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 bordercolor=#ffffff> | 카시오페아 カシオペア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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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기(CASIOPEA-P4) 멤버> 왼쪽부터: 이마이 요시노리 - 오타카 키요미 - 노로 잇세이 - 나루세 요시히로 | ||||
<colbgcolor=#dcdcdc><colcolor=#000000>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
결성 | 1977년 도쿄도 | |||
데뷔 | 1979년 5월 25일 1집 | |||
현 멤버 | 노로 잇세이 (기타) 오타카 키요미 (키보드) 나루세 요시히로 (베이스) 이마이 요시노리 (드럼) | |||
전 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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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재즈, 록, 펑크, 라틴 등 | |||
레이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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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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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4기 카시오페아 (곡: TODAY FOR TOMORROW) |
2. 특징
- 리듬면에서는 16비트를 기반으로 하고, 하모니면에서는 재즈 이론을 기반으로 텐션과 대리 코드를 활용한 자연스러운 화성과 코드 진행, 전조가 특징이다. 결성한 이래부터 리더 겸 기타리스트인 노로 잇세이가 쓴 오리지널 곡을 중심으로 연주하면서, 록과 펑크를 기반으로 솔로 플레이가 아닌 앙상블을 주체로 한 인스트루멘탈 음악은 일본의 초기 퓨전 신에 있어서 드물었지만, 80년대에 들어서 팝적인 면을 전면에 내세운 티 스퀘어와 함께 주류가 되면서 테크니컬한 인스트루멘탈 곡에 '카시오페아같다'는 형용사가 주로 사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 80년대 초반부터 중반에 걸쳐 상업적으로도 성공해 가사가 없는 인스트루멘탈 밴드임에도 매 앨범 발매마다 차트 상위권을 휩쓰며 라이브를 거듭할 때마다 팬이 늘어 일본 전국에서 콘서트 투어를 개최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북미 진출을 위한 보컬 음악의 도입과 미국식 팝색을 강하게 드러낸 음악성은 밴드의 방향성에 망설임을 드러내어 팬 이탈이 현저해지며 1989년에는 베이시스트 사쿠라이 테츠오와 드러머 짐보 아키라의 탈퇴라는 최악의 사태까지 겹쳐 인기가 급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베이시스트인 나루세 요시히로를 맞은 후엔 록과 펑크 기반의 인스트루멘탈 음악으로 회귀하여(멤버가 바뀐만큼 1기의 음악성이 그대로 되돌아온 것이 아닌 2기만의 음악색을 드러내었다) 지속적인 활동을 하면서 시간은 걸렸지만 오랜 팬들의 복귀와 함께 새로운 세대의 팬들을 늘리는 데도 성공하였다. - 음악을 들어보면 귀에 익은 곡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방송에서 이들의 음악을 시그널 곡으로 매우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MBC 뉴스데스크에 쓰인 Trance Evolution, KBS 체험 삶의 현장 에서 유니콘 타고 모금할 때 나온 Flush Up, iTV 열전 게임챔프에서 본방송 시작했을때 나온 Hole Heartedly, 지역방송사인 G1방송 라디오 운전상식에서 쓰인 Seasons 등이 있다. T-SQUARE나 디멘션 같은 여타 퓨전 재즈 밴드들과 비슷하게 역시 국내 내한을 자주 오는 밴드였는데, 상술했듯 한국의 방송사에서 하도 자기들 음원을 라이브러리째로 써먹어서 사용료 받을 겸 온다는 유머가 있었다.
- 일본의 대표 퓨전 밴드인만큼, 여러 밴드 혹은 세션들과의 협동 공연 또한 다수 가졌다. 특히 T-SQUARE와는 경쟁관계이면서도 TV 프로그램에 같이 출연할 정도로 친분이 깊다. 2003년에는 <Casiopea vs The Square>라는 이름으로 두 밴드가 역사적인 라이브를 성사하기도 했고, 스퀘어의 35주년 기념 공연에서 노로 잇세이가 세션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 야마하와 연관이 많은 밴드이기도 하다. 밴드 자체도 야마하에서 주최한 밴드 콘테스트인 EastWest 수상자 출신이고, 키보디스트 무카이야 미노루와 오타카 키요미는 둘 다 야마하 음악원(무카이야 미노루는 전신인 네무 음악원) 출신에다 4기 멤버인 이마이 요시노리도 야마하 엔도서이다.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1기 시절 초기에는 멤버들 전부 야마하 악기만[1]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후 멤버들이 바뀌면서 야마하 선호 성향은 옅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야마하 장비의 비중이 높은 편.
