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6 11:24:53

쿠스코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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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왕국
Kingdom of Cusco[1]
파일:잉카 제국 황실 문장.png 파일:Tawa_chakana.svg.png
국장[2] 차카나[3]
파일:Late-intermediate-peru.png
쿠스코 왕국의 판도. 조그마한 적갈색이 쿠스코 왕국의 영토이다.
1197년 ~ 1438년
성립 이전 정복 사업 이후
와리 문명 잉카 제국
위치 남아메리카
수도 쿠스코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신권정치[4]
국가 원수 카팍→사파 잉카[5]
언어 케추아어
종족 잉카인
종교 잉카 다신교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1197년 망코 카팍의 쿠스코 왕국 건국
1438년 파차쿠티의 제국 설립
현재 국가
[[페루|]][[틀:국기|]][[틀:국기|]]

1. 개요2. 역사
2.1. 건국 신화2.2. 왕국의 형성

[clearfix]

1. 개요

쿠스코를 중심으로 했던 왕국이자 잉카 제국의 전신.

2. 역사

2.1. 건국 신화

잉카 문명은 수천년간 지속된 안데스 문명의 끝자락에 위치한 문명이다. 잉카인들이 나타나기 전 페루 지방에서는 크게 티티카카 호를 중심으로 800여 년간 번영한 티와나쿠 문화와 아야쿠초를 중심으로 500여 년간 번영한 와리 문화가 있었으며, 잉카인들 역시 이 문화권에 속하면서 자연스레 이들의 문화를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문화를 발전시켜나가게 된다.
파일:Manco_Cápac_18th_century_Cusco_School.jpg
파일:mamaocllo.jpg
파일:Templo_del_Sol_Titicaca.jpg
잉카의 창시자인 '망코 카팍'망코 카팍의 아내인 '마마 오클로'[6]망코 카팍의 미라가 안치되어 있었던 사원[7]
우리가 '잉카인'이라고 부르는 부족은 12세기 경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전설에 의하면 안데스의 한 동굴에서 4명의 남자와 4명의 여자가 나왔고, 이들의 지도자는 가장 먼저 동굴 바깥으로 나온 망코 카팍이라는 남성이었다고 한다. 망코 카팍은 순금으로 된 긴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태양신 인티(Inti)로부터 그 지팡이가 꽂히는 땅으로 가서 국가를 세우라는 계시를 내려받았다. 8명의 남녀들은 태양신의 명을 따라 새로운 땅을 찾아나섰으나, 중간에 한 사람은 힘을 과신하다가 동굴에 갇히고 한 사람은 돌이 되어버리거나 또 한 사람은 중간에 떨어져 나가서 결국에는 망코 카팍과 4명의 여자들만이 남았다. 이들이 딱 쿠스코에 도착했을 때에 마침 지팡이가 땅에 푹 들어갔고, 망코 카팍은 이 곳을 새로운 거주지로 삼고 쿠스코 왕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잉카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이 망코 카팍과 4명의 여인들이라고 굳게 믿었다. 참고로 잉카족의 실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원래 페루 출신인 토착민이 아니라 볼리비아에서 온 유랑민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8] 한편 망코 카팍은 쿠스코 계곡을 정복하고 난 후에 지쳐서 돌기둥으로 변해서 죽었다고 한다.

2.2. 왕국의 형성

망코 카팍이 승하한 후, 왕위는 망코의 아들인 신치 로카가 물려받았다. 신치 로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권 강화에 노력했으며, 붉은 술을 황금 원통에 통과시켜서 만든 독특한 형태의 왕관을 만들기도 했다. 위의 잉카 제국의 상징으로 나온 왕관이 바로 이 신치 로카가 고안해낸 왕관이다. 이후 역대 왕들과 황제들은 모두 이 왕관을 사용했고, 왕가의 권위를 드러내는 기물로 써먹었다. 또한 귓볼에 구멍을 뚫어 거대한 원반 모양의 황금 귀걸이를 달고 다니면서 귀족층과 평민층을 외견상으로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신치 로카 사후에는 그의 아들인 료케 유판키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전임자들에 비해 성향이 평화로웠다.[9] 쿠스코 내부에 시장을 처음으로 열고, 농업을 장려하는 등 내수에 치중된 정책을 펴나갔다.

료케 유판키 사후 왕위에 오른 쿠스코 왕국의 제4대 국왕 마이카 카팍은 료케보다는 활발한 성향이었다. 아레퀴파와 모퀘구아 지역이 이때 잉카 지역에 편입되었으며, 쿠스코 인근의 부족들을 여러 차례 병합하면서 왕국의 영토를 넓혀나갔다. 다만 이때도 쿠스코 왕국의 국경은 오직 쿠스코 계곡 안쪽에만 한정되어 있었으며, 안데스의 부족들도 이렇다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쿠스코 왕국은 제5대 국왕 카팍 유판키 때부터 쿠스코 계곡 밖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수도인 쿠스코에 여러 다리나 창고, 탑 등을 세우면서 인프라를 건설하기도 했다.

