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7 23:08:17

필 심스

슈퍼볼 우승 반지
XXI XX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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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필 심스.we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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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자이언츠 No. 11
필립 마틴 심스
Phillip Martin Simms
출생 1954년 11월 3일 ([age(1954-11-03)]세)
켄터키 주 스프링필드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가족 관계 아내, 2남 1녀[1]
출신 대학 모어헤드 스테이트 대학교
신체 191cm / 98kg
포지션 쿼터백
프로 입단 1979년 드래프트 1라운드 7순위
뉴욕 자이언츠 지명
소속 구단 뉴욕 자이언츠 (1979~1993)
수상 2× Super Bowl champion (XXI, XXV)
Super Bowl MVP (XXI)
2× Pro Bowl (1985, 1993)
First-team All-Pro (1986)
NEA NFL Most Valuable Player (1986)
New York Giants No. 11 retired
New York Giants Ring of Honor
1. 개요2. 커리어
2.1. 학창 시절2.2. NFL 커리어2.3. 은퇴 이후
3.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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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직 미식축구 선수이며 포지션은 쿼터백이다. 소속 팀은 뉴욕 자이언츠였고 선수 생활 전부를 자이언츠에서만 뛴 원 클럽 맨이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뉴욕 자이언츠를 이끌었던 쿼터백으로 슈퍼볼 우승 2회를 이끌었다. 현재는 해설자로 활약하고 있다. CBS-TV의 NFL on CBS의 고정 패널로 활동 중.

슈퍼볼 XXI의 MVP를 수상했으며 슈퍼볼 패스 성공률 1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무려 88%(22회 성공/25회 패스).

2. 커리어

2.1. 학창 시절

켄터키주 스프링필드의 농장에서 태어났다. 초등학생 시절에 가족이 스프링필드에서 루이빌로 이사했고, 서던 고등학교에 다니며 풋볼 팀인 트로전스의 쿼터백을 맡았다. 대학에서는 모어헤드 스테이트 이글스에서 뛰었으며 좋은 활약을 했다. 대학 시절 33,462야드를 기록했다.

2.2. NFL 커리어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의 빌 월시 코치는 심스를 보고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조 몬태나보다도 심스를 뽑고 싶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심스는 전국적인 인지도로 따지면 무명에 가까웠고[2] 극성스러운 뉴욕 팬들은 뉴욕이 1라운드 7픽으로 심스를 깜짝 선발하자 야유를 보냈다. 심스는 내심 그린베이 패커스에서 뛰고 싶었다고 고백했지만 스프링캠프에서 동료들과 잘 융화되었고 팀에 받아들여졌다.

루키 시즌 심스는 5경기에서 선발 쿼터백으로 나섰고 6승 4패를 기록했다. 터치다운은 13개를 성공. 올루키 팀에 이름을 올렸고 그해의 신인왕 투표에서는 2위를 차지했다.

1982년까지 심스는 부상으로 인해서 자주 경기를 빠졌는데 1981년에는 팀을 플레이오프에 보냈지만 1982년에는 부상으로 시즌을 통째로 쉬었다. 이 시즌 이후 레이 퍼킨스는 감독직을 사임하고 앨라배마 대학교로 떠났고 그 자리에 자이언츠의 명장 빌 파셀스가 부임해오게 된다.

파셀스는 부상을 입었던 심스 대신에 선발 쿼터백으로 스콧 브루너를 기용하려 했고 심스는 화가 나서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하기도 했다. 1983년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서 부진하던 브루너 대신 쿼터백으로 들어온 심스는 엄지손가락에 큰 부상을 입고 또 시즌을 쉬게 된다.

이렇듯 부상이 잦던 심스에게 극성스러운 뉴욕 팬들은 무자비한 야유를 보냈고 심스의 부인이 경기장에 앉아 있는 게 괴로웠다고 회상할 정도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다. 절치부심한 심스는 Ron Erhardt 코치와 함께 수많은 경기들을 돌려보고 공부하면서 부상 기간 동안 복귀를 준비했다.

1985년 시즌에 심스는 기량이 놀랍도록 발전하였고 자이언츠는 1985년에 1963년 이후 처음으로 10승을, 1986년에는 14승을 올리면서 강팀으로 진화한다.

