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5:26:40

카리브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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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カリブソング
Carib Song
출생 1986년 4월 13일
죽음 1994년 10월 20일
성별 수컷
털색 갈색 (鹿毛, 카게)
아비 마루젠스키
어미 에스프리디아 (エスプリディア)
외조부 나디아 (ナディア)
생산자 노지마 목장
마주 오기후시 목장 레이싱 클럽
(현 YGG 호스 클럽)
조교사 카토 슈호 (미호)
성적 44전 11승
총상금 5억 3704만엔
주요
우승
G2 메구로 기념 (1991)
G3 페브러리 핸디캡 (1990), 금배(동) (1990)
교류중상 브리더즈 골드 컵
상세 정보 파일:netkeiba_logo.png | JBIS

1. 개요2. 생애
2.1. 데뷔 전2.2. 현역 시절2.3. 작은 부활, 그리고 죽음
3. 평가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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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경주마.

유력 경주마들이 줄줄이 부상으로 인한 은퇴나 사망, 성적 부진으로 존재감을 남기지 못해 존재감 최하를 달리는 1989년 클래식 세대 중에선, 비록 GI 트로피는 들어올리지 못했으나 잔디와 더트를 오가며 오랜기간 활약해 경마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명 조연이다.

2. 생애

2.1. 데뷔 전

나고야 경마장에서 조교사로 일하던 노지마 하루오가 가업인 농장을 이어받은 후, 자신이 담당했던 암말 에스프리디아가 좋은 씨암말이 될 거라 생각해 각별히 관리하며 적당한 말들과 교배 시키다 슬슬 에스프리디아가 좋은 씨를 배었을 것이라 생각한 타이밍에 당대의 명종마인 마루젠스키와 교배를 시켜 낳은 것이 카리브 송이다.

망아지 시절에도 이미 목장 측에서는 상당히 평가가 후해서, 마주인 오기후시 레이싱 클럽에서 구입해 갈 때 "중상 한두개 쯤은 충분히 따 낼 수 있는 말이다"라며 당당하게 말할 정도였다.

조교사 관리하에 들어갔을 때는 첫 교육기승해 본 쿠리하다 구무원이 "이거, 범상치 않은 말이 들어왔는데?"라 흥분하며 직접 구무원을 맡았고, 마루젠스키 산구들에 자주 보이는 다리 휨 증상도 없는 탄탄한 마체로 성장해 기대를 받았다.

실제로 병합훈련 당시에는 카리브 송의 움직임에 제대로 따라오는 말이 없어서 여러마리의 말을 릴레이 형식으로 병합훈련 시켜야 할 정도로 격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고, 당시 이 기묘한 훈련모습은 미호 트레이닝 센터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2.2. 현역 시절

12월 3일 열린 신마전에선 3착으로 패하는데, 주변 상황에 너무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여 미승리전에선 브링커를 씌워 출전시켜 보았더니 가볍게 도주로 우승한다.

하지만 이후로도 제대로 경주에 집중하지 못하며 기성난을 보여 5전 연속으로 패배, 결국 89년 2월에는 방목을 결정한다.[1]

가을에 복귀한 후에는 시바타 마사토로 기수가 바뀌고, 어느정도 기성난도 잡혀서 복귀전 승리, 이후 경기에선 2착과 3착으로 선전하는 등 경주마로서의 자세가 잡히게 된다.

그리고 11월에는 900만엔 이하 조건전, 1400만 이하 조건전, 오픈전을 차례로 쾌승하며 드디어 오픈마가 된다. 4세 시즌의 첫 경기에선 전년도 최우수 더트마인 다이나 레터에게 반마신차로 패하며 연승이 끊기지만 이후로도 꾸준히 좋은 성적를 거두며 컨디션를 유지한다.

그리고 첫 중상 도전이 되는 GIII 페브러리 핸디캡[2]에서는 대회 명칭대로 핸디캡이 주어지는데, 대상마가 전년도 최우수 더트마였던 다이나 레터 뿐이라 홀로 61Kg의 부담중량을 지었을 뿐이라 이전 대결에서 반마신차 승부로 가능성을 보인 카리브 송이 1번인기로 출전한다. 그리고 그 기대대로 정석적인 선행책으로 당당하게 승리, 첫 중상 우승을 달성한다.

하지만 다음 경기인 마치 스테이크스에선 반대로 카리브 송이 최고 중량부담을 떠않아 2착으로 패배한다. 직후 세침치료를 받고 바로 휴양에 들어간다.

