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2 23:53:39

하동도


당나라의 행정구역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정관 10도 (627년 ~ 733년)
관내도 하남도 하동도 하북도 농우도
산남도 검남도 회남도 강남도 영남도
개원 15도(733년 ~ 907년)
관내도 도기 하남도 경기 하동도
하북도 농우도 산남동도 산남서도 검남도
회남도 강남동도 강남서도 검중도 영남도 }}}}}}}}}


1. 개요2. 하위 행정구역
2.1. 하중부(河中府)2.2. 강주(絳州)2.3. 진주(晉州)2.4. 습주(隰州)2.5. 분주(汾州)2.6. 자주(慈州)2.7. 노주(潞州)2.8. 택주(澤州)2.9. 심주(沁州)2.10. 요주(遼州)2.11. 북경태원부(北京太原府)2.12. 대주(代州)2.13. 울주(蔚州)2.14. 흔주(忻州)2.15. 남주(嵐州)2.16. 헌주(憲州)2.17. 석주(石州)2.18. 삭주(朔州)2.19. 운주(雲州)2.20. 선우도호부(單于都護府)

1. 개요

하동도(河東道)는 당나라의 최상위 행정구역인 (道) 중 하나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산서성 일대를 관할했다. 여기 적힌 정보들은 《구당서》 39권 지리지2과 《신당서》 39권 지리지3의 정보를 기준으로 한다.

2. 하위 행정구역

2.1. 하중부(河中府)

하중부의 전신은 하동군(河東郡)으로 북위 때 신가(神䴥) 원년(428년) 옹주(雍州)가 설치되었으며, 연화(延和) 원년(432년) 태주(泰州)로 개칭되었다. 이후 태주는 태화(太和) 연간에 폐지되었다가 북주 때 포주(蒲州)로 다시 설치되었으며, 수나라 때 주현제가 실시되면서 하동군이 폐지되었다. 양제가 즉위한 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포주는 하동으로 개편되었다.

당나라가 들어선 뒤 하동군은 다시 포주로 개편되었으며, 개원(開元) 8년(720년) 중도(中都)가 설치되고 하중부로 승격되었지만 나중에 다시 포주로 격하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하동군이 되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포주가 되었다. 건원(乾元) 3년(760년) 다시 하중부로 승격되었고 761년 중도가 되었지만 원화(元和) 3년(810년) 다시 중도의 지위를 상실했다.

2.2. 강주(絳州)

강주의 전신은 북위 때 설치된 동옹주(東雍州)로 북주 때 강주로 개칭되었다. 수나라 때 양제가 즉위한 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강군(絳郡)으로 개편되었으며, 당나라가 들어선 뒤 강주로 개편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강군이 되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강주가 되었다.
    • 곡옥현(曲沃縣)[1], 강현(絳縣), 직산현(稷山縣)[2], 원현(垣縣), 양릉현(襄陵縣)[3]

2.3. 진주(晉州)

진주의 전신은 평양군(平陽郡)으로 북위 때 당주(唐州)가 설치되었고 뒤에 진주로 개칭되었다. 수나라 때 양제가 즉위한 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임분군(臨汾郡)으로 개편되었다. 의녕(義寧) 2년(618년) 평양군으로 개칭되었다가 당나라가 들어선 뒤 진주로 개편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평양군이 되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진주가 되었다.
    • 임분현(臨汾縣)[4], 홍동현(洪洞縣)[5], 신산현(神山縣)[6], 악양현(岳陽縣)[7], 곽읍현(霍邑縣)[8], 조성현(趙城縣)[9], 분서현(汾西縣), 기씨현(冀氏縣)[10]

2.4. 습주(隰州)

2.5. 분주(汾州)

2.6. 자주(慈州)

동위 때 남분주(南汾州)가 설치되고 북제 때 분주, 북주 때 서분주(西汾州)로 개칭되었다. 수나라 개황(開皇) 16년(596년) 경주(耿州)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분주로 개칭되었고 양제가 즉위한 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문성군(文成郡)으로 개편되었다. 무덕(武德) 원년(618년) 분주(汾州)로 개편되었고 무덕(武德) 5년(622년) 남분주(南汾州)로 개칭되었다가 무덕(武德) 8년(625년) 자주로 다시 개칭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문성군이 되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자주가 되었다.
    • 길양현(吉昌縣)[11], 문성현(文城縣)[12], 창녕현(昌寧縣), 여향현(呂香縣)[13], 오성현(仵城縣)[14]

2.7. 노주(潞州)

