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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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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치적 스펙트럼
2.1. 초기 파시즘과 불온한 혁명성2.2. 후기 파시즘과 우경 기회주의
3. 국가협동조합주의4. 지도자 원리5. 미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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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시즘의 특징에 대한 문서.

2. 정치적 스펙트럼

파시즘은 우파인가, 좌파인가 하는 물음은 조금 진부하게 보이기는 해도 우회하기 힘든 질문이다. 파시스트들이 반부르주아적인(부분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인) 충동에 이끌린 것을 보면, 파시즘은 좌파 운동의 변종처럼 보인다. 그러나 파시즘의 반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와 담론은 성정과 기질에 관계된 것일 뿐 뚜렷한 정치적 내용을 결여한 것이었다. 오히려 파시스트들은 법과 질서를 내세우며 민족 국가의 위세와 사회 통합을 일관되게 옹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기성제도 및 기득권 계층과 타협했다. 또 파시스트들의 반부르주아적 선전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개혁과 폐절을 위한 그 어떤 진지한 계획도 제시하지 않거나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파시즘의 반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와 담론이 단순한 허위의식이자 공허한 '립 서비스'였다는 것은 아니다. 동시대인들은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와 담론이 응당 실제적인 것이라고 느끼면서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했다. 그런 만큼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와 담론은 그 자체 역사적 사실로서 현실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복잡한 사정을 고려하면서, 일부 학자들은 파시즘을 두고 정치적 우파의 내용을 급진적인 정치적 스타일로 제시한 운동으로 파악하는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아예 정치적 좌우라는 고답적인 구별을 파시즘 연구에 적용할 수 없다고 보면서, 파시즘을 우파도 좌파도 아닌 제3의 운동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장문석, 파시즘 144p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파시즘의 다른 많은 특징을 부수적인 것으로 격하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그들은 파시즘의 급진적 측면을 과소평가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오직 사회주의만이 진정한 의미의 급진주의다. 그래서 그들은 기성의 행정 엘리트 및 주류 정치인들에 대한 파시스트 운동의 급진적 대항을 '수사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러한 대항의 효과를 바로 보지 못하며, 또한 당의 다른 목표와 상충될 경우 재계의 요구가 무시되었다는 사실을 적절히 설명해내지 못한다.
케빈 패스모어, 파시즘 28p
전체주의라는 개념에 비추어보면, (의회주의자와 독재주의자를 포함한) 보수 진영과 파시스트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보수주의는 교회나 관료, 군, 혹은 군주에 의한 통치를 지지하며, 가족과 사유재산을 보호한다. 반면에 파시즘은 대중에 기반을 둔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부상과 이들이 이끄는 대중 정당을 전제로 한다. 파시즘은 보수주의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사회적 제도나 관습을 위협하며, 그런 점에서는 공산주의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이를 반박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파시스트들과 보수주의자들이 공통의 적을 두고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음을 강조한다.
케빈 패스모어, 파시즘 138p
파시즘은 우파도 아니고 좌파도 아니라기보다는 우파이면서 동시에 좌파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끝으로 파시즘은 카테고리 상으로 명확히 구별되기보다는 우파에서 좌파로 연속되는 폭넓은 정치적 스펙트럼 속에서 식별된다. 이로부터 ‘일반적 개념으로서의 파시즘’에 대한 합의 학파의 정의가 전제하고 있는 파시즘의 고정된 ‘본성’을 상정하기보다는 파시즘을 변화하는 ‘과정’과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장문석, 파시즘의 알리바이? :1930년대 영국과 프랑스의 파시즘을 둘러싼 쟁점과 시각, 영국연구, 2013, vol., no.29, pp. 209-240 (32 pages)#
파시즘에 대한 초기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1933년 코민테른의 테제이다. 이에 따르면, 파시즘이란 “금융 자본의 가장 반동적이고 국수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인 분파의 공공연한 테러 독재”이다. 이 공식 해석에서 파시즘은 명백히 ‘자본주의의 도구’이거나 ‘대자본의 대리인’으로 간주된다. 물론 파시즘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당대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파시스트 운동에서 확인되는 소부르주아 대중의 지지 기반을 강조함으로써 파시즘에 대한 좀더 복합적인 해석을 제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양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들은 기본적으로 파시즘을 자본주의적 계급 관계의 맥락에서 파악하며 그 속에서 대자본의 영향력이 관철된다고 본다는 점에서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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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처럼 파시즘과 대자본의 결탁을 강조하는 해석은 다양한 논자들에 의해 강력히 비판받았다. 이미 오래 전에 데 펠리체(Renzo De Felice)는 파시스트 당의 후원금 기록에 의거하여 파시스트 운동의 실제 기부자들이 개별 동조자들, 상인들, 중소 사업가들, 전문직 종사자들이었음을 밝히면서 거대 자본가들이 파시즘의 강력한 후원 세력이었다는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을 반박한 바 있다. 특히 데 펠리체의 견해의 연장선상에서 멜로그라니(Piero Melograni)의 수정주의적 해석은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관계라는 테마와 관련하여 새로운 정통 해석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그는 제조업 분야의 거대 기업가들이 파시스트 생디칼리슴과 같은 파시즘 내부의 급진적인 경향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는 점을 밝히면서 기업가들이 파시즘을 통제하고 조종했다고 볼 수 없고 파시즘이 대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이었다고 주장했다. 확실히 이러한 견해는 파시즘을 자본주의적 계급 관계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전통적인 관점-다양한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에서 영향을 받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함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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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3일, 밀라노의 산 세폴크로(San Sepolcro) 광장에서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와 190여 명의 파시스트들이 훗날의 ‘파시스트 국민당(Partito nazionale fascista, PNF)’의 전신인 ‘이탈리아 전투단(Fasci italiani dicombattimento)’을 결성했다. 이렇게 파시즘이 이탈리아의 정치 무대에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좌파 운동의 한 변종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초기 운동에 가담한 자들의 경력이 그렇게 보였다. 초기 파시스트들은 대부분 왕년의 공화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생디칼리스트들이었다. 미래주의자들도 우상파괴적인 문화적 좌파로 보였다. 더욱이 전투단이 내건 구호들, 그러니까 21세 이상의 성인남녀의 보통선거권, 상원의 폐지, 8시간 노동제,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반교권주의 등은 그 자체 혁명적이지는 않더라도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국가를 혁신하려는 좌파적 강령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데 펠리체는 이탈리아 파시즘이(독일 나치즘과는 달리) 그 기원상 좌익 급진주의의 특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러나 파시즘이 갖는 정치적 좌파의 이미지는 곧 불식되었다. 파시스트들은 ‘볼셰비즘의 위협으로부터 조국을 구하자’라는 구호 아래 사회당 건물과 노동조합 사무실을 방화하고 사회주의자들과 노동 운동가들에게 린치를 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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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파시즘은 데 펠리체의 생각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정치적 좌파라기보다는 오히려 우파로 인식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톰슨(Doug Thompson)은 파시즘이 줄곧 강조한 바 있는 민족이 “훈육되어야” 하며 강력한 법률에 의해 지배 계급의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부와 특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우파 이데올로기의 핵심이라고 본다. 맨(Michael Mann)도 파시즘이 질서를 숭배하고 사적소유권을 보호하며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와 유기적 민족주의를 포용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우파에 속하는 운동임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파시즘을 정치적 우파의 계보에 위치시키는 것만으로는 파시즘의 특성을 이해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아래로부터의 대중동원과 준군사주의(paramilitarism)가 보통의 권위주의로부터 파시즘을 구별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물론 톰슨도 전통적 우파에서는 볼 수 없는 파시즘만의 새로움이 “모든 이탈리아인들과 직접 소통하는 기회”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에 더 이상 천착하지는 않으며, 파시즘과 우파 정치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데 주력한다. 