3.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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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기 멤버> 왼쪽부터: 사쿠라이 테츠오 - 무카이야 미노루 - 노로 잇세이 - 짐보 아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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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기 멤버> 왼쪽부터: 노로 잇세이 - 무카이야 미노루 - 짐보 아키라 - 나루세 요시히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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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기(CASIOPEA 3rd) 멤버> 왼쪽부터: 오타카 키요미 - 짐보 아키라 - 노로 잇세이 - 나루세 요시히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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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기(CASIOPEA-P4) 멤버> 왼쪽부터: 이마이 요시노리 - 오타카 키요미 - 노로 잇세이 - 나루세 요시히로 |
3.1. 현 멤버
3.1.1. 기타: 노로 잇세이
<colbgcolor=#010101><colcolor=#dddddd> 노로 잇세이 [ruby(野呂, ruby=のろ)][ruby(一生, ruby=いっせい)] | Issei Noro | |
출생 | 1957년 1월 1일 ([age(1957-01-01)]세) |
도쿄도 메구로구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기타리스트,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 |
소속 그룹 | 카시오페아 ISSEI NORO INSPIRITS |
장르 | 퓨전 재즈 |
데뷔 | 1979년 카시오페아 1집 |
가족 | 아버지, 어머니, 누나, 아내 |
학력 | 도쿄도립 타마가와고등학교 (졸업) 메이세이대학 (영어영문과 / 중퇴) |
레이블 | HATS UNLIMITED |
링크 |
3.1.2. 베이스: 나루세 요시히로
<colbgcolor=#010101><colcolor=#dddddd> 나루세 요시히로 [ruby(鳴, ruby=なる)][ruby(瀬, ruby=せ)][ruby(喜博, ruby=よしひろ)] | Yoshihiro Naruse | |
출생 | 1949년 11월 13일 ([age(1949-11-13)]세) |
도쿄도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베이시스트 |
소속 그룹 | 카시오페아 |
장르 | 퓨전 재즈 |
학력 | 세이케이대학 (졸업) |
링크 |
3.1.3. 키보드: 오타카 키요미
<colbgcolor=#010101><colcolor=#dddddd> 오타카 키요미 [ruby(大髙, ruby=おおたか)][ruby(清, ruby=きよ)][ruby(美, ruby=み)] | Kiyomi Otaka | |
출생 | 1966년 10월 18일 ([age(1966-10-18)]세) |
사이타마현 야시오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키보디스트, 오르가니스트, 작곡가 |
소속 그룹 | 카시오페아 |
장르 | 퓨전 재즈, 프로그레시브 록 |
배우자 | 야보리 코이치(矢堀孝一)[2] |
링크 |
3.1.4. 드럼: 이마이 요시노리
<colbgcolor=#010101><colcolor=#dddddd> 이마이 요시노리 [ruby(今, ruby=いま)][ruby(井, ruby=い)][ruby(義頼, ruby=よしのり)] | Yoshinori Imai | |
출생 | 1987년 11월 2일 ([age(1987-11-02)]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드러머 |
소속 그룹 | 카시오페아 유형 램페이지 |
장르 | J-POP, 록, 퓨전 재즈 |
종교 | 개신교 |
링크 |
2022년 7월 1일 서포트 드러머인 짐보 아키라의 뒤를 이어 정식 드러머로 들어왔다.
3.2. 전 멤버
3.2.1. 키보드: 무카이야 미노루
<colbgcolor=#010101><colcolor=#dddddd> 무카이야 미노루 [ruby(向, ruby=むかい)][ruby(谷, ruby=や)][ruby(実, ruby=みのる)] | Minoru Mukaiya | |
출생 | 1956년 10월 20일 ([age(1956-10-20)]세) |
도쿄도 세타가야구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키보디스트,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 주식회사 음악관 대표이사 |
소속 그룹 | 카시오페아 (1977 ~ 2012) |
장르 | 퓨전 재즈 |
데뷔 | 1979년 카시오페아 1집 |
배우자 | 전 아내 (? ~ ?) 후지 미사키(藤みさき)[3] (2015 ~ ) |
자녀 | 2명 (아들, 딸) |
학력 | 도쿄도립대학 부속고등학교 (졸업) |
링크 | |
음악관: |
3.2.2. 베이스: 사쿠라이 테츠오
<colbgcolor=#010101><colcolor=#dddddd> 사쿠라이 테츠오 [ruby(櫻, ruby=さくら)][ruby(井, ruby=い)][ruby(哲, ruby=てつ)][ruby(夫, ruby=お)] | Tetsuo Sakurai | |
출생 | 1957년 11월 13일 ([age(1957-11-13)]세) |
도쿄도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베이시스트, 작곡가 |
소속 그룹 | 카시오페아 (1976 ~ 1989) JIMSAKU |
장르 | 퓨전 재즈, 하드 록 |
데뷔 | 1979년 카시오페아 1집 |
학력 | 게이오기주쿠대학 (상학과 / 졸업) |
링크 |
3.2.3. 드럼: 짐보 아키라
<colbgcolor=#010101><colcolor=#dddddd> 짐보 아키라 [ruby(神, ruby=じん)][ruby(保, ruby=ぼ)][ruby(彰, ruby=あきら)] | Akira Jimbo | |
출생 | 1959년 2월 27일 ([age(1959-02-27)]세) |
도쿄도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드러머, 작곡가 |
소속 그룹 | 카시오페아 (1980 ~ 1989, 1997 ~ 2022) JIMSAKU |
장르 | 퓨전 재즈, J-POP |
데뷔 | 1980년 카시오페아 3집 |
학력 |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과 / 졸업) |
링크 |
3.2.4. 그 외
- 드럼 - 사사키 타카시(佐々木隆)
카시오페아의 원년 멤버. 1956년 11월 16일 토야마현 출생. 그가 참여한 1집과 2집을 들어보면 알 수 있듯 리드미컬하고 섬세한 드럼 사운드가 특징인 드러머였다. 이후 음악성의 견해 차이로 2집 Super Flight 이후 탈퇴. 짐보 아키라가 그의 자리를 대신한다.
