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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1847-1849), 황제(1849-1859) °°: 아이티 대통령은 임기가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 ||||
제국 · 왕국 | }}}}}}}}}}}} |
<colbgcolor=#262A9A><colcolor=#fff> | |||
출생 | 1907년 4월 14일 | ||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 |||
사망 | 1971년 4월 21일 (향년 64세) | ||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 |||
재임기간 | 제34대 대통령 | ||
1957년 10월 22일 ~ 1971년 4월 2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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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당적 | |||
학력 | 아이티 국립대학교(의학) | ||
종교 | 가톨릭 → 부두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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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티에서 세 번째로 오랫동안 집권한[1] 대통령이자 독재자, 의사, 문화인류학자. 통칭 파파 독(Papa Doc)으로 불렸다.
집권 기간 동안 수많은 야권 인사들을 탄압하며 3만 ~ 6만 명[2]에 달하는 국민들을 학살한 것은 물론 부두교를 이용해 아이티를 사실상의 제정일치 사회로 만들었으며 집권 하에 부정부패까지 만연해 안 그래도 사정이 좋지 않았던 아이티의 경제를 망쳐 놓는 등의 악행을 저질러 오늘날의 아이티를 최빈국으로 만든 원흉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2.1. 집권 이전
1907년 4월 21일에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있는 대통령궁 근처에서 흑인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4년 아이티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발리에는 지방에서 의료 봉사에 종사하였고, 그 사이에 1년간 미국의 미시간 대학교에서 공공의료에 관한 공부를 하였다. 1938년경부터는 부두교 신앙과 관련 자료들을 연구하면서 수많은 민족학적 논문 및 서적을 발표하면서 소위 네그리튀드라고 알려진 아프리카 흑인 전통을 찬미하는 문화 운동의 큰 주축으로 거듭나게 된다. 1939년에는 간호조무사였던 시몬 오비드(Simone Ovide, 1913?~1997)와 결혼해 딸 3명과 아들 1명을 낳는다.독재자로써 정말 악명이 높은 인물이지만, 집권 이전에는 장기려 박사나 슈바이처와 비견되던 위인으로 간주되었다. 1943년부터 뒤발리에는 미국의 도움으로 열대성 피부병 요(ywas)의 확산을 억제하기 위해 예방 접종을 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며 빈곤층에 발진티푸스와 딸기종, 말라리아와 같은 전염병이 확산되는 것을 예방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고 그의 이런 헌신적인 활동 덕분에 뒤발리에는 사람들로부터 파파 독(Papa Doc)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Papa Doc은 Papa Doctor, 즉 아버지 의사선생님이란 뜻이다. 당시 '파파 독'은 자신의 가난한 가족들에게 집을 사주는 것조차 까먹을 정도로 뒤발리에는 환자들을 위해서만 살았으며 그 결과 '파파 독'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비'라는 의미와 같은 뜻으로까지 여겨졌을 정도로 의사 시절 뒤발리에는 만민의 존경을 받았다.[3] 이런 배경을 가지고 뒤발리에는 1946년부터 국립보건원 국장으로 임명된 후 1949년부터는 보건부장관과 노동부장관을 역임하다가 1950년에 육군 대령 폴 마글루아르(Paul Magloire, 1907~2001)의 쿠데타에 반발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의사 생활을 재개하다가 1954년부터 마글루아르가 물러난 1956년까지는 시골에서 은신했다.
당시 아이티 사회는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 서민 계층과 소수파로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물라토 엘리트층과의 비롯된 대립에서 혼란한 와중으로 군부 쿠데타에 의한 정부 붕괴가 잇따랐는데 마글루아르가 1956년 12월 12일에 물러난 후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무려 4명의 지도자가 난립했을 정도였다. 이에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1957년에 '기아와 빈곤, 문맹과 불공정을 퇴치하겠다'는 선거 공약을 내세우며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물라토 엘리트층에 대항하는 흑인주의를 주장하면서 특히 흑인층의 지지를 얻었고, 결국 1957년 9월 22일에 72% 이상의 득표율로 아이티 대통령에 당선되었고[4][5], 1개월 후인 1957년 10월 22일에 뒤발리에는 아이티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6]
2.2. 독재자로서의 행각
대통령에 취임한 후 뒤발리에는 초기에는 억압되던 부두교의 전통성을 인정하고 국민복지를 펼치는 정책을 펼치며 물라토 엘리트들이 독점하고 있던 공직 및 요직을 흑인에게 개방하는 등의 나름 현명한 정책을 보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권력의 맛에 점차 중독되면서 날이 갈수록 추악한 독재정치를 펼쳤으며 아이티군의 지도자들을 실각시키면서 점차 군대를 분열시켰다.후술하듯 뒤발리에의 학정은 호르헤 비델라 외에는 적수가 전혀 없을 정도로 중앙아메리카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었음은 물론, 무려 북한과 이디 아민 치하 우간다에 비견될 정도로 인류 역사의 어떠한 국가들을 들고 와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의외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뒤발리에는 집권 초반에도 몰래 잔인한 처벌 집행을 자행했으며 간간히 독선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 시기에 뒤발리에의 비밀경찰들은 선거 몇 주 뒤에 정적들과 관련있어 보이는 집안의 11살 소년들을 비밀리에 덤불로 끌고 가 나무 몽둥이로 구타하거나 일가족을 모두 구금하는 등 냉혹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취임 1년 정도 되는 1958년 7월 28~29일에는 3명의 추방된 아이티의 육군 장교들이 미국인 용병 5명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는 쿠데타 참여자들을 모두 사살한 후 고위급 장성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육군사관학교를 폐교시킨 후 추가 쿠데타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군의 무기와 장비를 대통령궁으로 옮겼다.[7]
이 쿠데타는 뒤발리에에게 오히러 축복이 되었는데, 쿠데타 진압 1주일 후 뒤발리에는 "나는 아이티를 정복했다. 그리고 권력을 쟁취했다. 내가 새로운 아이티다. 나를 파괴하려 하는 자들은 아이티를 파괴하려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티는 나를 통해서 숨을 쉬며 나는 아이티를 통해서 존재한다. 신과 운명은 나를 선택했다."라는 대국민 연설을 남기고 헌법의 일부 조항을 정지시킨 후 '국가 안보' 유지를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전권을 본인에게 부여했다. 이렇게 쿠데타 이후 1년 만에 무려 300명이 뒤발리에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1959년 5월 24일에 뒤발리에는 인슐린 과다복용으로 심장마비에 걸려 9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뒤발리에의 주치의는 이 심장마비로 뒤발리에가 신경에 손상을 입어 정신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후술할 기행과 악행들을 저지른 것으로 보았다.[8] 안 그래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뒤발리에는 자기가 몸져누웠을 당시 권한대행이던 클레망 바르보(Clement Barbot, 1914~1963)[9]가 자기의 권력을 찬탈하려 암살을 시도했을 거라 믿어서 1960년 7월 14일에 바르보를 정적으로 간주하고 체포하여 감금했다. 이 무렵에도 뒤발리에에 대한 원한이 주변에 점점 퍼져 있었는지 뒤발리에의 아버지의 묘소가 훼손되고 유골이 흩뿌려지는 적까지 있었다고 한다.
1961년 4월 30일에 아이티에서는 인류 선거사에 영원히 남을 해괴한 선거가 펼쳐졌다. 당시에 임기가 2년이나 남아 있었던 뒤발리에는 재선이 금지되던 헌법 조항을 어기고 대통령 선거에 야당의 경쟁자 하나 없이 유일한 후보로 나가 1,320,748명 투표, 1,320,748명 찬성, 즉 찬성 100%라는 경이적인 득표결과 집계를 하여 100% 찬성이라는 엽기적인 기록을 세웠다.[10] 당연하지만 뉴욕 타임즈는 이 선거에 대해 "라틴 아메리카에는 역사상 수많은 부정선거가 있었지만 이 선거만큼이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은 없었다"라고 비판했다. 당시 기사 거기에 통통 마쿠트는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강제로 투표소로 끌고 가거나 7살 아이에게도 투표를 강요하고는 이를 '자발적인 찬성 표시'라고 사실을 완전히 왜곡했다.
뒤발리에는 이 황당한 선거를 '국민들이 뒤발리에를 그에게 권력을 부여한 하느님처럼 아주 오래 통치하기를 바라는 마음'의 징표로 받아들이고는 "나는 인민의 뜻을 받아들인다. 나는 혁명가로서 인민의 뜻을 무시할 권리가 없다"는 선언을 했으며, 동년 5월 22일에 있던 취임식을 위해 통통 마쿠트는 대형 트럭에 5만 명의 국민들을 사실상 압송한 후 이동하는 하루 동안 음식도 전혀 주지 않으며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고 한다. 5만 명이 참석한 취임식에서 뒤발리에는 '여러분이 곧 나이며 내가 곧 여러분이다'라고 선언했다.
상술한 악연 때문에 뒤발리에에 원한을 품게 된 바르보는 1963년 초에 석방된 후[11] 동년 4월 26일에 대통령 차량을 타고 등교하는 뒤발리에의 자식 2명(장클로드와 시몬)을 유괴하고 뒤발리에를 직접 실각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유괴 계획이 들통나 실패하고 통통 마쿠트에게 추격당하던 상황이었다. 뒤발리에는 이 유괴 사건의 범인이 바르보가 아닌, 전직 중위 겸 명사수이던 데다가 이 사건을 '뒤발리에의 자작극일 것이다'라고 주장했던 프랑수아 브누아(François Benoit)일 거라고 믿었고, 뒤발리에의 마음을 알아챈 브누아가 탈출하자[12] 대통령의 명을 받든 통통 마쿠트는 그 대신 브누아의 집에 찾아가 그의 부모를 살해한 후 7개월 된 아들과 그 아기의 유모, 다른 가사 노동자가 집에 있는데도 집에 불을 지르고는 이 계획에 가담한 것으로 의심되는 군 장교들과 그들의 가족들(어린이 포함), 그들의 가사 노동자들, 단순히 그들과 같이 있던 사람들까지 닥치는 대로 사살했고, 심지어 브누아 아르망(Benoît Armand)라는 이름의 애꿎은 변호사마저 이름이 '브누아'라는 이유만으로 살해했다. 이 하루 동안 죽거나 '실종'된 사람들은 확인된 사람만 무려 73명에 달한다. 당시 사망자 명단과 정보
이후 바르보가 진범이란 것을 알게 된 뒤발리에는 바르보가 검은 개로 변신해 잡히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경찰에게 포르토프랭스에 있는 모든 검은 개를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바르보는 그로부터 얼마 안 지난 1963년 7월 14일에 통통 마쿠트한테 검은 개가 아닌 사람의 모습을 한 채로 동생과 함께 기관총으로 즉결 처분된 후 신문에 시신이 실리게 된다. 그리고 뒤발리에는 동년 여름에 망명한 반대파들의 잠입 시도가 적발되자 아예 아이티의 모든 시민권을 6개월 동안 정지시켰으며,[13] 동년 9월 17일에는 공식적으로 여당인 국가혁명당 1당만 허용되고 야당은 모두 금지되는 일당제 국가를 선포했다.