따라서 파시즘이 종래의 우파와 구별되는 지점을 좀더 분명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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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포는 파시즘 내부에 극우 민족주의 이외에도 극좌 생디칼리슴의 경향이 있음에도 주목한다. 이 ‘혁명적’ 생디칼리슴은 점차 ‘민족적’ 생디칼리슴으로 변형되었는데, 여기서 유의할 대목은 이탈리아의 생디칼리스트들이 혁명을 대체하여 민족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혁명의 주체로서 계급 대신 민족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견해는 파시즘의 분석에 좌/우의 구별뿐만 아니라 급진/온건의 범주도 도입해야함을 시사한다. 사실 루포는 파시즘이 급진주의에 기초한 “20세기에 전형적인 우파의 새로운 존재 방식” 즉 “새로운 우파”라 본다. 그리고 이 때의 급진주의란 정치적 내용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행위 형태의 측면에서 규정된다. 즉 급진주의자는 현재의 상태와 거리가 멀면 멀수록 좋은 것이라는 믿음 아래 미래를 위해 투쟁하며 낡은 세계와의 타협을 경멸하고 이념들과 계급들과 민족들 사이의 공공연한 투쟁의 이념을 고양시키려는 새로운 정치 양식의 옹호자로 간주된다. 결국 이렇게 보면 파시즘은 보수적인 내용을 급진적인(혹은 혁명적인) 방식으로 제기한 새로운 정치 현상인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파시즘의 급진성이 파시스트들과 기업가들이 충돌하게 된 주요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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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스트들과 기업가들의 그러한 불편한 관계는 공공연한 충돌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토리노 파시즘의 지도자 데 베키(Cesare Maria De Vecchi)와 아넬리의 관계이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충돌은 데 베키가 피아트 노동자들의 분노를 이용할 심산으로 해고 노동자들을 원조하기 위해 ‘노동기금’을 만들려고 한 1920년 11월 중순에 발생했다. 그런 가운데 이듬해 1월 17일, 데 베키는 아넬리의 사저 앞에서 피아트 해고 노동자들의 ‘샤리바리(charivari)’를 조직함으로써 그와의 정면대결을 불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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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에도 파시즘과 피아트의 정략결혼은 굳건히 유지되었다. 그러나 두 배우자는 같은 침상에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피아트의 전망은 더 많은 이윤과 경영의 자율성을 최대한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 반면에 파시즘은 전체주의적 권력 독점의 전망 아래에서 사회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부단히 증대시키려고 했다. 물론 이 두 개의 전망은 상당 부분 겹쳐 있었다. 국가가 기업의 특권을 존중해주는 한 국가 통제는 오히려 시장의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기업이 더 많이 생산할수록 기업은 파시즘의 전체주의적 야심을 실현할 수 있는 확고한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그렇지만 기업이 자신의 이윤과 자유를 희생하지 않으려고 할 때, 그것은 파시스트들의 눈에 전체주의 체제에 어울리지 않는 자본주의적 탐욕의 결정체로, 혹은 부도덕한 경제 동물로 비쳤다. 그런가하면 파시스트들이 국가의 우월성을 극한으로 추구할 때, 그것은 기업가들의 눈에 자본주의적 질서를 위협하는 전체주의적 권력의 화신으로, 혹은 현대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야만인들로 비쳤다. 요컨대 기업이 이윤의 논리에 묶여있었다면 파시즘은 권력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양자 사이에는 근원적으로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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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6월 10일, 무솔리니가 베네치아 궁의 발코니에서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탈리아가 2차대전에 참전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알프스 전투, 그리고 잇따른 그리스 및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쟁이 개시되고 전황이 신통치 않자 무솔리니는 책임을 다른 데로 떠넘기려는 태도를 보였다. 특히 ‘부르주아’가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차노(Galeazzo Ciano)는 1940년 8월 12일자 일기에서 부르주아에 대한 무솔리니의 적의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면 나는 소심하고 비열한 부르주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물리적으로 파괴할 필요가 있고, 아마 그 중 20% 정도만, 꼭 그만큼만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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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운데 피아트가 차츰 전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1942년 11~12월 연합구의 토리노 폭격으로 피아트는 참혹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 비상사태에서 발레타는 파시스트 당 고위관료들이 보여준 무능력과 무책임에서 피아트가 느낀 실망감과 불쾌감을 “어느 누구도 감히 입 밖에 내뱉을 수 없는 표현으로써” 그들에게 분명하게 전달했다. 피아트의 체제 이탈을 가속화시킨 계기는 1943년 3월의 토리노 대파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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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1943년 3월의 토리노 대파업 이후 피아트가 보인 행보는 퍽 의미심장하다. 회사의 내부 문서들을 보면, 4월부터 피아트가 군부 고위층 및 왕실 핵심 인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하면 1935년에 사망한 아넬리의 아들이자 피아트의 ‘황태자’ 에도아르도(Edoardo)의 후임으로 피아트 최고경영진에 합류한 반파시스트 자유주의자 비스콘티 베노스타 후작(marchese Giovanni Visconti Venosta)이 비슷한 시기에 옛 자유주의자들 및 졸리티주의자들과 활발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그리고 7월에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한 직후에는 피아트에서 미국 모건은행을 대표하고 있었던 품미(Giovanni Fummi)가 연합국과의 직접적인 통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3월 파업이 갖는 전환점으로서의 성격은 비단 피아트에 국한되지 않는다. 파업 직후 도네가니, 피렐리, 볼피(Volpi)와 같은 주요 기업가들이 연합국 측과 접촉하려고 한 증거들이 있다. 요컨대 3월 파업 이후 피아트 경영진은 물론이요. 상층 부르주아지의 중요한 일부가 파시즘의 붕괴 이전에 그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시즘 편에서도 중요한 변화들이 있었다. 무솔리니는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 직후인 1943년 7월 24~25일에 그란디(Dino Grandi)가 주도한 파시스트 최고평의회의 ‘궁정 쿠데타’에 의해 실각하고 그란 사소(Gran Sasso)의 요새에 감금되었다. 그는 독일 공수부대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 뒤, 1943년 9월 18일 북부에서 독일군의 후원과 재건된 파시스트 조직들을 토대로 이탈리아 사회공화국(Repubblica Social Italiana)을 수립했다. 이 즈음 무솔리니는 자신의 몰락을 설명하는 논리를 개발했는데, 이른바 ‘부르주아지의 배신’이라는 테제가 그것이다. “부르주아지가 배신했다. 우리는 교활한 산업과 그에 못지않게 교활한 은행을 갖고 있다” 이제 파시즘과 부르주아지의 균열은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이상의 과정을 거치면서 파시즘의 집권 이후 줄곧 유지되었던 파시즘과 피아트의 정략결혼의 관계는 끝이 났다. 피아트의 이탈이 이미 파시즘의 붕괴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양자의 관계 결렬은 예정된 이혼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파경은 다른 배우자의 사망, 혹은 사망이 유력해보이던 시점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차라리 사별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이든, 양자의 관계 결렬은 이미 정략결혼 직후부터 잠재해있던 (그러나 종종 수면 위로 부상했던) 긴장과 갈등이 사실상의 패전을 배경으로 표면화된 것이었다. 패전의 상황은 기업가들에게는 과거와의 단절과 적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을 맹목적으로 외치는 파시즘의 관념적인 급진적 성향을, 그리고 파시즘에게는 오직 자신의 생존과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돌보려는 기업가들의 물질적인 부르주아적 성향을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파시즘은 우파 정치와 급진주의를 결합한 새로운 정치 운동으로서 이탈리아의 정치 무대에 등장하여 놀랍도록 짧은 시간 안에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미 운동 초기부터 확인되는 파시즘의 정치적 우파 성향과 급진주의적 색채는 비록 시기에 따라 형태와 의미를 달리 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파시즘이 몰락할 때까지 공존하면서 파시즘과 대기업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변수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먼저 톰슨, 맨, 루포 등의 논의를 토대로 파시즘의 우파정치와 급진주의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 뒤, 이 두 가지 요소들 중 어느 하나를 특권화시키는 대신 두 요소 모두에 관심을 안배하면서 시기에 따라 변화하는 파시즘과 대기업의 관계를 피아트의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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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을 그 자체 권위주의적 우파의 정치적 경향성과 전체주의로 이끌리는 급진적 정치 양식이 모순적인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현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파시즘의 그러한 모순성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이 보여준 파괴력과 동시 그 한계를 단순한 상황론이나 본질환원론이 아니라 철저하게 파시즘의 내적 논리에 따라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다.
