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7:47:46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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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젊은 시절4. 수많은 테러를 기획하다5. 9.11 테러를 기획하다6. 최후

1. 개요

خالد شيخ محمد(Khalid Sheikh Mohammed‎)

파일: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jpg

파키스탄 출신의 테러리스트로, 9.11 테러의 주범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2. 설명

대부분의 사람들은 9.11 테러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세운 테러 단체인 알카에다의 계획 하에 진행된 것으로 알지만 사실 이 전대미문의 테러 사건에는 또 다른 흑막이 있었다. CIA로부터 'KSM'이라고 불리는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이슬람권의 테러 조직과 네트워크를 넘나드는 전형적인 '외로운 늑대형' 테러리스트였는데 어떠한 테러 단체에 소속되지 않았지만 이슬람권의 거의 모든 테러 조직과 접촉하여 정보를 공유하고 테러 계획을 수립하여 온갖 테러 사건을 일으켰다. 빈 라덴이 9.11 테러라는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이 사람 때문이었으며 미국인 인질 대니얼 펄을 직접적으로 참수한 범인이기도 하다.

3. 젊은 시절

그는 1964년 또는 1965년에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에서 태어났지만 가족은 얼마 후 쿠웨이트로 이주했고 그는 그곳에서 성장했다. 독실한 이슬람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16살에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했으며 청년 캠프에서 지하드에 대해 교육을 받고 폭력 투쟁에 공감하게 되었다.

1983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초완 대학과 노스캐롤라이나 농업기술대학을 거치면서 학위를 받았다. 그러다가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자극받고 1987년에 졸업하자마자 파키스탄 페샤와르로 가서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지도자 압둘 라술 사야프를 만났다. 사야프는 그의 멘토가 되었고 그를 자신이 운영하던 무자헤딘 캠프에 입소시켰다. 그은 훗날 CIA에게 자신이 소련군과의 전투에 직접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압둘라 아잠[1]의 요청으로 아프가니스탄 무장 단체들의 통신 연결을 돕는 전기 회사에서 행정업무를 맡았다. 1992년 그는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보스니아 내전에 참여하여 무자헤딘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카타르에 가족들을 정착시키고 카타르 정부의 전력수리부 기술자로 4년간 일했다.

4. 수많은 테러를 기획하다

그에겐 자신처럼 테러리스트의 길을 걷는 조카가 있었다. 람지 유세프(رمزي يوسف, Ramzi Yousef)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파키스탄에서 대학 교육을 받고 독일 등 서방 세계를 전전하다가 1991년 미국 버지니아에 정착해 배송 회사 직원으로 일했다. 그는 CNN에서 중계되던 걸프 전쟁, 팔레스타인 분쟁 등을 보며 가슴 속에 분노를 쌓았으며 룸메이트에게 "백악관이나 이스라엘 대사관을 대상으로 '무언가 큰일'을 하겠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는 미국에 복수를 결심하고 테러를 계획했다.

그는 이러한 조카에게 구체적인 작전을 제시했다. 유세프는 1991년부터 1992년까지 그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서 계획의 진전 과정을 전하고 의논했다. 그는 유세프에게 660달러를 송금하며 자금을 조달해 줬고 위조 여권을 만들어서 유세프가 뉴욕에 잠입하는 것에도 관여했다. 유세프는 자신이 직접 포섭한 요르단 출신의 이야드 이스모일과 함께 세계무역센터의 지하 5층에 폭탄을 터트리고 달아났다.

그는 일이 성공한 뒤 미국을 빠져나온 유세프와 합류하고 필리핀으로 잠적했다. 이후 이른바 보진카 계획을 수립했는데 12대의 미국 여객기를 태평양 상공에서 이틀 간격으로 폭파시키려 했던 음모다. 그와 유세프는 1994년 여름 마닐라의 한 아파트에서 폭탄과 시한장치 제조에 필요한 화학물질을 확보하는 한편 홍콩과 서울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여객기들을 목표물로 물색했다. 만약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한국인 승객 다수가 희생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해 11월에 마닐라를 방문하는 미국 대통령 암살 계획도 짰고 니트로글리세린을 채운 재킷을 몰래 반입하여 미국행 수송기를 폭파시키는 음모도 세웠다.

