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9:20:16

휘렘 술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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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황후
없음 쉴레이만 1세대 휘렘 술탄 셀림 2세대 누르바누 술탄
파일:Tizian_123.jpg
이름 튀르키예어 휘렘 술탄
(Hürrem Sultan)
오스만어 خرم سلطان
본명 알렉산드라 리소프스카
(Aleksandra Lisowska, Олександра Лісовська[1])
이명 록셀라나
(Roxelana)
출생 1504년
폴란드 왕국 로하틴
(현 우크라이나)
사망 1558년 4월 15일 (53-54세)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톱카프 궁전
장례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배우자 쉴레이만 1세 (1533년 결혼 / 1566년 사망)
자녀 메흐메트 황자, 미흐리마 술탄, 압둘라 황자, 셀림 황자, 바예지트 황자, 지한기르 황자
부친 하브릴로 리소프스키
모친 렉산드라 리소프스카
종교 기독교 (정교회)이슬람 (수니파)

1. 개요2. 술탄의 연애시3. 생애4. 평가5. 기타6. 각종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오스만 제국의 황후.[2] 본명은 알렉산드라 리소프스카(Aleksandra Lisowska). 쉴레이만 1세의 황후이자 셀림 2세의 모후. 서방에서는 '록셀라나(Roxelana)'로 불린다. 록셀란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이 두 이름은 슬라브인 여성 이름인 '루슬라나(Ruslana)'에서 따왔다는 설과 '러시아 여자'라는 명칭에서 비롯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휘렘 술탄이 우크라이나 출신이기는 하지만 휘렘의 고향은 러시아보다는 폴란드 쪽 영향력이 강한 지역으로 분류된다.

아랍에서는 카리마(كريمة, Karima) 혹은 후람(خُرَّم, Khurram) 술탄으로 부르기도 한다.

2. 술탄의 연애시

Celis-i halvetim, varım, habibim mah-ı tabanım
Enisim, mahremim, varım, güzeller şahı sultanım

Hayatım hasılım,ömrüm, şarab-ı kevserim, adnim
Baharım, behçetim, rüzum, nigârım verd-i handanım

Neşatım, işretim, bezmim, çerağım, neyyirim, şem’im
Turuncu û nar û narencim, benim şem’-i şebistanım

Nebatım, sükkerim, gencim, cihan içinde bi-rencim
Azizim, Yusuf’um varım, gönül Mısr’ındaki hanım

Stanbul'um, Karaman’ım, diyâr-ı milket-i Rum’um
Bedahşan’ım ve Kıpçağım ve Bağdad’ım, Horasanım

Saçı marım, kaşı yayım, gözü pür fitne, bimarım
Ölürsem boynuna kanım, meded he na-müsülmanım

Kapında çünki meddahım, seni medh ederim daim
Yürek pür gam, gözüm pür nem, Muhibbi’yim hoş halim!
나의 동반자, 나의 사랑, 빛나는 나의 달빛이여,
나의 목숨과 같은 벗, 나의 가장 가까운 이, 아름다움의 제왕인 나의 술탄.

나의 생명, 내가 살아가는 원인 되는 나의 천국, 천국의 강을 흐르는 나의 포도주여,
나의 봄날, 나의 즐거움, 나의 낮의 의미, 내 가슴속 깊이 새겨진 그림 같은 나의 사랑, 나의 미소짓는 장미여,

나의 행복의 근원, 내 안의 달콤함, 유쾌한 나의 잔치, 밝게 빛나는 나의 빛, 나의 불꽃.
나의 오렌지, 나의 석류, 나의 귤, 나의 밤의, 침실의 빛이여,

나의 식물들, 나의 사탕, 나의 보물, 이 세상에서 내게 고통을 주지 않는 단 한 사람.
나의 성자 유수프, 나의 존재의 이유, 내 가슴속 이집트의 귀부인이여,

나의 이스탄불, 나의 카라만, 나의 루멜리아의 마을과 대지들.
나의 바다흐샨이자 나의 큽착이자 나의 바그다드이자 호라산,

머리카락은 아름답고, 눈썹은 활과 같고,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나를 아프게 하는 연인이여,
설사 내가 죽더라도 그 이유는 그대 때문이리니, 나를 구해주시오 오, 비무슬림인 아름다운 나의 사랑.

