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01 08:23:43

페드로 엔리케스 데 아세베도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01818, #a01e1e 20%, #a01e1e 80%, #801818);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rowcolor=#ff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나사우의 엥겔베르트 2세 빌럼 드 크로이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rowcolor=#fff> 스페인령 네덜란드
<rowcolor=#fff>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파르마의 마르가레테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톨레도 루이스 데레케센스 이 수니가
<rowcolor=#fff>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돈 후안 데아우스트리아 파르마-피아첸차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페테르 에른스트 1세 폰만스펠트포어데로르트 오스트리아의 에른스트
<rowcolor=#fff>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페드로 엔리케스 데 아세베도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7세[A]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A]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
<rowcolor=#fff>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프란시스코 데멜로 마누엘 드모라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빌헬름 돈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
<rowcolor=#fff>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루이스 데베나비데스 카리요 프란시스쿠 드모라 이니고 멜코르 데벨라스코 후안 도밍고 데수니가 이 폰세카
<rowcolor=#fff>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카를로스 데아라곤 데구레아 파르마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오토네 엔리코 델카레토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데아구르토
<rowcolor=#fff> 제29대 제30대
막시밀리안 폰 바이에른 이시도로 데라쿠에바 이 베나비데스
<rowcolor=#fff>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rowcolor=#fff>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에우제니오 디 사보이아 비리히 필리프 폰 다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엘리자베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하라흐로라우
<rowcolor=#fff> 제35대 제36대 제37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오스트리아의 카를 루트비히
로렌의 샤를 알렉상드르 작센의 알베르트 카지미어
[A]: 1598년 5월 6일에서 1621년 7월 13일까지 일시적으로 총독이 아니라 주권자였다.
}}}}}}}}}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푸엔테스 데 발데페로 백작
페드로 엔리케스 데 아세베도
Pedro Enríquez de Acevedo, I conde de Fuentes de Valdepero
파일:Pedro_Henriquez_de_Acevedo.jpg
성명 페드로 엔리케스 데 아세베도
Pedro Enríquez de Acevedo
출생 1525년 9월 18일
스페인 제국 카스티야이레온 사모라
사망 1610년 7월 22일 (향년 84세)
밀라노 공국 밀라노
아버지 디에고 엔리케스 데 구즈만
어머니 카탈리나 데 폴레도 이 피멘텔
형제 14명
배우자 후아나 데 아체베도
직위 초대 푸엔테스 데 발데페로 백작, 밀라노 총독,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
1. 개요2. 생애

1. 개요

스페인 제국의 백작, 군인, 정치인. 영국-스페인 전쟁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생애

1525년 9월 18일 스페인 제국 카스티야이레온 자모라에서 제4대 알바 데 알리스테 백작 디에고 엔리케스 데 구즈만과 디에고 엔리케스의 두 번째 부인인 카탈리나 데 톨레도 이 피멘텔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5명의 자녀를 둔 가족에게서 태어났다. 또한 제3대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톨레도는 그의 삼촌인 동시에 그의 이복누이인 마리아 엔리케스 데 톨레도 구즈만과 결혼했기에 그의 처남이기도 했다.

가난한 집안에 가신도 없었던 페드로 엔리케스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군대에 일찍이 입대한 뒤 오랜 세월 하급 기사로 활동했다는 것만 전해진다. 40대에 접어든 1572년 후아나 데 아세베도와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었다. 이 결혼 이후, 스페인 제국의 군주 펠리페 2세는 공식 문서에서 그를 푸엔테스 데 바데페로 백작 페드로 엔리케스 데 아세베도라고 칭했고, 그는 이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오랜 세월 별다른 행적을 남기지 못하고 군대에 복무하던 페드로 엔리케스는 1585년 60세의 나이에 그가 무척 용맹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펠리페 2세의 주목을 뒤늦게 받아서 사절로서 토리노로 파견되어 사보이아 공작과 접견해 프랑스 가톨릭 동맹에 대한 지원을 확약받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 후 밀라노 총독 산초 데 게바라 이 파디야의 지휘 아래 밀라노 기병대 대장에 발탁되어 1588년까지 복무했다.

