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산: 용의 출현의 개봉 전 정보와, 예고편 공개 이후 예고편을 통해 분석된 여러 가지 정보들을 서술한 문서이다.2. 개봉 전 정보
2020년 5월, '한산: 용의 출현'이 크랭크인되고 티저 포스터가 공개되었다. 2편과 3편을 동시 제작한다고 한다.배우들이 변경된 이유는 명량 해전보다 더 이전 시간대인 한산도 대첩을 다루기 때문도 있지만, 전편의 주연 배우 최민식이 출연을 고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이도 환갑을 넘겨 액션을 주로 하는 촬영이 어려워진 면도 있고, 본인이 인터뷰에서 "솔직히 이순신을 연기할 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만약 후속작이 나온다고 해도 난 참여를 안 할 것"이라고 선을 그었기 때문에[1] 배역 교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김한민 감독도 "명량의 이순신은 칠천량에서 동고동락했던 자신의 동료들 대부분이 전사하고 적들의 사기가 높고 아군의 불안감이 커진 최악의 상황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장군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지만, 한산의 이순신은 조선 수군이 건재하고 또 한산대첩 전의 옥포 해전 등을 계기로 조선 수군의 사기가 충분한 상태에서 군사들과 소통하는 친근감 있는 선비형 이순신을 그려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거북선의 활약을 기대할 만하다. 김한민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는 명량에서 아쉽게 보지 못했던 거북선의 완벽 재현과 거북선의 활약을 눈앞에서 즐길 수 있을 것이다."라며 거북선의 해전 활약 씬을 강조했다. 실제 크기의 거북선을 제작해 촬영했다고.
일각에선 김한민 감독이 이번에는 '명량' 때 지적된 역사 왜곡 논란을[2] 피해갈 수 있도록 각색은 적게 하였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소리도 있다.(...)
2020년 11월, 모든 배우들의 촬영이 끝났으며 개봉까지 남은 기간 동안에는 CG, 음향 작업과 편집을 거칠 것이라고 한다.
2021년 6월 15일, 해당 시리즈의 3편인 '노량: 죽음의 바다'가 크랭크업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원래 2021년 여름에 개봉 예정이었으나[3] 코로나19의 여파로 개봉이 연기되었다. 그리고 2022년 7월 말 한산도 대첩 430주년 기념으로[4] 개봉한다고 4월에 공식 발표했다.
2022년 7월 11일, 잠실 롯데월드타워 광장에서 연등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다음 달 8일까지 볼 수 있는 이 전시에는 이순신 장군과 8m 길이의 거북선을 연등으로 만들었다. 이 외에도 깃대 등 다양한 연등들이 전시돼 있다.
2022년 7월 22일, 해군 독도함에서 특별 시사회를 가진다. 이번 시사회에서는 독도함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을 비롯해 육, 공군 장병 등 관객들을 초청할 예정이다. 시사 전에는 김한민 감독과 더불어 박해일, 변요한, 김성규, 김성균, 조재윤, 박훈, 박재민과 함께 간단한 무대 인사가 진행될 예정으로 독도함에 배우들이 직접 찾아가 무대인사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3. 예고편 분석 및 추측
티저 및 메인 예고편을 바탕으로, 고증을 따지거나 영화 전개를 추측한 문단이다.3.1. 역사 재현성
자세한 내용은 한산: 용의 출현/역사 재현성 문서 참고하십시오.3.2. 연기
예고편 영상 공개 직후의 일본어에 비평과 달리 시사회가 본격적으로 상영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배우들의 일본어 연기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변요한의 일본어와 박재민의 일본어에 대한 호평이 많다. 이는 변요한의 인터뷰에 나와있듯이 정확한 일본어 구사를 위해 일본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일본어를 익히기 위해 투자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길었기 때문.박해일이 연기한 이순신의 이미지가 불멸의 이순신의 김명민처럼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 굉장히 호평받고 있다.
3.3. 전투 장면
메인 예고편에서 거북선의 전탄발사가 나오는데 이 장면이 멋지다고 아주 호평받고 있다.
거북선 위를 도끼와 방패로 조총을 막으며 구루지마의 안택선쪽으로 달려가는 장면이 있다.[5]
학익진을 펼치기 전에 영상매체에서 잘 표현하지 않았던 첨자찰진을 하며 진격하는 장면도 나오는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진영에 있는 판옥선은 41척으로 55척으로 기록된 것과 달리 14척이 안 보인다.
러닝타임 129분 중 무려 51분이 전투 장면이라 한다.
3.3.1. 영화 내용 관련 추측
3.3.1.1. 등장 전투 관련
두 예고편(티저, 메인)에서 이 영화가 한산도 대첩만을 담고 있지는 않으리란 추측도 가능하다.- 첫 번째 근거는 해전이 차지하는 러닝타임의 비중이다. 루머에 따르면 해전이 차지하는 상영시간이 무려 51분에 달한다고 하는데, 명량에서 명량 대첩이 차지한 러닝타임이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한산도 대첩이 아닌 다른 해전이나 육상 전투들도 충분히 등장 가능하다.