유세프는 1994년 12월 11일 삼촌의 지시를 받고 마닐라발 도쿄행 필리핀 항공 434기를 상대로 비행기 폭파 테러를 감행했는데 이는 차후에 있을 대규모 테러를 준비하기 위한 실험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그는 여객기의 화장실에서 시한폭탄을 조립한 뒤 이를 좌석 밑에 감추고 중간 기착지에서 내렸다. 폭탄은 오키나와 인근 상공에서 폭발했으나 위력이 약했고 조종사들이 긴급 상황에서 잘 대처하여 오키나와 항공에 긴급 착륙한 덕분에 폭탄이 숨겨졌던 좌석의 승객만 죽고 나머지는 전원 생존했다.

마닐라의 아파트로 돌아온 유세프는 12개의 대형 폭탄 제조를 계속했는데 이 폭탄들은 보진카 계획에 따라 각각 12대의 미국 여객기에 실려서 폭발할 예정이었지만 폭탄 제조 도중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급히 아파트를 빠져나와 해외로 도주했다. 필리핀 경찰은 유세프의 아파트 현장에서 사제폭탄을 비롯해 컴퓨터에 남겨진 각종 자료를 확보했으나 그때는 이미 두 사람 모두 무사히 탈출한 뒤였다. 유세프는 미국 당국에 의해 200만 달라의 현상금이 걸렸고 결국 1995년 1월 7일 두 달 만에 이슬라마바드에서 파키스탄 당국에 체포되어 미국으로 호송되어 240년형을 선고받고 ADX 플로렌스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조카가 체포된 뒤 CIA의 추적을 피해 수단, 예멘, 말레이시아, 브라질 등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전 세계의 이슬람 테러집단과 접촉했다. 그러다 그는 운명의 만남을 가졌다. 당시 수단에서 추방되어 아프가니스탄에 머물고 있던 빈 라덴과 만난 것이다.

5. 9.11 테러를 기획하다

1996년 중반 아프가니스탄에서 빈 라덴과 만난 그는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과 보진카 계획 등을 설명하며 자신에게 미국에게 복수할 비장의 계획이 있다고 털어놨는데 훈련된 조종사를 이용해 비행기로 미국의 시설물들을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그의 당초 계획은 실제의 9.11 테러보다 더욱 거창했다.

1. 열 대의 항공기를 납치한다.
2. 국방부, CIA, FBI, 핵발전소, 세계무역센터 및 동부와 서부의 최고층 빌딩 등 총 9개의 시설물에 충돌시킨다.
3. KSM 자신은 마지막 열 번째 비행기를 직접 조종해 적당한 공항에 착륙한 후 미국의 중동 정책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 뒤 남자 승객은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만 풀어준다.

빈 라덴은 그의 제안을 별 다른 언급 없이 듣기만 했고 그에게 알카에다에 공식적으로 가입하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이를 사양했다. 빈 라덴은 당시 아프가니스탄 정착이 시급해서 그런 거창한 테러 공격을 기획할 여유가 없었고 그는 외로운 늑대마냥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빈 라덴과 만난 뒤 계속 세상을 떠돌다가 1997년 파키스탄 카라치에 가족들과 함께 정착한 뒤 아프가니스탄을 오가면서 알카에다와 교류했다. 빈 라덴의 최측근이자 군 사령관인 모하메드 아테프는 그로부터 컴퓨터 기술 등을 전수받고 긴밀한 친분을 유지했다.