1964년 6월 14일에 있던 종신 대통령제 찬성 투표는 1961년 대통령 선거와 맞먹는 황당선거였는데, 찬성표가 99.9%가 나왔다길래 확인해봤더니 각 사람이 투표할 수 있는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은 것을 넘어서 모든 투표용지에 미리 찬성표에 표시를 한 상태였다고 한다.[14] 이 선거에서 찬성표 VS 반대표는 '280만 VS 3234'였으며 나머지 1%에 해당하던 3234명의 최후는 어땠을지 상상에 맡긴다.[15]
8일 뒤인 6월 22일에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 뒤발리에는 1시간이나(!) 지각을 해 놓고 1시간 30분이나 연설을 했는데, 뒤발리에가 오기 전부터 모두 서 있어야만 했던 청중들 중 한 독일인 외교관이 지쳐서 의자에 앉자 뒤발리에는 연설을 중단하고는 의전 담당관에게 그 외교관을 다시 일어나게 하라고 지시하는 군기잡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렇게 뒤발리에는 죽을 때까지 대통령으로 집권하게 된다.
뒤발리에가 종신 대통령이 된 후 아이티의 국기는 위와 같이 변경되었고[16][17] 공공 장소와 학교는 물론, 거리에도 뒤발리에의 초상화가 전시되었다. 그리고 1965년경에는 국가의 전체 재원의 65%를 '국가 안보'에 할애하게 되었으며[18] 뒤발리에는 공식 직함인 대통령에서 한 단계 넘어 스스로를 '군주'라고 자칭하며 황금색과 파란색이 섞인 '왕좌'에 앉은 채 국민들의 생살여탈권부터 '크레올'이라는 단어에 들어갈 철자까지 모든 것을 결정했다.
물론 뒤발리에는 모든 결정에 관여하면서도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그의 참모들은 구체적인 권한도 명시되지 않은 공식 직함을 몇 개씩 맡으면서 행정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며[19] 한 미국인 참모는 뒤발리에가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조종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소비한다'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뒤발리에는 대통령궁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고 전국을 순회한 적도 한 번도 없었으며, 1년에 몇 차례 통통 마쿠트의 주도로 군중들을 동원해 자신을 찬양케 하는 것 외에는 공개석상에 나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가 집권할 동안 아이티는 프랑크 디쾨터의 말처럼 군부도, 당파도, 파벌도, 이름뿐이 아닌 진짜 정당도 없고, 오직 뒤발리에에 대한 충성심에 대한 경쟁으로 서로의 자리를 빼앗고자 하는 부하들만 존재했다.
2.2.1. 친위대 통통 마쿠트
철모를 쓰고 있는 정규군 군인과 군모를 착용한 통통 마쿠트 단원의 모습. 좌측의 행상인 여성의 경멸과 공포를 내포한 표정은 이들의 악명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준다. |
뒤발리에는 쿠데타 시도 진압 직후인 1958년 7월 30일에 검은 셔츠단에서 영감을 받아 사설 비밀경찰 조직이자 친위대로 쓰기 위해 무장단체를 새로 조직했는데 이는 공식적으로는 국가보안의용민병대(Milice de Volontaires de la Sécurité Nationale-Militia of National Security Volunteers- MVSN)라고 불렸다. 뒤발리에는 MSVN의 모든 대원을 자신이 직접 등록했다.
그러나 MVSN은 당시 아이티 사람들이 불렀던 별칭인 '통통 마쿠트(Tonton Macoutes)'[20]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했다. '통통 마쿠트'는 이 단어와 유사한 망태기 할아버지나 유럽의 크램푸스처럼 아이티의 신화에서 버릇없는 아이들을 잡아가서 응징하는 '삼베자루 아저씨 통통 마쿠트(Tonton Macoute-Uncle Gunnysack)'와 유사한 발음에서 유래했다.
통통 마쿠트는 다소 별나고 친근한 이름과는 달리 서슬퍼런 아이티의 뒤발리에 독재 시기를 대표하는 공권력들이자 독재정부의 오른팔들이었으며 국가나 헌법은 뒤로 하고 오로지 지도자인 뒤발리에 개인의 명령에 충성하는 사설 용병집단이나 마찬가지였다. 뒤발리에 정부는 이들을 적극 증원하여 창설 2년 만인 1961년 기준으로 당시 군의 약 2배에 달하는 대규모 조직으로 성장했는데, 총 대원 수는 9천~1만 5천 명 정도라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고, 파시즘권의 게슈타포와 친위대 또는 공산권의 비밀경찰들과 홍위병 포지션이었으며 이들에 비견하고도 남을 정도로 잔인하고 냉혹했다.
뒤발리에는 통통 마쿠트로 하여금 사회를 감시하게 하면서 그를 비판하는 국민을 체포하고 처형했는데 이런 행위 때문에 견디지 못한 많은 지식인이나 기술자들이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그 비밀조직이 활동하면서 프랑수와 뒤발리에를 비난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은 뒤발리에의 정적을 지지했던 극빈층 여성으로부터 협박에 응하기를 거부한 사업가까지 참으로 다양했으며, 심지어 살해된 사람들의 시신을 옮기려 하던 실종자들의 가족들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한낮에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통통 마쿠트로부터 테러를 당한 반정부 세력도 있었으며 통통 마쿠트 단원은 종종 무작위로 가족을 선택해 나체로 거리를 걸어가게 한 뒤 총살했고 반정부 인사들을 참수하거나 불태워 죽이거나 돌로 쳐죽이는 것을 넘어 산 채로 사지를 절단하거나 피부를 벗겨내기도 했다. 게다가 뒤발리에게 반대하는 사람이 여자라면 그 집에 난입해 무자비하게 강간한 다음 알몸으로 길가에 내버려두기도 했으며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잔인하게 처형된 시체들을 나무에 거는 등 공공장소에 대놓고 전시하기도 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남자들이 흥분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먼저 처형될 사람의 아내와 자식들부터 죽이거나 어머니 품에 안긴 아이들마저 그대로 난도질해 죽이는(!) 극악무도한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1964년 8월 6일 뒤발리에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스스로를 '젊은 아이티(Jeune Haiti)'라고 부른 13명의 아이티인 청년[21]들이 아이티 남동쪽의 제레미(Jérémie) 마을에 상륙하고는 11월 12일에 마지막 남은 2명이 체포되고 모두 현장에서 살해되거나 포르토프랭스의 공공묘지 앞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될 때까지 뒤발리에 정권에 맞서 싸웠는데, 뒤발리에는 통통 마쿠트로 하여금 이들의 가족들에게 보복하도록 명령하여 '젊은 아이티' 멤버 중 3명의 가족들 전원, 합해서 27명을 몰살했다. 이렇게 살해된 사람들은 부모, 배우자, 형제자매, 자식들에 달했으며 통통 마쿠트는 4살짜리 아이를 살해하기 전에 가족들 앞에서 고문을 가하기도 했고, 심지어 이 학살의 사망자 중에는 2살짜리 아기와 85세의 할머니도 있었다. 이들은 '저녁' 소풍을 많이 갔던 가족들이었기에 이 학살은 제레미 베스퍼스(Jérémie Vespers)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 뒤발리에는 '젊은 아이티' 11명을 체포하고는 1964년 11월 12일 공개처형하게 했는데 뒤발리에는 이 처형 광경을 공무원들과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의 모든 학생들에게 지켜볼 것을 강요했고 이 처형을 TV와 라디오로 생중계했으며 처형된 시체는 썩어들어갈 때까지 며칠간 공개적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
이런 무자비한 테러에 아이티 국민들은 밀짚모자와 푸른 셔츠에 선글라스 차림으로 마체테와 권총으로 무장한 통통 마쿠트 대원을 무서워했고 통통 마쿠트 대원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갖은 행패를 부리고 국민들의 재산을 마음대로 빼앗았다. 뒤발리에는 농민들의 토지를 몰수한 후 통통 마쿠트에게 할당했는데 안그래도 공식적으로 무급 상태였던 통통 마쿠트는 자국민의 재산을 자기 재산인 양 대놓고 강탈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게 되어 당대에도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이던 아이티의 국민들의 삶은 더더욱 비참해졌다.
통통 마쿠트의 중요 지도자들 가운데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심취한 부두교의 지도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부두교의 흔적이 깊게 남아있다. 이 부두교적 요소는 토착종교에 심취해 있던 대중들에게 깊은 공포를 심어 주었고 그들이 대중을 제압할 때 이데올로기로 쓴 공포의 대부분은 부두교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던 것이라고 한다.
통통 마쿠트가 자행한 감시와 폭력 때문에 국민들이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뒤발리에 정권이 몰락하자 시민들에게 피의 복수를 당했다. 이때 죽어나가는 통통 마쿠트 대원들이 흔했을 정도였다. 그 예시로 장클로드 뒤발리에의 실각 다음날의 시위에서는 10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이 사건의 대부분은 민중들이 통통 마쿠트 요원들을 사적제재 차원으로 살해한 건들이었다. 시민들은 통통 마쿠트의 집을 파괴하고는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까지 몰살하여 복수를 자행했고, 부두교 사제들과 여사제들 50여명이 뒤발리에 일가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살해당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길바닥에서 산 채로 불속에 넣어져 화형당한 다음 구워진 통통 마쿠트 대원의 시신의 살점이 성난 시민들에게 문자 그대로 인육으로 먹힌 사례까지 있었다. 통통 마쿠트가 얼마나 아이티인들의 증오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사례. 이 복수극 장면은 당시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비롯한 세계 언론들에 소개되었고, 한국의 잡지 지오에도 실린 바 있다.
이렇게 아이티 국민들은 통통마쿠트의 씨를 말리고 독재 잔재를 청산할 것 같이 보였으나 후술할 대로 결국 실패하고 만다.