- 드럼 - 히야마 마사아키(日山正明)
짐보 아키라가 복귀하기 전의 2기 카시오페아를 책임진 첫번째 드러머. 1990년부터 1993년까지 활동했다.
히야마 마사아키는 1959년 9월 2일생이며, 메인스트림 재즈 출신의 인물로 나루세 요시히로와 함께 카시오페아에 가입했으나 흡연으로 인한 건강 문제로 인해 탈퇴. 복귀 후 현재는 아마노 키요츠구의 세션을 맡고 있다. 음악적으로는 90년에 나온 앨범 'The Party' 앨범 이후로 기존에 비해 좀더 록에 가까운 후기 카시오페아의 음악적 방향을 정립했다는 평이다. 레귤러 그립을 사용한다.
- 드럼 - 쿠마가이 노리아키(熊谷徳明)
짐보 아키라가 복귀하기 전의 2기 카시오페아를 책임진 두번째 드러머. 1993년부터 1996년까지 활동했다.
쿠마가이 노리아키는 1970년 3월 18일 홋카이도 삿포로시 출생이며, 버클리 음악대학 출신이다. 1996년까지 활동하며 내한공연에도 참석했다가 탈퇴 후 오구로 마키나 오다 테츠로 등의 Being 계열 아티스트들의 세션을 주로 맡았다. 티스퀘어의 전 베이시스트 스토 미츠루, 세션 기타리스트 히라이 타케시 등과 함께 퓨전 재즈 밴드인 TRIX를 결성해 활동중이다.
4. 역사
4.1. 데뷔 이전( ~ 1979)
1974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기타리스트 노로 잇세이와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베이시스트 사쿠라이 테츠오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함께 속했던 도쿄 도내의 록 연주 커뮤니티에서 만나게 되고 이내 의기투합해 기타리스트 제프 벡, 베이시스트 팀 보거트, 드러머 카마인 어피스가 결성했던 그룹인 벡 보거트 앤 어피스(Beck, Bogert & Appice)를 목표로 함께 연습하게 된다. 이후 1975년, 노로 잇세이는 메이세이대학에 진학하여 대학 경음악 동호회에서 세션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단기적인 활동에 그쳤고, 자작곡을 기반으로 한 사쿠라이 테츠오와의 밴드 활동이 주가 된다. 노로와 사쿠라이 이외의 멤버는 유동적이었고 보컬 멤버가 있던 시기도 있었지만, 하드 록과 펑크를 기반으로 재즈를 더한 인스트루멘탈 음악의 방향성은 유지한다.전술했듯 노로와 사쿠라이 이외의 멤버는 늘 변했기에 밴드의 이름은 생각해두고 있지 않았지만, 어느 소잡지의 취재를 받을 때 "밴드의 이름이 없으면 실릴 수 없다"는 말을 들은 것을 계기로 노로 잇세이는 어머니에게 조언을 구해 어머니로부터 "별자리같은 거 재밌지 않아?(星座とか面白いんじゃない?)"라는 말을 듣고 우주적이면서도 흥미롭다고 생각해 별자리 책을 펼쳐 수많은 별자리 중 카시오페이아자리에서 따온 카시오페아(カシオペア, Casiopea)로 밴드의 이름을 정하게 된다.
밴드의 명칭을 정한 후 1976년, 앞서 언급한 노로와 사쿠라이가 속했던 록 연주 커뮤니티에 속했던 키보디스트 코이케 히데히코(小池秀彦)와 드러머 스즈키 토오루(鈴木徹)를 영입해 4명 편성으로 야마하가 주최했던 아마추어 밴드 콘테스트인 EastWest '76에 출전하여 결승까지 진출하고 노로 잇세이는 베스트 기타리스트상을 받으면서[4] 아마추어 음악계에 이름이 점차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결승 직후 스즈키 토오루는 당시 데뷔하게 된 퓨전 밴드 PRISM의 활동에 초점을 두기 위해 탈퇴하고 이어 코이케 히데히코도 다른 세션 활동으로 바빴기 때문에 덩달아 탈퇴하게 된다.
다시 노로와 사쿠라이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둘은 이듬해에 개최되는 EastWest '77 출전을 위해 멤버 찾기에 집중한다. 노로는 친구의 인맥을 통해 당시 네무 음악원(현 야마하 음악원) 엘렉톤과에 재적 중이던 무카이야 미노루를 키보디스트로 영입하고, 드러머는 좀처럼 정해지지 않고 계속 교체되다 결승에 가서야 사사키 타카시로 고정하게 된다. 카시오페아는 최우수 그룹상과 2년 연속 베스트 기타리스트상을 받고 결승 멤버 그대로 프로 데뷔를 목표로 하게 된다. 이 1977년을 공식적으로 카시오페아의 결성년도로 삼고있다.