장문석, 이탈리아 파시즘과 대기업 : 피아트의 사례를 중심으로, 역사교육, 2005, vol., no.95, pp. 243-274 (32 pages)#

파시즘의 기원인 파쇼는 원래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공동체에서 사용하던 이름이었으며, 초기 파시즘 운동은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물론 파시즘은 극단적인 민족주의 사상이다. 파시즘을 극우로 분류하는 것은 파시즘이 자본가들의 사주를 받은 하수인이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독점자본주의 이론 때문이었는데, 이것은 모순과 한계로 비판받고 사장되었다. 오늘날 파시즘을 극우로 분류하는 경우에는 파시즘의 극단적 민족주의를 지적하지, 파시즘이 극단적 자본주의였다고 주장하는 경우는 없다. 파시즘이 반동적 우파 사상이라는 통설은 1980년대 제브 스테른헬(Zeev Sternhell)이 출간한 저서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Neither Right Nor Left)를 통하여 도전받았다. 그는 왕정복고 근왕주의적 양상이 있는 파시즘들을 극우 파시즘으로, 생디칼리슴과 사회주의 노동조합운동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 파시즘을 극좌적 파시즘으로 분류했다. 제브 스테른헬은 이탈리아 파시즘이 조르주 소렐[1]이나 조반니 젠틸레 같은 아나키스트나 공산주의자와의 연관된 사실을 지적하였다. 합의파 학자들은 무솔리니가 집권한 이후에도 스스로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지적하며, 파시즘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기회주의적 포퓰리즘 세력이며, 파시즘 내에서는 파시즘 좌파와 파시즘 우파가 공존했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좌파도 우파도 아니라는 지적에 반대하여, 좌파인 동시에 우파였다는 의견도 있으며,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을 거쳐서 '혁명적 우파로' 전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파시즘이 민족주의라는 극우적 본질을 사회주의의 이론체계를 통해 구현하려고 한 '혁명적 민족주의'라고 본다. 파시즘의 스펙트럼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냐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2차 세계대전 시기의 후기 파시즘에서는 극우적 성향이 강화되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이러한 좌우 스펙트럼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의 스테른헬 논쟁이후로 벌어진 비교적 최신의 연구동향이므로, 1970년대와 같은 옛날 논문에서는, 지금은 학계에서 사장된 독점자본주의 이론의 흔적이 있다. 물론 파시즘은 여전히 학계에서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극우 이데올로기로 분류되는데## 이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극단적 민족주의(소위 국수주의)적 성격 때문이며[2] 파시즘 특유의 혁명적 성격을 고여하면 일반적인 반동적 극우파와는 철저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파시즘적 생디칼리슴과 같은 조합주의 등은 사회주의적 요소라고 볼 수는 있지만,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를 사회주의의 주체로 보는 마르크스 사회주의와는 다르다. 이것은 기업의 이익과 노동자들의 이익을 파시즘 국가가 통제하는 구조를 일컫는 것이다. 이런 구상들은 집권 이전 포퓰리즘적 구호로 이용되었을 뿐 실제로 파시스트들이 집권하게 되면 이들이 과거에 내세웠던 이데올로기적 정책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고 오로지 총통이나 두체(Duce)에 대한 충성만을 강조한다. "총통은 독일이며 독일은 총통이다"라는 유명한 구호가 이를 증명하며, 나치당의 강령 등을 내세워 사회주의적 요소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히틀러 본인의 행동[3]등 이러한 파시즘의 특성에 대해서 영국의 여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독특한 해석을 한 바 있는데 그녀에 따르면 파쇼란, 대부분 자의식 과잉에 빠져있는 이들이 파쇼가 되기 때문에 항시 자기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세우려 한다고 해석했다. 파쇼들은 기존의 여타 사회 집단에 적대적인 것은 물론이고 같은 파쇼들 사이에서도 적대적인 권력 암투를 계속하기 때문에[4] 충분히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파쇼들이 마르크스 사회주의 노선을 걷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부정하는 제3의 위치[5]를 취하게 된 원인에는 많은 연구가 있다. 파쇼들 중에는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가입한 사람들도 있었고, 파시즘의 민족 공동체에 관한 아이디어는 대부분 아나키즘에서 유입된 것이다. 노동계급이 국민국가와의 협조로 민족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개념은 분명 생디칼리즘의 영향이다.[6] 때문에 이 문제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일단 알아둬야 할 점은, 파쇼들은 어떠한 특정한 사상의 공유를 통해서 생성된 철학적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파시즘이 먼저 있고 그를 공유하는 파쇼들이 파시즘의 가치 아래 모인 것이 아니라, 파쇼라는 집단이 먼저 모여서 활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외부에서 파쇼들의 언행 등을 관찰하다가 정립한 개념이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파쇼들이 서로 모이게 된 배경은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가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 부조리의 원인이 되는 암적 요소들을 제거해야 된다"는 비교적 원초적인 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는 게 통설이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파쇼들이 마르크스 사회주의 노선을 걷지 않은 원인이 비교적 명확해진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심각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는데,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볼셰비즘 혁명가들이었다. 이들은 맑시즘이 볼셰비즘으로 완성(?)된 이후에 나타났다는 점에서 이탈리아에 있던 기존의 사회주의자들과는 차이가 있다.[7] 지금도 같은 사회주의 진영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을 비판할 때 자주 나오는 얘기지만 소비에트 연방이 형성된 이후에는 유럽 전역에 직업적인 혁명가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는데, 이걸 굳이 나쁘게 말하자면 밥만 먹고 다른 사람 마녀사냥이나 하러 다니는 인간들이 늘어났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이런 혁명가들 중 소련 외부에서 활동한 이들은 결국 "우리도 공화국이 돼서 연방에 가입하자"는 주장을 할 뿐이니 마치 외세를 떠받들자는 주장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런 "마녀사냥"과 "매국 행위"에 대항하여 사회의 기본 형태를 지켜야된다는 식의 경계심이 폭발하여 끝내 광기로 이어진 것이 파시즘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8]

경제혼란기에 노동자와 빈민계층이 사회주의 사상에 몰리면, 공산혁명을 방지하기 위하여 자본가와 대기업이 파시즘을 전략적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는 기존 정치권의 자유주의자들마저 공통적으로 보이던 행동이다.[9]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파시즘이 태동했던 대도시 밀라노가 아니라 에밀리아 로마냐(Emilia-Romagna)라는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했던 가난한 농촌이었다. 이 농촌의 지주 계급들은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 자신들의 지배권에 위협이 될까 두려워해 파시즘을 지원한 것이었다. 또한 파시즘이란 사상 자체의 기회주의적인 면도[10] 종래의 경제체제를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그대로 내버려두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

그렇다고 파시즘을 단순히 공산주의자들 때려잡으라고 보수주의 세력이 키운 극우라고 정의하면 크나큰 오류가 생긴다. 대기업들이 나치당에게 지원을 해준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그보다 훨씬 많은 지원을 비파시즘 전통적 보수세력에게 했었다. 기업 관련 기록 문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독일 기업가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할 수 있겠다는 기미만 보이면 어떤 비사회주의 계열에도 지원을 해줬었다. 쉽게 말하자면, 분산투자를 한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시즘 정당이 진짜로 행했던 반 자본주의적 행동을 설명할수 없게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나치당은 1932년 말에 모든 기업 트러스트를 없애는 법안을 지지하고 베를린 운송 노동자 파업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했다.[11] 또한 검은 오케스트라에 의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융커와 군부같은 전통적인 보수 엘리트 세력은, 나치와 권력을 놓고 내부에서 서로 경쟁한 관계였다.