1588년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해 리스본에서 함대를 준비하고 있던 초대 산타크루스 후작 알바로 데 바잔 이 구즈만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1589년 2월 포르투갈 육군 사령관이 되었다.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노리스가 이끄는 잉글랜드 대함대의 스페인 원정이 발발하자, 그는 리스본 수비대 7,000명을 지휘해, 초대 산타크루스 후작의 동생인 알론소 데 바잔의 해군과 함께 침략자에 맞서 항전해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잉글랜드군을 물리치면서 펠리페 2세의 신임을 얻은 푸엔테스 백작은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 투입되어 네덜란드 방면 스페인군 총사령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에게 해임을 통보하는 임무를 맡았다. 1592년 6월 4일,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총독부에 푸엔테스 백작의 파견을 통보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푸엔테스 백작은 1592년 11월 23일 브뤼셀에 도착했다. 그러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에 대항한 원정을 떠났다가 코드벡 공방전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하여 12월 3일 아라스에서 푸엔테스 백작을 만나지 못한 채 사망했다.

1593년 2월, 펠리페 2세는 푸엔테스 백작을 네덜란드 방면 스페인군 총사령관으로 선임했다. 당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민심은 매우 불안정했고, 군대는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해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몰렸다. 푸엔테스 백작은 전쟁 위원회의 왕실 비서인 에스테반 데 이바라의 협력받으며 병사들의 급료에 쓰일 재정을 확보해 군대의 질서를 확립했으며,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았다. 또한 펠리페 2세는 그를 네덜란드 임시 총독으로 선임했다.

1592년 12월 12일, 푸엔테스 백작은 국왕을 대신하여 네덜란드 국무원에서 페터 에른스트 1세 만스펠트포르데로르트를 네덜란드 총독으로 확정하는 선언문을 반포했다. 하지만 펠리페 2세는 만스펠트가 고령이라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끼고, 1593년 2월 4일 푸엔테스 백작에게 특허를 발급했다. 이 특허에는 만스펠트가 사망할 경우 푸엔테스 백작이 임시 총독으로 다시 선임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한 펠리페 2세는 2월 25일에 푸엔테스 백작을 "모든 민족 군대의 사령관"으로 선임한다는 특허장을 발급하면서, 이 직함을 신중하게 사용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날, 왕은 만스펠트에게 푸엔테스 백작이 원정을 떠날 때 일상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브뤼셀에 남아 있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만스펠트는 왕의 명령에 불복종했다. 그는 총독으로서 자신의 지위가 군사 원정을 지휘할 권한을 부여한다고 믿었다. 그는 푸엔테스 백작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여러 정책에서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푸에테스 백작은 군대의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1593년 1월 5일 군사령을 공표했다. 이에 따르면, 포로와 포로 또는 포로와 몸값을 교환하는 걸 금지하고, 모든 적군 포로를 즉시 교수형에 처할 것이며, 이 명령을 준수하지 않는 자들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네덜란드 공화국스타트허우더 마우리츠는 이에 대응해 적에 대해 동일한 정책을 시행했다. 푸엔테스 백작의 이 명령은 스페인군 내부에 혼란과 불안을 일으켰고,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모든 협상을 무산시켰다.

푸엔테스 백작과 만스펠트 간의 갈등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펠리페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에르네스트 대공을 네덜란드의 실질적인 총독으로 임명하기로 하고, 푸엔테스 백작에게 대공이 도착하기 전에 군대를 개혁하는 임무를 맡겼다. 오스트리아의 에르네스트 대공은 1594년 1월 30일 브뤼셀에 도착했다. 늙고 병들었으며, 사치스럽고 조직력이 부족했던 만스펠트에게 불만이 많았던 플란데런 주민들은 젊은 에르네스트 대공을 열렬히 환영했다. 오스트리아의 에르네스트 대공은 푸엔테스 백작의 역량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1594년 8월 프랑스 방면 스페인군 사령관으로 선임해 만스펠트와 그의 적대 관계를 종식하려 했다.