- 두 번째 근거는 시간적 배경, 플롯상 여러 전투의 등장이 수월하다는 점이다. 명량에서는 칠천량 전투&명량 해전 또는 명량 해전&노량 해전을 담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6] 그런데 이 한산도 대첩 시간대에서는 다룰 플롯이 일본군의 패배 및 아군에게의 희망밖에 없고, 또 한산도 대첩 전후 전투와의 간격이 적다.[7] 무엇보다 사천 해전은 본 영화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룰 거북선의 첫 등장이다. 그렇기에 사천 해전으로 거북선의 위용을 보여주고, 또한 일본군이 거북선에 경각심을 갖도록 하는 원활한 전개를 펼치기 매우 좋다.
- 세 번째는 예고편에 등장하는 장면을 통한 추측이다. 거북선이 일본 아타케부네에 충각 운용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뚫릴 만한 적당한 크기와 위치의 구멍을 일본군 장수들이 보고 거북선에 대해 경각심을 펴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거북선의 용머리 부분이 상술한 그 장면에서 격벽을 뚫고 들어와 선내 일본군이 경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1. 거북선이 안택선에 충각 전술을 사용하고 2. 일본군은 이에 유달리 놀라고 3. 이후 들이 받힌 함선은 일본군 군영으로 옮겨져 조사받는다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2번과 3번에서 일본군이 거북선의 등장에 유달리 놀라고 특별히 조사까지 하는 것을 보면 아마 거북선의 첫 등장으로 일본군이 놀라지 않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거북선은 사천 해전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따라서 사천 해전은 등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또한 사헤이가 조선 학익진에 대해서 파악하고 일본 수군에 전달했다고 했다. 이에 두 가지 가설이 예상되는데
- 첫 번째는 사헤이라는 인물은 조선에 파견된 일본군 첩자이며 한산도 대첩 직전 열린 군사회의 이후 일본군에게 학익진에 대해 전달했다는 것이다. 일단 이 장면은 고증 오류는 아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나왔듯이 포위진 및 학익진은 이전에도 있던 전술이었고 단지 해군에서 이순신이 한산도 대첩으로 처음 운용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일본군은 학익진을 파악 하지만, 불멸의 이순신처럼 조선 수군의 완벽한 포위진+화포운용으로 이를 이겨낼 수 없었다~" 의 전개를 펼칠 가능성이 크다.
- 두 번째 가설은 한산도 대첩에서 이미 학익진으로 왜군이 개박살난 이후, 한산도 대첩에 참전한 왜군 장수들의 학익진에 대한 경고를 왜군 상부가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가설이다. 우선 한산도 대첩에 참전한 장수 중 하나가 와키자카 사효에로 위에서 말하는 사효에와 완벽히 들어맞으므로 이 가설이 맞을 가능성이 더욱 높다. 이 경우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군이 개박살나고, 이에 참전한 왜군 장수 사효에가 학익진에 대해 경고하자 일본 상부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또한 이 가설이 맞다면 한산도 대첩 이후 안골포 해전이나 부산포 해전이 추가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니면 후일을 기약하자는 식으로 왜군 장수들이 학익진에 대해 파악 및 연구하는 장면으로 끝낼 수도 있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한산도 대첩은 무조건 등장하고[8] 추가적으로 사천 해전[9]도 등장할 가능성이 높으며 안골포 해전과 부산포 해전의 등장 역시 가능성은 있다.
- 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임진왜란 초기의 전투들을 잠시 다룰 가능성도 있다. 스틸컷을 열심히 돌려보다보면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말을 탄 채로 칼을 뽑은 채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해상이 아닌 육상 전투를 묘사한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단 1600명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왜군이 5만여 명에 달하는 조선군을 기습하여 이긴, 우리 입장에서는 뼈아픈 패배인 용인 전투까지 나올 확률이 높다.
아마도 이순신이 용인 전투의 영웅으로 불리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부산포에 왔다는 첩보를 받고 선조에게 올라간 용인 패배에 대한 장계를 통해 용인 전투를 연구하는 식으로 새로운 적이 될 와키자카를 분석하는 장면일 가능성도 있다.
