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9 19:01:20

크리스찬 레이트너

크리스찬 레이트너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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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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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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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도널드 레이트너
Christian Donald Laettner
출생 1969년 8월 17일 ([age(1969-08-17)]세)
뉴욕주 앵골라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신학교 듀크 대학교
신장 211cm (6' 11")
체중 107kg (235 lbs)
포지션 파워 포워드 / 센터
드래프트 1992 NBA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지명
소속 팀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1992~1996)
애틀랜타 호크스 (1996~1998)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1999~2000)
댈러스 매버릭스 (2000~2001)
워싱턴 위저즈 (2001~2004)
마이애미 히트 (2004~2005)
지도자 포트 웨인 매드앤츠 코치 (2012)
등번호 32번 - 미네소타 / 애틀랜타 / 디트로이트 / 댈러스
44번 - 워싱턴 / 마이애미
4번 -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1. 개요2. 커리어
2.1. NBA 데뷔 이전2.2. NBA 데뷔 이후
3. 수상 내역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전 농구선수. 그 유명한 1992년 올림픽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에 소속되었던 선수이기도 하다.

2. 커리어

2.1. NBA 데뷔 이전


고화질 영상은 이쪽

듀크 대학교 소속으로 4년 연속 NCAA Division I 남자농구 챔피언십 Final Four에 진출했으며, 91년에 이어 92년까지 2년 연속으로 NCAA 우승을 견인한 대학농구 역사상 최고의 스타 중 한명이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잘생긴 백인 미남 선수였기 때문에 흑인들이 지배한 농구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로 기대를 모았다. 버저비터로 듀크의 우승을 확정지은 것이 압권.[1]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드림팀 1기에 대학생으로서는 유일하게 선발되었다. 당시 후보는 레이트너 외에 샤킬 오닐, 알론조 모닝, 지미 잭슨, 해롤드 마이너가 있었는데, 초대형 유망주인 오닐을 제치고 선발되었기에 후대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만 당시로서는 그리 납득 못할 결과도 아니었는데, 이는 프로에서는 오닐이 훨씬 대성할 것으로 여겨지긴 했어도 오닐의 팀은 2라운드 탈락한 반면 레이트너는 2년 연속 우승에 네이스미스 올해의 대학선수상을 차지할 정도로 최고의 대학선수였기 때문이다.

파일:크리스찬레이트너2.jpg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1기 시절

그러나 드림팀에서는 천덕꾸러기 신세. 유일하게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아예 드림팀 안에서는 "College kid" 라고 불렸으며, 당시 드림팀 멤버들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College kid" 라고 부른다.[2] 이후 1992년 드래프트에서 샤킬 오닐, 알론조 모닝에 이은 3순위로 지명되었다.

2.2. NBA 데뷔 이후

2.2.1.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시절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지명을 받아 데뷔했으며, 대학 시절의 포스에 잘생긴 외모까지 갖춰 아직 신생팀 딱지를 벗지 못한 미네소타의 간판 스타가 될 것이라 여겨졌다. 미네소타에서의 시즌별 평균 기록은 다음과 같다.
  • 1992-93: 81경기 18.2득점 8.7리바운드 2.8어시스트 1.0블록 1.3스틸
  • 1993-94: 70경기 16.8득점 8.6리바운드 4.4어시스트 1.2블록 1.2스틸
  • 1994-95: 81경기 16.3득점 7.6리바운드 2.9어시스트 1.1블록 1.2스틸
  • 1995-96: 44경기 18.0득점 6.9리바운드 2.9어시스트 1.0블록 0.9스틸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루키 시즌에 이미 수위급 빅맨으로 활약하며 평년 드랩이라면 신인왕도 노려볼만한 활약을 펼쳤지만, 앞서 지명된 샤킬 오닐알론조 모닝이 워낙 뛰어난 활약을 펼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묻히는 경향이 있었다. 거기다 레이트너는 루키 시즌이 득점 커리어하이 시즌일 정도로 이렇다 할 성장세가 없었는데, 어찌보면 대학 4년을 거치면서 NBA에 입성하자마자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기량을 완성했지만 그 이상의 실링은 없었던 셈. 그러다 훗날 프랜차이즈 사상 최고의 선수로 성장할 케빈 가넷이 입단하여 알력이 생기자 4년차 도중 거의 내쫒기다시피 애틀란타 호크스로 트레이드됐다.