2.2.2. 잔혹한 정적 탄압
뒤발리에의 정적들과 허락 없이 아이티를 탈출하려다 붙잡힌 사람들은 포르토프랭스에 있는 '포르 디망슈(Fort Dimanche)'라는 감옥에 재판도 없이 구금되어 좁고[22] 비위생적인 감방에서 가족과 변호사와의 면회가 금지된 것은 물론, 하루에 300kcal 미만의 음식을 공급받은 것도 모자라 물도 1주일에 한 번씩만 호스로 받아가며 연명해야 했다[23].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에게 무자비한 구타, 강간, 전기고문, 담뱃불로 지지기, 신체절단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수감 공간을 늘린다며 수감자들의 팔다리를 옆으로 얽거나 거세까지 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가혹행위와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수감자가 죽으면 감방에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감옥 밖의 공동묘지에 버려졌으며, 뒤발리에 부자가 집권할 동안 이 감옥에 수감된 사람 중 약 3천 명이 고문, 탈수, 영양실조, 감염 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4] 참고자료[25]게다가 디망슈에서 살아남은 수감자들도 이곳에서 대채적으로 6~7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만 했으며, 뒤발리에는 대중들에게 '국가의 적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오랜 수감생활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망가진 정치범들을 석방하여 그 참혹한 모습을 공개적으로 보여주거나 아예 수감자의 시신을 공개적으로 전시하기도 했다. 물론 수감자의 가족들이 수감자들을 면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26] 이렇듯 고문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고문실에 묻은 피들을 가리기 위해 고문실의 벽을 갈색으로 칠해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반공주의자였던 뒤발리에는[27] 냉전 분위기와 쿠바 혁명을 인용해가고 그의 정적과 반정부 인사들을 '쿠바와 모스크바의 비밀 첩보원'들이라고 주장하며 공산진영의 위협을 과장한 것은 물론[28] 자신의 학정을 '아이티 내부의 빨갱이를 소탕한 정책'이라며 정당화했다. 뒤발리에는 1969년 3월에 2개의 망명 정당이 연합한 '아이티 공산주의자 연합당'이 아이티에 상륙하고는 부두교 사제가 없는 유일한 마을에서 뒤발리에 시기 아이티의 국기를 끌어내리자 이를 명분으로 수십 명을 공개적으로 총살, 교수형하게 했다.
그런 다음 뒤발리에는 1969년 4월 28일부터 아이티에서 모든 공산주의자를 제거해야 한다며 "공산주의 활동은 그 형태에 관계없이 국가의 안보에 반하는 범죄로 선언된다"는 법을 발표했는데, 이에 따라 공산당에서 활동했거나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퍼뜨렸거나 그렇게 고발된 사람을 돕거나 숨겨줬다고 판단되어 기소된 사람들은 군사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은 후 사형되고 재산이 몰수당하게 되었으며, 공산주의와 관련된 책들을 보유한 사람들 역시 사형에 처해졌다. 물론 이 법에서는 시민이 공산주의로 기소될 수 있는 기준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으며, 이 법에 의거하여 공산주의자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진짜 공산주의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법 선포 직후인 1969년 5월 3일에는 경찰이 포르토프랭스의 한 집을 포위한 후 집에 총격을 가해 35명의 '공산주의자'를 죽이고 4명을 생포하기도 했다. #
게다가 "국민들을 가짜 뉴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핑계로 언론을 극심히 탄압해 언론인들이 '폭동 교사' 혐의로 구속되거나 라디오 방송국이 연이어 폭파당하기까지 했으며, 10대 소년 6명이 벽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뒤발리에를 타도하자'는 문구를 썼다는 이유로 모두 재판도 없이 처형된 후 모든 청년 단체 가입은 사형에 처해지는 중범죄가 되었다.
한편 뒤발리에의 6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던 1967년에는 대통령궁 근처에서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던 손수레에서 폭탄이 터져 2명이 죽고 9명이 다치자 뒤발리에는 쿠데타를 의심하며 군 지도부를 숙청한 것은 물론이고 대통령궁 경비원 19명[29]을 포르 디망슈 감옥에 가둔 후 사살하라고 손수 명령을 내렸고, 뒤발리에는 이들을 삭발하게 하고는 수갑을 채운 채 맨발로 공개적으로 포르토프랭스를 돌아다니게 한 후 군법회의에 회부하게 하고는 6월 8일 오후 1시경에 군복과 군용 헬멧을 갖춘 채 퍼트 디망쉬에 와서 사격장 말뚝에 묶인 그들의 사형을 직접 주재한 후[30] 2주 뒤인 6월 22일에 전국적으로 열린 뒤발리에의 종신 대통령 당선 3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대통령궁에서 수천 명의 군중들을 동원해 한 연설에서 처형된 사관들이 있는 명단을 이름 사이사이에 과장되게 뜸을 들이면서 '결석'이란 말을 계속하며 부른 뒤, "그들은 모두 총살되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물론 이 연설을 들은 대중들은 충격에 빠졌고, 뒤발리에는 이후 "나는 단호하게 내리치는 강철 같은 팔을 가졌다."라는 말을 남기며 경호원들을 처형한 것이 혁명과 그 혁명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정당화했고, "나는 케말 아타튀르크, 블라디미르 레닌, 콰메 은크루마, 파트리스 루뭄바, 은남디 아지키웨, 마오쩌둥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이며 아이티의 화신이다."라고 주장했다. 몇 달 후 뒤발리에는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자신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장교들을 쓸모없이 희생시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이 사건에 대해 뒤발리에가 군인들과 국민들이 자신에 대해 더 강하게 복종하게 하기 위해 꾸민 사건이라고 보고 있다. '6월 8일 사건'에 대한 상세한 정리글
이렇게 뒤발리에는 정신이상을 감안하더라도 의사 시절의 인격적인 면모는 완전히 사라진 가학적인 폭군이 되었다. 뒤발리에는 저녁 식사 후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 벽이 핏빛으로 칠해진 대통령궁의 지하 감옥에 내려가 고문실 벽의 구멍으로 고문 광경을 엿보거나 아예 직접 고문실로 찾아가 피해자들이 고문당하고 황산 욕조에 담기는 것을 확인하고는 흐뭇해했다고 하며, 이도 모자라 10대밖에 안 된 아들 장클로드에게 이 끔찍한 모습을 자기랑 함께 볼 것을 강요하기까지 했고, 심지어는 이디 아민처럼 옷장에 그를 몰아내려 했던 정적들의 목을 보관하거나, 죽은 사람의 영혼과 대화하려는 목적으로 처형된 반군의 머리를 얼음에 넣은 후 가져왔다고 한다. 게다가 뒤발리에의 옛 동료들의 증언에 의하면 뒤발리에는 살아 있는 사람을 손수 땅에 묻어 죽이기도 했으며, 심지어 부두교 신자들에게 나를 위해 그대들의 아기들을 제물로 바쳐라라는 극악무도한 명령까지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거기에 종신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지 고작 2일 뒤인 1964년 6월 24일 도미니카 공화국에 기반을 둔 15명 규모의 반뒤발리에주의 게릴라 집단 아이티 혁명군(FARH)이 아이티의 남동부 지역을 급습하자 통통 마쿠트와 아이티군은 아이티 남동부의 마을을 돌면서 이들을 돕거나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의심되는 약 600명을 남성, 여성, 어린이, 노인, 심지어 유아까지 가리지 않고 살해했고, 이 학살로 완전히 씨가 말려진 가족들도 흔했다. 그나마 이들 중 9살짜리 아이 1명은 겨우 탈출했지만, 나중에 발견되어 아이티 대통령궁으로 옮겨진 후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이 아이를 직접 죽였다고 한다.[31] 이쯤이면 과장 안 보태고 식인 루머가 돌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지경.
뒤발리에 시기를 포함한 아이티 역사상 있던 민간인 학살 모음
2.2.2.1. 뒤발리에의 최측근 3인방
뒤발리에 치하에서 반인륜 범죄의 주축을 담당한 3인방은 다음과 같으며, 모두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성을 보여준 것은 물론이고 생전에 어느 정도 만행의 대가를 제대로 치렀다.- 뤼크네 캉브론(Luckner Cambronne, 1930~2006) - 가난한 설교자의 아들로 태어나 국립은행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클레망 바르보가 축출된 1960년부터 1971년까지 통통 마쿠트의 2대 수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뒤발리에의 충성스러운 부하이자 프랑수아 뒤발리에 정권의 2인자로, 직접 고문과 살인에 가담했다는 증언은 없긴 했어도 통통 마쿠트의 모든 악행들을 총괄한, 누구보다도 잔인한 대장이였다. 그가 저지른 악행과 잔인함으로 인해 캉브론은 아이티 역사상 두 번째로 무서운 인물[32], 카리브의 흡혈귀(Vampire of the Caribbean)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는데, 사실 캉브론이 후자의 별명을 얻은 이유는 1971년부터 1972년까지 본인이 운영한 혈장 센터인 '헤모-캐리비안(Hemo-Caribbean)'을 통해 미국과 캐나다의 병원과 대학에 빈자들과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의 혈액과 시신을 정기적으로 공급했기 때문이었으며,[33] 물론 캉브론은 자신의 '산업'의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대규모로 살해했다. 참고로 그는 하원의원 연단에서 연설할 때 좋은 뒤발리에주의자는 (뒤발리에를 위해) 그들의 자녀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거나 (뒤발리에를 위해) 그들의 부모를 죽이는 어린이들입니다(Un bon duvaliériste est prêt à tuer ses enfants et les enfants à tuer leurs parents)라는, 패륜을 타당화하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캉브론은 뒤발리에의 1964년 헌법 개정과 종신 대통령직 수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고, 1963년부터 1967년까지 공공 사업, 교통 및 통신부 장관도 역임하며 인프라 개발을 명목으로 세운 '국가 재건을 위한 국영 운동(MRN)'이라는 유령기업에 부유층들과 외교관들이 선의로 모금한 돈과 공적 자금을 횡령하고 이 돈을 개인 사업을 위해 사용했는데,[34] 그렇게 횡령한 돈이 당시 가치로만 무려 1천만 달러에 육박했다고 한다.[35] 1971년에 프랑수아가 사망한 후 캉브론은 1년 6개월 동안 국방부 및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만 20살 정도밖에 안 된 어린 대통령의 종신 특별 고문으로 일하며 아이티의 실권자로 여겨졌던 만큼 총리직을 노려보기도 했으나, 프랑수아의 아들인 장클로드의 세습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1972년 12월에 프랑수아의 미망인인 '마마 독(Mama Doc)' 시몬[36]과 장클로드에 의해 추방되었고, 이후 미국의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로 망명하여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살았다.