푸엔테스 백작은 프랑스 방면 스페인군 사령관으로서 캉브레를 공략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병력과 군자금이 부족해지자, 카스텔레를 공격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려 했다. 그는 자신이 왕에게만 책임을 지는 대장이라는 칭호를 얻었다는 걸 근거로 삼아 작전 목표 변경을 정당화했지만, 에르네스트 대공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논쟁으로 프랑스로의 원정이 지연되던 1595년 2월, 오스트리아의 에르네스트 대공의 건강이 악화했다. 대공은 만스펠트가 정식 총독을 맡기를 희망했지만, 만스펠트가 너무 늙었다는 비서 에스테반 데 이바라의 조언을 듣고, 푸엔테스 백작이 자신이 사망할 경우 국왕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총독직을 맡기로 했다. 대공은 1595년 2월 20일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푸엔테스 백작은 대행 총독 직위를 마지못해 수락했다는 것을 펠리페 2세에게 알렸다. 국무원은 그의 선임을 수락했다.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밑에서 부총독을 지낸 제3대 에르스코트 공작 필리프 드 크루이는 자기가 아닌 그가 총독으로 선임된 것에 항의했지만, 국무원은 전임 총독의 추천을 받았고, 이전에 대행 총독을 맡은 바 있었던 푸엔테스 백작을 믿기로 하고,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1595년 2월 8일, 샤를 에로지에르가 이끄는 네덜란드군이 마우리츠의 지시에 따라 속임수를 써서 리에주 주교령에 속한 위이 마을을 점령했다.(위이 습격) 푸엔테스 백작은 즉시 군대를 동원해 위이 공성전을 단행했고, 에로지에르는 3월 21일 구출의 희망이 없자 협상 후 항복했다. 푸엔테스 백작은 항복 협정을 무시하고 에로지에르를 포함한 모든 적을 학살하려 했지만, 기병대를 지휘하는 라모트의 영주 발랑탱 드 파르디외와 다른 영주들이 강하게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위이 성채와 마을은 리에주 주교에게 반환되었다.

1595년 4월 중순, 푸엔테스 백작은 아브르 후작 샤를 필리프 드 크루이의 주장에 따라 네덜란드 공화국과 평화를 협상했다. 마우리츠는 오직 스페인령 네덜란드 대표들과 협상하고 싶어 했고, 다른 누구와도 협상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푸엔테스 백작은 왕의 대표단이 참석하지 않는다면 협상은 성립되지 않는다며 난색을 보였고, 결국 타협은 이뤄지지 않았다. 1595년 5월 2일, 펠리페 2세는 푸엔테스 백작에게 자신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베르트 7세가 새 총독으로 부임할 것이라고 알렸다. 푸엔테스 백작은 이를 의회에 발표하고, 에른스트 7세가 도착할 때까지 네덜란드 총독을 맡는 걸 승인받았다.

1595년 7월 25일, 마우치츠가 1차 흐룬로 공방전을 단행했지만, 크리스토발 데 몬드라곤이 이끄는 스페인군의 반격을 받자, 라인 강 너머로 후퇴하면서 많은 장비를 버렸다. 이후 프랑스 국왕 앙리 4세가 아르투아와 에노를 탈환하기 위해 쳐들어오자, 푸엔테스 백작은 각 지방의 군대를 동원했지만 병력이 부족하여 앙리 4세에 맞서 반격 작전을 쉽사리 전개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수아송 등 프랑스 북부 도시들의 자발적인 반란을 희망했다. 어렵게 군대를 일으킨 푸엔테스 백작은 르 카틀레, 둘랑, 캉브레를 차례로 점령했다. 그러나 앙리 4세를 대신하여 군대를 이끈 부용 공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가 함 마을을 점령한 뒤 압박해 들어오면서 행동에 제약받았고, 가톨릭 동맹군 내 여러 인사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앙리 4세에게 굳이 대적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하나둘씩 앙리 4세에게 귀순하면서 점차 위축되었다. 1595년 11월 프랑스 가톨릭 동맹의 지도자인 마옌 공작 샤를 드 로렌이 앙리 4세에게 투항하면서, 프랑스 가톨릭 동맹은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1596년 2월 1일, 푸엔테스 백작은 펠리페 2세에 의해 네덜란드 총독 겸 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알베르트 7세의 브뤼셀 입성에 참여했다. 그 후 3월 8일 스페인으로 돌아간 그는 1598년 임종을 눈앞에 둔 펠리페 2세로부터 스페인 국가평의회와 전쟁평의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펠리페 2세 사후 펠리페 3세가 등극한 뒤, 그는 스페인 정부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대표적인 강경파로, 펠리페 3세의 총신인 레르마 공작 프란시스코 데 산도발 이 로하스의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과 화해하자는 주장에 반대했다.