그대의 문에서 계속 그대를 찬양하리, 그리고 노래하리.
사랑때문에 아픈 가슴을 지닌, 눈물이 가득 찬, 나는 무힙비요, 행복하도다.
쉴레이만 대제가 휘렘 술탄에게 바친 연애시.
무힙비(Muhibbi)는 쉴레이만 대제의 필명이다. 그는 무힙비라는 필명으로 몇몇 시를 썼는데 무힙비라는 단어는 아랍어에서 온 단어로 '사랑에 미친 남자'를 의미한다.

가젤(Gazel)이라고 불리는 장르로, 엄격한 각운과 음보를 지킨다. 유튜브에 낭독하는 영상도 있다. 오스만어본과 현대 튀르키예어역을 참고해서 옮겼다. 출처

휘렘 술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튀르키예 사극 무흐테솀 유즈이을에서 휘렘 술탄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남편인 쉴레이만 1세에게 쉴레이만이 예전에 지었던 이 연애시를 다시 한 번 들려달라고 부탁하고 쉴레이만이 읊는 시를 들으면서 세상을 떠난다. 영어 자막이 달린 해당 장면 동영상

3. 생애

본래 폴란드-리투아니아 로하틴 출신 루테니아인으로 정교회 사제의 딸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황후와는 거리가 먼 출신이라고 볼 수 있지만 10대 시절 노예 사냥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던 타타르족에게 포로로 붙잡혀 노예가 되어 크림 칸국의 궁정으로 보내졌고 거기서 또 다시 칸국의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에게 바치는 조공으로서 수도 코스탄티니예하렘으로 보내졌다.[3] 당시 오스만의 황태후이자 하렘의 주인인 하프사 술탄(Hafsa Sultan)[4]은 휘렘을 자기 아들 쉴레이만 1세에게 선물했고 이윽고 쉴레이만은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휘렘에게 반한 쉴레이만 1세는 알렉산드라에게 '휘렘'[5]이라는 호칭을 내리고 술탄의 아이들을 낳게 된다.

당시 쉴레이만 1세는 마히데브란 술탄(Mahidevran Sultan)[6]과 귈펨 하툰(Gülfem Hatun)[7]이라는 두 명의 여성들 사이에서 자식을 본 상태였고 특히 마히데브란에게서는 무스타파라는 아들을 둔 상태였다. 무스타파는 쉴레이만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있었지만 쉴레이만은 마히데브란이 아닌 휘렘을 황후로 맞이하였고 정식으로 결혼하여 '술탄의 배우자'라는 사실을 공표한다. 휘렘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8] 그러니까 쉴레이만 1세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 하렘의 모든 여성들(황자를 낳은 여자도 예외없이)은 다른 나라의 왕비, 황후들 처럼 왕의 배우자로서 그 나라의 국모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니라 파디샤(황제)에게 순종하며 제국의 대를 잇는 혈통을 낳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휘렘 술탄은 이런 관례를 깨고 오스만 제국 최초로 술탄과 정식으로 결혼을 했으며 황후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마히데브란이 아닌 휘렘을 사랑했던 이유는 마히데브란은 단순히 술탄에게 순종적인 여성이었지만 휘렘은 성직자의 딸이었기에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아 매우 지혜로웠고 술탄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는 지적인 여성이었다. 그 모습에 술탄이 반했다고 한다.

결국 쉴레이만 1세는 술탄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제국의 관습을 깨고 휘렘과의 결혼을 선언했다. 황족들과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휘렘을 사랑했던 쉴레이만은 이 모든 반대를 무시하고 사랑하는 휘렘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제국의 대재상이자 쉴레이만 1세의 절친한 친구 이브라힘 파샤와 쉴레이만 1세가 가장 아꼈던 여동생 하티제(Hatice) 공주의 결혼식보다 더 화려한, 오스만 제국 역사상 손꼽히는 화려한 결혼식이었다고 한다.[9]

노예 출신 여성이 술탄의 총애를 받자 궁정 내부에서 많은 견제를 받았다. 그러나 승자는 휘렘이었고 궁정 암투끝에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황후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정적들을 작살냈는데 술탄을 두고 다투던 마히데브란을 지방으로 쫓아보내고 자신의 아들을 쉴레이만 1세의 후계자로 옹립하기 위하여 술탄의 후계자로 낙점되어있던 무스타파를 계략으로 죽인다. 무스타파의 편을 들던 쉴레이만의 최측근이자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었던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şa)가 사형당하는데에도 그녀의 입김이 컸다.

