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00:53:49

터널(소설)

1. 개요2. 상세3. 줄거리4. 등장인물5. 해설6. 추천사7. 미디어 믹스

1. 개요

대한민국소설. 저자는 소재원. 작가와 비평사에서 출판했다. 2013년 4월 20일 발매. 가격은 12800원.

2. 상세

본래 터널은 소재원 작가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성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출판사들에게서 흥행할 요소가 전혀 없다는 이유로 출판을 허락받지 못해 데뷔작이 되지 못했다.[1] 이후 대중에 공개된 소재원 작가의 첫 작품 '나는 텐프로였다'가 영화 비스티 보이즈의 원작임이 알려지면서 소재원 작가는 신인에서 벗어나게 되어 출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다. 소재원 작가는 또다른 사회적 문제를 담은 숨겨진 본인의 작품을 공개하는 것이 옳다 여겨져 이 작품을 드디어 출간했다고 한다.[2]

소시민이었던 주인공 이정수가 터널에 갇히게 된 일에 대한 소설이다. 터널의 부제목'우리는 얼굴 없는 살인자였다'이다.

3.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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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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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 #==
터널(영화)/원작과의 차이점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소설 터널은 영화와 달리 암울하고 비극적인 내용으로 끝난다. 주인공의 구조가 중단되자 주인공은 차 안에서 분신자살, 주인공의 아내는 여론의 린치 때문에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고 궁지에 몰린 나머지 딸과 함께 동반자살, 1년후 터널 개통식 때 구조대장만이 마지막으로 나와서 이 가족을 기억하라고 일갈하다가 경호원들에게 끌려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한 마디로 세상은 원위치(나쁜 의미로)된다는 결말로 주인공들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완벽하게 패배했다.

부제목 '우리는 얼굴 없는 살인자였다'에 스포일러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주인공이 죽는다는 걸 부제목에서 알려준 것이다.

만약 영화의 결말이 원작 소설과 같은 결말이었다면 완전 폭망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것은 소재원 작가 본인도 인정할 만한 사실이다. 전술했듯이 소설 터널은 소재원 작가가 태어나서 처음 완성한 작품이었지만 출판사들에게서 흥행할 요소가 전혀 없다는 이유로 출판을 허락받지 못해 데뷔작이 되지 못했다. 영화 제작진들이 결말을 주인공이 구출되는 해피 엔딩으로 바꾼 것은, 원작 소설처럼 주인공들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불쾌하기만 하게 죽어버린 배드 엔딩영화관에서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5. 해설

박진영 문화평론가는 소설 터널을 이렇게 해설했다.
【 해설 】
>당신들의 지옥: 소재원의 『터널』론

S.O.S. save our souls!

여기, 구조를 요청하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지금 터널에 갇혀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그를 욕하고 비난한다. 남편을 살려 달라 외치는 그의 부인을 "생지옥"에 밀어 넣는다. 터널에 고립된 그와 지옥을 견디는 그녀, 그리고 당신-우리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바로『터널』의 이야기다.
『터널』은 홍수가 나고 지진이 일어나 도시 전체를 삼켜 버리는 재난서사형 소설은 아니다.(그것은 '고립-구출'의 관습적 문법을 따르는 대신 '고립-파국'의 비극성을 극대화한다.) 혹은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의 경구를 재해석한 도덕적 교화(?)의 소설도 아니다.(『터널』은 적어도 역결과로써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커다란 벌레가 된 사실을 알게 되는 초현실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야이기, 지금-여기, 21세기 한국사회에 틈입해 있는 '대재앙'의 서사가 『터널』이라는 진원지에서 시작된다.

소재원 작가는 『터널』을 통해 우리사회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목도되는 일상적 폭력과 권력의 문제를 서늘하게 다룬다. 그는 특히 우리시대의 대표적 아고라, 뉴미디어 디지털 '광장'에서 너무 쉽게 늑대로 전신하는 당신-우리들의 어떤 순간을 날카롭게 응시한다. 그 순간은 또한 권력에 의한 관계구도를 함축함으로써 이때 늑대는 단지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이 아니라 교활함으로 무장한 '스마트한' 야수의 전형이 된다. 권력은 후안무치하며 늑대는 '아름다운 마음(良心)'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맹목적인 군중심리를 발동시켜 여론몰이에 나선다.