노주의 전신은 상당군(上黨郡)으로 북주 때 노주가 설치되었다. 수나라 때 주현제를 실시한 이후로도 노주라는 지명이 유지되다가 양제가 즉위한 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상당군으로 개편되었다. 당나라가 들어선 무덕(武德) 원년(618년) 다시 노주로 개편되었으며,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상당군이 되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노주가 되었다.
    • 상당현(上黨縣), 호관현(壺關縣)[15], 장자현(長子縣)[16], 둔류현(屯留縣)[17], 노성현(潞城縣)[18], 양원현(襄垣縣)[19], 여성현(黎城縣)[20], 섭현(涉縣), 동제현(銅鞮縣)[21], 무향현(武鄕縣)[22]

2.8. 택주(澤州)

2.9. 심주(沁州)

의녕(義寧) 원년(617년) 심원현(沁源縣)에 의녕군(義寧郡)을 설치했다. 당나라가 들어선 무덕(武德) 원년(618년) 심주로 개편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양성군(陽城郡)이 되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심주가 되었다.
    • 심원현(沁源縣)[23], 화천현(和川縣)[24], 금상현(綿上縣)[25]

2.10. 요주(遼州)

전신은 태원군(太原郡) 요산현(遼山縣)으로 무덕(武德) 3년(620년) 병주의 4개 현을 분할하여 요주를 설치했다. 무덕(武德) 8년(625년) 기주(箕州)로 개칭되었고 선천(先天) 원년(712년) 의주(儀州)로 다시 개편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낙평군(樂平郡)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의주(儀州)가 되었고 중화(中和) 3년(883년) 다시 요주로 개칭되었다.
    • 요산현(遼山縣)[26], 유사현(楡社縣)[27], 화순현(和順縣)[28], 평성현(平城縣)

2.11. 북경태원부(北京太原府)

남북조시대까지 병주(幷州), 태원군(太原郡)으로 불린 곳으로 수나라 때 주현제를 실시하면서 병주가 되었다. 양제가 즉위한 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태원군으로 개편되었다.

수나라 말인 617년 태원 유수였던 이연은 여기서 거병하고 다음해에 당나라를 세웠다. 측천무후는 스스로 제위에 오른 뒤 천수(天授) 원년(690년) 이곳에 북도(北都)를 세웠으며, 신룡(神龍) 원년(705년) 중종의 중조에 따라 북도는 폐지되었다. 개원(開元) 11년(723년) 병주에 북도(北都)를 다시 세웠으며, 병주는 태원부(太原府)로 승격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북도를 북경(北京)으로 개칭했다가 상원(上元) 2년(761년) 해당 명칭을 폐지했고 머지않아 다시 북도라고 하였다.
    • 태원현(太原縣), 진양현(晉陽縣), 태곡현(太谷縣)[29], 문수현(文水縣)[30], 유차현(榆次縣), 우현(盂縣)[31], 청원현(清源縣)[32], 교성현(交城縣)[33]

2.12. 대주(代州)

2.13. 울주(蔚州)

전신은 안문군(雁門郡) 영구현(靈丘縣)으로 수나라 말 유무주에게 점령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유무주를 평정한 이후 무덕(武德) 6년(623년) 울주가 설치되었다. 치소는 병주(幷州) 양곡현(陽曲縣)에 임시로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7년(624년) 대주(代州) 번치현(繁畤縣)으로 옮겨졌고 다음해에 흔주(忻州) 수용현(秀容縣) 북항주성(北恆州城)으로 옮겨졌다가 정관(貞觀) 5년(631년) 다시 치소를 옮겼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안변군(安邊郡)으로 개편되었으며, 지덕(至德) 2재(757년) 흥당군(興唐郡)으로 개칭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울주가 되었다.
    • 영구현(靈丘縣)[34], 비호현(飛狐縣)[35], 흥당현(興唐縣)[36]

2.14. 흔주(忻州)

전신은 누번군(樓煩郡) 수용현(秀容縣)으로 이연이 거병한 뒤 신흥군(新興郡)이 설치되었다. 무덕(武德) 원년(618년) 흔주로 개편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정양군(定襄郡)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흔주가 되었다.
    • 수용현(秀容縣), 정양현(定襄縣)[37]

2.15. 남주(嵐州)

전신은 대업(大業) 4년(608년)에 설치된 누번군(樓煩郡) 남성현(嵐城縣)으로 수나라 말 유무주에게 점령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유무주를 평정한 뒤 동회주(東會州)가 설치되었다. 이후 동회주를 폐지하고 남주를 설치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누번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남주가 되었다.
    • 의방현(宜芳縣)[38], 정락현(靜樂縣)[39], 합하현(合河縣)[40], 남곡현(嵐穀縣)[41]

2.16. 헌주(憲州)

2.17. 석주(石州)

2.18. 삭주(朔州)

북제 때 설치된 주로 수나라에서 양제가 즉위한 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대군(代郡)으로 개편되었다가 마읍군(馬邑郡)으로 개칭되었다.