EastWest '77 당시의 출전곡들 | |
Flying | Midnight Rendezvous |
EastWest '77 출전 후 카시오페아는 도쿄 교외에서 활발하게 라이브 활동을 하며 프로 데뷔를 위한 초석을 다져감과 동시에 여러 음반 회사에도 데모 테이프를 가지고 음반 발매를 위한 제의를 해봤지만 카시오페아의 음악은 당시 시장에서는 상품성이 떨어진다며 대폭 변경할 것을 요구받기 일쑤였다. 그렇게 앞으로의 활동을 고민하고 있을 무렵, 알파 레코드(Alfa Records)의 무라이 쿠니히코(村井邦彦) 사장로부터 제의가 들어오게 된다. 당시 알파 레코드는 마츠토야 유미와 1978년 데뷔한 4인조 코러스 그룹인 서커스의 대성공으로 최신 장비가 갖춰진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었고, 데모 테이프 대신 최신 장비를 통해 처음부터 녹음을 다시하여 첫 음반을 발매하게 된다.
4.2. 1기(1979 ~ 1989)
1기 카시오페아 (곡: Asayake) |
1980년, 짐보 아키라가 탈퇴한 사사키 타카시의 빈 자리를 채우게 된다. 짐보 아키라는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사쿠라이 테츠오가 대학의 빅 밴드 그룹 게이오기주쿠대학 라이트 뮤직 소사이어티(慶應義塾大学ライトミュージックソサエティ)에서 베이시스트 대역을 맡으면서 만나게 된 드러머였다. 사쿠라이는 짐보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사사키 타카시의 탈퇴가 기정사실화된 카시오페아에 추천하였고, 사사키 타카시의 탈퇴 후 정식 멤버로 들어오게 된다. 당시 3학년이었던 짐보 아키라는 그 전까지 프로 경험이 전무했고, 장래에 프로가 될 생각도 없었지만 빅 밴드 활동과 별개로 미국의 드러머인 스티브 갯(Steve Gadd)과 하비 메이슨(Harvey Mason)을 동경하여서 그들이 참여했던 퓨전 음악들을 자주 듣고 카피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비슷한 음악성을 지닌 카시오페아에 들어오는 것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짐보 아키라가 가입하고 바로 녹음된 3집 Thunder Live는 음악 잡지 ADLiB 등의 평론계에서 큰 호평을 받았고, 이 앨범을 하비 메이슨이 감명깊게 들으면서 카시오페아의 활동에 참여해 일부 앨범들의 프로듀싱과 조언을 해주어 이후 카시오페아의 작풍이 변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 소속 레이블인 알파 레코드가 해외 진출에 매우 의욕적이었기 때문에 알파 레코드를 대표하는 뮤지션 중 하나였던 카시오페아 또한 미국과 영국 시장을 겨냥한 앨범들을 1981년, 1982년에 발매하여 해외에 진출한다. 미국에서 알파 레코드는 현지 법인 알파 아메리카(Alfa America)를 설립하고 카시오페아는 앨범 Eyes of the Mind와 Make Up City[5]를 발매하며 시장에 진출하였다. 두 앨범 모두 차트에 오를 정도의 성과를 보이며 단기적인 성공을 하긴 했지만, 이듬해인 1982년에 알파 아메리카가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미국 시장에서 철수하게 되어 계속 음반 발매를 할 수 없었고, 카시오페아의 미국 진출도 자연히 중단되었다. 미국 진출과 별개로 1982년 미국 뮤지션인 기타리스트 리 릿나워(Lee Ritenour)의 일본 투어 중 리 릿나워 그룹과 협연하여 FOUR BY FOUR를 발매하기도 했다.
미국과 달리 유럽 시장에서는 꽤나 괄목할만한 성과들이 있었다. 1983년 첫 해외 공연을 런던에서 성공적으로 마쳤고, 1984년에는 일본 그룹으로서는 드물게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주목을 받는가 하면, 이후 2번째로 진행한 런던 공연은 NHK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독일, 스웨덴, 덴마크 등에서 공연하며 활발하게 유럽 투어를 진행하였다.
1983년 런던 라이브 | 1984년 NHK 뉴스 보도 |
1986년, 카시오페아는 유럽과 동남아 등지에서의 성공을 토대로 앨범 Sun Sun을 통해 다시 미국 시장 진출을 시도한다. 이 앨범은 데이비드 보위의 서포트 기타리스트로 유명한 카를로스 알로마(Carlos Alomar)가 프로듀서로 참여해 좀 더 팝 음악의 영향을 받아 음악성의 변화를 꾀했으나 미국 시장에서의 성과도 시원찮았고, 일본 국내 시장에서는 전작 Halle의 후광을 업어 골드 디스크(음반 10만장 이상 출하)를 달성하긴 했지만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또한, 마츠바라 미키 앨범 <LADY BOUNCE>를 전곡 어레인지 담당했지만, 미키와 맞지 않는다는 등 평이 좋지 못했다.