이렇게 궁중 내부에서 권력다툼을 주도하면서 정치에 개입을 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는 원인을 가지고 오기도 하였다.[10] 오스만 제국의 초중반기에 술탄의 자식들간의 황위 다툼이 치열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인망이 높고 능력이 출중했던 무스타파를 죽인 것에 대해서 비난이 많다. 쉴레이만 1세가 유럽과 페르시아를 정복하러 자주 이스탄불을 비웠을때는 술탄과 다름없는 권력을 쥐기도 했다. 성격도 신경질적이고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쉴레이만 1세와 휘렘 술탄의 사랑만큼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쉴레이만은 휘렘을 오스만 제국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정식 황후로 책봉했을 뿐 아니라 휘렘을 제외한 하렘의 어떤 여인도 만나지 않았을 정도. 휘렘 술탄과 유럽 원정을 나간 쉴레이만 1세 사이에 오간 편지들이[11]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쉴레이만이 지어준 이름 그대로 휘렘은 쉴레이만에게 있어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쉴레이만과 휘렘은 술레이마니예 모스크에 함께 묻혔다.
무힙비. 네 아름다움의 꽃밭에서 종달새는 아침이 되도록 그렇듯 너를 찬미하고 있구나.
쉴레이만 1세는 자신의 아내인 휘렘을 이렇게 평가했다.

여담이지만 휘렘 술탄은 어떤 의미에서 오스만 제국의 '관습 파괴자' 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황제의 공식 황후가 되었다는 데에서 이미 관습 하나가 깨진 것이고, 황제로부터 평생 자신의 곁에 있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 역시 관습 파괴. 장남이 황위를 계승하는 법이 없었던[12] 오스만 제국에서는 황자들이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예외없이 지방 총독으로 내려보내 자질이 어떤지 알아보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이때 황자의 모후(황제의 입장에서는 첩)도 황자와 함께 지방으로 내려가 황자가 황위에 오른 뒤에야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갈 수 있었다.[13]

현재 우크라이나에서는 휘렘 술탄의 생애 관련해서 위인전이나 드라마도 나오는 등 나라를 빛낸 위인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는데 심지어 외국인들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소개하는 책자에도 휘렘 술탄 관련한 내용이 버젓이 적혀 있는 수준이다. 미모와 지혜로 강대국이던 오스만 제국 당대 최고의 명군을 주물렀다는 점뿐만이 아니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숙적이던 크림 칸국의 뒤를 봐주던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부추겼다는 점 덕분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구국의 영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스탄불에는 그녀가 후원하여 만든 하세키 휘렘 술탄 하맘(Haseki Hürrem Sultan Hamamı) 이라는 튀르키예식 목욕탕 건물이 있다. 오스만 제국 시절 유명한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의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오스만 제국 시절 하맘 건축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아야 소피아 인근에 있는데 오늘날에는 양탄자 박물관 겸 상점으로 이용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2px-Letter_of_Roxelane_to_Sigismond_Auguste_complementing_him_for_his_accession_to_the_throne_1549.jpg

지그문트 2세에게 보낸 편지

쉴레이만 대제와 휘렘 술탄, 휘렘의 딸 미흐리마흐 술탄(Mihrimah Sultan)이 폴란드의 지그문트 1세와 지그문트 2세에게 보낸 우호 서신들은 그 내용과 서신의 장식미를 인정 받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14]

4. 평가

오랫동안 제국을 망친 악녀, 총명한 군주를 유혹한 팜므파탈로 여겨져 왔지만 현대에는 현대 중국에서 진회가사도를 재평가했듯이 페미니즘적인 면에서 재평가된다. '술탄의 노예'에서 적극적으로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낸 주체적인 여성, 혹은 냉혹한 하렘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쓴 여성이라던가. 그러나 이런 평가는 권력투쟁의 상대가 자기 위의 권력자가 아니라 같은 하렘의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딱 들어맞지는 않다.

그보다는 다른 관점에서의 평가가 더 설득력있다. 전통적으로 서구 학계에서는 술탄을 쥐고 흔들며 권력을 남용해 오스만을 말아먹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 자체가 황후에 휘둘려 살던 공처가는 절대 아니었기 때문에 황후 말만 듣고 정책을 시행한 암군과는 거리가 멀었고[15] 쉴레이만 1세의 황금기 이후에도 오스만 제국은 17세기까지 나름의 발전이 있었다는 점이 주목 받으면서 그녀에게 오스만 제국 쇠퇴의 원인을 탓하는건 적절하지 못하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부유층의 자선을 중시하는 이슬람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휘렘은 당대 백성들을 위한 자선 사업에 힘쓰기도 했다.[16] 위에서 언급된 하세키 휘렘 하맘도 그 사업의 일환이다.