카팍 유판키 사후, 우린(Urin) 일족[10] 반란을 일으켜 왕세자를 쫒아내고 카팍 유판키의 아들이자 우린 일족이었던 잉카 로카를 제6대 국왕으로 올렸다. 잉카 로카는 30여 년 동안 재위하면서 인근의 창카족을 몰아내는 등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으며, 귀족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농경 진흥을 위해 수로들을 연이어 파내면서 쿠스코 왕국의 기반을 닦는 데 성공했다. 참고로 잉카 로카를 기준으로 이때부터의 잉카 왕실을 우린 왕조라고 부르고, 이전의 카팍 유판키까지의 국왕들을 하난 왕조의 국왕들이라고 부른다.

잉카 로카 사후 왕위에 오른 제7대 국왕 야와르 우아칵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 않다. 다만 유명한 점으로는 어릴 적에 적에게 잡혔을 때 피눈물을 흘려서 적들에게 충격을 주어서 풀려났다는 전설적인 일화 정도랄까. 어쨌든 야와르 우아칵은 1380년부터 1410년까지 약 30여 년 동안 재위했고, 그의 뒤를 이어 비라코차 잉카가 즉위했다.[11] 비라코차 잉카는 야와르 우아칵의 아들은 아니었으나, 같은 우린 혈족의 인척이었기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비라코차 잉카는 극도로 호전적인 인물이었고, 즉위하자마자 어린 나이에 '나는 세상의 절반을 정복하겠다'라는 포부를 밝힐 정도로 정복자 꿈나무였다고 한다. 그러나 비라코차 잉카의 호전적인 정복 활동은 인근의 창카 부족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창카족이 세력을 모아 대반격에 나서면서 수도 쿠스코마저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비라코차 잉카는 아들 둘을 거느린 채로 쿠스코를 버리고 산악 지방으로 도망치고야 말았다. 그러나 비라코차 잉카의 세 번째 아들인 잉카 로카[12] 왕자는 쿠스코와 태양 신전을 포기하지 않았고, 끝까지 창카 군대에 맞서 싸우면서 결국 쿠스코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리자 당연히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국왕과 수도를 지켜낸 왕자는 엄청난 비교가 되었고, 비라코차 잉카는 반강제적으로 잉카 로카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었다.[13] 이 잉카 로카가 비라코차의 뒤를 이어 쿠스코의 제9대 국왕으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잉카 제국의 여명을 열어젖힌 파차쿠티 황제였다.

파차쿠티는 인근 부족들을 활발히 정벌하며 남미 서부 해안가 대부분을 아우르는 거대한 대제국을 건설했고, 이때부터는 쿠스코 왕국이 아니라 여러 왕국들을 지배하는 잉카 제국 시기로 본다.



[1] 쿠스코 왕국 시기는 '타완틴수유'라고 부르지 않는다. 타완틴수유는 잉카 제국에게 패배한 피정복민들이 잉카 제국을 불렀던 용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2] 황제인 사파 잉카의 문장. 쿠스코 왕국 제2대 군주인 신치 로카가 고안한 왕관으로, 붉은 술을 황금 원통에 꿰어 만든 모양을 하고 있었다.[3] Chakana. '잉카 십자가'라고도 불린다. 십자가는 여러 개의 세계들을 상징하고, 중간의 구멍은 이 세계들을 이어주는 곳이자 영혼들이 드나드는 세상의 중심, 즉 쿠스코를 의미한다.[4] 황제는 태양신 인티의 대리인이자 화신 그자체였다.[5] 편의상 잉카 군주들을 다 '사파 잉카'로 통일해서 부르지만, 엄밀히 따지면 '사파 잉카' 칭호는 6대 군주인 잉카 로카가 처음 썼다.[6] 망코 카팍의 정실이자, 2대 국왕인 신치 로카의 어머니이다.[7] 티티카카 호 중앙에 있는 '태양의 섬'에 있던 석조 사원으로 코리칸차와 함께 잉카 제국 최고의 성소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너져서 폐허만 남아있다. 미라의 행방 역시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이다.[8] 그래서 현대 볼리비아는 잉카 제국을 아이마라 왕국과 더불어 자국의 양대 전신으로 여기고 있다. 현대 볼리비아인 중 아이마라족은 아이마라 왕국 계승 의식이 강하고, 케추아족은 잉카 제국 계승 의식이 강하다.[9] 료케 유판키의 재위기간에는 그 어떠한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딱히 이렇다 할만한 전쟁도 치르지 않았다.[10] 우린 일족은 수도에 머무르면서 농경과 제사를 주관했던 귀족층으로, 하난(Hanan) 일족이 독차지해왔던 왕좌에 대해 욕심이 강했다.[11] '비라코차'는 잉카의 창조신으로 신성한 이름이었다. 비라코차 잉카는 우르코스 산맥에서 신의 환상을 보고, 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12] 훗날 파차쿠티가 되었다.[13] 비라코차 잉카는 잉카 로카에 대한 암살 시도까지 하면서 자신의 첫 번째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으나, 잉카 로카가 다른 후계자들을 모두 죽여버리면서 무위로 돌아갔고, 결국 슬픔에 잠긴 채 쓸쓸히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