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12:54:22

카타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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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특징
3.1. 조직3.2. 사상3.3. 여성의 역할과 성관념3.4. 소수설
4. 미디어

1. 개요

Cathars, Cathari, Catharism
Albigenses, Albigensians

중세 유럽에서 발생한 기독교이단. 어원은 '청정한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카타로스(καθαρὀς, katharos)'에서 유래하였다. 프랑스 왕국 남부의 알비를 중심으로 퍼졌다고 하여 '알비파'라는 별명도 있지만, 실제 중심지는 알비가 아니라 툴루즈였다고 한다. 그 외에 '바타리니파', '랑그독파' 등이라고도 불린다. 이들이 모두 동일한 그룹인지, 혹은 다른 그룹인지는 아직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불가리파(불가리아파)라는 별명도 있었다.

프랑스 왕국 남부와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걸쳐서 널리 퍼졌으나 가톨릭이 이단으로 판단하여 무력으로 카타리파 신자들을 학살해서 멸망되었다. 카타리파에 대한 공격은 십자군 전쟁과 같이 여겨졌는데 이를 '알비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2. 역사

파일:Spread_of_Paulicanism.png
지도에서는 Waldensians, 즉 발도파도 표기되고 있지만, 발도파는 비슷한 시기의 카타리파와는 달리, 이원론적 영지주의 세계관을 부정하였으며, 여러모로 카타리파와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카타리파의 사상은 동유럽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불가리아 제1제국과 동유럽에 퍼져 있던 바오로파, 보고밀파와 관련이 깊다는 추측이 있다.

처음 기록이 나타난 것은 1081년 쾰른인데 이 무렵 독일 지역에서 카타로스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남프랑스에서 1112년에서 1120년에 걸쳐서 카타리파가 증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카타리파는 강한 반가톨릭 성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선언되었으며 기록상으로는 1122년에 카타리파 신도의 첫 번째 처형이 이루어졌다. 일시적으로 약화되기도 했지만 기세는 죽지 않고 점점 전파가 이루어졌다. 특히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교세가 확대되었으며 12세기 후반에는 남프랑스를 장악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세가 커졌다.

결국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1179년)에서 카타리파 금지가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교황은 처음에는 특사를 프랑스 남부에 파견하여 카타리파 신도들을 가톨릭으로 복귀시키도록 호소하였지만 남프랑스의 영주들은 프랑스 왕권이 미치지 않는 범위에 있었고 교황청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도 싫어한 지역 주교들도 교황 사절의 개입을 거부하였다.

카타리파가 주로 남프랑스에서 맹위를 떨친 것은 남프랑스 지역의 영주들의 직간접적인 비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카타리파가 퍼져나갈 당시 남프랑스는 분할상속의 원칙 때문에 수많은 군소영주들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교황청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남프랑스의 영주들이 갖고 있던 세금 징수권의 일부를 자신들이 차지해 버렸다. 이에 대해 영주들은 당연히 큰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다들 세력이 약한 데다 이들을 단결시킬 구심점도 없었기 때문에 당시 유럽 최고의 위세를 자랑하고 있던 교황청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남프랑스의 영주들은 반가톨릭 성향을 갖고 있는 카타리파에게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파문이 두려워서 섣불리 카타리파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영지에서 카타리파가 퍼져나가는 것을 방관하거나 은밀히 돕는 방식으로 카타리파의 세력 확산에 기여했다. 남프랑스 여러 곳에서 카파리파 교회와 모임이 만들어졌다.

특히 툴루즈 백작 레몽 6세가 유명했는데 그는 카타리파가 아니라 정통 가톨릭 신자였지만 카타리파를 보호했으며 교황청의 원복 시도에 일절 협조하지 않았다.[1] 결국 카타리파를 소탕하기 위해 후술하는 알비 십자군이 결성되자 레몽 6세와 그의 아들 레몽 7세는 반 십자군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1100년대부터 교황청의 주도 하에 성직자와 설교자들이 카타리파의 세력이 커진 남프랑스에 들어가서 이들의 주장을 논파하는 방식으로 카타리파 신자들을 가톨릭에 복귀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영주들의 비협조 때문에 이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결국 교황청은 카타리파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이에 따라 카타리파 및 카타리파를 비호하는 영주들을 모두 공격하기 위하여 알비 십자군이 편성되었으며 이들의 공격으로 1350년 이후엔 완전히 소멸되었다.

3. 특징

3.1. 조직

카타리파의 조직은 알기 어렵지만 크게 완덕자(perfecti)와 일반 신도(credentes)로 나누어진다. 완덕자는 소수이며 카타리파의 교리를 완전히 실행하여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하고 노동을 하지 않으며 세속과 단절된 생활[2]을 보냈다. 이들이 지극히 금욕적이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물로 보였기 때문에 당시 가톨릭의 부패에 염증이 난 민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완덕자는 지도자로서 신도들을 이끌었으며 남성과 여성 모두 완덕자가 될 수 있었다.