1998년 8월 동아프리카 미국 대사관 동시 테러 사건의 보복 차원에서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 공격을 받은 알카에다는 미국을 향한 더 큰 테러 공격을 기획했다. 빈 라덴은 그에게 구체적인 테러 계획을 짜기 위해 칸다하르로 와서 상주하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수락했다. 그는 칸다하르로 와서 알 카에다와 함께 구체적인 작전을 기획했지만 본인은 빈 라덴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 맹세를 끝까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9년 3~4월 칸다하르 인근의 알카에다 시설물인 알 마타르에서 빈 라덴과 알 카에다 군 사령관 모하메드 아테프, 그리고 그가 만나 공격 대상물을 선정하는 등 구체적인 기획에 들어갔다. 이때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조종사를 포섭하여 이스라엘의 도시 엘리아트를 폭격하자는 제안을 했다. 빈 라덴은 이에 마음이 끌렸으나 곧 미국에 대한 테러에 집중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그가 직접 비행기를 조종해 성명을 발표하는 계획은 소영웅주의라는 이유로 빈 라덴에 의해 철회되었다. 그의 당초 목표물이던 LA의 라이브러리 타워(현 유에스뱅크 타워)와 시카고의 시어스 타워(현 윌리스 타워) 등 동서 연안의 최고층 빌딩에 대한 공격도 공격이 너무 복잡해진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그들은 의논 끝에 백악관, 의사당, 펜타곤, 세계무역센터를 타격하기로 결의했다.

빈 라덴은 알카에다 정예 대원 4명을 선발했고 그는 이들에 대한 사전 교육을 맡았다. 이들 4명은 미국에 대한 증오와 지하드를 위한 순교 의식에는 모자람이 없었지만 영어를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서방 생활에 문외한이었다. 그는 이들을 미국에 투입시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판단했고 빈 라덴은 그의 조언에 따라 이들을 동남아 등지로 파견해 훈련과 공작을 맡겼다.

그는 4명 중 미국 비자를 받은 2명을 시켜서 여객기를 납치하여 미국의 목표물을 충돌시키게 하고 자신이 과거 수립했던 보진카 계획에 따라 미국 비자를 받지 못한 2명을 동남아에 보내서 태평양을 횡단하는 미국 여객기를 납치한 뒤 공중에서 폭파시키는 작전을 제안했으며 일본, 싱가포르, 한국 내의 미국 시설물들에 여객기를 충돌시키는 것도 고려했는데 특히 주한미군 주둔지에 비행기를 추락시키는 계획은 전적으로 그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그는 타이, 한국, 홍콩, 말레이시아에서 출발하는 여객기를 납치한 후 동시에 폭파시켜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시키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빈라덴은 미국 내 공격과 일치시키기에 너무 어렵다고 판단하고 동남아시아 쪽의 공작은 취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함부르크에서 온 테러리스트들 네 명이 합류했는데 이들은 풍부한 서방 생활 경험에다 능통한 영어, 기술적 역량을 갖추었다. 빈라덴은 이들을 독일로 보내 미국의 비행 학교 등록을 진행했지만 한 명은 비자가 거부되었고 나머지 3명이 비자를 확보하여 2000년 1월 15일 LA에 도착한다. 이후 테러리스트들은 계획대로 여객기를 납치했고 9.11 테러가 벌어지고 밀았다.

6. 최후

9.11 테러 이후 그는 미국의 보복을 피해 파키스탄에 잠적했지만 CIA에게 체포된 테러리스트들의 자백으로 위치가 발각되었고 결국 2003년 3월 1일 체포되었다. 그는 미국 당국에 넘겨져 폴란드 북부에 있는 CIA의 비밀 수용소(Dark Base)에서 가혹한 심문을 당했다. 정보 당국은 183차례의 물고문을 가하고 기저귀와 족쇄를 채운 뒤 7일 이상이나 세워 놓았다. 그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빈 라덴이 아메드 알 쿠와이티와 아민 알 하크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토라보라를 탈출했다고 증언했다. 다만 자백 외에 다른 증거는 없다.

그는 재판을 거쳐 9.11 테러 모의 혐의로 가석방이 허용되지 않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현재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복역 중이다.


[1] 빈 라덴과 함께 알카에다를 설립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