수나라 말 유무주는 이곳에서 태수 왕인공을 살해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당나라는 유무주를 토벌한 뒤 삭주를 설치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마읍군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삭주가 되었다.
    • 선양현(善陽縣)[42], 마읍현(馬邑縣)[43]

2.19. 운주(雲州)

운주의 전신은 수나라 대에 마읍군(馬邑郡) 운내현(雲內縣) 경계에 있던 항안진(恆安鎭)으로 수나라 말 유무주에게 점령되었으며, 유무주는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에 의해 토벌되었다. 무덕(武德) 6년(623년) 북항주(北恆州)가 설치되었다가 다음 해에 폐지되었으며, 정관(貞觀) 14년(640년) 운주가 설치되었다. 영순(永淳) 원년(682년) 돌궐 제2제국의 제2대 가한 묵철가한의 침공으로 인해 백성들을 삭주(朔州)로 옮겼다. 개원(開元) 18년(730년) 운주를 다시 설치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운중군(雲中郡)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운주가 되었다.
    • 운중현(雲中縣)[44]

2.20. 선우도호부(單于都護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선우도호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북위 태화(太和) 11년(487년)에 신설된 현이다.[2] 북위 태화(太和) 11년(487년)에 고량현(高涼縣)이라는 이름으로 신설되었으며 수나라 때 직산현으로 개칭되었다.[3] 본래 진주(晉州)의 속현이었다가 원화(元和) 14년(819년) 강주의 속현이 되었다.[4] 옛 명칭은 평양현(平陽縣)으로 수나라 때 임분현으로 개칭되었다.[5] 옛 명칭은 양현(楊縣)으로 의녕(義寧) 원년(617년) 홍동현으로 개칭되었다. 무덕(武德) 원년(618년) 홍동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서하현(西河縣)을 설치했다가 정관(貞觀) 17년(643년) 임분현에 통폐합했다.[6] 무덕(武德) 2년(619년) 양릉현(襄陵縣)의 일부를 분할하여 부산현(浮山縣)을 설치했다. 무덕(武德) 4년(621년) 신산현으로 개칭되었다.[7] 북위 때 안택현(安澤縣)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고 수나라 때 악양현으로 개칭되었다.[8] 옛 명칭은 체현(彘縣)으로 뒤에 영안현(永安縣)으로 개칭되었다. 수나라 대인 개황(開皇) 16년(596년) 분주가 설치되고 개황(開皇) 18년(588년) 여주(呂州)로 개칭되었다. 정관(貞觀) 17년(643년) 여주가 폐지되면서 진주의 속현이 되었다.[9] 의녕(義寧) 원년(617년) 곽읍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10] 옛 명칭은 의씨현(猗氏縣)이었다.[11] 동위 때 정양현(定陽縣)이 설치되었고 수나라 개황(開皇) 18년(598년) 길양현으로 개칭되었다.[12] 원위 때 근성현(斤城縣)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고 수나라 때 문성현으로 개칭되었다.[13] 의녕(義寧) 원년(617년) 오성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평창현(平昌縣)을 설치하고 정관(貞觀) 원년(627년) 문향현으로 개칭했다.[14] 원위 때 형군현(刑軍縣)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나중에 오성현으로 개칭되었다.[15] 무덕(武德) 4년(621년) 상당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으며, 고망보(高望堡)에 치소를 두었다가 정관(貞觀) 17년(643년) 치소를 진류천(進流川)으로 옮겼다.[16] 북제 때 폐지되었다가 개황(開皇) 9년(589년) 기씨현(寄氏縣)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치되었으며, 개황(開皇) 18년(598년) 장자현으로 개칭되었다.[17] 북제 때 폐지되었다가 개황(開皇) 16년(596년) 기씨현(寄氏縣)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치되었다.[18] 수나라 개황(開皇) 16년(596년)에 신설되었다.[19] 무덕(武德) 원년(618년) 양원현에 한주(韓州)가 설치되어 양원현을 포함한 6개의 현을 관할했다. 무덕(武德) 6년(623년) 심주 동제현을 한주의 속현으로 두었다. 정관(貞觀) 17년(643년) 한주가 폐지되어 양원현을 포함한 5개의 현이 노주의 속현이 되었다.