또한 파시스트들은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한다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기업들에게 군수품의 생산량을 할당하며 통제하는 전시계획경제를 시행하였는데, 나치당은 군비경제계획에 부응하지 않는 기업들에 대한 투자와 생산을 강력히 통제하였다. # 반공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이며 국수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파시즘은 근본적으로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사상 내지 체계이기 때문에 자본가들 역시 정권에 충성을 바치지 않으면 상당히 인생이 팍팍해지게 된다. 또한 파시즘의 가장 깊은 기반은 "생계수단이 없으며 사회에 무차별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무법자들"에 있기 때문에[12] 파시즘도 최종적인 목표는 기존 경제체제의 전복이었다. 그러나 이미 파시스트 본인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부정했으므로, 파시즘이 결국 혁명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였다. 즉, 어느 정도 우발적으로 벌어진 면이 있었던 제1차 세계대전과 달리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는 파시즘에 의해 사실상 의도적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2.1. 초기 파시즘과 불온한 혁명성

괴벨스와 공산당의 파업 지도를 담당했던 울브리히트가 각각 <공격>, 또는 파업 시작 때부터 금지되었지만 불법적으로 간행, 배포하고 있던 <적기>에서 '노동자의 억압자'와 '반동'을 비난하고 있는 동안, 파업 이탈을 막으려는 나치와 공산주의의 감시 요원들이 차고지에 대열을 짓고 모여 들었다. 돌격대원들과 붉은전사동맹 소속원들은 공동으로 베를린 거리를 순찰하며 파업 방해자들을 구타하고, 운행 중인 베를린 교통회사의 버스나 전차를 공격하였다. 11월 4일 폭력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파업 참가자들과 경찰의 심각한 충돌이 있었고 3명이 총격으로 사망하고 거의 50명이 부상을 당했다.
베를린 교통회사 파업에서 나치주의자들이 참가한 것은 유산계급의 근원적 공포를 자극했다. 돌격대의 모습, 그들의 투쟁 방식과 당 선전 선동의 사회주의적 구호들은 나치당의 사회주의 진영이 다시 영향력을 확보하였고 극좌파와 극우파가 협력하기 시작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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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선거 이틀 전 파펜이 독일의 모든 방송을 통하여 독일 민족에게 행한 연설은 명백하게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였는데, 이는 나치 운동 내의 갈등을 심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거기서 파펜은 자신이 과거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고 민족의 혁신을 촉구하는 히틀러의 격문"을 신뢰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제 나치주의자들은 "수천 년 역사를 지닌 우리 문화의 죽음"을 의미하는 '신성모독적인 볼셰비즘'과 손을 잡고 제국정부의 경제 프로그램을 좌초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최후의 힘을 발휘하려는 민족에 대한 범죄라는 것이다.
여론으로 나타난 폭풍 같은 격노와 흥분을 보면서 괴벨스는 사회주의적인 행위가 제국의회 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사실을 곧 깨달았다. 그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당의 평판이 불과 며칠 동안 '눈부시게' 올라갔다고 하면서도, 이것이 아직은 선거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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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보아 수도 베를린에서 그들의 득표율은 28.6%에서 26.2%로 떨어졌다. 이에 비해 공산당은 31.3%를 획득하여 베를린의 제1당이 되었고 처음으로 사회민주당을 앞질렀다. 사민당 득표율은 23.3%에 머물렀다.
베를린에서 나치당의 득표율 감소는 전국 평균보다는 낮은 수준이었다. 독일 전체로 볼 때 나치당은 2백만 명 이상의 유권자를 잃었고, 득표율은 37.3%에서 33.1%로 내려앉았다. 그렇지만 196개의 의석을 차지해 여전히 제국의회 최대 정당의 위치는 유지할 수 있었다. 중앙당과 사민당도 이전 선거들에서보다 나쁜 성적을 거두었다. 이에 비해 공산당과 독일국가인민당, 그리고 독일국민당 의회 같은 군소 정당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나치당이 중앙당과 연합하여 의회 과반수를 차지할 가능성은 사라졌고, 이 때문에 독일국가인민당은 캐스팅보트 역할을 다시 얻어낸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괴벨스는 패배의 여파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는 전국적으로 크게 주목받은 베를린 교통회사 파업에 나치주의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주도하였고 이 일로 노동자 계층 유권자들에게 침투할 수 있기를 바랐으나 이는 완전히 실패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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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는 다시 원기왕성하게 투쟁을 시작하겠다고 했으나, 베를린으로 돌아온 직후 당의 "최초의 도전적 분위기"가 "나른한 침체감"으로 변해버렸음을 깨달았다. 곳곳에서 갈등과 분쟁과 불화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패배 후에는 온갖 오물들이 드러나고, 우리는 몇 주 동안이나 이를 기를 쓰고 치워야 한다." 이에 덧붙여 기부금 수입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점점 더 당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는 "돈은 빠져나가기만 한다. 오로지 지급할 돈들, 채무뿐이다." 라고 투덜댔다. 특히 소액 채권자, 물품 공급자, 양복점, 건축업자 등에게 갚아야 할 어음 채무가 문제였다. 채권자들은 나치당이 떠오르고 권력 획득이 가까워지는 듯 보인 시기에는 나중에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되돌려 받을 생각으로 투기를 했는데, 이제 와서 점점 안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시셰 차이퉁>은 딸랑거리는 모금함을 든 돌격대원들이 거리에 넘쳐나 베를린 중심가에서 거지들의 수를 훨씬 능가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조롱했다. 그러한 모금 활동을 "나치당의 겨울 구호 활동을 위하여"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나치당을 위한 겨울 구호 활동"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367~371p
나치당의 경우, 초기에는 독일 공산당과 함께 바이마르 체제 전복을 위해 손을 잡고, 베를린 교통회사 파업에서 공동전선에 돌입하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노선 결과로 전통적인 좌익 정당인 독일 공산당만 노동자들의 표를 흡수하여 이득을 보고, 나치당은 기대했던 좌익 표는 못 얻고, 오히려 우익 표만 이탈하면서 선거에서 참패를 당하고 빚에 쪼들리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초기 파시즘의 노선이 실패로 증명된다.
