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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창평 정치범수용소 학살 사건 |
1. 개요
1987년 함경북도 온성군의 창평 제12호 관리소[1]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2. 상세
1987년경 12호 관리소의 탄광 주변에서 노역하던 한 정치범이 보위원으로부터 심하게 구타를 당한 게 발단이었다. 당시 주변에는 정치범 200여 명이 있었는데 이 장면을 보고 흥분해 단체로 보위원을 구타해서 죽이고 산 너머의 보위원 사택까지 습격하면서 대규모 폭동으로 번졌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보위원 가족들이 분노한 정치범들에 의해 맞아 죽었다고 한다.그러자 보위부는 14.5mm 대공 기관총(고사총)[2]과 AK소총을 동원해 수감자 수백에서 수천 명을 학살했다. 사망자 수에 대한 주장이 갈리는데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수용인원 15,000여 명 중 5,000여 명이 학살당했다는 말도 있고 TV조선 모란봉클럽에 출연한 한 출연자는 "300여 명이 학살당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12호 관리소는 1987년 5월 해체되었고 생존한 12호 수용자들은 다른 수용소로 분산되었다.
1987년부터 1994년까지 수용소에서 근무했다가 탈북한 안명철에 의해 "비슷한 시기에 대규모 학살사건이 벌어졌다"는 실상이 알려졌고 이후 다른 북한이탈주민들도 비슷한 증언을 보태면서 사실로 굳어졌다.
주성하 기자도 이 사건을 다루었다. 유튜브 영상
현재는 해체된 수용소 부지에는 담배농장이 세워졌고 군인들이 집단배치되어 담배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3. 기타
- 같은 해, 정확히는 1987년 5월 1일에 평양시에서 '국제노동절(5.1절)' 야간축제에 동원된 일부 군중이 건설 현장[3]에서의 무임금 강제노동에 항의하는 시위를 일으키자 사회안전부가 집단 총격을 가해 40여 명의 사상자[4]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이는 1987년 8월 남한 언론에서도 보도되었다. #1 #2 #3
4. 관련 문서
[1] 운영 당시 지도는 이 링크에서 볼 수 있다.[2] 14.5×114mm 크기가 보드마카 수준인데 이걸 사람한테 난사하면 사람은 그냥 고깃조각으로 분해된다. 김정은 집권 후 북한에서는 이걸 공개처형용으로 사용한다.(다만 장성택이 고사포로 처형되었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장성택의 측근인 리룡하와 장수길이 고사포로 처형되었다.)[3] 당시 평양에서는 평양 외곽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광복거리 같은 시가지를 조성하는 중이었다.[4] 이들 중 10여 명은 사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