3.2. 사상

현재 카타리파의 사상은 알기 어려운데 카타리파는 소멸했고 그들 자신이 남긴 자료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카타리파의 사상은 주로 반박자들의 문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3]

전체적으로 선과 악, 신과 악마, 천국과 현세, 영혼과 육체 등을 대칭적으로 뚜렷하게 구분하는 이원론이 특징이며 선한 신의 영혼의 천국은 따로 있고 현재의 세상을 더러운 물질적 악의 세상으로 보고 있다. 영지주의적인 색채가 강했으며 카타리파는 이를 보고밀파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카타리파는 세상을 렉스 문디(Rex Mundi)[4]라는 악한 존재가 창조했다고 생각하였는데 고대 영지주의와 다른 점은 세상을 창조한 악한 존재를 사탄과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카타리파는 환생을 믿어 금욕적이고 정결한 삶을 살다 죽으면 사탄이 다스리는 더러운 물질적/육체적 현세를 벗어나 죽은 사람의 영혼이 영적인 세계인 선한 신의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5]

영지주의에서 믿듯이 물질 세계에 갇힌 영혼은 세상을 벗어나서 영적 세계인 천국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러운 세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금욕 생활을 보내는 것이다. 카타리파의 수장인 비숍과 카톨릭보다는 간단하고 평등한 여러 성직자 계급이 있고 일반교인으로 완전한 금욕생활을 보내는 신도가 완덕자(Perfecti)다. 가톨릭과는 달리 여성도 성직자가 될 수 있었다.

예배 의식으로 엔두라(endura)가 있었으며 죽음 직전에 안락식(Consolamentum)이라는 의식을 하였다. 가톨릭에서 하는 성사는 일절 거부하였다.

카타리파에게 가장 큰 죄악은 살인이었으며 따라서 육식도 기피하였다. 완덕자(Perfecti)들은 부산물이나 생식을 통해서 나오는 음식들은 무조건적으로 기피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채식주의 생활을 하였다. 고기는 생식활동의 결과이므로 먹지 않았고 생식활동의 결과물인 다른 음식(달걀, 치즈, 버터)도 금지하였다.

단, 생선을 비롯한 해산물은 뭐든지 먹어도 좋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해산물은 생식활동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카타리파는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성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손을 낳는 것도 가장 기피하였는데 이는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물질세계에서의 고통을 받는 것을 받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속박의 굴레를 씌우는것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고로 그들은 주로 '생식에 연결되지 않는 성행위'를 하였다.[6] 이러한 것들 때문에 고발당한 의심스러운 신도를 조사할 시 "합법적으로" 결혼한 것을 확인하였을 때 그 신도는 제명되었다.

카타리파에서는 '맹세'를 금지하였다.[7] 이 때문에 봉건질서를 파괴한다고 여겨져서 세속 봉건 영주들에게도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일체의 상업적 행위도 금지하였다.

다만 카타리파 신도들 중에서 이러한 규율들을 정말 칼같이 다 지키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카타리파 신도들은 정상적인 성관계를 가져 아이를 낳았고 고기와 술과 계란도 마음껏 먹고 살았다.[8] 규율들을 다 지키는 것이 어렵기도 했거니와 가톨릭 교회 당국에 체포당해 "너는 이단인 카타리파가 아니냐?"라고 추궁을 받았을 때 "나는 아내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고기와 술과 계란도 마음껏 먹고 삽니다. 이렇게 카타리파의 규율들을 지키지 않는 나는 결코 카타리파 신도가 아닙니다."라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그럼에도 카타리파가 급속도로 세력이 확산되고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던 비결은 당시 서유럽가톨릭교황청이 세속화가 이뤄지면서 부정부패와 연관되고 권위주의적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인 교회에 반발심을 가지게 된 귀족, 가톨릭의 교리상 성직자[9]가 될 수 없던[10] 여성, 그리고 라틴어를 모를 뿐만 아니라 문맹으로 인해 라틴어로 집전되는[11] 미사를 이해할 수 없던[12] 서민층 등이 가톨릭에 비해 훨씬 교리적으로 가볍고 입문하기 쉽던 카타리파 등의 이단에 빠져들게 되었다.

중세 후기로 갈수록 서민들은 내용을 알 수 없던 성당에서의 미사보다 집에서 개인적인 예배를 보는 것을 중시하게 되면서 신앙이 올바른지에 대한 검토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보고밀파, 카타리파와 같이 이단으로 부를만한 교단들이 발생하거나 침투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는 원인이 되었다.