피우메에서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단눈치오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본 인물은 다름 아닌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그는 전방에서 근무한 짧은 시간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전쟁 기간 동안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인민>(Popolo d' Italia)을 편집하면서 보냈다. 이 신문은 그가 사회당으로부터 축출된 후에 창간한 일간지였다. 그는 아직도 좌파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자신과 사회당으로부터 축출된 다른 인사들이 어떠한 정치적 노선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18년 그는 신문의 명칭을 <전투자와 생산자 일보>로 개정했다. 생산자란 용어는 민족주의자와 노동조합주의자라는 강한 뉘앙스를 풍겼다. 또한 무솔리니가 그 자신을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분리시켜 개입주의자들에게 좀 더 근접시키려 노력하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가 1919년 밀라노에서 새로운 운동, 즉 '전투파쇼 Fasci di Combattimento' 라는 정치단체를 발족시켰을 때 그것의 강령인 상원제의 폐지, 유권자 모임, 전쟁 수익의 몰수, 농민들을 위한 토지 분배 등은 여전히 이탈리아 사회당에 근접한 것이었다.
무솔리니와 다양한 미래파 인사들, 노동조합주의자들, 이 시기에 무솔리니를 지지하고 있던 민족주의자들은 일정한 정치적 목적 없이 헤매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의회의 자유주의를 혐오하고 있었지만 명확한 강령이나 사회주의자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19년 선거에서 무솔리는 곤경에 처했는데, 파시스트 당원이 단 한 명도 당선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솔리니 자신도 자신의 고향이 로마냐의 프레다피오 Predappio 에서 낙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은 유일한 선택은 우익으로의 전환뿐이다. 1920년 파시스트 강령에서 적잖은 좌파적 요소들이 배제되었다. 이제 강령에는 애국심, 전쟁의 정당성, 위대한 국가, 그리고 이 모든 것들과 관련된 이탈리아 사회당에 대한 혐오만이 남아 있었다. 파시즘은 이탈리아 사회의 보수 세력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퍼 듀건,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279~281p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파시스트당의 전신인 전투파쇼가 1919년 3월 23일 밀라노의 산 세폴크로 광장에서 설립되었을 때에, 파시스트들은 독재와 군국주의, 검열에 대하여 반대하였으며, 신분과 계급과 관련된 권위주의적인 직함의 폐지, 농민에 대한 토지분배, 21세 이상의 성인남녀의 보통선거권, 귀족적인 상원의 폐지,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자본에 대한 누진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반교권주의 등 좌익성향의 정책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회당이라는 기존의 좌익정당이 멀쩡히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당 탈당세력들이 사회당이랑 별 차이없는 주장을 해봤자 좌익세력의 표를 얻을리가 없었고, 이러한 좌익 노선의 결과로 파시스트들은 1919년 11월 선거에서 참패하였고, 무솔리니는 우익세력에게 접근하게 된다.

2.2. 후기 파시즘과 우경 기회주의

사건사의 시각에서 보면, 파시즘의 집권은 곧 자유주의의 자살을 뜻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전후에 분출된 전투적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적 선동에 직면해 있었다. 유산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그러한 사회적 소요는 자신들의 재산과 자유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일종의 '대공포'를 야기했다. 그들은 패닉 상태에서 반볼셰비즘의 구호를 외치는 파시스트들 가운데서 반가운 동지를 발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파시스트들의 폭력을 묵인했고, 연합 공천을 통해 파시스트들에게 의석을 제공했다. 물론 자유주의자들은 파시스트 행동대의 과격한 언동에 불안감을 느꼈으나 사회주의자들보다는 파시스트들이 더 다루기 쉬울 거라고 잘못 가정하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파시스트들을 이용해 사회주의자들을 배제한 뒤 파시스트들을 곧바로 내치거나 길들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는 순진한 환상에 불과했다. 손님이 주인을 내쫓고 집을 독차지한 것이다.
장문석, 파시즘 46p
파시즘 운동이 무르익어 권력을 진지하게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파시스트들은 기득권층과 깊이 공조하게 된다. 물론 이탈리아와 독일의 보수층이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범법 행위를 처벌하지 않고 여러 번 묵과해준 것은 사실이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선거와 폭력적 위협을 통해 파시스트당과 나치당이 무시 못할 세력으로 성장하자 보수 세력은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보수파 지도자들은 특히 파시즘을 자기 편으로 흡수할 것인지 아니면 다시 주변 세력으로 돌려보낼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한가지 중대한 사안은 경찰과 사법기관을 통해 파시스트들이 법을 따르도록 강제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 이탈리아와 독일의 보수파 국가 지도자들은 좌파로부터 민중의 지를 빼앗으려는 파시스트들의 폭력을 묵과함으로써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으리라고 생각했다.
파시즘이 권력에 안착하도록 도와준 보수파의 공모는 몇 가지 종류로 나뉜다. 우선, 파시스트들이 좌파를 겨냥해 휘두른 폭력에 대한 공모를 들 수 있다. 독일의 경우 가장 치명적인 결정 중 하나는 폰 파펜이 1932년 6월 16일 나치 돌격대의 행동에 대한 금지 조처를 해제한 것이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행동대는 이탈리아 경찰과 군인의 묵인 내지는 노골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아무 힘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또 다른 공모 형태는 상대의 체면을 높여준 것이었다. 1921년 5월 졸리티가 무솔리니를 선거 연합에 포함시킴으로써 무솔리니의 위신을 높여준 사건은 이미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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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스트들과 보수주의자들이 권력을 나누어 가질 방안을 모색하던 기간은 (이탈리아와 독일 모두) 파시스트나 보수주의자 양쪽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다. 협상을 해봐도 기껏해야 양쪽 모두에게 이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방안만 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좌파가 권력을 장악하거나 군사 독재가 등장해 보수파와 파시스트들을 모두 의회에서 내쫓는 사태를 생각하여 양측 모두 기꺼이 필요한 만큼 의견을 조정해 차선책에 합의했다.