『터널』은 독자에게 '불편한'소설이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망각하려는 야수의 시간을 아프게 되살려주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알면서도 묵과해 왔으며, 또 때로는 기꺼이 늑대가 되는 시간을 즐겨(?) 맞이하기도 했으니 『터널』은 '용감한' 소설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온-오프라인 이중세계에 걸쳐 우리사회의 가장 민감한 병증을 파헤친다는 점에서, 당대의 가장 '레알'한 리얼리즘 소설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터널』속으로 들어가 보자.
재난은 어디서 오는가

이정수. 평범한 가장이자 성실한 시민인 그가 어느 날 터널에 갇혀 고립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네 살 된 딸 수진의 생일을 위해 케익과 인형을 싣고 귀가하는 중이었다. 터널이 무너지자 안온했던 일상은 한순간에 큰 돌덜이와 모래더미 속에 파묻히고 만다. 하지만 그의 고립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커다란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의 '사건'(『변신』)과는 다르다. 분명한 인과관계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재난은 어디서 오는가. 아내 미진은 다음과 같이 외친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부실 공사를 한 시공사의 책임이고 그걸 방관하며 나 몰라라 한 사업소와 공사대금을 빼돌려 탐욕을 채운 누군가의 책임이지. (···중략···) 빨리 당신이 나와서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아버린 사람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했으면 좋겠어. 그들이 아무리 우리보다 강한 힘이 있고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싸워서 그들의 잘못을 벌 받게 만들 거야. (152쪽)

짐작하다시피 그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 책임을 따지려면 부실 공사를 한 시공사와 이를 방관·방조한 사업소와 공사대금을 사적으로 횡령한 윗선에 물어야 한다(덧붙인다면, 안전불감증이 만연한 한국사회 정도가 될 것이다.). 재난서사의 '재난'은 이처럼 홍수쓰나미로만 오지 않고, 많은 경우 사회적 모순에 해당하는 '위험'요소로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것은 경고한다. 우리로 하여금 사회에 드리워진 어둠의 포스를 직시하도록 한다. 그렇게 익숙한 일상의 '실제' 질서를 거울관계로 반영함으로써 스스로 하나의 타자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터널』 역시 마찬가지이다. 『터널』은 특히 30여 일에 걸친 주인공의 절대적 고립을 통해 사회적 현 문제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문제의식을 표방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을 아우른다. 하나는 이정수의 고립에 얽혀 있는 사회적 원인이 우리사회의 오래된 병폐를 환기한다는 점이다. 『터널』은 딸의 생일선물이었던 인형이 그의 베개가 되고 케익이 생명연장을 위한 절박한 식량이 되는 급작스러운 전환을 통해, 사회의 감춰진 환부를 스스로 현상하도록 한다. 또 언제 어디서 무너져 내리고 휩쓸릴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오늘은 무사했다 해도 내일의 대상은 누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사회적 안전핀이 제대로 장착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현대인들은 불특정의 심각한 위기에 이처럼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그 어떤 것도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은 개인에게 항구적인 불안과 위기감을 초래한다. 하지만 더욱 문제적인 것은 그것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원인임에 반해,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개인에게 닥쳐온다는 사실이다. 『터널』은 개인의 측면에서 운 없는 제비를 뽑았다는 인식이 아니라 구조적 차원에서 상존하는 뿌리 깊은 불의와 부패를 문제 삼고 있다. 하지만 『터널』에 기입되어 있는 대재앙의 서사는 다음 측면에서 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손가락'의 공포

소재원 작가는 더 심각한 재난, 더 중요한 원인을 『터널』에 한 겹 더 설정해 놓는다. 이는 30일간 서서히 변화하는 사람들의 태도 및 여론의 추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나타난다. 이정수의 사건이 처음 보도되었을 때 사람들은 동정과 연민에 찬 시선으로 응원을 보내온다. 하지만 예상보다 구조작업이 길어지고 그로 인해 의도치 않은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자 사람들의 태도는 급격히 변화한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엔 그를 이미 죽은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엄연히 살아있되 유령이 되어 버린 존재, 그렇게 실재하는 좀비를 통해 작가는 『터널』의 보다 직접적인 주제를 표출하고 있다.