2.2.2. 애틀랜타 호크스 시절

그래도 이적 직후 당시 강팀이었던 애틀랜타의 한 축으로 활약하며 미네소타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플레이오프 무대를 처음으로 밟을 수 있었다. 그 다음 시즌에는 82경기를 모두 소화하며 18.1득점 8.8리바운드 2.7어시스트 0.8블록 1.2스틸을 기록했으며, 커리어에서 유일한 올스타 선정도 바로 이 시절이었다.

당시 애틀랜타는 꽤나 이상적인 조합이었다. 엄청난 골밑 수비력을 자랑하던 레전드 센터 디켐베 무톰보, 조던과 페이튼 바로 다음가는 수준의 가드 수비수이자 포인트 가드로서 득점과 어시스트도 고루 해주는 무키 블레이락, 평균 20득점을 기대할 수 있는 스윙맨 스티브 스미스가 있는 팀에 나름 수준급 공격형 빅맨인 레이트너가 합류한 것.

블레이락과 스미스, 그리고 레이트너는 호크스에서 뛰는 동안 각각 한 번 씩은 호크스의 선수로서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특히 무톰보는 명예의 전당까지 올랐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상당한 구성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레이트너는 올스타에 선정된 바로 다음 시즌인 1997-98시즌에 부진에 빠지고 급격히 내리막을 탔다.

2.2.3. 이후

디트로이트 이적 후 부상을 당한 뒤 그나마 준 에이스급의 기량마저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댈러스, 워싱턴, 마이애미를 거치며 롤 플레어로 활약하다가 2005년에 은퇴했다.

커리어 전반을 요약하면 대학 농구계에서는 위대한 선수로 손꼽히지만 NBA에서는 대학 시절 기대치와 위상을 그대로 이어가지 못했고, 결국 드림팀 1기 멤버들 중 개인 자격으로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못한 유일한 선수로 남았다.[3] 애시당초 그는 명전의 문턱을 두드려보긴 커녕 All-NBA Team에도 선정된 적이 없으며[4],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대학시절 그의 드림팀 참가 이력이 마치 초사이어인들 사이에 크리링이 끼어있는 것마냥(...) 기묘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다만 그렇다고 별볼일 없거나 그냥저냥 널려있는 수준의 선수로 기억되기는 뭣 한게, 어쨌든 레이트너는 대학 4년을 꽉 채우고 넘어와 NBA에서도 나름 장수하며 통산 누적 득점도 10000점은 넘긴 선수다. 한 번이라지만 올스타에도 선정되었으니 이정도만 해도 충분히 수준급의 커리어를 보낸 선수가 맞겠으나, 대학 시절의 업적 및 기대치나 드림팀 1기 멤버라는 출신 성분에 비하면 여러모로 아쉬운 족적이라는 것.

레이트너는 확실한 스타급은 아니었지만 다방면에서 공헌할 수 있는 선수였으며, 전성기 기준으론 약팀의 에이스나 중~강팀의 주축 중 한명 정도의 역할까진 가능한 선수였다. 어찌보면 한때 같이 뛰었던 톰 구글리오타, 후대 선수인 키스 밴 혼과 비슷한 정도의 위상.[5] 당시 빅맨 중 슛거리가 상당히 긴 편으로 슈팅터치도 괜찮아 4할 후반대 야투율, 8할이 넘는 자유투 성공률을 기록했으며, 패스나 시야를 포함한 농구센스도 나쁘지 않았다. 수비에서는 파워가 강한 편이 아니어서 림프로텍팅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해준 편. '센터급 장신에 적당한 파워, 수비나 골밑장악능력보다는 공격 위주'란 점에서 좀 거칠게 표현하면 보급형 케빈 맥헤일 정도 되는 선수인데, 시대에 따라 빅맨들 스타일이 달라져 밀레니엄 시대 빅맨 중에는 비교가 애매하다.[6]