이렇게 파시즘 정당들은 새로운 동맹세력과 더 깊이 공조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당을 분열시키고 일부 순결주의자들을 소외시키는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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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무솔리니는 각기 다른 권력 관계 속에서 이런 '지배를 위한 타협'을 결정했다. 무솔리니의 승리에서는 파시스트 행동대가 매우 중요했으며 선거 정당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다는 사실은 무솔리니가 지역의 파시즘 우두머리들인 라스(ras)에게서 히틀러가 나치 돌격대에게 받은 도움보다 더 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히틀러는 협상에서는 무솔리니보다 좀 더 자유로운 위치였지만, 당 투사들과의 마찰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파시즘 지도자에게는 권력 획득을 위해 보수파 지도자들과 타협을 벌이는 때가 매우 위험한 순간이었다. 지도자가 정치 엘리트층과 비밀리에 거래를 하는 동안 그를 따르던 투사들은 밖에서 참을성 없이 웅성거리며 내통 행위를 비난했다. 1920년 후반에 이미 정당 지도자들과 비밀 협상을 하고 있었던 무솔리니는 크리스마스에 단눈치오를 도우러 피우메에 가지 못했을 뿐더러 1921년 5월에는 졸리티의 선거 연합에 합류하면서 일부 투사들을 실망시켰다. 무솔리니가 1921년 8월 지금까지 적으로 지냈던 사회주의자들과 '강화조약'을 맺자 불만을 품은 추종자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무솔리니는 한시적으로 파시즘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나며 조약을 포기한 뒤에야 간신히 반란 세력을 달랠 수 있었다.
히틀러 역시 권력 획득 과정에서 어떤 거래를 할 때마다 당내의 반발에 부딪혔다. 전(前) 자유군단 지도자이자 베를린과 독일 동부의 나치 돌격대 지휘관이었던 발터 슈테네스(Walter Stennes)는 히틀러의 합법적인 수단을 통한 권력 획득 전략에 반대했다. 슈테네스의 나치 돌격대원들은 승리의 기쁨이 계속 연기되고 낮은 보수를 참고 기다리는 기간이 너무 긴 데다 비(非)군부 출신의 정당 지도부에 복종해야 하는 상황에 격분한 나머지 1930년 9월 베를린의 나치당사를 점거했다. 1931년 2월, 돌격대원들이 노상 폭력 사태를 금지한다는 명령을 따르지 않자 히틀러는 슈테네스를 나치 돌격대에서 쫓아냈다. 격분한 돌격대 대원들은 1931년 4월 당사를 재점령했고, 히틀러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설득한 뒤에야 겨우 폭동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나치 돌격대 과격분자 5백 명이 숙청되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1932년 말 선거 지지율이 하락하고 자금이 바닥을 드러낸 데다 일부 부관들이 전도유망한 미래를 찾아 연립 정부로 떠나버리자, 히틀러는 나치당에 대한 통제권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협상에서의 입지가 좁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굳은 의지와 도박사적 직감만큼은 여전했던 히틀러는 총리직에 전부를 걸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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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진영의 지도자들은 다른 가능성, 예를 들면 온건 좌파와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 또는 왕이나 대통령의 비상권한을 통해 통치하는 것(독일의 경우에는 그 비상 통치를 계속하는 것) 같은 다른 가능성을 거부했다. 보수파 지도자들은 파시즘이라는 대안을 선택했다. 파시즘 지도자들은 그들대로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면 꼭 필요했던 '정상화'를 이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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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보수주의자들은 나치 지식층 일각에서 여전히 내세우던 반(反)자본주의 논리를 우려했고, 이탈리아 보수 세력은 에드몬도 로소니(Edmondo Rossoni, 1884~1965) 같은 파시즘 노동운동가들에게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이미 오래 전에 '생산력주의'와 산업계의 영웅을 찬양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히틀러는 사적인 대담은 물론이고 1932년 1월 26일 뒤셀도르프 기업가 클럽에서 한 유명한 연설을 통해서도 자신은 경제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사회진화론자임을 분명히 밝혔다.
거래를 하려면 히틀러와 무솔리니라는 품위 없는 이단아에게 고위직을 내줄 수밖에 없었지만,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을 영입한 후에도 자신들이 국가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유럽에서는 그렇게 벼락 출세한 정치 초보들이 정부를 이끈 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보수 세력은 한갓 오스트리아계 상병 출신인 히틀러나 풋내기 사회주의자 선동가인 무솔리니는 높은 자리에 앉는다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었다. 교양있고 경험도 풍부한 보수 진영 지도자들의 기지가 없으면 정치를 이끌어갈 수 없으리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요컨대 파시스트들은 좌파와 권력을 나누지 않고도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정권을 유지해 나갈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고, 이 방법은 보수 세력의 사회 경제적 기득권이나 정치적 지배권에 위협을 가하지도 않았다. 또 보수 세력은 그들대로 권력의 문을 여느 열쇠를 쥐고 있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준(準)입헌적 방법으로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입각시켰지만, 이렇게 구성된 연립 정부에서 파시즘 지도자들은 완전한 통치권을 갖지는 못했다. 준(準)합법적 방법으로 입각한 무솔리니와 히틀러에게 주어진 권한은 헌법이 정부 수반에게 허락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실질적인 측면으로 말하자면, 집권 초기에는 보수주의 동맹 세력과 연합을 이루어 통치하느라 권력이 한정되어 있었다. 파시즘 정당들이 연립 정부의 요직을 몇 석 차지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내각에서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곧 두 파시즘 지도자는 이 미약한 거점을 이용해 철저한 독재로 바꿔 나갔다. 준(準)헌법적 정권을 무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개인 독재로 바꿈으로써 국가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권력 강탈'이었다.
로버트 O. 팩스턴, 파시즘 230~245p
실제로 폭력은 이제 뚜렷하게 공산당, 특히 그 군사조직의 일이 되어 버렸다. <적기>가 '나치 병영'에 맞서는 공세를 촉구하고 '나치 병영'의 주소들을 공개하자 돌격대가 모임을 갖는 수집들은 공산당이 선호하는 습격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9월 9일 공산당의 암살 부대가 '추어호흐부르크'라는 술집을 덮쳤다. 습격대가 권총을 난사하고 도망친 뒤 그곳에는 다수의 돌격대원들이 중상을 입고 신음하고 있었으며, 그들 중 몇몇은 곧 사망했다.
그로부터 4주 후에도 피바다를 이룬 사건이 있었다. 20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노이쾰른의 리하르트 거리로 행진해 들어왔다. 그들 중 몇 명은 돌격대 21중대가 모이는 음식점인 '뵈베' 앞에서 대열을 이탈하여, 사람이 많은 그 술집에 무차별 발포했다. 그 결과 10여명의 돌격대가 중경상을 입었고 한 사람은 사망했다. 그는 1931년 정치적인 유혈 충돌로 베를린에서 발생한 29명의 사망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폭력 행위가 늘어나는 것도 모든 계층의 국민들이 계속 나치즘 쪽으로 기우는 데 한몫을 했다. 그들이 늘어놓는 합법성에 대한 신앙고백,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 지도부의 민족주의적 파토스(pathos, 열정)가 효과를 드러냈다. 사회민주주의의 지도급 인사들조차도 소련이 조종하는 공산당이야말로 독일에 진정한 위험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비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나치주의자들에게 동맹자의 역할을 맡겼다.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나치주의자들을 "볼셰비즘의 해일에 대항할 수 있는, 독일에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요새"라고 보았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318~319p
무솔리니는 이러한 통제불능의 파시스트 행동대원들 없이는 어떠한 정치적 힘도 발휘하기 힘들며 연립내각 협상에도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위태로운 정치적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졸리티나 살란드라[13]와 같은 인물들에게 자신은 추종자들과 그들의 파괴적인 욕구에 거의 동조하지 않으며, 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그들을 최대한 억제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켜줘야만 했다. 이와 동시에 자유주의자들과의 협상은 전략적 책략, 즉 단지 트로이의 목마를 이용해 적군의 요새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일단 입성한 후에는 자유주의 정부를 전복시킬 것이라고 못박음으로써 일반 파시스트 당원들을 안심시켜야만 했다. 아마도 무솔리니 자신은 살란드라의 연립내각에 참여한 소수 파시스트 출신의 장관들이 제안한 평화롭고 모두가 함께 구성하는 정부를 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동대원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혁명을 원하고 있었다. 10월 24일 나폴리에서 개최된 파시스트 전당대회에서 4만여 명의 파시스트 행동대원들이 '로마 진군'을 요구했다.