1600년 5월 19일, 푸엔테스 백작은 밀라노 공국 총독에 선임되었다. 그는 그해 8월 밀라노에 도착한 뒤 밀라노와 사보이 공국, 피옴비노 공국 내에 용병 부대를 상주시키고 스페인이 북부 이탈리아에서 이득을 확보할 수 있도록 강경책을 밀어붙였다. 스페인 영지 내 이탈리아인들의 분규를 무력으로 제압했고, 도시 국가간의 분란을 부추겨서 스페인에 맞서 힘을 합칠 여지를 없애려 했다. 1601년 1월, 앙리 4세를 타도할 반역을 꾸미는 음모자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음모는 발각되었고, 앙리 4세는 푸엔테스 백작이 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해임을 요구했지만, 펠리페 3세는 이를 부인하고 푸엔테스 백작의 직위를 유지했다.

1602년 1월 31일, 프랑스와 스위스가 졸로투른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스위스 13개 주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을 것이며, 그랑송 주는 프랑스군이 자국 영토를 통과하는 걸 승인했다. 이 경로는 이탈리아에서 네덜란드로 향하는 스페인군의 통행로이기도 했기에, 이곳이 프랑스의 손아귀에 넘어간다면 네덜란드 방면 스페인군의 안위가 위험해질 것이었다. 스페인 정부는 이 조약을 스페인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한 스위스, 베네치아 공화국, 토스카나 대공국간의 동맹이라고 해석했다.

푸엔테스 백작은 이 협정에 대응하기 위해 스위스와 롬바르디아의 곡물 무역을 차단해 스위스인들을 굶기기로 하고, 이를 위해 1603년 10월 27일 자신의 이름을 딴 푸엔테스 요새를 발텔리아 지역 입구인 콜리코 인근 파안디스파냐의 교차로에 세웠다. 또한 스위스 내 가톨릭을 신봉하는 칸톤들을 부추겨서 스위스 동맹 내 분열을 조장하려 했다. 그러나 이 조치로 인해 스위스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무역, 특히 베네치아 무역이 큰 방해를 받으면서 스페인 당국에 항의가 쏟아지자, 스페인 당국은 푸엔테스 백작이 동의 없이 요새를 건설한 것을 비난하고, 스위스에 이 "사소한 국경 분쟁"에 관해 푸엔테스 백작과 직접 해결하라고 권유했다. 그 후 푸엔테스 백작은 스위스와 협상한 끝에, 롬바르디아와 스위스의 무역을 허용하는 대가로 스페인군이 네덜란드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을 얻어냈다.

1605년, 스페인 제국에 귀속된 밀라노 공국의 봉건적 권리를 회복하기로 한 푸엔테스 백작은 베네치아, 제노바, 토스카나에 속한 영지를 포함한 루니지아나의 모든 영주에게 스페인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다. 그는 영주들이 이에 불복해 저항한다면, 이를 빌미로 삼아 스페인의 영역을 대거 확장할 전쟁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스페인 당국이 이를 저지하면서,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1610년 5월, 푸엔테스 백작은 자신의 건강이 악화하고 있음을 펠리페 3세에게 알렸다. 이에 국왕은 그에게 후임자를 밀라노 총독으로 선임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지시를 전해 듣기 전인 1610년 7월 22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