이후 카시오페아는 오랜 세월 함께해온 알파 레코드에서 폴리도르 레코드(Polydor Records)로 이적하고, 자신들만의 레이블 AURA를 통해 1987년 Sun Sun의 음악성을 어느정도 계승한 앨범 Platinum을 발매한다. 이후 1988년에는 '옛날의 곡과 닮아도 괜찮으니 격의 없는 자연스러움'을 목표로 Euphony를 제작하고, 1기 카시오페아의 마지막 앨범이자 라이브 앨범인 World Live '88을 발매한다.
한편 1988년까지 카시오페아는 매년 2장의 음반을 꾸준히 발매하면서도 일본 국내와 해외 모두에서 연간 100번이 넘는 라이브를 해냈다. 항상 카시오페아는 그룹으로서 활동을 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멤버들의 솔로 활동이 적었고, 다른 아티스트의 라이브나 레코딩에 참가하는 일도 드물었다. 1989년, 카시오페아는 폴리도르 레코드와의 계약이 끝나고 다음 소속사로 이적을 준비하는 동안 잠시 밴드 활동을 휴지하고 각 멤버들의 솔로 활동으로 그 공백을 메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쿠라이와 짐보 아키라가 따로 멤버를 모아 결성한 보컬 밴드 샴바라(Shambara)의 처우를 둘러싸고 노로·무카이야와 사쿠라이·짐보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노로·무카이야는 샴바라의 향후 지속적인 활동이 카시오페아 활동 재개에 지장을 줄 수 있기에 활동 중지를 주장했고, 사쿠라이·짐보는 두 활동 모두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주장은 끝까지 모아지지 않았고, 결국 사쿠라이 테츠오와 짐보 아키라는 그 해에 카시오페아를 탈퇴하고, 이듬해에 짐사쿠(JIMSAKU)를 결성한다. 한편 멤버 분열 문제 외에도 소속사 이적 문제도 아직 남아있는 상황이었기에 카시오페아에게 1989년은 굉장히 쓰라린 해로 남았다.
4.3. 2기(1990 ~ 2006)
2기 카시오페아 (곡: Fightman) |
새 멤버가 정해진 카시오페아는 이내 앨범 The Party를 동명의 영상물과 동시에 발매하고, 이후 1991년 Full Colors를 발매하여 좋은 평가를 받는다. 2기 카시오페아 초반의 이 두 앨범은 인스트루멘탈 음악으로만 이루어진 구성으로 발매하여 1980년대 후반에 바뀐 음악성을 수정한 것을 확실시하여 바뀐 음악성에 실망한 기존 팬들의 복귀와 더불어, 나루세 요시히로와 히야마 마사아키만의 새로운 개성을 형성해 작풍의 변화를 통한 새로운 팬들의 유입 또한 이끌어냈다.
The Party VISUAL STACK |
1992년 8월, 히야마 마사아키는 건강 문제로 요양을 위해 라이브 앨범인 We Want More를 마지막으로 탈퇴하고, 그 후임으로 당시 22세인 쿠마가이 노리아키가 가입하게 된다. 쿠마가이는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하여 일본 국내 활동을 찾던 중 아마추어 시절 동경하던 카시오페아의 소속사에 프로필과 데모 테이프를 보낸 것이 영입의 계기가 되었다. 또 동년 10월, 카시오페아는 다시 친정과도 같은 알파 레코드로 소속사를 이적하였고, 이후 알파 레코드가 경영부실로 파산하여 도시바 EMI에 인수되어 알파 뮤직으로 법인이 바뀌자 계약 기간을 마치고 1994년 가을에 포니캐년(Pony Canyon)으로 이적하게 된다.
한편 멤버와 레이블이 바뀌면서도 활동은 점차 안정되어갔다. 앨범도 다시 매년 정기적으로 발매하는가 하면, 해외 공연도 여러 국가에서 활발히 진행하게 된다. 특히 1996년 2월 17일에는 예술의전당에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에 일본인 아티스트로서 한국 공연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MBC에서 방송한 1996년 한국 공연 |
1996년 10월 쿠마가이 노리아키가 탈퇴한다. 이 시기에 라이브에서 스가누마 코조(菅沼孝三)가 잠시 서포트 드러머를 맡은 적도 있었지만, 이내 짐사쿠 활동중이던 전성기 멤버 짐보 아키라가 1997년 1월에 서포터 드러머로 복귀하기로 결정되며 다행히 짧은 기간 내에 일단락되었다.
1997년, 결성 20주년을 맞아 카시오페아는 활동 초기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던 하비 메이슨을 게스트로 Light and Shadows를 발매한다. 한편 짐사쿠가 1998년 2월 마지막 투어 중 해산을 발표하면서 짐보 아키라가 카시오페아 활동에 더욱 힘을 주는 계기가 되어 단순 서포트에서 스페셜 서포트로 참가 명의를 바꾸며 카시오페아에는 오히려 호재가 되었다. 이후 전작인 Light and Shadows의 차분한 분위기와 다르게 옛 카시오페아의 스타일을 포함한 Be를 발매하고, 1999년에는 데뷔 20주년작인 Material을 발매한다.