로마 진군의 이념은 이탈리아의 역사에서 태동했다. 마치니, 가리발디 그리고 이들의 민주주의 추종자들에게 로마로의 진군은 국가쇄신의 상징이었으며, '민중' 스스로 민중을 위한 이탈리아를 건설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1922년 10월 28일 파시스트들에 의해 시작된 로마 진군은 이러한 영광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무장도 제대로 하지 않은 세 무리의 젊은이들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수도인 로마로 집결했다. 이들 몇 군데의 우체국과 경찰서, 관청을 점거했다. 무솔리니는 스위스 국경과는 가깝지만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진 밀라노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이 도박이 성공하리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왕은(아직까지도 분명히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군에게 발포 명령을 내려 반란군을 진압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에 무솔리니는 로마에 도착해 이탈리아 역사상 최연소인 39세의 나이로 수상에 취임했다.
로마 진군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분수령을 여겨지지 않았다. 어떠한 폭동이나 시위도 발생하지 않았다. 반복적인 일상생활은 계속되었으며, 언론에서는 이를 전후 이탈리아의 혼란과 폭력에 더해진 또 하나의 사건으로 묘사했다. 지난 몇 년 간의 혼란과 불안이 종식되고 평정을 되찾았다는 안도감이 확산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동대원들이 정부체제의 일부로 흡수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이것이 '현실적' 이탈리아와 '정치적' 이탈리아의 격차를 줄이고 제도를 강화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믿었다. 졸리티와 같은 정치가들은 무솔리니를 은근히 무시했는데, 이들은 그의 천박한 매너와 불안한 처지를 기회로 그를 조종하고 충분히 이용하다가 그가 자신들을 필요로 할 때 제거해버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본질적으로 헌법에 따라 수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파시스트 당원들을 고려해 쿠데타의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행동대원들의 로마 시내 행진이 계획되었다. 이러한 모순적인 출범은 이후 2년 간의 변화를 결정지었다. 무솔리니는 재집권을 위해 유화정책을 폄과 동시에 자신이 여전히 파괴주의자임을 지역의 파시스트 지도자들과 그 추종자들에게 확인시켜주었다. (...) 이러한 상황에서 무솔리니는 안정과 질서, 평정을 되찾기 위한 요구들을 수용했다. 그의 정부는 하나의 '국가적 화해' 를 실천했다. 내각에는 3명의 파시스트 인사가 등용되었고, 그 밖에 자유주의자, 인민주의자, 민족주의자, 철학자 조반니 젠틸레, 2명의 군장성이 임명되었다. 무솔리니는 행동대원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강요했다. 1923년 1월 무솔리니는 그 특유의 영악한 기질을 발휘해 파시스트 치안 담당 의용대를 창설했다. 이 단체는, 적어도 겉으로는 파시스트 혁명을 지원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일반 파시스트 당원들을 통제하고 로베르토 파리나치와 같은 라스[14]들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된 것이었다. 혁명과 폭력에 대한 행동대 지도자들의 집요한 요구는 무솔리니의 신망을 위협했다.
보수 세력의 존경을 끌어내기 위한 무솔리니의 노력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그는 남부 지역의 대토지 소유주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전후 소작인의 토지 점유를 허용했던 법령을 폐지했다. 교회를 고려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을 공공장소에 다시 설치하도록 했으며, 전쟁 기간에 피해를 입은 교회들의 복구를 위해 거액의 자금을 지원했다. 1923년에는 교육개혁을 단행해 초등학교에서의 종교수업을 의무화했다. (...) 존경을 받기 위해 무솔리니가 단행했던 가장 중요한 조치는 1923년 2월 민족주의자들을 파시스트 국민당에 흡수시킨 것이었다. 엘리트주의자, 군주제를 지지하는 사람들, 보수주의적이고 의회에 적대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민족주의자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정치적 관점 때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군장성, 학자, 고위 공무원, 부유한 사업가, 법조인들과 같은 사회 고위층의 지원도 한몫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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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심을 끌어내기 위한 무솔리니의 노력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무솔리니를 헌법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자유주의자들의 목적도 달성된 것 같았다. 사회주의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다. 가톨릭 세력 역시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전후의 경제가 위기에서 벗어나 다시 번영의 단계로 접어들면서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탈리아가 정치적 안정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행동대원들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무솔리니가 의회에서 다수의 세력을 이용해 자유주의 체제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오래전부터 약속된 혁명을 자신들에게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1924년 6월 초 일단의 파시스트 과격주의자들이 개혁사회주의 의원이 자코모 마테오티(Giacomo matteotti)를 납치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이 벌어지기 불과 며칠 전에 마테오티는 으회에서 선거 기간에 자행된 파시스트들의 폭력을 목록으로 작성해 공개하면서 이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무솔리니에 대한 신뢰는 위기를 맞이했다.
무솔리니는 개입 사실을 증명하는 여러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마테오티 살해사건과의 관계를 부정했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파시즘의 성격과 목적, 즉 파시즘이 합법적인 단체인지 아니면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세력인지가 문제였다. 무솔리니는 매우 곤란한 딜레마에 빠졌다. 행동대와 그 단원들의 폭력을 부정하는 것은 가장 헌신적인 추종자들과 분리된 자신을 자유주의 체제의 처분에 내맡기는 것을 의미했고, 반대로 개입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파시즘이 범죄집단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는 함정에 빠졌다. 그는 자유주의적 동지들을 달래기 위해 과거 민족주의자였던 루이지 페데르초니를 내무부장관에 임명하고 파시스트 치안담당 의용대를 군대에 예속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무솔리니의 반대 세력들을 설득시키지도 못했을 뿐더러 행동대원들을 분노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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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 의용대의 지휘관들은 무솔리니에게 반대 정당에 어떠한 행동을 취하거나 아니면 공포정치를 포기할 것을 강요했다. 무솔리니는 더욱 곤경에 빠졌다. 그의 유일한 선택은 독재를 선포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 뿐이었다. 1925년 1월 3일 무솔리니는 의회로 가서 그의 정적들에게 "만약 파시즘이 범죄조직이었다면... 그 책임은 나에게 있다" 라고 선포했다.[15] 그의 연설에 왕도, 반대파의 의원들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전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솔리니의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순간에 그들이 보여준 우유부단한 태도로 인해 이후 자유주의 이탈리아는 실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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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이후에도 정부의 파시스트화 경향은 무솔리니의 전통 엘리트들에 대한 의존이 여전했던 만큼 제한적이었다. 공식적으로 무솔리니는 단지 수상일 뿐이었다. 1922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왕이 그를 수상으로 임명했던 것처럼 강한 압력만 작용한다면 (실제로 그렇게 했듯이) 왕은 언제든지 무솔리니를 사임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무솔리니는 기존의 체제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 비록 정권이 수사학적으로나 형태상으로 상당히 급진적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 실체는 매우 보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일반 파시스트 조직원들은 국가기구를 운영할 만큼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단지 이들 중 소수만이 행정 경험을 가지고 있거나 교육을 받았을 뿐이었고, 다수는 기질적으로나 지적으로 공직을 수행하기보다는 악다구니에 가까운 일에 더 적합한 그런 사람들이었다.