결과적으로 휘렘 술탄이 비판받는건 그녀가 노력해 황위에 올린 황자가 암군으로 평가받는 셀림 2세인 탓이 큰데 사실 그녀의 첫번째 아들 메흐메트가 황위에 올랐다면 부정적인 평가가 줄어들었을것이다. 메흐메트 황자는 마히데브란 소생의 무스타파 황자에게 뒤지지 않는 총명한 황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쉴레이만 부부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상황이었고 메흐메트 황자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셀림 2세보다 훨씬 뛰어난 황제로 즉위했을것은 자명하다.

휘렘 술탄은 노예 출신이 황후가 된것 외에도 오스만 제국의 황후들 중 최초로 술탄과 정식으로 결혼한 황후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그 이전의 술탄의 배우자들은 정식 혼인 관계가 아니었다.

5. 기타

쉴레이만 대제와 함께 건축가 미마르 시난을 후원해주어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를 짓게 하였으며, 사원의 뜰 안에 쉴레이만 대제와 같이 안장되어 있는데, 영묘 자체는 따로 따로 쓰고있다. 미마르 시난의 묘지도 사원 근처 가까운 곳에 있다.

오스만 제국의 황후들과 후궁들은 상당수가 록셀란 황후와 같이 유럽 출신들이다.

오스만 제국의 후궁들 중에서는 유럽에서 끌려온 인원수도 많았지만, 상당수는 체르케스인과 아르메니아인, 레바논인 등 오스만 제국 영토와 가까운 곳에 기독교인 중에서 징발되었다.

휘렘 술탄이 노예에서 해방되어 정식 황후가 된 데서 알 수 있듯 제아무리 황제의 후궁이라고 해도 사회적인 신분은 노예에 불과했는데, 이슬람권에서 같은 무슬림을 노예로 삼는 것은 금지였기 때문. 그렇게 되면 황제의 후궁은 기독교도 가운데에서 데려오는게 논란의 소지가 적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물론 토호들 같은 지방 유력자들조차도 금발의 여성을 후궁으로 선호하는 성향이 있어서(...) 유럽 출신의 여자들이 더 선호되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 초창기에 정략결혼한 적도 몇 번 있다.

파일:attachment/휴렘 술탄/statue.jpg

고향인 우크라이나의 로하틴 시에는 휘렘 술탄의 동상이 세워져있을 만큼 꽤 위인으로 알아주는 듯. 그러나 폴란드에서는 휘렘은 우크라이나인이 아니라 폴란드인이라면서 우크라이나의 이 동상을 꽤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각이 많다.근데 어차피 두 나라 다 슬라브계 국가들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tamp_of_Ukraine_s148.jpg

1991년 소련 해체로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으로 독립한지 6년후인 1997년 우크라이나에서 발행된 휘렘 술탄 우표. 우측에 우크라이나어로 '록셀라나'라고 적혀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모스크도 있었으나, 마리우폴에 있는 해당 모스크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았다.

6. 각종 매체에서

노예에서 당시 세계 최강국의 황후가 된 극적인 인생 덕분인지 일찍부터 유럽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각종 오페라, 그림, 음악등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장 쉴레이만 생전인 1561년에 프랑스의 작가 가브리엘 부냉이 <라 솔탄(La Soltane)> 라는 희곡을 썼는데, 이는 무스타파 황자가 처형당하는 과정에서 휘렘 술탄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다룬 내용으로 프랑스 역사상 기독교도가 아닌 이교도가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최초의 작품으로 의의가 크다.

파일:Anton_Hickel_001.jpg

18세기 독일 화가 안톤 힉켈이 그린 그림 '록셀라나와 쉴레이만 대제'
  • 하이든의 교향곡 제63번 C장조에는 프랑스어로 '록슬란'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역시 이 황후를 가리키는 제목이다.