하지만 그 해 포니캐년이 성과 부진을 이유로 엔카, 가요, 포크 음악 계열의 가수 대부분의 전속계약을 종료시키며 젊은 층을 타겟으로 한 J-POP 전문 음반사로 변모를 꾀하고, 이에 카시오페아는 같은 지원 조건으로는 소속사 유지가 힘들 것이라 판단하고, 1999년 가을에 파이오니아 LDC로 7년만에 돌아오게 된다.
파이오니아 LDC 복귀 직후인 1999년 10월 2일, 카시오페아는 히비야 야외 음악당에서 기존 4인에 더해 사쿠라이 테츠오와 쿠마가이 노리아키, 그리고 1976년의 카시오페아 초대 키보디스트인 코이케 히데히코를 게스트로[6] 20주년 기념 라이브 공연을 한다. 이 공연은 앨범과 영상물로도 제작되어 20th라는 제목으로 발매하였다. 2001년 6월 28일에는 1996년 이후 5년만에 2번째 내한 공연을 했는데, 당시 미발매 앨범이었던 Main Gate의 곡 Good Luck!을 세계 최초로 공개하기도 하였으며, 2003년 8월 9일에는 당시 발매한 앨범 Places 기념 투어로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3번째 내한 공연을 하였다.
이어 그 해 11월 21일과 22일, 도쿄 후생연금회관에서 양일간 카시오페아와 함께 일본 퓨전 재즈의 양대 거장인 T-SQUARE와 Casiopea vs The Square Live라는 공연명으로 역사적인 협연을 이뤄낸다. 21일의 공연은 앨범으로 발매되었고, 22일의 공연은 영상물로 발매되었다. 한편 이 시기 파이오니아 LDC를 모회사 파이오니아가 덴츠에 매각함에 따라 제네온 엔터테인먼트(Geneon Entertainment)로 상호가 변경되어 카시오페아도 제네온 소속이 되고, 2004년 이후에는 짐보 아키라와 전 T-SQUARE 드러머인 노리타케 히로유키(則竹裕之)가 함께 결성한 트윈 드럼 유닛인 Synchronized DNA를 서포트로 하여 투어를 진행하거나 정규 앨범인 Signal을 발매하기도 한다.
2003년 T-SQUARE와 협연한 Fightman |
하지만 카시오페아의 활동은 80-90년대에 비해 2000년대에 들어 점차 줄어드는 추세였고, 멤버들의 개인 활동들도 그만큼 많아져갔다. 그러던 중 2006년 1월, Live Signal 투어를 20일 도쿄 후생연금회관과 27일 삿포로의 페니 레인 24(Penny Lane 24)에서 마지막으로 마치고 카시오페아는 이후의 일본 국내 일정을 발표하지 않는 것에 이어, 연례행사가 된 팬클럽 파티 또한 사전에 공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레 중단하며 좋지 않은 징조를 보였다. 그럼에도 6월 28일과 29일에 예정되어있던 4번째 한국 라이브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예정대로 실시하여 전 라이브에서 격렬하게 호응해준 한국 팬들에게 마지막 무대를 선물하였고, 이후 8월 1일에 카시오페아는 노로 잇세이의 "카시오페아 일체의 활동을 중지하고 싶다"는 의향에 따라 모든 활동을 중지한다.
4.4. 활동 휴지기(2006 ~ 2012)
이 시기에 멤버들은 각자 다양한 솔로 활동을 하였다. 노로 잇세이는 ISSEI NORO INSPIRITS를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2009년에는 카시오페아 원년 멤버 사쿠라이 테츠오와 어쿠스틱 듀오 PEGASUS를 결성하여 협연하기도 하였다.2009년 PEGASUS 라이브의 칙 코리아 원곡인 Spain 연주 |
무카이야 미노루는 철도 사업의 음악 제작에 기용했던 뮤지션들로 무카이야 미노루와 멜로디즈(向谷実とメロディーズ)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나루세 요시히로는 카시오페아에 제공한 자작곡을 중심으로 선보이기 위한 유닛, Narucho-ICE(나루초이스)를 결성해 정기적인 라이브 활동을 하였다. 이 그룹은 베이스, 기타, 드럼, 관악기×3으로 6명 편성에 초기에는 무카이야 미노루가 게스트로 매회 참가해 무카이야의 자작곡이나 노로 잇세이가 쓴 카시오페아의 대표곡들도 연주되었고, 노로도 2009년과 2012년 2회 참가해 Asayake나 Fightman 등의 대표곡을 연주했지만 노로와 무카이야 두 사람이 함께 참가한 적은 없었다.