미국에 망명할 초기에 캉브론은 제대로 죗값을 치르기는 커녕 마이애미의 부촌에 있는 집에서 살면서 매주 주말마다 개인 제트기에 위스키와 여성을 태우고는 라스베이거스나 산후안에 있는 카지노의 단골이 되는 등 초호화 생활을 누리고[37] 카페 사업체도 운영하기도 했으나, 그나마 다행히도 하판락과 딘코 사키치&나다 사키치 부부와는 달리 그렇게 누리던 생활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했다. 캉브론은 사업도 실패하고는 카지노 중독으로 돈이 고갈되어 아이티로 돌아갈 돈을 구한다는 구실로 장클로드 뒤발리에에게 돈을 빌리는 신세가 될 정도로 몰락하였고[38], 그렇게 빌린 약간의 돈으로 간소한 집을 산 후 아내 이나 캉브론(Ina Cambronne)와의 사이에서 딸 6명, 아들 2명, 많은 손주들, 심지어 증손주까지 보며 조용하고 평온한 여생을 보냈다.[39]
그러다가 캉브론은 말년의 3년 동안 신부전과 당뇨병 환자 신세가 되었는데, 그의 전 측근들의 말에 따르면 캉브론은 수술에 필요한 기구를 살 수 없어 일주일에 한 번씩 투석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며, 결국 캉브론은 2006년 9월 24일 오전 3시 30분에 플로리다에 있는 침례교 계열 병원에서 향년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반인륜적 체제 하에서 인권탄압에 가담한 사람의 대명사격으로 언급되고, 몰락하는 듯 보였어도 한동안 잘나가는 듯 싶었다가 처참히 몰락한 것을 감안하면 아이티판 노덕술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는 셈이다.
캉브론은 망명 생활을 할 때에도 자신이 '뒤발리에주의자'임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고, 장클로드가 축출된 후에도 장클로드가 아이티로 돌아오기를 소망한 것을 넘어 아이티의 모든 행사를 지켜보며 항상 자신이 언젠가는 아이티에서 다시 권세를 누릴 수 있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캉브론이 죽자 캉브론의 딸 중 한 명은 아버지의 만행들을 '잘못된 정보'라고 부인하며 "가정적인 남자로서 그는 정말 훌륭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캉브론의 친구 중 한 명도 "친구와 가족에 대한 그의 사랑은 깊습니다. 나는 그가 평화롭게 떠났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적어도 캉브론은 개인적으로는 친절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 막스 아돌프 부인(Madame Max Adolphe, 1925~2018) - 본명은 로잘리 보스케(Rosalie Bosquet)이며, '막스 아돌프'는 그녀의 남편이자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아이티의 공중보건부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원래 재봉사로 일하다가 여성 권리 운동을 하며 아이티 여성 운동 회장직을 역임했던 그녀는 1961년에는 아이티 최초의 여성 의원으로 공동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녀는 하급 장교로서 통통 마쿠트에 가입하는데, 그녀가 이때 본색을 드러냈는지는 몰라도 뒤발리에는 그녀의 '용기'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녀를 포트 디망슈 감옥의 소장 겸 통통 마쿠트의 여성 지부인 필레트 랄로(Fillettes Laleau)의 최고 책임자로 승진시켰다.[40] 이렇게 뒤발리에의 신임을 받은 그녀는 직접 '독창적인' 성적 고문을 설계할 정도로 교활한 인물이었으며, 직접 정치범들을 '폭력적으로' 심문하거나 남녀 가리지 않으며 수감자들을 손수 성고문하기도 했고,[41] 부하들이 구타하면서 울부짖고 몸부리치는 사람들을 지켜보거나 손수 수감자들을 고문하거나 살해하면서 '가학적인 기쁨'을 느끼기도 한 데다가 심지어는 어린이와 노인에 대한 고문을 총괄하거나 고문당하는 수감자들의 모습을 담은 녹화 자료들을 보관하기도 했다.
그녀는 '파파 독'의 사후에 포트 디망슈 감옥의 소장에서 해임당하고는[42] 1972년 5월까지 짧게 포르토프랭스의 시장을 역임하며 도시의 하수 처리 작업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 후에는 이렇다 할 행적을 보이지 않았고, 1986년 2월에 시민 봉기로 인해 폭도들에게 집을 약탈당한 후 잠깐 포로로 잡혔다가 수녀로 변장하고 미국으로 도피했다. 미국으로 도피한 그녀는 어떠한 소식도 전해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은둔 생활을 했기에 공식적으로는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으며, '1986년에 자살했다' '현재 아이티에서 멀쩡히 살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43]
이후 그녀의 근황은 망명 32년 뒤인 2018년에야 전해지게 되었는데,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녀는 2018년 11월 18일 향년 93세를 일기로 미국 조지아주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캉브론처럼 대규모로 거액을 축적했다는 말이 전혀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44] 미국에서 그동안 모은 돈으로 떵떵거리며 살았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며, 오히려 그녀가 사망한 조지아에서는 아이티계 미국인들이 만 단위로 살고 있는 판인 만큼[45] 미국에 망명한 막스 아돌프 부인은 과거의 행적이 교포들에게 드러나 보복당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30년 넘게 고개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숨어 살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46][47]
한편 그녀의 딸인 마갈리 아돌프 라신(Magalie Adolphe Racine)은 아이티에 거주하며 패션 및 모델링 산업과 관련된 기업을 경영하며 아이티에서 패션쇼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미셸 마르텔리(Michel Martelly, 1961~)[48] 아이티 대통령 부부의 고문 겸 의전 책임자로 활동했고, 2013~2014년에는 청소년, 스포츠 및 시민 행동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49].
- 뤽 데지르(Luc Désir, 1925~?) -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으며, 프랑수아 뒤발리에 치하부터 뒤발리에의 부하로 일해오다가 장클로드 뒤발리에 시기에는 아예 통통 마쿠트 수장을 역임한[50] 인물이었는데, 그 역시 잔혹한 인물이었다. 임신 6개월차의 임산부와 아이티의 전 대통령 뒤마르세 에스티메(Dumarsais Estimé, 1900~1953)[51]의 조카 2명을 고문해 죽인 적이 있는 데다가 큰 소리로 성경을 읽으며 부하들에게 고문을 명령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고문당하는 피해자들의 비명을 테이프로 녹음하고는 집에서 휴식을 취할 때 들었을 정도로 냉혹한 인물이었다. 성경이나 기독교를 학살의 합리화에 악용한 것으로 보면 아이티판 조지프 코니라고도 볼 수 있다.
데지르는 뒤발리에 정권이 몰락한 후인 1986년 2월 25일에 에어 프랑스 여객기를 타고 푸에르토리코로 도피하려고 했으나 데지르에 대한 원한이 워낙 사무쳤던 수천 명의 아이티인들이 공항으로 달려가 활주로를 짓밟고 비행기 창문을 부수며 '데지르를 태우는 것을 허용하면 항공기를 파괴하겠다'는 발언까지 하며 데지르의 도피를 막았고, 결국 비행기 조종사는 데지르를 태우지 않고 데지르는 군인의 보호를 받으며 공항을 떠났다. 그리고 민중들은 다음 날에 수영장까지 갖춘 데지르의 저택을 점거하고는 그의 집에 있던 심문 자료들과 나치 관련 서적들을 약탈했다. 악행이 워낙 컸던 나머지 1986년 7월 23일에 열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였으나, 데지르는 '난 기독교인인데 어떻게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겠는가?' '나는 누구를 죽이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나는 기독교인이고 내 주변에 좋은 것만 나눠준다.' 등의 적반하장 격 망발을 남기며 항소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유죄 판결을 '국가에 대한 망신'이라고 주장하며 아이티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비록 수감은 되긴 했으나, 1989년 9월 20일자 LA 타임즈에 따르면 데지르는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징역 30년으로 또다시 감형되었다.[52]
아이티의 인권운동가 장클로드 바죄(Jean-Claude Bajeux)는 이 감형에 대해 '뒤발리에주의자를 향한 화해의 제스처이며 다음 단계는 완전한 사면이다'라고 비난했는데, 이 말처럼 데지르는 1991년에 쿠데타로 집권한 라울 세드라(Raoul Cédras, 1949~) 대통령에 의해 끝내 사면되었으며, 사면 이후에는 외국의 해안가로 망명해 2000년 기준으로도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망명 후 어떻게 살았는지가 상세히 알려진 캉브론과 적어도 사망 날짜와 장소만큼은 확인된 막스 아돌프 부인과는 달리 데지르의 사망 여부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는데, 만약 살아있다면 2024년 현재 99세의 노인일 것이다. 다만 재판 당시에 데지르는 당뇨병이 악화되어 발을 절단하고 의족을 차야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현 시점에서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다. #
2.2.3. 우상화
대통령궁에 평생 계시는 우리 박사님, 현재와 미래 세대가 당신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포르토프랭스와 지방에 임하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아이티를 주시고 매일 우리나라에 침을 뱉는 반 애국자들의 불법 행위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유혹에 굴복하게 하고 그들의 독의 무게로 그들을 어떤 악에서도 구하지 마십시오...(Our Doc, who art in the National Palace for life, Hallowed be Thy name by present and future generations. Thy will be done at Port‐au‐Prince and in the provinces. Give us this day our new Haiti and never for give the trespasses of the anti patriots who spit every day on our country; let them succumb to temptation, and under the weight of their venom, deliver them not from any evil...)
아이티의 어린이들이 뒤발리에 시기에 외워야 했던 '뒤발리에 기도문' #
아이티의 어린이들이 뒤발리에 시기에 외워야 했던 '뒤발리에 기도문' #
이런 와중에 뒤발리에는 '흑인을 위한 종교'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1961년 1월에 아이티 내에서 일하던 가톨릭 사제 4명과 프랑스인 주교를 추방했고,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와 로마 교황청로부터 자동 파문당했다. 이에 뒤발리에는 맞불작전으로 공석이 된 성직자를 직접 임명하는 권한을 가지는 법을 만들어 아이티의 교회를 장악하게 됐다. 현재 아이티의 카톨릭이 민간에서는 부두교와 혼합되어 토착화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아이티의 민간전승이 부두교에 많이 영향을 받아서이기도 했지만, 특히나 뒤발리에가 아이티 내의 교회와 종교까지 자신이 소유함으로써 아이티의 기존 카톨릭 교회에 부두교 이미지까지 혼합하면서 더 그렇게 되었다.
가톨릭 사제들을 쫒아낸 후 교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뒤발리에는 자신에 대한 개인 숭배를 확립하는 작업에 들어갔고, 스스로를 부두교의 주술사이자 현인신이라고 했으며 그 중에서도 죽음을 관장하는 신인 "바롱 삼디"(Baron Samedi)라고 선언하였다. 게다가 뒤발리에는 부두교의 사신인 바롱 삼디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덧씌우기 위해 검은색 정장과 나비넥타이, 모자를 쓴 해골의 모습인 바롱 삼디의 모습을 본떠 공석에서도 나비넥타이를 맨 양복차림을 하고 다녔다. 본문에 나와있는 사진을 보면 그냥 얌전한 교수님이나 노신사 같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민간신앙적 우상화까지 전부 중의적으로 생각해서 옷차림을 가진 것이기에 더욱 교활한 것이다.