파일:attachment/휴렘 술탄/suleyimanandhurrem.jpg
  • 2011년부터 2014년 6월까지 방영했던 튀르키예 사극 위대한 세기에서 진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드라마 자체가 휘렘과 쉴레이만 1세의 삶을 다룬 작품이니 당연하다. 참고로 이 드라마는 유럽과 중동에서 인기가 엄청났다. 튀르키예판 한류에 비견되었을 정도. 왼쪽이 휘렘 술탄. 오른쪽이 쉴레이만 1세.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튀르키예에서 사극화하기 이전에 우크라이나에서도 휘렘 술탄의 일대기를 다룬 '록솔라나'라는 이름의 드라마를 1998년도 즈음 제작했었지만, 무흐테솀 유즈이을만큼 유명해지지는 못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OtamB4m95o
https://www.youtube.com/watch?v=dBKSQWRNhu4 영어 더빙판은 이쪽 영어판 더빙조차도 이렇게 대충한 걸 보면 왜 우크라이나판 드라마는 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파일:attachment/휴렘 술탄/夢の雫黄金の鳥籠.jpg
  • 시노하라 치에(篠原 千絵)의 만화 '꿈의 물방울, 황금의 새장'에서도 주인공으로 나온다. '알렉산드라'는 부모를 잃고 오스만 제국의 하렘으로 끌려온다. 특이하게도 쉴레이만 1세의 총신인 이브라힘 파샤가 알렉산드라를 술탄에게 바치지만 알렉산드라는 이브라힘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게 되고 이브라힘 역시 알렉산드라에게 호감을 느끼나, 첫째아들인 메메드의 출생의 비밀 문제를 계기로 대립하게 된다.[17]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프랑스의 문학비평가이자 소설가인 카트린 클레망의 소설 '술타나(La sultane)'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신을 납치한 타타르족 청년과 친구가 되지만 이 청년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그 후 오스만의 하렘에서 쉴레이만이 처녀들을 간택하러 왔을때 휘렘은 쉴레이만의 눈에서 타타르족 청년의 모습을 떠올리고 미소짓는데 이 미소 덕분에 술탄에게 간택된다.
  • 노빈손 시리즈 중 '노빈손의 예측불허 터키 대모험' 편에서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 같은 이미지로, 권모술수에 능통하고 카리스마 있는 여인으로 등장. 노빈손 일행의 도움으로 아들 셀림을 황위에 올리는 데 성공한다. 주인공인 노빈손 일행이 셀림 왕자의 조력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노빈손 일행과 한편이지만, 악역 같은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 대항해시대 시리즈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롯사나'라는 이름의 NPC로 등장하며 이스탄불에 위치해 있다.
    •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는 고용 가능한 A급 항해사로 등장한다.[18] 대항온에서는 NPC 모델이 중동 스타일이지만 오리진에서는 위대한 세기를 참고했는지 붉은머리 백인인데, 초상화마히데브란처럼 악녀스럽게 나온다. 다만 손주며느리인 사피예 술탄이 게임에서 취급이 더 좋다. 사피예 술탄이 인연 연대기에 주연급 비중으로 등장하는데 주인공인 사피예 술탄과 엄청 죽이 잘 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휘렘 술탄의 몰년이 1558년이고 사피예 술탄의 생년은 1550년이고 때문에 둘이 같은 시대에 활약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얘기다.
오스만의 술탄인 쉴레이만 1세의 정비. 본래 첩의 지위에 있었으나 쉴레이만 1세의 총애를 받아 으뜸가는 빈첩의 작위를 받았다. 이후 오스만의 외교 정책과 국제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주요 도시에 공공시설을 짓는 등 자선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항해사 소개
  • 하렘생존기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쉴레이만 1세가 휘렘 술탄에게 바친 연애시가 언급된다. 연애시를 읽던 고손자 아흐메드는 어떻게 이토록 여자에게 빠질 수 있냐며 쉴레이만 1세를 이해하지 못했다.