[20] 옛 명칭은 예릉현(刈陵縣)으로 수나라 때 여성현으로 개칭되었다.[21] 무덕(武德) 원년(618년) 신주의 속현이 되었으며, 무덕(武德) 3년(620년) 일부가 분할되어 갑수현(甲水縣)을 설치했다가 무덕(武德) 9년(626년) 갑수현을 폐지했다. 한주가 폐지된 뒤 노주의 속현이 되었다.[22] 옛 명칭은 원현(垣縣)으로 원위 때 저성현(沮城縣)으로 개칭되었다. 당나라 때 한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한주가 폐지된 뒤 노주의 속현이 되었으며, 측천무후가 재위할 때 무향현으로 개칭되었다. 신룡(神龍) 연간에 다시 무를 뺐다가 나중에 무향현으로 개칭했다.[23] 원래 명칭은 곡원현(穀遠縣)으로 북위 때 심원현으로 개칭되었다. 무덕(武德) 2년(619년) 심원현의 일부를 설치하여 초원현(招遠縣)을 설치했다가 다음해에 폐지했다.[24] 의녕(義寧) 원년(617년) 심원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25] 개휴현(介休縣) 남쪽 경계 지역을 분할하여 설치했다.[26] 옛 명칭은 요양현(轑陽縣)으로 수나라 때 요산현으로 개칭되었다.[27] 의녕(義寧) 원년(617년) 신설되었다. 무덕(武德) 3년(620년) 유주(楡州)가 설치되었다가 무덕(武德) 6년(623년) 폐지되었다.[28] 옛 명칭은 양유현(梁楡縣)으로 개황(開皇) 10년(590년) 화순현으로 개칭되었다.[29] 무덕(武德) 3년(620년) 태주(太州)를 설치했다가 무덕(武德) 6년(623년) 태주를 폐지하면서 다시 병주의 속현이 되었다.[30] 무덕(武德) 3년(620년) 분주(汾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무덕(武德) 6년(623년) 병주의 속현이 되었고 이듬해에 다시 분주의 속현이 되었으며, 태종의 즉위 후 다시 병주의 속현이 되었다. 천수(天授) 원년(690년) 무흥현(武興縣)으로 개칭되었고 신룡(神龍) 원년(705년) 다시 문수현이 되었다.[31] 무덕(武德) 3년(620년) 수주(受州)를 설치했다가 정관(貞觀) 8년(634년) 수주를 폐지하면서 다시 병주의 속현이 되었다.[32] 수나라 때 옛 경양성(梗陽城)에 설치된 현이다.[33] 수나라 때 진양현(晉陽縣)의 일부가 분할되어 설치되었다. 선천(先天) 2년(713년) 일부를 분할하여 영천현(靈川縣)을 설치했다가 이듬해에 폐지했다.[34] 수나라 말 유무주에게 함락되어 치소가 양곡현에 임시로 설치되었다가 정관(貞觀) 5년(631년) 다시 옮겨졌다.[35] 무덕(武德) 6년(623년) 다시 설치되었고 치소가 역주(易州) 수성현(遂城縣)에 임시로 설치되었다가 정관(貞觀) 5년(631년) 다시 옮겨졌다.[36] 옛 명칭은 안변현(安邊縣)으로 지덕(至德) 2재(757년) 흥당현으로 개칭되었다.[37] 무덕(武德) 4년(621년) 수용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38] 옛 명칭은 남성현(嵐城縣)으로 무덕(武德) 4년(621년) 의방현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일부가 분할되어 풍윤현(豊潤縣), 합회현(合會縣)이 설치되었다가 다음해에 풍윤현을 의방현에 통폐합했다. 무덕(武德) 9년(626년) 합회현을 의방현에 통폐합했다.[39] 옛 명칭은 가람현(岢嵐縣)으로 개황(開皇) 18년(598년) 분원현(汾源縣)으로 개칭되었다가 대업(大業) 4년(608년) 정락현으로 개칭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관주(管州)의 속현이 되었고 일부가 분할되어 분양현(汾陽縣)과 육도현(六度縣)이 설치되었다. 다음해에 관주는 북관주(北管州)로 개칭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북관주와 분양현, 육도현이 폐지되고 정락현은 남주의 속현이 되었다.[40] 무덕(武德) 4년(621년) 임진현(臨津縣)이 설치되었고 정관(貞觀) 원년(627년) 합하현으로 개칭되었다.[41] 장안(長安) 3년(703년) 의방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옛 가람군(岢嵐軍) 자리에 남곡현을 설치했다. 신룡(神龍) 2년(706년) 현이 폐지되었다가 개원(開元) 12년(724년) 다시 현이 되었다.[42] 북제 때 초원현(招遠縣)이 설치되었고 수나라 때 선양현(善陽縣)으로 개칭되었다.[43] 개원(開元) 5년(717년) 선양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대동군성(大同軍城)에 설치했다.[44] 정관(貞觀) 14년(640년) 정양현(定襄縣)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 영순(永淳) 원년(682년) 묵철가한의 침공으로 폐지되었다가 개원(開元) 18년(730년) 다시 설치되었고 운중현으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