그리고 뒤발리에는 자신을 더욱 위압적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공석에서 연설시엔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강한 비음을 내며 발언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부두교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정치적인 문제를 결정할 때 부두술사들을 데려와서 결정을 하고는 염소의 내장을 연구하며 이를 정치에 대한 길잡이로 삼기도 했고, 1년에 하룻밤은 자신과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은 장 자크 데살린 장군의 묘석 앞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심지어 뒤발리에는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을 접하고는 '내가 케네디가 암살된 그날 아침에 JFK의 인형을 2,222번 찔렀다'며 케네디의 암살도 자신이 저주를 내린 것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54] 그리고 뒤발리에는 '케네디의 영혼을 가두어 내 의지에 종속시킴으로 하여금 아이티에 관한 미 국무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를 희망한다'며 비밀리에 케네디의 무덤에 사절을 보내고는 케네디의 무덤 인근의 흙과 시든 꽃을 채취하고는 작은 병에다 무덤 인근의 공기 일부를 담아 아이티로 전달하게 했다.
물론 뒤발리에에 대한 신격화와 우상화도 자행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뒤발리에의 어깨에 손을 얹은 뒤 '나는 그를 선택했다'는 문구를 새긴 포스터도 그려졌고[55], 1964년 6월에 종신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몇 주 후에는 뒤발리에 본인이 직접 주기도문의 신을 찬양하는 구절들을 자신을 찬양하는 구절들로 바꾼 뒤 이 '혁명의 교리문답'을 소책자로 출판하기까지 했다. 이 책에서 뒤발리에는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애국자' '민중의 해방자' '아이티의 혁신자' '국위를 위해 싸우는 전사' '혁명의 우두머리' '데살린의 이상을 계승한 존경스러운 피의 계승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태어난 종신 대통령'으로 묘사되었다. 국가의 사상을 개인숭배를 목적으로 한 사이비 종교로 만들려고 작정을 한 셈이다.
뒤발리에는 언론으로부터 '최고의 지도자' '아이티의 영적 지도자' '경애하는 지도자' '총체적인 선의 사도',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원칙 주창자' '국민들이 창조해 낸 신' '흑인 세계의 영적인 지도자' '아이티 국민 대다수의 부패할 수 없는 지도자' '공화국의 혁신가' '혁명의 수장' '국가의 영적 아버지'이라고 찬양받았고, 뒤발리에도 자신을 '나를 겁먹게 할 수 있는 총알과 기관총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영적인 존재이다' '내가 혁명이고 국기다'라고 일컬었는데, 미국 대사관은 당시 신문의 뒤발리에에 대한 아첨이 '소름끼칠 정도로 속이 뻔히 보이고 끝없이 반복되었다'고 평했다. 당연하지만, 모든 상점과 집에는 뒤발리에의 플라스틱 흉상과 초상화가 전시되었고, 라디오에서는 '그리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라며 뒤발리에를 신의 화신으로 묘사했다. 다만 뒤발리에는 후술할 신도시를 제외하면 자신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아돌프 히틀러와 마찬가지로[56] '동상은 죽은 사람을 위해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뒤발리에는 포르토프랭스 중심가의 광장, 다리, 도서관, 수영장, 공항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게다가 뒤발리에는 자신을 '위대한 작가이자 역사학자, 민족지학자, 시인, 철학자'로 보이게 하기 위해 자신이 쓴 서적들을 출판하고는 이들 중 '대표 작품집'을 매일 5시간 동안 낭독하던 아이티의 전국구 라디오 프로그램은 뒤발리에를 '키플링과 발레리,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드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인'으로 아부하기도 했으며, 뒤발리에는 문맹률이 90%인 아이티 국민들에게 이 책들 중 최소 3/4를 암기하도록 요구했다. 물론 뒤발리에의 생일은 국경일이 되었으며, 공무원이 성공적인 결정을 내린 것과 우기를 무사히 넘긴 것도 뒤발리에의 공이 되었다.
1966년 4월에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가 아이티를 방문하자[57] 셀라시에가 '귀하는 반드시 대통령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들이 계속해서 귀하의 덕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귀하를 방문해서 직접 만나고 나서야 나는 이 나라와 이 나라의 국민들이 귀하를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라고 했다고 아이티의 신문에 보도되었는데, 실제로 이 말은 대통령궁 소속 작가가 조작한 발언, 다시 말해 가짜 뉴스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 뒤발리에는 '아이티 철학의 대스승'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더 나아가 대통령 당선 10주년이던 1967년 9월 22일을 기념하기 위해 뒤발리에의 얼굴이 새겨진 서로 다른 액면가의 금화 4종이 주조되고 뒤발리에의 대표 작품집의 편집본이 '혁명의 성무일도'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9월 22일에 뒤발리에는 연설에서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며 자신의 수많은 '업적'들을 열거한 뒤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우등한 흑인이다. 왜냐하면 전 세계의 다른 어떤 흑인들도 우리처럼 역사적인 대업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벗이여, 오늘 나는 여러분의 지도자가 전 세계 흑인들로부터 살아 있는 태양으로서 존경받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말해 주고자 한다. 그 사람은 아메리카 대륙을 비롯한 전 세계의 흑인의 혁명 의식에 불을 지핀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2.2.4. 부정부패와 경제 파탄
아프리카나 중남미의 독재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경제정책 또한 터무니없어서 이 시기부터 아이티의 경제는 재기가 힘들 정도로 추락했다. 아이티의 수입 대부분은 사탕수수였는데 뒤발리에는 사탕수수 농장을 국영화하여 지지자들에게 분배했다. 정확히는 기존 사탕수수 농지를 전부 강탈한 다음 측근들에게 나눠준 것인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농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문외한들이라서, 농장 경영이 제대로 이루어 질 리가 없어 농장 생산량은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그리고 뒤발리에는 카리브해가 미국의 안보에 필수적인 지역이란 것을 강조하며 미국으로부터 받아낸 경제원조를 모두 자신의 가족들과 측근들이 착복하도록 손을 썼고, 국영기업이나 국가의 세금도 뒤발리에가 자신의 개인재산으로 취급하면서 아이티 사회에서는 뇌물로 인한 범죄가 엄청나게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뒤발리에는 미국에 의한 연 1500만 달러의 지원[58]을 위시한 해외의 수많은 원조들을 횡령해 개인계좌로 옮긴 것은 물론이고, 쿠바의 풀헨시오 바티스타에게서 400만 달러를 수수받기도 했다.
물론 뒤발리에의 학정 때문에 견디다못한 아이티인들 7~8%가 해외로 도피했으며, 이렇게 국민들이 단체로 고국을 탈출해 두뇌유출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1960년대 중반까지 아이티를 떠난 전문직 종사자는 전체 전문직 종사자의 약 80%에 육박했다고 하며, 그렇게 고향을 떠난 아이티인들이 주로 이민간 곳이 프랑스어를 쓰는 캐나다 퀘벡이여서 퀘벡에는 아이티계 이주민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거기다가 당시 아이티 지식인들 중에는 아예 UN에 들어가 코트디부아르와 콩고 공화국 등의 프랑스 식민지 출신 신흥 독립국들의 발전에 애쓴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아이티는 이웃나라 도미니카 공화국처럼 실력있는 흑인 야구선수를 배출하지 못할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로 인해 아이티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수많은 아이티인들이 가난해지게 되었는데, 일례로 1971년 기준으로 아이티의 1인당 GDP는 세계 최하위권인 76달러[59] 정도였고, 이 때문에 아이티는 1971년에 UN에서 선정한 최빈국 25개국 중 유일하게 아메리카에 있는 국가이기도 했다.[60] 당시 UN은 국민 1인당 국민생산이 경상가격으로 100$(2024년 기준으로 775$) 미만인 나라를 최빈국으로 지정한 것을 보면 아이티가 얼마나 극빈국으로 전락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61] 뒤발리에 시기 포르토프랭스 빈민가 묘사[62][63] 1960년 2.73억 달러였던 아이티 GDP는 1971년 3.63억 달러로 성장하여 개도국 버프도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문맹을 근절하자는 뒤발리에 운동에도 문맹률은 세계 최고 수준인 90%에 달했던 데다가 그가 사망할 시점에 평균수명은 겨우 47.7세에 불과했고, 연료 부족으로 나라 전체가 정전되는 일까지 있었으며, 명색이 저명한 의사 출신 대통령이 집권한 나라라면서 공중 보건은 참담한 수준이 되었고 심지어 수도의 거리와 평소에는 농작물이 잘 자라던 아이티 남부 지역에서도 아사자가 나올 정도였다. 이는 상술한 것처럼 뒤발리에는 국가의 전체 재원의 절반을 거뜬히 넘는 거액을 '국가 안보'를 가장한 불필요한 정적 탄압에만 쏟아붓고는 공공 서비스를 대부분 등한시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2000년 시점으로 아이티 부채의 40%가 프랑수아 뒤발리에 시대에 쌓인 것이었고, 심지어 뒤발리에 부자는 아이티가 받아온 해외 원조 중 약 80% 정도의 거액을 착복했다고 한다. 또한 대형 허리케인이 아이티에 닥칠 때마다 수천 명의 아이티인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이유는 무차별적인 벌목 때문에 국토의 3% 정도에만 숲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뒤발리에는 자기를 기리기 위해 브라질의 계획도시이자 새로운 수도가 된 브라질리아에서 영감을 받고는 캉브론에게 재정을 담당하게 하여 카바레(Cabaret)라는 작은 마을을 '뒤발리에빌(Duvalierville)'이라는 도시로 건설했고, 뒤발리에빌을 자신의 동상과 기념비들은 물론, '나의 적은 곧 아이티의 적이다'나 '나는 당신들이 만난 최고의 존재다'라는 등 뒤발리에를 찬미하는 거대한 네온사인들로 채웠다. 뒤발리에빌의 건설을 위해 통통 마쿠트는 국민들을 수탈했고, 설탕, 쌀, 식용유와 같은 필수적인 식료품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공무원들에게 급여의 일부를 헌납할 것을 강요했다.
2.3. 최후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그의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
이러한 뒤발리에의 학정을 국제 사회에서는 매우 비난하게 되었고, 결국은 1970년 6월에 아이티를 '반공의 요새'로 치켜 세우며 전폭적인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해오던 미국이 모든 형태의 원조를 중지하면서 아이티 국민의 불만은 급속히 높아졌다.[64]
이 무렵에 뒤발리에는 당뇨병과 심장병, 관절염 등의 온갖 병을 앓다가 너무도 쇠약해진 나머지 아내가 음식을 떠먹여줘야 했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이런 뒤발리에는 1970년 11월 18일에 겨우 만 19세밖에 안 된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베이비 독(Baby doc)' 장클로드 뒤발리에를 차기 대통령에 지명하고, '베이비 독'을 차기 대통령로 임명하기 위해 대통령 연령 제한을 40세에서 20세로 낮추는 것으로 개헌하고는 1971년 1월 30일에 '장클로드 뒤발리에를 종신 대통령에 선출하는 데에 찬성하는가'에 대한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이 투표에 참여한 239만 1,916명 중 공식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한 사람은 0명이었으나, 실제로는 1명이 무효표를 냈고 또 다른 1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64세 생일으로부터 1주일밖에 안 지난 1971년 4월 21일에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향년 64세로 사망한다.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상서롭게 여긴 날짜인 4월 22일 새벽 1시에 '베이비 독'이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채로 취임했고, 4월 23일에 열린 '파파 독'의 장례식은 수천 명의 국민들이 참석하고 아이티의 음악가들이 뒤발리에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6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프랑수아의 뒤발리에의 장례식 영상[65] '파파 독'의 죽음 후 아이티라는 국가는 혼란에 빠져들기는 커녕 대체로 매우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했다고 전해진다.