즉 어떻게 보면 카타리파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벌어진 알비 십자군 전쟁은 이후 벌어질 교황청 권위의 추락과 종교 개혁의 서막과도 같은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다.

3.3. 여성의 역할과 성관념

카타리파는 당시 여성들에게 환영을 받았는데 이는 완덕자(Perfecti)와 같은 높은 자리도 가톨릭과 달리 여성에게도 열려 있었고 안락식(Consolamentum)이라는 의식을 주도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카타리파는 앞서 언급한 대로 환생을 믿었으며 남자도 여자로써 부활한다고 믿었다.
카타리파의 믿음 중 영혼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비물질적이며 성이 없는(Sexless) 것로 기록되는 것이 있었다.

고로 카타리파는 당시 가톨릭 사회가 인정하지 않던 완덕자 같은 자리를 약속하며 여성 신도들을 모집하였다.

여성 완덕자들은 엄격한 금욕주의를 지킬 것을 요구받았지만 그들만의 가정을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었다. 여성 완덕자들은 소수지만 선교 또한 담당하였다.

여성 신도들은 카타리파 공동체에서 신앙 등을 교육받으며 밖으로 나가 아이를 배어 낳으면 그 아이도 신도로 교육시켰다. 여성 신도들의 이러한 활약으로 인해 카타리파 신도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카타리파는 여성을 완벽하게 동등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례로 그들은 물질세계에서 벗어나 영적세계로 가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남성이어야만 하며 여성은 죽어서 남성으로 부활해야 구원(salvation)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여성의 성적 매력은 물질 세계를 향한 남성의 경계심을 흐트러뜨린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움직임들로 인해 카타리파의 양성평등 관념은 점차 희석되어 갔으며 여성 완덕자도 제외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후기 프랑스 카타리파만의 제한된 유행이며 이탈리아 카타리파는 여전히 여성 완덕자들이 존재하였다.

3.4. 소수설

일부 개신교계에서는 알비파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주교제와 제국교회의 성사 발전과정을 거부한 고대 교회의 후예로 본다. 카타리파는 성사 이전의 교회 방식을 보존한 자들이며 가톨릭이 이단으로 규정지은 보고밀파/바오로파, 이탈리아북부의 발도파와 일치를 이룬 성직제도를 거부한 고대 교회의 후예였다고 보는 것이다.[13] 이는 이탈리아 개혁교회가 된 발도파 교회들, 프랑스 개혁교회 등의 입장이며 한국에서는 성서침례친우회, 일부 장로회 인사들[14]이 주장한다.[15] 완덕자의 존재와 성관계 및 음식에 관한 규율 등은 이들을 마니교로 몰려 한 왜곡이라는 것이다.[16] 이러한 관점에서는 알비파는 '제도 교회'로 표현되는 가톨릭과 대비되는 '영의 교회'가 되며,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이어져 온 '영의 교회'가 다시 빛을 본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개신교 내부에서도 다수설이 아니며[17] 오히려 '고대 교회 - 알비파 - 개신교'로 연결되는 역사성을 만들어내려는 강력한 목적성을 갖춘 역사 왜곡이다. 알비파와 비슷하게 제도 교회를 적대시하는 영성 중심의 분파들은 교회사에서 여럿 있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별개의 분파인 이들을 16세기 이후의 교회사에 맞춰서 '개신교 역사'로 소급시킬 이유가 전혀 없다.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사가들은 개신교의 시작을 마르틴 루터[18], 더 올려잡아도 후스파 정도로 잡지 '참 교회'가 어둠 속에서 1500년쯤 이어졌다는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19]

게다가 바오로파, 보고밀파, 카타리파는 현재 주류 개신교계에서도 이단으로 판정할 수 있을 정도로 신학적으로 거리가 멀다. 3개 교파 모두 영지주의와 이원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성서와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 또한 주류 개신교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따라서 역사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현재 주류 개신교와 이 영지주의 계열 교파들의 연결 고리는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이를 연결하려는 시도는 모두 무리수다.

