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16 19:34:09

최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최영지(崔泳祉)
내수(乃修)
본관 경주 최씨[1]
출생 1889년[2] 2월 16일
경상도 경주부 부내면 교리
(現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3] 69번지)[4]
사망 1927년 1월 3일[5]
묘소 경상북도 경주시 천북면 동산리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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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경주 최부자집 12대 최준의 둘째 남동생이다.

2. 생애

1889년 2월 16일 경상도 경주부 부내면 교리(現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9번지)에서 아버지 최현식(崔鉉軾, 1854 ~ 1928. 6. 20)과 어머니 풍산 류씨(豊山 柳氏, 1851 ~ 1932. 10. 1)[6] 사이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주군 부내면 교리(現 경주시 교동) 68번지 최부자댁 뒷 새댁으로 이주해 분가했다.[7]

위로 형 최준, 최윤(崔潤, 1886. 3. 26 ~ 1969. 10. 22)[8], 아래로 최순(崔淳, 1892. 10. 15 ~ 1948. 3. 22)[9]이 있었다. 아버지 최현식은 경주 교촌 최부잣집 11대로, 1888년(고종 25) 식년 진사시에 3등 19위로 입격한 뒤 경릉(敬陵) 참봉[10]을 거쳐 1900년 산릉도감 감조관(山陵都監監造官)[11] 등을 역임했다.

1909년 10월 안희제·이동하(李東廈)·남형우·이시열(李時說)·윤병호·서상일·박중화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고 당원으로서 국권회복을 위해 지하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같은 달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도 신입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끝내 경술국치를 당하자 청나라로 망명했다. 이후 중화민국과 조선을 수시로 넘나들다가 1919년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고, 형 최준의 부탁으로 현금 2만원을 휴대하고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12] 그해 4월 13일 임시정부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차장(次長)제를 폐지하고 위원제를 채택할 때 임시의정원 의원 및 재무부 위원에 선임되었고, 임시정부 조사원으로도 활동했다. 191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조선 내 각 지방의 유력자, 재산가, 학교, 종교 등을 조사할 때 경주군 지역의 유력자로 보고되기도 했다.

1920년 8월 21일 대구부 금정(現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 타나카여관에서 최시형의 장남 최동희(崔東曦)·이근호(李根鎬) 등과 만나 독립운동 방법을 논의하다가 곧 체포되었고, 그해 9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받고 출옥했다.

1921년 이후에는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 더이상 상하이에 체류할 수 없게 되자 귀국했다. 1923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혁청단(革淸團)이 결성되자 이에 입단했고, 1924년 임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주식회사 대동사(大東社)에서 이사역임했다.

1926년 상하이에 잠시 체류해 있던 중 당시 경주경찰서장 이노우에 시게루(井上茂)[13] 경부(警部)로부터 '아버지가 위독하니 빨리 귀국하라'는 형 최준 명의의 가짜 편지를 받았고, 이에 형이 보낸 편지로 생각해 급하게 귀국했으나 귀국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혹독한 고문의 여독 및 오랜 망명생활로 인한 지병 악화 등으로 가출옥했지만 1927년 1월 3일 순국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 사성공파(司成公派)-정무공파(貞武公派)-교리파(校里派) 18세 영(泳) 항렬.[2] #. 경주최씨사성공파보 권8 377쪽에는 1891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경주 최씨 사성공파-정무공파 집성촌이다.[4] 이 지번에 바로 경주최부자댁이 자리해 있다.[5] 음력 1926년 11월 30일.[6] 류성룡의 후손으로, 류도휘(柳道彙)의 딸이다.[7] 현재 이 자리에는 최완 고택을 비롯해 고운님오시는길찻집이라는 찻집이 들어서 있다.[8] 초명 최영희(崔泳禧).[9] 초명 최영희(崔泳禧).[10] #[11] #[12] 1919년 5월 일본 외무성 기록 騷蜜 제2219호에 '경상북도 경주 부호 최준(崔俊)의 동생 최완(崔浣)이 2만원의 현금을 휴대하고 상해에 나타났다'고 기재되어 있다.[13] 1925년부터 1927년까지 경주경찰서장으로 근무하면서 최준에게 붓글씨를 배운다는 핑계로 3년간 최부자댁을 출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