뒤발리에의 유해는 생전에 즐거 입던 검은 프록코트 차림으로 유리 덮개를 단 관에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나 후에 '베이비 독'이 건립한 영묘에 이장되었다.
2.3.1. 사후
이렇개 권력을 세습받은 '베이비 독'은 초반에는 아버지가 폐교시킨 육군사관학교도 부활시키고 일부 정치범도 사면시키며 유화책을 펼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데다가 오히려 누나 마리 드니즈(Marie-Denise Duvalier)에게 권력을 양도하고 싶었다고 하고, 이 때문에 실제 행정 업무는 어머니와 루크네르 캉브론에게 섭정을 맡기고 자신은 소위 플레이보이처럼 살았다고 한다.하지만 얼마 안 가 본색이 드러났는데, '베이비 독'은 아버지도 능가할 정도로 극도로 부패했던 데다가 대규모 학살은 피하는 등 아버지보다는 약간 온건했긴 했어도 역시나 수천명을 살해하고 아이티의 국가 부채보다 훨씬 많은 돈을 해외로 빼돌리는 폭정을 자행한 독재자였고, 15년 후인 1986년 2월 7일에 장클로드가 민중 쿠데타로 실각하면서,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정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실각하고 이들 부부가 다른 19명과 함께 미국 비행기를 타고 아이티를 빠져나오기 무섭게 아이티의 민중들은 상술한 것처럼 통통 마쿠트 요원들을 무더기로 살해한 것은 물론이고 뒤발리에 일족이 살던 2천여평 대지의 호화 저택의 내부를 모조리 문자 그대로 때려부수고 뒤발리에 일족과 관련된 모든 것들[66]을 모조리 파괴했으며, 특히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영묘(가옥형 무덤)을 본 민중들은 돌과 맨손으로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영묘를 부쉈다.[67] 해외에서는 민중들이 뒤발리에의 관을 꺼내 그 위에 올라가 춤을 추고, 관을 부순 뒤 뒤발리에의 유해를 매질하고 그의 안경과 두개골을 들고 환호했던 것처럼 알려지기도 했으나, 실제로 시민들이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무덤을 파괴했을 때 무덤 속에 뒤발리에의 관은 없었다고 한다. 이는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탈출하기 전에 민중들이 무덤을 파헤칠 것을 예감하고는 며칠 전부터 수하들을 시켜 아버지의 관을 몰래 꺼내 이장해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유해는 가족들에 의해 비공개로 이장되어 현재의 매장지는 뒤발리에 가문 외에는 아는 사람들이 없다. 한편 파괴된 영묘에는 뒤발리에 일가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온갖 욕설들과 낙서가 가득차게 되었다고 한다. '뒤발리에는 에이즈 환자'라는 말이 점잖은 편이라 할 수 있을 정도. 참고자료
그리고 통통 마쿠트의 결말은 전술한 내용이 끝이 아니었다. 장클로드가 축출된 후에도 살아남은 통통 마쿠트 단원들은 씨족 밑 후원 네트워크를 형성하고는 신뒤발리에주의 성향 사업가[68]와 정치인이 되는 등 아이티의 정계에 큰 영향을 미치며 부유하게 살고 있으며, 뒤발리에가 축출된 후에도 한동안 전직 통통 마쿠트 단원들은 육군과 함께 민주주의와 인권, 법치주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던 정치인, 언론인들을 살해하고 '실종'시켰으며,[69][70] 1991년 2월에 집권한 좌파 성향의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Bertrand Aristide, 1953~)[71]가 불과 7개월 후에 쿠데타로 축출되자[72] 이 기회를 타 1994년까지 3년 동안 준군사조직들을 꾸리고는 군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박해하며 공식 수치로만 무려 3천 명의 자국민을 학살했다.
특히 이들은 1993년 중반에 에마뉘엘 '토토' 콩스탕(Emmanuel 'Toto' Constant, 1956~)[73]의 주도로 '아이티의 진보와 발전을 위한 전선(FRAPH)'라는 이름의 준군사조직을 만들고는 CIA로부터 은밀한 자금 지원을 받으며 경찰 및 군대와 유착 관계를 맺으며 뉴욕, 마이애미를 위시하여 대규모 아이티 망명 커뮤니티가 있는 외국 도시에서도 아이티인에 대한 정치적 관련 살인을 저질러왔으며, 아리스티드의 지지자들을 무려 100명 이상이나 암살하거나 1994년 4월 23일에는 아예 친아리스타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거주하던 판자촌 지역을 습격해 많은 사상자를 낳는 라보토 학살(Raboteau massacre)[74][75]을 일으키는 등의 만행을 저질러왔고, 당시 현직 법무부 장관이었던 기 말라리(Guy Malary, 1943 ~ 1993)[76]의 암살[77]에도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고, 그 외에도 통통 마쿠트 출신이 만든 준군사 조직들은 90년대 내내 아이티에서 유혈 사태를 만들어냈다.[78] 이러한 갱단의 폭력성은 악명 높은 아이티 갱단으로 계승되어 아이티의 무정부 상태에도 일조했다.
뒤발리에 일가의 만행 정리(프랑스어)
3. 평가
북한의 김씨 왕조, 시리아의 알 아사드 부자와 함께 최악의 세습 독재자이며,[79][80] 1930년대부터 서서히 쇠락하던 아르헨티나를 결정적으로 박살내버린 호르헤 비델라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넘어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특히나 2차 대전 이후 존재했던 반공, 우파 성향의 독재자들 중에서는 그 잔혹성이나 악행이 한 손안에 반드시 들어갈 정도로 포악하고 잔인한 독재자로 회자된다.[81]또한, 정적들을 탄압할 때 직접 고문 장면을 보며 흐뭇해하는 것은 물론 어린아이를 본인의 손으로 살해하거나 갓난아기를 산제물로 바치라고 지시하는 등, 인격적 면모에서도 인류 역사상 존재하였던 모든 독재자들을 통틀어서 한 손에 꼽히는 수준의 악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몬스터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는 의사로써의 선행으로 국민들에게 슈바이처와도 같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 실제로 저 이상의 일화를 보여준 독재자는 고의적 음주운전으로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어린 학생들을 깔아뭉개죽인 보카사 1세와 연쇄 아동 성폭행범이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정도가 전부이다. 대한민국으로 비유하면 장기려 박사가 김일성 수준의 독재자가 된 것과 다를 바가 없다.[82] 집권할때 즈음부터 정신질환을 앓아서 미쳐버린 것과 다를 바 없다는 평가까지 나왔을 정도이니.
뒤발리에가 시행한 정책들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국가로 악명이 높은 북한이나 이디 아민 치하의 우간다와 별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반인륜적이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으로 악명이 높으며, 심지어 이디 아민과는 달리 세습까지 성공하여 1986년까지 우상화되는 등 다른 독재자들과는 그 질이 차원이 다르다. 실제로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실각한 1986년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묘지는 아이티 국민들에 의해 즉시 파괴되었으며 뒤발리에에 대한 증오가 가득찬 온갖 욕설로 완전히 도배되었다.
사망 이후에도 뒤발리에의 학정의 악영향은 계속되고 있는데, 일단 뒤발리에 부자 집권 당시 극악한 부정부패로 인하여 국가 재정이 파탄난 것은 물론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만든 통통 마쿠트 대원들은 아이티 민주화가 이루어진 1990년대 이후에도 살아남아 육군과 민주주의 세력에 온갖 테러를 자행하며 외국에서도 반 뒤발리에 성향의 아이티인들을 암살하고 그 잔혹성은 악명 높은 갱단으로 잔재되었다. 이렇게 최빈국으로 거덜난 아이티는 2차례의 대지진을 겪고 21세기에 현직 대통령이 암살된 데다가 나라에 갱단이 판치는 무정부 상태에 들어선[83], 그야말로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생지옥이자 파탄국가가 되고 말았다. 김일성, 아돌프 히틀러, 블라디미르 푸틴, 마오쩌둥, 시진핑 등 한 시대를 대표하는 독재자로 불리는 인물들이 저지른 악행들을 모두 저지른 것이다.
이로 인하여 뒤발리에는 로버트 무가베,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와 함께[84] 독재자가 된 영웅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4. 가족
4.1. 부인 시몬 뒤발리에
Simone Duvalier(1913.3.19 ~ 1997.12.26)
그녀는 1939년 12월 27일에 프랑수아와 결혼하였으며, 남편의 생전에는 남편처럼 부두교에 능한 것으로 알려져 많은 아이티인들이 그녀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후 1980년에 아들이 물라토 출신의 여성 미셸 베네(Michele Bennett)(1950 ~ )과 결혼하자 '뒤발리에 혁명의 수호자'로 강등되고는 1982년에 미셸 베넷의 요청으로 프랑스의 파리로 추방되었었으며, 아들이 1986년에 축출되고 1990년에 이혼한 후에는 아들과 함께 비교적 가난하게 살다가[85] 1997년 12월 26일에 향년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녀는 망명 생활을 했을 때에 "정치적 상황이 허락될 때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고 한다.