다시 더트전에 출전한다면 또 중량부담을 져야 할텐데, 이게 껄끄러웠던 진영측은 복귀전을 더트가 아닌 잔디로 잡았고, GIII 올 커머에 출전했으나 죠지 모나크의 도주에 페이스가 말려들오 후반에 역분사, 메지로 아르당과 닥터 스퍼트에 밀리며 7착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착차에 비하면 마신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아 진영측에 "잔디에서도 충분히 통한다"라는 확신을 주었다.

이후로는 다시 더트로 복귀, 미스터 토우진등 나름 이름 좀 날린다는 지방 더트마들을 가볍게 물리치며 오프전 2연승을 달린다. 그리고 도전한 GIII 더트전 윈터 스테이크에선 타마에 비해 5KG의 중량부담을 더했다곤 하나 워낙 격이 다른 말이기에 충분히 우승할 것으로 내다봤으나, 최종직선이서 형성된 마군을 뚫는데 시간이 걸려 나리타 하야부사에게 반마신차 패배를 당한다. [3]

이렇게 목표였던 윈터 스테이크는 놓쳤지만, 연간 성적과 연대율이 모두 좋았기에 1990년 최우수 더트호스상을 받게 된다.

6살 시즌의 첫 경기에는 오랜만의 잔디 중상인 금배(동)이었는데, 웃기게도 탑 핸디는 59.5kg의 다이나 레터, 세컨드 핸디가 59kg의 카리브 송이라는, 잔디 레이스임에도 더트마들에게 최고 핸디캡이 주어지는 요상한 상황이 펼쳐진다.

그런 핸디캡이 있음에도 도주하는 유키노 선라이즈를 가볍게 제치고, 당 레이스 최고의 말각으로 맹추격을 해 온 해피 샤토의 추격을 뿌리치며 2마신 반차의 승리를 거둔다. 이 승리로 JRA의 잔디와 더트의 중상을 모두 차지하는 기록을 세운다.

기세를 몰아 GII AJCC(아메리카 쟈키 클럽 컵)에 도전하나, 이 경기에선 은퇴경기에 최선을 다 한 노장 런닝 프리와의 헤드온 승부 중 틈을 찌르고 들어온 메지로 몬트레를 놓쳐 반마신차 패배를 당한다.

이어진 메구로 기념에선 60.5kg의 톱 핸디를 짊어졌음에도 도주하는 타케시바를 제치며 승리, 닛케이상에선 또 한번 톱 핸디를 짊어진 채 출주해 호주하나 추입으로 찔러들어온 키리산시에게 제쳐지며 2착을 한다.

패배도 여러번 했지만 전체 연대율은 나쁘지 않았고 특히 닛케이상 2착이면 해볼만 하다는 생각에 진영측은 첫 GI 도전으로 봄 천황상을 선택한다. 하지만 당대 최강마인 메지로 맥퀸의 아성에는 미치지 못한 채 10착으로 대패한다.

일단 휴양을 거친 후 다시 도전한 중앙 GI 전선에선 마이니치 왕관배에서 프레크라스니 등에 이은 4착, 천황상 가을에선 메지로 맥퀸의 사행으로 인한 대량 피해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던 덕분에 카미노 크레세를 제치고 프레크라스니에 이은 3착으로 들어오나, 곧 맥퀸이 강착을 당하며 2위로 승착된다.

이런 좋은 경기력을 보여 진영측은 다시한번 GI 전선에 도전하나 재팬 컵 8착, 아리마기념 11착으로 패배하며 6세 시즌을 마감한다.

7세 시즌에는 다시한번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AJCC부터 시작하는 로테이션에 들어가지만, 이번엔 토쇼 팔콘, 야마닌 글로벌, 메지로 라이언등 강적들에 막혀 2착, 3착, 3착이라는 성적표를 받게 된다.

