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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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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colbgcolor=white,#2d2f34>최경회(崔慶會)
출생 1532년
조선 전라도 능주[1]
사망 1593년 6월 (향년 61세)
조선 경상도 진주목 진주성
본관 해주 최씨
삼계(三溪), 일휴당(日休堂)
선우(善遇)
시호 충의(忠毅)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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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2. 생애

먼 선대 조상은 고려 전기 소위 해동공자로 유명한 문헌공 최충이다.

1532년 전라도 능주에서 최천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송천 양응정에게 수학하였고, 1557년 고봉 기대승을 찾아가 사사하였다.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영해군수가 되었다.

1590년에 모친상을 당해 벼슬을 내어놓고 낙향하였다. 3년상을 치르던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 형제인 최경운, 최경장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최경회는 전주와 남원으로 진격하는 왜군을 금산과 무주에서 격퇴하였고, 진주를 치려는 왜군의 일부를 차단하면서 진주 대첩 승리에 일조하였다. 이 공적으로 최경회는 경상우병사에 임명되었다.

1593년 최경회는 제2차 진주성 전투가 발발하자 3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가 진주성 내에서 항쟁했으나,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해 자결하였다.

진주의 창렬사와 화순 능주의 포충사에 제향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의이다.

3. 기타

  • "논개는 기생이 아니라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양첩이었다"라는 주장이 있지만 논개 자체의 실존이 불분명하기에 신빙성이 높지는 않다. 최경회와 논개를 엮는 것은 1987년 최경회의 집안인 해주 최씨 가문에서 발간한 <의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에서 최경회의 부인이 왜장을 유인해서 자살했다는 식으로 묘사한 것이 처음인데 여기서는 기생 출신은커녕 천첩이라는 묘사마저 없다.

4. 대중매체에서

  •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에서는 '본래 장수군의 관기였다가 장수를 방문한 최경회를 모시게 되었고 이후 최경회가 천첩으로 거둬들였다'라고 표현하였다.[2]
  • 김별아의 소설 <논개>에서는 매사 공평하고 강직하며 자상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논개의 은인이기도 했고 나중에는 논개와 혼인해 남편이 된다. 논개가 관기가 아닌 몰락 양반의 딸이라고 설정했기 때문. 작중 내내 논개가 일평생을 바쳐 사랑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1]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삼천리#[2] 물론 에필로그에서는 '논개는 기생이 분명하다'라고 단언하며 '기생이라는 게 창피하다는 이유로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게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