4. 미디어

현대에는 십자군과 대부분의 교회에 대한 반발로서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 11eyes - 메인 빌런인 리제롯테 베르크마이스터는 원래 카타리파의 일원으로, '리젯트 벨토르'라는 이름의 순수한 소녀였다. 교황청의 베지에 대학살과 이후 겪은 막장스런 일들로 인해 세계를 저주하는 악녀가 된 것.
  • 다빈치 코드
  • 성혈과 성배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가톨릭의 이단으로 등장한다. 별개의 교황을 가지는 프라티첼리 말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다른 가톨릭 이단들과 달리 카타리파는 교황이 없지만 관용 기술 레벨과 무관하게 남녀평등 상속제를 실시할 수 있고 여성도 사제, 자문위원, 군사지휘관이 될 수 있어서 능력치 좋은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써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상 게임 내에서 가장 개성적인 이단이기 때문에 이단 플레이를 하는 유저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단이다. 그러나 EU4에 컨버트해서 등장시키는 경우 참된 신앙 관용도 +2, 안정도 비용 -10%라는 심심한 특성을 가지는 복붙 종교가 된다. 비공식 한글패치의 구버전 번역명은 원뜻을 직역한 순결파.
  • l'Abbaye des Morts - 인디 게임 제작사 Locomalito에서 제작한 고전 플랫폼 스타일의 횡스크롤 게임으로 배경이 알비 십자군에 의해 카타리파가 학살당하던 시기이며, 주인공인 장 레이몬드는 카타리파의 수도사라는 설정.
  • 마운트 앤 블레이드에서 모드 Nova Aetas 모드에서 나온다. 스와디아 지방에서 Cathars로 나오며 거주지도 존재하며 모든 병력들이 블랙 플레이트로 떡장을한 기병들이며 근거지 소탕은 역사대로 성을 끼고 나온다.

[1] 바로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알비파 '문제'의 난해함은 신학적 이단 문제와 정치적 적대감 사이의 구분이 힘들었다는 것이다.[2] 성직자와 평신도가 각각 '선택된 자'와 '듣는 자'로 구분되었던 마니교와 유사한 요소다.[3] 개신교계 일각에서는 카타리파가 재세례파와 유사했으나 가톨릭 측에서 왜곡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만 어디까지나 '일각'이며, 개신교계에서도 대다수는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본다.[4] 라틴어 단어인데 해석하면 렉스(왕) 문디(세계), 즉 '세계의 왕'이라는 뜻이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기독교를 탄압했던 로마 황제들을 가리키는 별명 중 하나였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이런 문맥의 뜻을 모르고 그대로 단어를 직역해서 받아들이는 바람에 렉스 문디가 사탄이라는 황당한 개념이 만들어졌다...[5] 사실 카타리파의 뿌리인 마니교도 환생을 믿었는데 이는 마니교가 원래 불교의 교리를 베껴서 만들어진 종교라서 당연한 일이었다. 마니교는 아니지만 드루즈 같은 이슬람의 각종 이단 종파들도 불교나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서 환생을 믿었는데 정통 이슬람에서는 그런 교리들을 당연히 이단으로 취급하여 철저하게 탄압하였다.[6] 여기에서 영어 비속어 "Bugger"가 나왔는데 카타리파가 불가리아인들의 이단 종파로 알려져서 "불가르"파로도 불렸기 때문이다.[7]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하늘이나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마라."라고 한 구절 때문이다.[8] 이러한 점은 카타리파의 뿌리인 마니교도 마찬가지였다. 마니교도 일반 신자들 중에서는 육식음주를 금지하는 규율들을 별로 지키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어느 종교의 신자라고 해서 그 종교의 규율 모두를 진짜 칼같이 다 지키는 철두철미한 신자는 드물지 않은가?[9] 주교, 신부, 부제. 수녀는 성직자가 아니라 수도자이며, 수도자는 남녀 모두 될 수 있다(수사, 수녀).[10] "세례 받은 남자만이 (거룩한) 서품을 유효하게 받는다(가톨릭교회법 제 1024조)."[11]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부터 자국어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전에는 모두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다.[12] 18~19세기 무렵 서구에서 출간된 수많은 문학 작품들을 보면, 학교에서 필수 과목으로 배워야 했던 라틴어 수업을 학생들이 너무 어려워서 하기 싫다고 불평하는 내용들이 자주 나온다...[13] 피에르 발도는 발도파의 창시자가 아니라 이들에 합류한 리옹 일대의 집단의 지도자로 본다.[14] 장로회에서 이렇게 주장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제25조 '교회에 대하여'를 참조.[15]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기욤 파렐의 평전에서도 해당 내용이 나온다. #[16] 이러한 관점을 담은 한국에 번역되거나 출판된 도서들은 링크 참조 1,2,3[17] 당장 위의 각주에서 소개된 세 책들만 하더라도 학술서가 아니며 한 책은 아예 안식교의 책이다.[18] 심지어 칼뱅도 이단의 대명사로 카타리를 그의 저술에 쓰기도 했다. 소수설과 동일한 주장을 펴던 이탈리아 피에르몽의 발도파와 협력하던 기욤 파렐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19] 개신교 신학에서는 가톨릭식 주교 제도가 성경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보지만 합법성 논쟁과는 별개로 역사학적으로는 '주교 1명이 교구를 이끄는 단독지도체제'가 늦어도 2세기엔 이미 통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