이후 휴양을 거쳐 복귀하지만 올커머 7착, 가을 천황상에선 기수 교체의 영향인지 16착이라는 참패, 그나마 이후 3번의 경기에서 2착 2회, 3착 1회로 선전은 했으나 결과는 내지 못했고, 그 이후로는 아예 게시판에 들지 못하는 성적을 올리며 경주마로서 말년에 들어섰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후로는 조금 만만한 지방 더트전선의 교류중상 위주로 출전하며 반등을 노렸지만, 이번엔 더트 전선에서 진영을 괴롭히던 중량부담이 문제로 다가온다. 전성기 시절에는 힘으로 무게부담을 버텨냈지만, 나이 들어 힘이 빠지면서 더 이상은 힘에 부쳐 부담을 버텨내지 못한 것.
여기에 8세 시즌에는 굴건염까지 겹치며 은퇴의 기로에 놓이지만, 카토 슈호 조교사가 "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아쉽가. 마지막으로 한번 더 화려하게 꽃피운 후 영예롭게 은퇴하게 해 주자"라며 출주 가능한 경기 중 가장 레벨이 낮은 경기 위주로 골라 다시 한번 승운을 되돌릴 수 있게 노력한다.

2.3. 작은 부활, 그리고 죽음

1년간의 휴양을 거쳐 9세 시즌인 94년, 제왕상을 통해 복귀해 5착으로 선전하며 가능성을 보인다.
그리고 맞이한 GIII 앱섬 컵에서는 장기 휴양 후 복귀한 9세의 노마임에도 그간 성적이 좋았던지라 다시한번 58kg의 톱 핸디가 부담되었는지 7착으로 패배한다.
결국 더 이상 부담을 지워주긴 힘들었던 진영측은 무리한 중상경기가 아니라 적당한 경기를 뒤지다 TV아이치 오픈 경기에서 간만에 적당히 가벼운 중량부담 덕인지 3착으로 선전한다.

그리고 맞이한 교류중상인 브리더즈 골드 컵[4]에선 오랜만에 핸디캡을 짊어지지 않게 되어 3번 인기를 받아들게 된다.
경기에선 도주하는 카리브 송을 쫓아, 지방의 영웅 라이블리 마운트와 제왕상 우승마 스테빌라이자마저 꺽으며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신진강호 마키노 토쇼가 맹추격해 오는 것을 떨쳐내고, 최후의 직선에서 기습을 노린 사사노 코반의 추입으로 바짝 다가섰지만 이들을 모두 떨쳐내며 승리한다.
마지막 승리였던 메구로기념 이후로 3년 반 만의 승리였다.

이에 진영 측에선 마지막으로 중앙 중상에서 진정한 부활을 이룬 후 명예로운 은퇴를 계획하나, 브리더즈 골드 컵 10일 후, 조교 중 갑자기 쓰러지고, 그대로 일어나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
사인은 급성 심부전.

3. 평가

비록 GI 승리는 못했으나 9세 시즌까지 44전을 뛰며 잔디와 더트를 가리지 않고 활약하며 중상 4승을 포함한 11승을 올린다.
총 수득 상금은 5억엔을 넘기며 클래식 주역으로 GI 승리도 맛본 동기들을 제치고 최고액을 기록[5]했으며, 굴건염이라는 치명적인 병을 이겨내고 고령에도 중상 승리를 기록하는 등 화려하진 않았으나 한 시대를 장식한 명 조연이자 명마로서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 말이다.

당시에는 아직 거리별 경기분류 등이 부진하던 시기이고, 근량부담도 지금보다 심했던 시기인지라 만약 2020년대에 태어났다면 더 많은 승수도 올리며 안전하게 활약할 수 있었을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4. 여담

  • 비록 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어찌됐든 굴건염이란 큰 병에도 굴하지 않고 늦은 나이에 부활하여 중상승리를 이룬 실적이 있다보니, 당시 현역지속 결정을 내렸던 카토 슈호 조교사는 이후 다시한번 굴건염으로 은퇴기로에 있던 말을 믿고 지극정성으로 간병해 다시한번 부활을 이후는 말을 맡게 된다.
    바로 98년 천황상 가을 우승마인 오프사이드 트랩이 그 주인공.


[1] 카토 조교사는 "상대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 말"이라 평가한다.[2] 이후 94년에 GII 페브러리 스테이크로 개명 및 승격, 97년에 GI으로 승격한다.[3] 워낙 압도적 인기 1위마였던지라 팬들은 물론 우승한 나리타 하야부사의 나카오 켄타로 조교사와 기수였던 요코야마 노리히로 마저 "우리 말이 카리브 송에게 이기다니..."라며 놀랐을 정도라고.[4] 현재는 암말한정 GI이지만 당시에는 제왕상에 버금가는 수준의 교류중상으로 슛말도 참전 가능했다.[5] 상금 2위는 오사이치 조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