종합적으로 그냥 '잘했다' 정도로 정리되는 선수이며, 사실 두드러지는 약점은 하나도 없는데 그렇다고 엄청나게 뛰어난 점도 딱히 없는 선수라 팀 입장에서 애매한 상황을 정리할 때 보내기도 쉬운 선수였다. 보내기 부담스러운 에이스급 재능은 아니라 확고부동의 코어로 삼을 정도는 아닌데, 기본 실력 자체는 또 수준급이라 시장에서 가치 있는 매물이었기 때문. 이 때문인지 3순위 지명선수임에도 꽤 일찍 팀을 옮겼고[7] 이후에도 팀을 꽤 옮긴 편이다. 재밌는 건 위에 언급된 구글리오타와 밴혼 역시 팀을 꽤 옮겼다. 사실 팀을 비교적 자주 옮기는 선수들 중엔 1) 스타급인데 성격이 거지같아서 감당못해 자주 옮기거나 2) 레전드급인데 팀에 별다른 애착이 없고 우승이나 돈 등 확실한 목표가 있어서 자주 옮기거나[8] 3) 평범한 롤플레이어여서 팀들의 필요에 따라 조각 맞추기하듯이 이리저리 팔려가거나, 4) 실력은 꽤 괜찮은데 스타급이라고 하긴 애매해서 팀에서 언터쳐블 위상까진 못 가는 경우가 있는데, 저 세 선수는 딱 4)번에 해당된다.

3. 수상 내역

수상 내역
파일:NBA-Allstar2021.png NBA 올스타 (1997)
파일:오륜기(여백X).svg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4. 관련 문서



[1] 위의 영상은 결승이 아니라 8강전(Elite Eight)에서 켄터키 대학을 침몰시킨 영상이다.[2] 사실 원래 예정대로 대학 선수들이 올림픽에 출전했다면 팀의 에이스가 됐을 인물이었다. 그래도 나름 4.8점을 기록하며 팀내 득점 순위에서 탈꼴찌는 했다. 꼴찌는 2.8점을 넣은 존 스탁턴. 물론 이 팀에서 개인기록은 큰 의미가 없었다.[3] 1992 드림팀은 "팀" 자체로 2012년에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4] 오히려 대학 시절 동료이자 후배였던 그랜트 힐이 짧은 전성기였지만 NBA의 슈퍼스타로 자리잡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5] 다만 저 둘과 달리 밴 혼은 멘탈 면에서 지나치게 유약한 면이 있었다.[6] 대략 올스타급과 주전 사이 키 큰 공격형 빅맨들인데, 보통 현 세대에 이 정도 위상을 지닌 빅맨들은 3점슛 능력을 지닌 스트레치 빅들이 많다. 참고로 레이트너의 외곽 슈팅 능력은 3점 슛이 '가능은 했다' 수준으로, 시대상 많이 쏘지도 딱히 부각되지도 않았다. 다만 자유투 성공률에서 볼 수 있듯 빅맨치고 슈팅터치는 매우 안정적이었고 실제로 확률높은 롱2 능력을 자랑했는데, 사실 이런 선수들이면 3점 장착하는게 상당히 용이하다. 장신이라 3점을 세트슛으로 쏠 수 있기 때문.[7] 레이트너와 구글리오타는 비슷한 수준과 플레이스타일을 지닌 선수였고 장단점도 비슷한 선수였지만, 당시 실력이 무섭게 올라오고 있던 케빈 가넷을 주전으로 올림으로 인해 7피트 언저리에 행동반경이 비슷한 세 명이 동시에 주전으로 동시에 뛰는 핵무리수 라인업이었기에 정리가 필요했다. 이 때문에 당시 가넷을 포함한 어린 선수들에게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하던 레이트너가 타깃이 된 것.[8] 르브론 제임스나 샤킬 오닐, 케빈 듀란트나 윌트 체임벌린 같은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