짐보 아키라는 드럼을 이용한 솔로 라이브인 원맨 오케스트라 활동에서 카시오페아에 제공한 자작곡이나 Asayake 등의 대표곡을 연주하였다. 또한 2009년 도쿄 JAZZ에 참여해 기타리스트 리 릿나워, 피아니스트 오트마로 루이즈(Otmaro Ruiz), 베이시스트 아브라함 라보리엘(Abraham Laboriel)을 게스트로 하여 공연하기도 하였다.
한편 노로 잇세이와 나루세 요시히로는 도쿄음악대학의 객원 교수로서 매주 만나고 있었고, 학생들의 제작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4.5. 3기(CASIOPEA 3rd, 2012 ~ 2022)
3기 카시오페아 (곡: DAYS OF FUTURE) |
한편 CASIOPEA 3rd 활동은 멤버들의 솔로 활동과 아울러 행해지고 있었는데, 노로 잇세이는 ISSEI NORO INSPIRITS 활동을 계속하였고, 나루세 요시히로도 활동 재개 발표 직전에 본인을 리더로 한 새로운 그룹인 더 초퍼스 레볼루션(The Choppers Revolution)을 결성한 상태였다. 오타카 키요미 또한 가입 이전의 참가 프로젝트를 계속하였고, 짐보 아키라도 휴지 전과 같이 모든 활동에 참여하지만 여전히 서포트라는 입장에서 참가하였다. 따라서 연간 활동은 극히 제한된 기간 동안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2013년 11월에는 CASIOPEA 3rd 최초이자, 8년만의 오리지널 앨범인 TA・MA・TE・BOX를 발매하고, 같은 달 전년에 이어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단독 공연을, 12월에는 일본 국내에서 앨범 발매 기념 라이브 투어를 했다. 이후 여러 앨범들을 발매하고, 2017년 12월 24일에는 카시오페아 결성 40주년과 ISSEI NORO INSPIRITS 결성 10주년 기념으로 EX THEATER ROPPONGI에서 4010이라는 공연명으로 양 밴드의 공동 라이브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2019년 3월에는 짐보 아키라의 환갑 기념 스페셜 라이브에 출연하였다. 이 라이브에서는 짐보가 사쿠라이 테츠오와 결성했던 짐사쿠의 21년만의 라이브도 행해진다.[7] 사족으로 짐사쿠는 이것을 계기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7월에는 CASIOPEA 3rd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이 된 PANSPERMIA를 발표하였다.
2020년 코로나 19의 세계적 유행은 일본 내에서도 관객과 함께하는 라이브 콘서트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엄청난 지장을 주었으며 CASIOPEA 3rd도 예외는 아니었다. 봄에 예정했던 토메이한 클럽 투어의 도쿄 오사카 공연을 10월로 연기하였고, 그것을 전후해서 9월에는 레귤러 서포트 드러머인 짐보 아키라 대신 신동으로 유명했던 여성 드러머 카와구치 센리(川口千里)를 서포트 멤버로 라이브 CASIOPEA 3+1000을 공연한다(이듬해와 내후년에도 개최). 한편 2021년 10월에는 전 멤버인 무카이야 미노루, 사쿠라이 테츠오, 짐보 아키라가 합심하여 퓨전 밴드 카츠시카 트리오(かつしかトリオ)를 결성하여 라이브 투어를 통해 카시오페아에서 각자가 작곡한 곡들을 중심으로, 노로 잇세이를 포함한 유일한 4인 공동 작곡 곡인 Halle도 연주되었다.
2021년 블루 노트 도쿄에서의 라이브. Midnight Rendezvous와 Tokyo Sunset 연주 |
2022년 2월, 서포트 멤버로서 활동에 참여하고 있던 짐보 아키라가 졸업(앞으로의 활동에서 이탈)을 발표하여, 같은 해 4월부터 5월 이뤄진 빌보드 라이브의 일본 국내 투어 A.J. FINAL이 행해졌으며, 5월 28일 빌보드 라이브 오사카 공연을 마지막으로 졸업하였다.
4.6. 4기(CASIOPEA-P4, 2022 ~ )
2022년 NEW TOPICS와 NEW BEGINNING을, 2024년에는 RIGHT NOW를 발매하였다.