그리고 1987년 슈퍼볼 XXI에서 덴버 브롱코스존 엘웨이를 농락하면서 대활약. 빌 파셀스 감독에게 "쿼터백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플레이"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뉴욕 자이언츠에 첫 번째 우승을 안기고 MVP에 선정된다. 우승 인터뷰에서 "난 디즈니 월드에 갈 거예요!"라고 외친 최초의 선수이기도 하다.

이후 계속해서 자이언츠와 심스는 우승에 도전했고 1991년 슈퍼볼 XXV에 진출하지만, 시즌 막바지 버펄로 빌스와의 경기에서 심스의 발이 부러지는 바람에 제프 호스텔러가 대신 쿼터백으로 나선다. 그럼에도 팀은 버펄로 빌스에 승리하면서 2번째 슈퍼볼 우승을 한다.

슈퍼볼 우승 이후 빌 파셀스 감독이 떠나고, 심스는 주전 쿼터백으로 다시 나섰지만 팔 부상으로 시즌을 다시 쉬게 된다. 1992 시즌에는 6승 10패에 그쳤으나, 1993 시즌에 11승 5패를 기록하며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다.

1993년 시즌이 끝나고 심스는 어깨 수술을 받고 복귀할 준비를 하지만 뉴욕 자이언츠는 심스를 방출한다. 그 이후 1994년에 애리조나 카디널스, 1995년에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등 복귀를 고려해 보지만 결국 심스는 은퇴한다. 심스를 방출한 이후 자이언츠의 구단주 웰링턴 마라는 "너무나 큰 슬픔의 날"이라면서 슬퍼했다고 한다.[3]

자이언츠의 쿼터백 분야 대다수의 기록을 가지고 있었지만 똑같이 2번의 우승을 기록한 후배 일라이 매닝에게 상당수 기록들이 경신되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2001년 심스를 '가장 과소평가된 쿼터백'이라고 표현했다.

2.3. 은퇴 이후

심스는 1995년 9월 4일 댈러스 카우보이스와의 경기 도중 하프 타임에 은퇴식을 가졌다. 심스는 마지막으로 한 번 패스를 해보고 싶다며 동료였던 로렌스 테일러에게 패스를 던졌다. 심스는 이때 패스가 제대로 안 될까 봐 긴장했는데 다행히도 LT는 패스를 잘 받아주었고 성공적인 은퇴식 세리머니로 남았다.

이후 NBCCBS에서 해설 위원으로 활약. 슈퍼볼의 해설도 맡으면서 방송인의 길을 걸었다.

현재 심스는 가족들과 뉴저지에 거주하고 있으며 2011년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3. 그 외

백인 신사다운 외모이지만 불같은 성격이며 빌 파셀스 감독과도 싸운 적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파셀스 감독도 성격으로 치자면 둘째 가라면 섭섭하다고 할 정도로 한 성격하기로 악명 높은 인물인데, 그런 감독과도 한바탕 할 정도면 대단한 인물이다. 한 경기에서 작전이 제대로 된 결과로 나오지 않아 사이드라인으로 들어가 말다툼을 하던 중, 작전 좀 제대로 내보란 식으로 쏘아붙이자 "감독은 나야, 나대지 마!"라고 파셀스 감독이 응수한 일화는 널리 알려진 사실.

[1] 그의 아들인 크리스 역시 NFL에서 활약했으나 아버지와 같은 족적은 남기지 못했고 현재는 NFL 기자 출신인 마이크 플로리오(Mike Florio)와 함께 Pro Football Talk를 진행 중이다.[2] 사실 그의 모교인 모어헤드 스테이트 대학교는 미국 내에서도 듣보잡이다. 이름을 말하면 "어디?"라고 되물을 확률이 십중팔구다. 다만 2011 NCAA 남자 농구 토너먼트 남서부 지역 2라운드에서 당시 4번 시드이자 강호였던 루이빌 대학교를 62-61로 꺾는 파란을 일으킨 적은 있다. 당시 모어헤드 스테이트는 13번 시드였다.[3] 이는 심스 방출이 본인의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구단 운영은 조지 영 단장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