『터널』에서의 작가의 시선은 냉정하고 냉혹하다. 소재원은 군중심리에 의한 네티즌들의 무개념 냄비근성과 권력 편에 붙어 자극적 기사와 황색선전을 일삼는 언론여론몰이를 비판한다. 그렇다면 작품 속으로, 터널의 심부로 좀 더 들어가 보기로 하자. 이정수가 어떤 '강요'에 의해 죽음을 선택하고 김미진 역시 '마녀사냥'에 의한 제물이 될 때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가 '강요'하는가. 가족을 만나려는 일념하에 해골에 가까운 모습으로 31일을 버틴 그를 누가 왜 불더미 속으로 인도하는가. 그의 아내가 그 장본인이라면 우리는 다시 궁금해진다. 그녀는 왜 남편에게 자살을 강요해야 했나. 우리는 여기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명제를 만난다.

인명구조를 위한 터널통제 기간이 길어지자, 우회도로를 이용해 시내로 나가야했던 마을주민 중 사망사건이 발생한다. 고령화된 주민들이 제때 응급처치를 받지 못하게 되어 두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동정여론이 급격히 선회한다. 그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 상황(아마도 죽었을!)에서 수적으로 더 많은 생명이 위험에 처해졌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갈등을 둘러싸고 인터넷은 뜨겁게 달궈지고 댓글은 어지럽게 난무한다. 과연 어느 편이 옳은가. 누구를 살릴 것인가. 양편 모두 결과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악'을 제출하게 된 상황에서 선과 악의 경계는 어디인가.

작가의 시선은 보다 '공정'하다. 그는 최악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문제는 선택의 옳고 그름을 정당화하거나, 어느 한 편의 정의를 판결하는 데 있지 않다. 어느 쪽이건 그것은 반쪽의 '선'이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경을 또 다른 기회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최악의 진실은 다음과 같다. 이런 딜레마는 단지 '최초의 악'의 제공자, 즉 시공사·사업소·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쁜 윗선에게만 '선'이 될 뿐이다. 나쁜 권력은 여론의 관심이 돌려 책임을 무마하는 데 이를 이미 활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터널』에서 가장 문제적인 것은 이들에게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스스로 즐겨 빠져드는 어떤 우매한 쾌락에 있다. 익명의 군중들은 한 줌의 동물적 쾌락, 배설욕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맡긴다. 그들은 더 이상 '고독한 군중'이 아니다. 이들의 '연대'는 막강한 파워를 낳는다. 이들에게는 폭력에 의하지 않고서도 사람을 죽일 수 있고, 거짓을 진실로 바꿀 수 있는 엄청난 무기가 있다. "사람들이 가장 즐겨하는 비난놀이"(164쪽)는 바로 당신의 손가락 끝에서 이루어진다. 각종 포털은 책임지지 않을 비방과 욕설을 연로로 삼아 매일 새롭게 갱신한다. 먹잇감은 끝없이 업데이트되기에 컴퓨터 앞에 앉은 당신은 배설의 욕구를 은밀히 부려놓은 후 다시 '생각하는 동물'로 되돌아오면 된다.

당사자들이 아닌 누군가에게는 그저 재미있는 연재소설과 같았다. 즉석으로 자신의 의견을 달 수 있는, 내용에 욕설을 퍼부으며 통쾌함과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실시간 소설. (169쪽)

이때 당신은 우리시대의 새로운 '정의'가 탄생하는 장면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에 의해 옳으면 그것이 곧 정의로 옹립되는 현실 말이다. 실제현실에서 '타진요'사건이나 악성댓글에 의해 목숨을 끊는 연예인들의 예가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뭉치면 '바보'가 되고 자신의 이름을 내려놓으면 '늑대'로 강등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터널』에서 이 질문은 중요하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주체성의 획득을 위해 끊임없이 타자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될 수밖에 없는, '보여지는 나'를 상정함으로써 객체화될 수밖에 없는 주제의 피곤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터넷 제국에서 주체는 더 이상 피곤해 '하지 않는다'. 『터널』에서 보듯, 그곳은 타자의 시선을 무장해제할 수 있는 주체의 단독무대가 된다. 이 무대에서 인간은 원초적으로 지니고 있는 공격성과 상호 적개심을 십분 드러낸다.(프로이트에 의하면 본능적 열정은 이성적 이익보다 더 강하다.) '김미진'은 그렇게 해서 우리시대의 새로운 '마녀'가 된 것이다.
면죄부는 그 어디에도 없다.