전통 엘리트 계층과의 타협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1월 3일 이후 무솔리니의 주요 임무가 파시스트 행동대의 권력과 독립성을 파괴하는 것이었음을 의미했다. 무솔리니의 전략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2월에 그는 크레모나의 라스로서 비타협적인 성향의 지도자인 로베르토 파리나치를 파시스트 국민당의 당비서로 임명했다. 이러한 결정은 표면적으로는 행동대의 승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는 독이 든 술잔과 같았다. 파리나치에게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 것과 (종종 파리나치 자신도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던) 당을 통제할 것이 요구되었다. 10월에 피렌체의 행동대가 소요를 일으켜 8명의 자유주의자들을 살해했다. 파리나치는 그들의 행동이 '합법적인 분노'의 결과였다고 해명했다. 무솔리니는 그를 신랄하게 비난했고, 몇 달 후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확신했을 때 그를 사임시켜버렸다.
파리나치를 대신해 파시스트 국민당의 당수로 임명된 아우구스토 투라티(Augusto Turatk)는 비교적 타협적인 인물이었다. 무솔리니가 원하는 바에 따라 당 내부의 숙청을 단행해 1926~1929년 대략 6만 명의 당원(대부분이 젊은 행동대원들이었던)을 추방했다. 대부분의 지역구는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들로 완전히 재편되었다.
크리스토퍼 듀건,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288~300p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우에는, 사회민주당마저 민주주의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으로 공산당을 꼽을만큼,[16] 독일 공산당의 정치깡패인 '붉은전사동맹'에 의한 적색 테러가 심각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붉은 2년' 당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폭력적 소요사태가 빈발하였고, 당시 파시스트들이 이에 맞서 싸웠다.

자유주의 리버럴과 같은 보수세력들은 구시대적인 모습의 한계로 대중정치에 미숙했고,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공산주의 확산의 위협에 맞설 수 없다고 판단한 경우에, 대중 선동 잘하는 파시스트 세력을 차악으로 이용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파시스트들을 이용해서 공산주의를 제거하고 나서 파시스트들을 토사구팽하거나 제도권에 편입시켜서 온건하게 길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보수주의자들은 파시즘의 집권을 승인하는 대신에 파시즘이 극좌적 성향을 정리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파시즘의 지도자들은 권력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자신들의 혁명적 이상을 기꺼이 저버렸고, 실용적인 접근을 취하면서 보수세력과 타협하게 된다. 그리하면서 보수세력과의 타협에 실망한 돌격대나 파시스트 행동대처럼 급진혁명을 원하던 과격분자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안심시키려고 노력했고, 집권후에는 이들을 숙청했다.

독일의 경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돌격대를 정리할 것을 요구하였고, 아돌프 히틀러는 마침 너무 나대면서 히틀러 자신의 권위에까지 도전했던 에른스트 룀과 돌격대를 장검의 밤 을 통해 숙청하였다. 이탈리아의 경우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생디칼리슴 노동 운동가와, 파시스트 행동대원들을 좌천시키거나 해임, 탈당시켜서 숙청하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에게 베니토 무솔리니가 총리로 임명되었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되면서 파시즘은 집권에 성공하였다.

파시즘과 전통적 보수세력과의 관계는 보수세력의 구심점의 존재 여부로 갈라지게 된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노환으로 사망으로 보수파의 구심점이 사라진 나치 독일의 경우에는 파시스트 세력이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되며, 전황이 불리해지자 보수파가 히틀러 암살시도와 쿠데타로 최후의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진압당하고 처형된다. 반면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이 보수파의 구심점으로 존재하였던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전황이 나빠지자, 무솔리니가 탄핵당하게 된다. 또한 천황이라는 절대적인 위상의 구심점이 존재하였던 대일본제국의 경우에는 2.26사건 당시 황도파의 쿠데타에 천황이 비협조하여 쿠데타가 실패하고, 파시스트인 황도파 청년 장교들과 기타 잇키는 처형 당했다.

3. 국가협동조합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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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도자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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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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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소렐은 아나키스트가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혁명적 조합주의'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다른 분류이며 소렐은 전자에 속하지 후자에 속하진 않는다.[2] 현대 정치에서 내셔널리즘은 배타주의, 주류 내이션의 사회적 위계 문제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일부 좌익 내셔널리즘을 제외하면 보통 우파와 더 친연성 있는 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며, 특히 평등주의을 전제하지 않은 극단적 민족주의는 우익 이데올로기로 여겨진다.[3] 에른스트 룀을 숙청한 "장검의 밤" 때 나치당 내의 좌파적 인사들까지 함께 죽였다.[4] 무솔리니의 라스 숙청, 히틀러의 장검의 밤[5] 파시즘은 사실 당시의 좌익 사상과 우익 사상을 적절히 혼합한 것이기 때문에 좌도 우도 아닌 제3의 위치로 불렸다. 민족 무정부주의, 민족 생디칼리슴, 페론주의, 슈트라서주의 등이 이에 속한다.[6] 이 때문에 생디칼리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르주 소렐의 경우, 좌우파 모두에게 존경을 받게 된다.[7]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개념이 확실히 잡힌 현대의 기준으론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맑시즘이 볼셰비즘의 형태를 취하는 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다는 걸 생각하면 이러한 차이가 이해되지 않을 것도 없다.[8] 이건 다르게 말하면 소비에트 연방과 그에 동조한 볼셰빅들의 의도와 달리, 분명 유럽 사회 일각에서 보기에는 소련이 주장하는 세계화가 러시아 제국주의의 연장선으로, 그리고 소련의 사주를 받는 혁명가들이 그저 백수 건달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결국 제2 세계가 무너진 지금에 와서는 노동조합의 역할이 곁가지로 밀려나버린 소련식 혁명은 처음부터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9] 독일에서 제1당이지만 불과 32%의 지지율을 얻었던 나치당이 연립정부로 집권한 것도 좌파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여타 정파들이 나치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10] 이는 파시즘이 튼튼한 이론적 근거가 있지 못하다는 점을 나타내기도 한다.[11] 로버트 팩스턴 <파시즘>[12] Zetkin, Clara; Foner, Phillip Sheldon. <Clara Zetkin: Selected Writings>. New York: International Pub, 1984[13] 안토니오 살란드라는 이탈리아 총리를 역임한 자유무역주의자이다.[14]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지방 유력자[15] 번역에 따라서 "만일 파시즘이 범죄 단체라면, 나는 그 범죄 단체의 수장이다" 라고도 번역함[16] 물론 이 쪽은 독일 혁명 당시 스파르타쿠스단 봉기 때 수권정당이랍시고 우파 정치깡패를 앞세워 때려잡은 걸로도 모자라 정식 절차도 없이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참살했으니 이후 이어진 공산당의 사보타주는 자업자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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