5. 디스코그래피
5.1. 정규 / 라이브 앨범
Casiopea Discography | ||||
{{{#!wiki style="margin: -0px -1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CASIOPEA | Super Flight | Thunder Live | Make Up City | |
1979 | 1979 | 1980 | 1980 | |
Eyes of the Mind | Cross Point | Mint Jams | FOUR BY FOUR | |
1981 | 1981 | 1982 | 1982 | |
파일:external/www.casiopea.co.jp/dropshadow2081602012cd20down20upbeat.png | ||||
Photographs | Jive Jive | The Soundgraphy | Down Upbeat | |
1983 | 1983 | 1984 | 1984 | |
파일:external/www.casiopea.co.jp/dropshadow2081602013cd20halle.png | ||||
Halle | Casiopea Live | Sun Sun | Casiopea Perfect Live | |
1985 | 1985 | 1986 | 1987 | |
Platinum | Euphony | World Live '88 | The Party | |
1987 | 1988 | 1988 | 1990 | |
Full Colors | Active | We Want More | Dramatic | |
1991 | 1992 | 1992 | 1993 | |
Answers | Hearty Notes | Asian Dreamer | Freshness | |
1994 | 1994 | 1994 | 1995 | |
Flowers | Light and Shadows | Be | Material | |
1996 | 1997 | 1998 | 1999 | |
20th | Bitter Sweet | Main Gate | Inspire | |
2000 | 2000 | 2001 | 2002 | |
Places | Marble | GIG25 | Signal | |
2003 | 2004 | 2005 | 2005 |
CASIOPEA 3rd | |||
Live Liftoff 2012 | TA・MA・TE・BOX | TA・MA・TE・BOX TOUR | A・SO・BO |
2013 | 2013 | 2014 | 2015 |
A・SO・N・DA | I・BU・KI | A・KA・RI | PANSPERMIA |
2016 | 2016 | 2018 | 2019 |
CASIOPEA-P4 | ||||
RIGHT NOW | ||||
2024 | }}}}}} |
5.2. 베스트 앨범
Best Selection (1993) | Twins (1997) | Work In (1999) | 20th Anniversary Best (1999) | Super Best 2000 (2000) |
파일:external/images-na.ssl-images-amazon.com/4154SK4TELL._AC_US160_.jpg | 파일:external/images-na.ssl-images-amazon.com/51SW5L7kTpL._AC_US160_.jpg | |||
Golden Best (2004) | GENTLE & MELLOW (2006) | GROOVE & PASSION (2006) | Best Of-Alfa Collection (2009) | Golden Best (2011) |
5.3. 기타 앨범
- 코구마 타츠야(小熊達弥) - Spiral Fusion (1979, 피처링)
- Casiopea vs The Square Live (2003, T-SQUARE 협연)
6. 여담
- 밴드명을 정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당시에는 '더 〇〇〇즈' 류의 밴드명이 일반적이라 카시오페아라는 밴드명은 보통 "이상한 이름이네"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또 라이브 하우스에서 별자리는 맞는데 '페가수스'라고 쓰여있거나 '에티오페아'라고 쓰인 적도 있어 노로 잇세이는 당시 무명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 양방언이 독립 후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 한창 잘나가던 밴드. 편곡으로 많이 참여했으며 짐보 아키라, 사쿠라이 테츠오와 친분이 있었고 그 둘과 기타리스트 후루카와 노조미와 함께 퓨전 팝 밴드 '샴바라'로 활동하기도 했다.
- Black Joke는 개그 콘서트의 위대한 유산(개그콘서트) 코너 처음 시작할 때(황현희가 아직 등장하지 않고 김대성만 있을 때) 8초~22초 사이 부분이 사용되기도 했다.
- 이승철은 카시오페아의 곡 <Me Espere>를 표절해 한국어 가사만 붙여서 마치 자신의 자작곡인양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라는 이름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문서 참조.
- 라디오를 접하는 일이 많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이 밴드를 접할 일이 있는데 바로 1998년에 발표된 Dream Maker가 여러 라디오 프로그램의 시그널로 쓰였다. TV에서는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코너였던 장하다 한국말에서 쓰였다.
7. 같이 보기
- MM JAZZ 인터뷰
- (2001.2) 짐보 아키라 & 사쿠라이 테츠오 - https://me2.do/5MCo8ZJJ
- (2001.6) 노로 잇세이 - https://me2.do/GmVAoKhM
- (2003.7) 무카이야 미노루 & 짐보 아키라 - https://me2.do/xHnsk1Q4
- Musicman 인터뷰
- (2019.9.25) 노로 잇세이 전편 - https://www.musicman.co.jp/interview/19788
- (2019.10.2) 노로 잇세이 후편 - https://www.musicman.co.jp/interview/19789
- (2019.11.5) 나루세 요시히로 후편 - https://www.musicman.co.jp/interview/242100
- Encount 근황 인터뷰
- (2021.11.13) 노로 잇세이 - https://encount.press/archives/241780/
- ZAKZAK 인터뷰
- (2022.11.30) 노로 잇세이 - https://www.zakzak.co.jp/article/20221130-RHTSFBWNW5OR5BLC3AXCSVKLQY/
- 카시오페아의 역사 블로그 투고본
- 일본어 위키피디아
[1] 노로 잇세이는 야마하 SG 시리즈, 사쿠라이 테츠오는 야마하 BB 시리즈, 짐보 아키라는 야마하 YD-9000R, 무카이야 미노루는 야마하 DX7을 기반으로 한 다수의 신디사이저[2] 직업은 기타리스트[3] 직업은 나레이터. 2015년 1월 17일 결혼식을 올렸다[4] 이때 상품으로 받은 것이 당시 발매한 야마하의 일렉트릭 기타 SG-2000이다.[5] 일본에서는 먼저 발매하였으나 미국에서는 Eyes of the Mind 이후 발매[6] 히야마 마사아키 또한 제안을 받았으나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관객으로 참석하였다고 한다.[7] 이 공연이 사쿠라이와의 유일한 CASIOPEA 3rd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