『터널』에 의하면 '나는 타인의 지옥이다'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정수가 죽음에 이른 후 김미진이 다시 새로운 '사투'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이들의 비극적 결말은 전혀 과장되거나 작위적이지 않다. 『터널』에 등장하는 또 다른 중심인물인 '전문가'와 기자·형사의 대결구도 역시 팽팽한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시키는 한 요소이다. 언론과 법의 지배에 맞서, 권력의 횡포에 맞서, 전문가는 끝까지 타협을 거부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작가 소재원이 『터널』을 쓴 궁극적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터널』은 신랄하다. 그리고 아프다. 소재원은 우리시대의 새로운 비극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작가의 의도는 분명하다. 당신-우리들의 "더러운 욕망" 때문에 발생한 "사회적 타살"의 직접적 진단만큼이나, 『터널』을 읽고 나면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먹먹해진다. Save our souls! 면죄부는 그러나 그 어디서도 찾을 길이 없어보인다. 그리하여 당신-우리들은 회심(回心)을 준비해야 할 시간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6. 추천사

소설 마지막 페이지에 추천사가 있다.
  • 조병옥(영화감독)[3]
작품을 읽고 소재원 작가와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나의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 즉 우리의 이야기.
숨겨진 사람의 깊숙한 내면을 본질적으로 파헤친 이 소설을 바라보며 나는 스스로의 죄를 속죄해야만 했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4] 젊은 청년의 글에 내 고개가 절로 숙여지며 소주잔을 나누고픈 이 마음은 오직 작품때문이었다.
소설가 소재원...
그와 진심으로 잔을 나누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밤새 나누고 싶다.
진한 여운, 진한 감동, 그로는 부족하다. 나는 감히 완벽이라는 표현을 이 작품에 선물하고 싶다.
시간이란 짧고도 긴 여운을 준다.
이 말을 소재원 작가님의 소설 앞에다가 붙여주고 싶다.
작가님의 소설을 읽는 동안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모든 감정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짠한 감동을 안겨주는가 싶더니 눈물을 자극하고, 펑펑 울리나 싶더니 분노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 작품.
또 분노를 참을 수 없을 즈음, 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모든 상황이라는 사실에 죄의식을 만들고 그 죄의식은 바로 우리의 집단적 본능이라는 소설 속 이야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 작품을 내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터널의 내용은 한국에서뿐만이 아니라 10억 인구의 중국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전 세계적 문제이자 숨겨진 진리일 것이다.
마지막 장을 넘기며 두려워졌다.
이 소설, 정말 모든 감정을 뒤집어 놓는 굉장한 소설이다.

7. 미디어 믹스

7.1.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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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원 작가의 다른 작품들 처럼 터널 역시 영화로 만들어졌다. 터널(영화) 참고. 김성훈 감독이 영화화했으며 하정우[6], 오달수, 배두나 주연의 작품이다. 2016년 8월 개봉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는 소설과 비슷한 전개를 따라가지만, 내용이 다른 부분도 상당히 많다.


[1] 이 소설의 결말을 알면 출판사에서 왜 이런 반응이 보이면서 허락을 해주지 않았는지 이해가 된다. 심지어 소재원의 SNS에 따르면 한 영화제작자에겐 '라면받침으로 쓰면 좋을 작품'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출판사에서는 '그냥 작가말고 딴 일 찾는게 어떻겠냐'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고.[2] 책 서두 참고.[3] 개들의 전쟁의 감독,각본을 맡았다.[4] 소재원1983년생으로 소설이 출판된 2013년에는 세는나이로 31살이었다.[5]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중국 출신의 방송인이다. 2005년에 KBS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한 이후 알려졌다.[6] 재밌게도 하정우는 소재원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을 영화화한 비스티 보이즈에도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