[1]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대통령은 1818년부터 1843년까지 집권한 장 피에르 부아예이며 두번째는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다.[2] 그가 사망한 해인 1971년에는 아이티 인구가 477만 명도 되지 않았다. 뒤발리에는 집권 기간 동안 인구의 0.62~1.26%를 학살한 셈이다. 심지어 이것보다 더 높은 추정치도 존재하는데, 1986년 뉴욕타임즈 기사에 따르면, 뒤발리에는 집권기간 동안 10만 명을 학살했다.#[3] 뒤발리에는 1967년에 자신이 쓴 책에서 자신을 3인칭으로 기술하며 '그는 그들과 같은 고통을 겪고 그들의 불행을 함께 슬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통령 시절을 가리킨 말이라고 보면 완벽한 헛소리지만 의사 시절을 가리킨 말이라고 보면 사실인 셈이다.[4] 이 선거는 1986년까지는 아이티에서 치러진 마지막 자유 선거였다. 그나마 다행히도 상대 후보였던 루이 데주아(Louis Déjoie, 1896~1969 는 선거 이후 암살당하지 않고 1969년에 뉴욕에서 죽었다. 이는 아이티 독립 이후 정계를 지배해오던 물라토 엘리트 계층의 1946년 흑인 민족주의 혁명으로 기울어가던 영향력 몰락의 결정타가 되었다. 이어진 뒤발리에의 독재체제 수립과 함께 완전히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되며, 뒤발리에 정권 몰락 이후에도 경제적인 영향력은 어느 정도 회복했으나 흑인 민족주의와 대중적 지지 기반의 상실로 인해 이전의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5] 이를 방증하듯 상대 후보였던 데주아는 설탕공장, 플렌테이션 농장 등을 운영하던 전형적인 물라토 계층의 정치인이였기에 뒤발리에 대신 데주아가 당선되었어도 아이티의 운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6] 이후 뒤발리에는 '22'를 자신의 행운의 숫자로 여겨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대부분 22일에 치르게 된다.[7] 이것이 와전되어 뒤발리에가 쿠데타를 막기 위해 아이티군 자체를 해체시켰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이티군은 쿠데타 실패 이후에도 계속 남되 1968년에 군인 수가 단 5천 명으로 축소되는 등 뒤발리에의 수족처럼 부려졌다. 아이티군의 해산은 권력을 세습받은 뒤발리에의 아들인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실각하고도 10여년이나 지난 1995년에야 해산되었고, 이후 2017년에 '아이티 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재건되었다.[8] 이와 비슷하게 10년 동안 전란도 없이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입힌 학정을 저질러 '아프리카의 폴 포트'로까지 불렸던 적도 기니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도 실제로는 마약중독자에 온갖 정신병을 앓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뒤발리에는 마약을 복용했다는 말은 없다.[9] 후술할 비밀경찰 '통통 마쿠트'의 초대 수장. 학교 교사 출신이었다.[10] 이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도 2002년 10월 16일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 단독 선거로 출마해 '100% 투표, 100% 찬성'이라는 기록을 세웠다.[11] 뒤발리에는 이때 그에게 '자비롭게' 새 자동차를 선물했다.[12] 이후 브누아는 도미니카 공화국 대사관에 도피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후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는 제너럴 모터스에서 일하다가 1986년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13] 이에 대해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프랑크 디쾨터는 '그럼에도 이런 결정은 상징적인 조치에 불과했는데 이미 정지할 자유 자체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라고 평가했다.[14] 하다못해 3.15 부정선거 등의 악명 높은 부정선거에서도 투표자가 원하는 후보를 찍게 했는데, 이 선거는 아예 대놓고 선거의 원칙을 완전히 부정한 셈이기에 '선거'라고 불러야 할지도 의문이 가는 수준이다.[15] 이들도 경찰들에 의해 비밀리에 고문 또는 사살되었다는 말이 있다.[16] 이는 프랑수아의 아들인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실각한 1986년까지 쓰이게 된다.[17] 이 국기의 검은색은 아프리카와 아이티의 관계를 상징한다.[18] 물론 그 '국가 안보'라는 것이 실제로는 반뒤발리에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었다는 것은 안 봐도 뻔하다. 실제로 상술한 마시아스 응게마도 국민 탄압 외에는 국정 운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는 반응게마 인사 탄압을 '내부 안보'라고 포장했다.[19] 뒤발리에는 충직한 부하들이 유능하기까지 하면 의심만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20] 아저씨(Tonton)+ 민병대원들(macoute)로, 민병대원 아저씨라는 의미이다. Tonton에는 프랑스어로 삼촌이라는 뜻도 있으므로 민병대원 삼촌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21] 흑인 1명, 물라토 12명[22] 3m*3m 정도의(즉 3평도 안 되는) 감방에 많으면 33명을 수용하기도 했는데, 이런 감방에서 수감자들은 개인당 겨우 30cm의 공간만 허용받았다. 이 때문에 수감자들은 잠을 자려면 교대로 자거나 '정어리처럼' 줄을 지은 채 자야 했다.[23] 심지어 증언에 의하면 195명의 수감자에게 겨우 18개의 컵만이 제공되기도 했다.[24] 당시 아이티는 누가 투옥되고 누가 처형되었는지를 공식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으나, 아이티의 국립 궁전 경찰서장인 장 타시(Jean Tassy)에 따르면 1957년부터 1967년까지 경찰 본부에서만 2,053명이 사망했다고 한다.[25] 이는 그가 권력을 세습한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 치하의 인권침해과 관련된 자료이지만, '베이비 독'이 아버지 '파파 독'이 물려준 기반 하에서 인권탄압을 벌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프랑수아 뒤발리에 정권에 대한 참고자료로 쓰는 데에도 그렇게 큰 무리는 없다.[26] 이후 포르 디망슈는 아이티의 민주화 후인 1991년 해체되었고, 포르 디망슈의 부지는 비위생적인 판자촌으로 전락했으며, 2000년대까지도 여전히 존재했던 이 감옥의 잔해는 2010년 아이티 지진으로 파괴되었다.[27] 뒤발리에는 젊었을 적에 공산주의(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적이 있으나, 유물론을 포함한 관련 서적들을 정독하고 나서 사회주의는 자신이 보기에도 영 아니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사회주의 관련으로 다른 좋지 않은 사정이 더 있었으리라 전해진다.[28] 그가 공산주의의 위협을 강조한 게 아주 허튼소리는 아니었는데, 쿠바 해안과 아이티 간의 거리는 불과 80km 남짓이다. 물론 이것이 뒤발리에의 학정을 정당화하는 것은 불가능하긴 하지만.[29] 이들 모두가 뒤발리에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뒤발리에 본인은 물론이고 뒤발리에의 가족과도 연관이 깊었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처형될 이유도 전혀 몰랐다고 한다.[30] 뒤발리에는 이들의 사형 과정에서 손수 처형할 이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했으며, 심지어 뒤발리에가 직접 선택한 총살 부대원은 모두 피해자의 친척 또는 (고위 장교로 복무하는) 가까운 친구였다고 한다. 거기에 사살된 경비원들의 친척들도 이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31] 사실 당대 아프리카의 악명 높은 독재자들 중 정적을 손수 죽인 독재자는 그리 드물지는 않았지만, 어린아이까지 봐주지 않고 직접 죽인 독재자는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참칭 황제 보카사 1세밖에 없다. 물론 보카사는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다 수감된 어린이들을 직접 때려죽인 것이 폭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쿠데타로 쫓겨났다.[32] '첫 번째로 무서운 인물'은 당연히 캉브론의 상관이었던 프랑수아 뒤발리에이다.[33] 이 혈장 센터는 혈액 튜브를 재사용하는 등 위생 상태가 매우 열악했기에 HIV 전파를 가속화했다는 역할까지 했다고 하며, 캉브론이 이렇게 미국에 밀매한 혈장은 매달 5톤에 달했다고 한다.[34] 심지어 (본인은 부인했으나) 대마초를 재배하고는 밀매해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는 의혹도 있다. #[35] 이 돈은 1967년을 기준으로 하면 2023년 환율으로는 무려 약 9천만 달러(!)에 달한다.[36]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생전에 뤼크네 캉브론과 불륜 관계였다고 한다.[37] 1970년대에 사업가도 아닌 사람이 개인용 제트기를 보유하고도 돈이 펑펑 남아돌았을 정도면 캉브론이 얼마나 막대한 금액을 부정하게 취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38]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1986년에 축출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캉브론은 길어야 13~14년 정도만 부를 누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무려 반세기 이상이나(!) 뻔뻔하게 부를 누려온 하판락과 사키치 부부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는 합당한 결말을 맞은 셈.[39] 물론 현 기준으로도 1천억 원이 넘는 거액을 불과 10년 남짓만에 다 탕진했다는 것 자체가 어느 의미에서는 가장 비참한 몰락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40] 9살 아이를 직접 죽이고 갓난아기를 제물로 바치게 한 악마와도 같은 독재자를 깊게 감명시킬 정도였으면 통통 마쿠트 평대원 시절에도 극도로 잔혹한 면모를 보여줬을 가능성이 높다.[41] 심지어 자기 남편의 정부까지 성고문했다고 한다.[42] 그녀가 여성이라는 성별 덕분(?)에 프랑수아 뒤발리에에 대한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유는 알 수 없다.[43] 이와 비슷하게 우간다의 악명 높은 반군 '신의 저항군(LRA)'의 수장 조지프 코니도 2005년에 LRA가 우간다에서 추방되자 수단의 독재자 오마르 알 바시르의 후원으로 수단 다르푸르 지역으로 도피해 철저히 은거 생활을 하며 (이전의 위세를 완전히 잃은) LRA 병사들에게 계속해서 명령을 내리고 있는데, 얼마나 철저히 은거 생활을 하는지 그 역시 사망설이 나돌 정도였다.[44] 물론 그녀는 포르 디망슈의 소장이었을 시절에 그녀의 거주지를 사용하기 위해 미국 특수부대로부터 월마다 수표를 받기도 했다.[45] 2000년에 조지아에 사는 아이티계 미국인은 35,000명 미만이었으나, 그녀가 사망한 2018년 기준으로는 8만 명의 아이티계 미국인들이 조지아에 살았다.[46] 특히 후술할 것처럼 말년에 딸이 장관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공개적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녀가 미국으로 망명을 간 후에 개명했으면 지금까지도 사망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적어도 사망 사실이나마 확인되었을 정도면 망명 후에 개명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47] 사실 한국에서도 고령의 정치인들이 정계 은퇴 후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가 부고 소식으로 근황이 알려지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48] 2011~2016년에 아이티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인기 많은 대중음악 가수였다.[49] 그녀의 남편인 조르주 라신(Georges Racine)은 2011년부터 2012년까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는데, 미국 국적을 가진 것이 드러나 얼마 안 가 자리에서 해임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갈리 라신은 마르텔리의 취임 이후 마르텔리의 집에서 식사를 했다는 인연 덕분에 장관으로 오른 것이었다고 한다.