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고 일지/2014년 4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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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하루 전인 2014년 4월 15일, 세월호가 사고배편을 항해하기 위해 인천항 연안 여객터미널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 사진이며, 해양수산부 해양안전심판원의 세월호 침몰사고 특별조사보고서에 싣린 사진이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시정이 굉장히 나쁜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1]
위 사진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세월호에 탑승하기 위해 기다리던 생존자 박모 씨가 촬영한 사진.출처[2] 18시 30분에도 분명히 안개로 인해 출항이 지연되고 있다고 나오고 있다.
1. 타임라인
4월 15일 | |
18시 30분 | 출발 예정 시각. 그러나 짙은 안개로 출항이 지연되었다. |
21시경 | 2시간 30분의 지연 이후 인천항에서 출항했다. |
2. 상세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사실상 시작된 날로, 지연 중 출발과 학교 측의 대응 등 여러 석연찮은 부분이 많은 시기이기도 하다. 18시 30분 출항하기로 했던 배가 안개로 인해 짧아진 가시거리[3][4]로 인해 출항은 11시까지 대기 후 가시거리를 확인하여 결정하기로 했으며 학생들은 버스를 통해 일단 학교로 돌려보낸 후 수학여행을 재계획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었다면 이 끔찍한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세월호의 선사 청해진해운이 단원고 학생들이 탑승하지 않으면 적자를 볼 것을 우려해 학생들을 탑승시키고[5] 저녁식사를 먹게 한 후 21시에 갑자기 출항을 결정했다. 23시에 결정하기로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처음부터 그냥 출항할 예정이었던 것이다.[6] 하지만 이 선택은 끔찍한 재앙을 불러올 나비 효과였다.[7]
이 항해에서 담당 선장은 실제 선장인 신보식이 돌연 휴가를 가게 되어 대리 선장인 이준석이 담당했다. 후에 실제 선장이 갑자기 휴가를 가게 된 이유가 밝혀졌는데, 실제 선장은 이 사고가 발생할 것을 이미 예상했다고 한다. 이유인 즉 배가 처음 일본에서 들여왔을 당시에는 페리 나미노우에급이 자매선이 4척이나 건조되었고 비슷한 형태의 카페리도 많이 건조된 나름대로 베스트셀러 카페리였던 데다 마루에이 페리에서도 많이 오래 잘 쓰인 만큼[8]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이 배를 개조하는 과정에서 배의 균형을 무시한 채 개조를 했고, 처음에 신 선장은 회사측에 선박을 개조하지 말라고 계속 의견을 제시했으나 그때마다 묵살당했다. 그래서 신 선장은 세월호를 몰기에는 너무 불안해서 휴가를 냈다고 한다. # 결과적으로 신 선장의 선견지명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1] 평상시의 시정이라면, 세월호의 뒤로 인천항의 등대와 바다 건너 영종도가 선명하게 보여야 한다. #[2] 이 생존자는 나중에 군입대 이후 제1보병사단 수색대대에서 의무병생활을 하다 수색작전중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을 또 겪었다. 현장에서 하재헌 하사와 김정원 하사의 응급조치를 한 의무병이 바로 박씨였다.[3] 위의 사진을 보면 어떤 상황이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안개로 인해 세월호 뒤로 인천항의 다른 접안시설이나 선박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4] 당시 가시거리가 800m였는데, 해무로 인해 가시거리가 1km 미만으로 떨어진 상황에서는 규정상 항구에서 절대 출항할 수 없다. 문제는 세월호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출항했다는 것이다. 항공기로 치면 조종사가 CAT-llla나 -lllb자격을 충족하지 않는데도 착륙을 강행하는 것과 똑같다.[5] 이때가 19시 20분이다.[6] 결국 그 날 안개를 뚫고 출발을 강행한 여객선은 세월호 단 하나뿐이었다고 한다.[7] 경쟁상대가 항공여객수 세계 1위를 자랑하는 김포-제주 항공노선이여서 청해진해운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기에 적자는 당연한 수순이었다.[8] 당연히 이는 마루에이 페리의 철저한 항해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