[1] 우크라이나에서는 본명이 알렉산드라가 아니라 아나스타샤(Анастасія Лісовська)였다고 주장한다.[2] 오스만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 황후라는 직위 자체가 없었으므로 정확히 말하면 황후는 아니지만 쉴레이만 1세는 휘렘 술탄을 자신의 부인으로 여겼고 하렘 출신 여성으로서 전례 없이 황제와 결혼식을 올리는 등 여러 면에서 타국의 황후와 유사한 대우를 받았다. 휘렘 술탄이 봉해진 하세키 술탄이라는 작위는 한국어로 옮기기에 적당한 말이 없지만 동아시아권에서 굳이 비슷한 작위를 찾아보면 황귀비(皇貴妃) 정도에 가깝다. 중국어 위키백과, 일본어 위키백과, 바이두 백과의 휘렘 술탄 문서들은 모두 휘렘 술탄을 황후로 표기하는 데서 보듯이 동아시아권에서도 황후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중화권에서는 하세키 술탄을 술탄황후(蘇丹皇后)라는 명칭으로 번역하기도 한다.[3] 당시 크림 칸국의 주 산업은 유목 외에도 노예 사냥 및 무역이 있었다. 이들의 노예 사냥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코사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우크라이나 중부 비옥한 드니프로 강 일대가 전부 야생의 자연 상태로 복구되었을 지경이었다.[4] 셀림 1세의 아내이자 오스만의 첫번째 황태후(Valide Sultan)로 1534년 사망할 때까지 오스만 황실의 어른이었다. 물론 전제군주국이 다 그렇듯 제국의 최고 권위자는 황제였지만 오스만 제국의 황태후는 하렘에 국한해서는 여인들의 생사여탈권도 행사할 수 있는 등 황제 이상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5] 페르시아어로' 즐거움'을 의미.[6] 캅카스나 캅카스 알바니아(유럽 알바니아 말고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 출신이라는 말도 있고 몬테네그로 출신이라는 말도 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쉴레이만은 그녀를 '귈바하르(봄장미)'라고 불렀다.[7] 이쪽의 비중은 그냥 공기(...)로 보면 된다. 그도 그럴 게 귈펨이 낳은 유일한 왕자는 천연두에 걸려 어린 나이로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8] 표면적인 이유는 황제(파디샤)는 알라의 대리인인데 감히 인간 여성이 신의 대리인과 결혼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물론 이건 표면상의 이유고 근본적인 이유는 튀르크족의 전통과 혹시 모를 외척의 세도를 막기 위해 황제가 결혼을 아예 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대책을 강구했던 것이다.[9] 오스만 역사가들은 이 결혼식을 흑역사 비슷하게 여겼던지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오스만 제국에 있던 베네치아, 신성로마제국 사람들의 증언과 기록은 쉴레이만 - 휘렘 부부의 성대한 결혼식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출처: 술레이만 시대의 오스만 제국. 앙드레 클로 저)[10] 이후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보면, 이전과는 달리 술탄은 장식에 불과하고 재상이나 태후, 또는 황후가 정권을 좌지우지하는 장면이 한동안 계속된다. 물론 이유야 여러가지 있겠지만, 황후가 정계에 발을 들인 최초의 예가 휘렘 술탄이라는 것은 사실.[11] 몇 통 남아있는 편지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남편의 승리에 대한 찬미, 통풍에 걸린 남편의 건강 걱정, 꼽추였던 막내 아들 지한기르 황자의 치료, 이스탄불 시민들을 위해 그녀의 이름을 내걸고 짓는 공중목욕탕인 하세키 휘렘 술탄 하맘에 대한 이야기 등, 여러가지가 있다.[12] 이전까지는 황제가 죽으면 황자들끼리 싸움을 벌여, 최후에 승리하는 자가 뒤를 이었다.[13] 황자가 황제가 못 되고 죽어버리면 그 어머니도 패자 부활전 같은 건 없고 평생 지방에서 썩어야 했다. 휘렘이 '내 아들을 황제로!'를 목표로 종횡무진 활약(?)한 것도 바로 이 관습 때문.[14] 폴란드와 오스만의 평화협정문과 부친상을 당한 지그문트 2세에게 보내는 위로 편지 등.[15] 제위 후반기 쉴레이만 1세의 실책으로 꼽히는 무스타파 황자 사형 사건도 휘렘의 개입 이전에 무스타파가 쉴레이만 1세의 눈 밖에 나던 상황이었고 그 즈음 쉴레이만 1세는 휘렘 소생의 황자 메흐메트를 총애하고 있었다. 메흐메트 황자는 요절해서 황제가 되지 못했으나 황자로서의 능력은 무스타파에 뒤질것이 없던 총명한 황자였던걸로 보인다.[16] 물론 이는 다수의 오스만 황후, 태후들의 특징이기도 해 튀르키예에는 오스만 황후나 태후들의 이름을 건 모스크나 공공건축물이 여럿 있다.[17] 그런데 휘렘 술탄과 이브라힘이 알고 보면 몰래 사랑하던 관계라는 식의 소설이 일찍부터 나오긴 했다.[18] 연관 항해사: 세페르 레이스, 시난 레이스, 살림 괴브데, 시난 파샤, 쿠르툴루 무슬리딘, 투르구트 레이스. 휘렘까지 고용을 완료했다면 트라브존, 코스탄티니예, 테살로니키, 라구사 중 한 곳에 S급인 마히데브란이 랜덤으로 여관에서 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