[50] 1981년에 쿠데타 모의 혐의로 해임되었다고 한다.[51] 뒤마르세 에스티메는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아이티의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다. 에스티메는 아버지가 지주에 삼촌이 상원의원인 요즘말로 금수저 출신이었으며, 아이티의 농촌과 인프라를 개발하는 등 여러 개혁 정책을 실시하며 아이티인들의 삶을 일시적으로 증식킨 데다가 국가 부채를 줄이며 1947년에는 미국의 재정 통제를 종식시키고 1949년에는 개발도상국 최초로 엑스포를 개최하는 등의 업적을 남긴 1950년에 폴 마글루아르의 쿠데타로 쫓겨난 후(그러나 마글루아르도 정책에서는 에스티메의 노선을 이어받으며 아이티를 카리브해 최고 휴양지 중 하나로 만드는 등 나라를 무난하게 통치해나갔다.) 해외를 전전하다가 1953년에 뉴욕에서 객사했다. 그러나 그의 업적들 덕분에 오늘날의 아이티인들은 에스티메에 대해 나라를 발전시킨 위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여러모로 부르키나파소의 토마 상카라와 유사한 길을 걸은 인물인 셈.[52] 이 시기에 감형을 받은 뒤발리에 시기 인사의 수는 데지르를 포함하여 무려 14명에 달한다고 한다.[53] Loa, 부두교에서 정령을 통칭하는 말이다.[54] 케네디는 뒤발리에의 악행에 질려, 1962년 중반에 뒤발리에 정권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중단했다. 자신에 반대하면 여느 초강대국의 지도자도 무사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이야기한 것.[55] 출처: 셸리 클라인, <독재자의 최후>의 뒤발리에 편.[56] 히틀러는 자신이 '미래의 통치자'라며 동상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과거의 인물을 위해 남겨 둬야 한다고 생각해서 우상화를 하면서도 자신의 동상은 세우지 않았다. 물론 히틀러가 죽은 후 히틀러를 기리는 동상을 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시도한 사람도 뒤발리에도 능가하는 최악의 독재자였던 이디 아민 정도밖에 없다. 흉상 정도는 몇몇 관공서에 들여놓긴 했다.[57] 셀라시에는 프랑수아 뒤발리에 치하에 아이티를 방문한 유일한 외국 국가원수였다.[58] 이는 집권 초기에 한한 것이고, 1961년에는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지원군 150만 달러로 삭감했다.[59] 2023년 환율로는 약 569달러인데, 2023년 기준 소말리아의 1인당 GDP가 544달러다. 참고로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1인당 GDP 평균은 400달러(2023년 환율로는 약 3,000달러)였으며, 세계의 1인당 GDP 평균은 879달러였다고 한다.[60] 다른 16개국은 아프리카에, 7개국은 아시아, 1개국은 오세아니아에 있었다. 여기서 다오메는 오늘날의 베냉, 오트볼타는 오늘날의 부르키나파소를 가리키며, 시킴은 1642~1975년까지 인도 북동부에 있던 나라다.[61] 참고로 2022년 UN 통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749$ 미만인 나라는 16개국으로 줄었으나 2022년 기준으로 UN이 지정한 최빈국 수는 46개(아프리카 33개, 아시아 9개, 오세아니아 3개, 아메리카 1개)로 오히려 1971년의 2배 가까이 늘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아메리카에 있는 유일한 최빈국이 아이티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62] 미국에 살고 싶다는 아이티인들의 소망이 반영되어 빈민가 구역의 이름이 미국 도시 이름들이다.[63] 더 충격적인 것은 2024년 현재도 이 실태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 2차례의 대지진 + 무정부 상태로 어느 의미에서는 삶의 질이 더 악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64] 당시까지만 해도 뒤발리에는 아이티 국민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촌의 흑인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흑인이던 뒤발리에가 오랜 세월 동안 아이티를 지배했던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물라토를 이겨낸 투사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고 한다.[65] 이 영상을 보면 아이티 국민들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김정일과 마찬가지로 살기 위해 억지로 연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일성의 경우 워낙에 대단한 정치력을 가졌는지라 국민 전체를 세뇌시키는데에 성공해 그의 사망 당시 진짜로 북한 전체가 떠나갈 정도로 애도 열기가 거셌으나 김정일의 경우 이미 인민들도 알 건 다 알았기에 인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66] 심지어 장클로드 뒤발리에의 장인과 처제의 집도 파괴되었다. 다만 딱히 동정할 것은 없는 게 장클로드 뒤발리에의 부인이던 미셸 메네(Michele Mennett, 1950~)의 일가는 마약은 애교에(???) 자국민의 장기와 시체까지 밀매할 정도로 부패한 일족이었다. 통통마쿠트 세력이 재집권하자 다시 복원되었고 파괴한 시민들은 처형되었다.[67] 부서진 영묘 또한 통통마쿠트 세력에 의해 복원되었고 파괴시킨 시민들은 처형당했다.[68] 일부는 소규모로 마약 카르텔을 운영하기도 했다.[69] 1986년부터 1990년까지 단 4년간 아이티에서 '실종'된 사람만 무려 1,500명 이상에 달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1987년 3~10월에 '실종'되었다고 한다.[70] 특히 1986년 4월 26일에는 포르 디망슈 감옥에서 뒤발리에 치하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평화적 시위에 군부가 총격을 가해 8~15명을 살해하기도 했다.[71] 뒤발리에 시기에 뒤발리에에 반대하는 종교운동을 펼쳐왔으며, 뒤발리에 이후 민주적으로 선출된 최초의 아이티 대통령이었고, 아이티의 혼란상 때문에 무려 4번이나 별개의 대통령 임기를 수행했다.[72] 라울 세드라 대령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전직 통통 마쿠트 대원들과 육군 병사들, 민병대들이 아리스티드의 지지자들을 포함한 아이티 민주화 운동의 구성원들과 반군부 인사들을 추적하며 첫 이틀 만에 300명을, 몇 주 동안 최소 1천 명을 학살했다.[73] 아버지가 뒤발리에 시기에 육군 사령관이었다.[74] 이들은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주민들을 구타하고 하수구에 강제로 눕혔으며, 도망치는 사람들과 애꿎은 땔감을 줍던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기도 했고, 바다를 건너 사망하는 사람들을 사살하기 위해 어선을 훔치기도 했다. 군이 유족들의 시신 수습을 금지하면서 사망자 수도 불명확한데, 최소 6명~최대 5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75] 2000년에 시작된 이 학살에 대한 재판에 회부된 사람만 59명(궐석재판 37명 포함. 이들은 모두 종신형 + 노동 교화형을 선고받았다.)에 달하고, 2004년 11월 9일에 최종적으로 재판석에 출두한 사람 중 총 16명에게 유죄(12명 종신형 + 4명 단기 유기징역)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반년도 안 지난 2005년 5월 3일에 갑자기 이들 중 15명(옥사한 1명 제외)의 형을 아이티 대법원이 취소했는데, 이 재판은 국제적으로 민주화 이후의 아이티의 사법 제도가 개선되었음을 인식시켜주며 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인권 재판 중 하나로 여겨졌던 만큼 이 형량 취소는 국제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특히 국제앰네스티는 이를 거대한 후퇴라고 맹비난했다.[76] 구글 언어 설정이 한국어일 때, 영어 발음인 가이 말라리로 뜨는데, 아이티는 프랑스어권이니 프랑스어 발음인 기가 맞다.[77] 무려 법무부를 떠나는 행렬에 기관총을 난사했다고 한다.[78] 참고로 FRAPH는 아리스타드가 1994년에 미국과 UN의 도움으로 재집권하면서 해체되었고, 그 무렵 콩스탕은 미국으로 도피했다가 2001년에 라보토 학살의 책임자로 궐석재판에서 종신형 + 노동 교화형을 선고받았으며, 2006년에 100만 달러 이상의 모기지 사기에 연루되어 2008년에 징역 12 ~ 37년형을 선고받았고, 아이티의 사법 제도가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뉴욕에서 형을 살았으나, 2020년 6월 23일에 아이티로 추방되고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체포되었다.[79] 다만 현재진행형인 저 두 일가의 독재와 달리 뒤발리에 일가의 집권기는 끝난 지 거의 40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니카라과의 소모사 가문이나 싱가포르의 리콴유 가문 역시 세습의 가장 유명한 사례이지만 악행 면에서 북한, 시리아, 아이티의 수준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애초에 리콴유는 단 한 명의 정적도 죽이지 않으며 싱가포르를 대한민국과 함께 세계 최선진국으로 만든 인물이기 때문에 여기 있는 부패하고 극악한 독재자들과는 평가의 범주 자체가 다르다. 그리고 싱가포르가 권위주의적으로 운영되는 것은 둘째치고 리콴유의 아들인 리셴룽 역시 리콴유의 후광이 매우 크기는 했지만 국민의 지지를 받아서 당선된 것이다. 적도 기니의 응게마 가문은 세습이 아니라 군인 조카가 극악의 독재자인 삼촌을 쿠데타로 몰아내 죽이고 새로운 독재자가 된 것이니 예외. 아버지는 독재, 딸은 국정농단으로 대한민국 내 비토 세력이 매우 큰 대한민국의 박정희 - 박근혜 부녀 역시 세습은커녕 박정희가 살해당한 지 30년도 더 지나서 박근혜가 선거에 출마하여 정정당당하게 당선된 것이며 필리핀의 마르코스 가문 역시 마찬가지.[80] 다만 아사드 가문은 의외로 세속주의 때문에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북한의 백두혈통이나 뒤발리에 가문보다는 낫게 평가하고 응게마 가문을 여기에 끼우는 사람도 있다. 물론 뒤발리에 가문과 백두혈통, 응게마 가문은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거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다.[81] 사실 이승만과 수하르토도 학살 면에 있어서는 뒤발리에도 능가했지만, 적어도 이들은 독립운동에 앞장선 인물인 데다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큰 업적도 있어서 나름대로 재평가 여론도 있다. 물론 학살 규모가 악명 높은 공산권 독재자들에 비견될 수준으로 너무 크기에 악평이 더 많긴 하지만. 사생활로만 따지면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가 뒤발리에, 비델라도 울고 갈 수준의 인간 말종이라고 할 수 있다.[82] 전술했듯 대한민국의 군사정권 독재자들과 이승만도 집권기 상당히 악랄한 모습을 보여줬으나 지도자로써는 굵직굵직한 업적이 있어서 호불호가 갈린다. 사실 전두환같은 경우 대부분 부정적 평가를 받으나 이쪽도 3저 호황을 통한 경제발전이라는 장점이 있고 그걸 다 빼고 순수한 통치 체제의 억압성으로만 봐도 뒤발리에보다는 한참 낫다. 집권 과정에서 뒤발리에와 비슷한 잔혹성의 대량학살을 저질러서 그렇지. 애초에 뒤발리에는 같은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는 비델라, 전세계 역사를 다 통틀어서는 북한과 비견되는 인류 역대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인물이다.[83] 2024년 5월 1일 한국 정부는 아이티를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했다.[84] 그나마 무가베는 독립운동을 할 적에도 독선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아페웨르키는 독립운동을 할 적에는 군인들에 대한 처우를 잊지 않던 덕장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둘 다 북한을 동경해서 그들을 따라하면서 나라를 망친 케이스다.[85] 아들이 집권할 동안 '마마 독'의 사치벽은 틈만 나면 파리와 뉴욕에 가서 고급 의상과 보석을 사는 것을 즐겼다는 미셸 베넷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녀가 망명 생활 동안 이전보다 가난하게 살았다고 표현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