또 이치, 웅치 전투의 주역이었던 권율, 정담, 황박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치, 웅치 전투도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3.3.1.2. 전투 플롯 관련 추측
여기서 먼저 알아야 할 건 명량의 주 전투무대인 울돌목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한산도 대첩이 시작되는 견내량 또한 조수간만의 차이가 굉장히 크고, 좁고, 수심이 낮은 해협이라는 점이다. 명량에서는 이순신이 이러한 해협을 먼저 선점하고 적을 기다렸으나 한산도 대첩에서는 적인 와키자카가 먼저 견내량을 선점한 상태에서 이순신을 기다리는 상황. 즉, 몇 년 후 이순신이 명량에서 펼쳤던 것과 유사한 전술을 와키자카가 펼쳤다는 것인데, 당시 왜군들은 누구도 깰 수 없다 판단한 이순신의 명량 대첩 전술을 과거의 이순신은 깨버리는 게 이 영화의 포인트가 될 듯하다.이를 위해 용인 전투와 한산도 대첩을 비교해서 살펴보면, 용인 전투는 조선군 5만이 광교산 앞에 도착했을 때 먼저 광교산을 관통하는 좁은 산길을 막고 있던 와키자카가 소규모 조선군 선발대를 쳐부쉈고 이후 조선군 본대가 물러나 우회하는 걸 택하자 와키자카가 뒤쫓아가 기습해 승리한 전투다. 가만 보면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 들 텐데, 한산도 대첩 당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와키자카가 이끄는 왜군이 초반에 벌인 전술과 동일한 흐름이다. 물론 용인 전투와 달리 한산도 대첩에서는 선발대를 이용해 넓은 바다로 유인해낸 것까지가 이순신의 전술이라는 게 함정.[10]
- [ 당시 기록 ]
- 8일 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물러 있는 곳(견내량)으로 바로 향했습니다. 바다 한 복판에 이르러 바라보니, 왜대선 1척과 중선 1척이 선봉에서 들락거리며 우리 수군을 보고서는 도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뒤쫓아 들어가니, 대선 36척과 중선 24척, 소선 13척(모두 73척)이 대열을 벌려서 머물러 있었습니다.[11]
그런데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은 서로 부딪치게 될 것 같아서 싸움하기가 곤란할 뿐만 아니라, 왜적은 만약 형세가 궁지로 몰리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어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사이에 있는데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왜적이 비록 뭍으로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 죽게 될 것이므로, 먼저 판옥선 5~6척으로 하여금 선봉으로 나온 왜적선을 뒤쫓아 엄격할 기세를 보였더니, 여러 배의 왜놈들이 한꺼번에 돛을 달고 쫓아 나왔습니다.[12]
우리 배는 짐짓 물러나는 척하면서 돌아 나오자, 왜적들도 줄곧 뒤쫓아 나왔습니다. 그래서 바다 가운데로 나와서는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벌려서 진격하여 각각 지자․현자․승자 등의 각종 총통들을 쏘아서 먼저 2~3척을 깨뜨리자, 여러 배의 왜놈들이 사기가 꺾이어 물러나 달아나려 하였습니다.
한산도 승첩을 아룁니다 : 견내량파왜병장(三度閑山島勝捷啓本: 見乃梁破倭兵狀) -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승전 장계 中
3.3.2. 함대 간의 거리
티저 예고편에서의 한산도 대첩 묘사. |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한산도 대첩 묘사. | 징비록에서의 한산도 대첩 묘사. |
한산도 대첩 장면에서 일본 함대와 조선 함대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해전에서 아군 함과 적군 함 가리지 않고 서로 너무 붙어 있다고 지적받았는데, 여기 예고편에서는 그것보다도 더 좁게 묘사되었다. 그 외 징비록(드라마)나 임진왜란 1592의 묘사보다도 대형 묘사는 좋지 않다.
그리고 티저에 공개된 학익진도와 '출발! 비디오여행'에서 공개된 학익진 훈련장면에서 다른 매체와 달리 이억기와 원균이 각각 학익진의 날개를 한쪽씩 담당하는것으로 보아 이억기, 원균이 매복해있다가 왜군 뒤쪽에서 둘러싸는 묘사가 아닐것으로 추정된다.[13]
물론 전투 묘사에서 지나치게 병력들이 조밀해 있는 모습은 전투를 가능한 한 화면에 담아서 볼만하게 만들려고 의도하는 경우가 많다. 강제규 감독의 마이웨이에서도 이러한 이유로 병력을 조밀하게 연출한 적이 있다.
3.3.3. 백병전[14] 여부
결론부터 말하면 조선수군은 등선육박전을 기피한적이 없으며 최초 해전인 옥포 해전부터 한산 해전에서도, 명량 해전에서 원거리 사격전을 비롯해 등선육박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투 방식을 보였다. 징비록 같은 사극에서 묘사하듯 무작정 원거리 사격을 한 것도 아니며 주로 근거리 사격전 이후에 등선하여 단병접전을 벌이거나 적선을 제압. 수색한 뒤 이를 불사지르는 것이 전반적인 전투 양상이다.화포로 원거리에서 공격한 기록은 해군사관학교 소장 수조규식(군사규범)의 200보(250m)에서 사격한다는 구절인데, 현존하는 수조규식은 조선 후기 규범이다 정조 때 이를 체계화 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미 광해군 시기 이후부터 정례화된 조선 수군의 전투 훈련 방식을 취합한 각 수영의 전투 교범인 수조홀기를 종합하여 만든 것이다.각 수영의 수조홀기의 내용을 확인해보면 수조규식과 큰 차이가 없으며 임진왜란 이후 전투 지침을 전면 수정할 정도의 대규모 전투가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막연히 수조규식과 그 이전 시대의 각 수영에서 제작한 수조홀기의 내용이 부정확하다고 할 수가 없다. 특히 역사적으로 전투 규범의 내용이 급격히 바뀌는 경우는 대규모 전투나 실전 경험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드문데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수군이 대규모 전투를 치른 적이 없으므로, 수조규식의 실전 경험은 임진왜란 시기 해전에 근거한 것이라고 봐야하기 때문에 참고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군이 가진 화기 수준으로는 원거리서 적을 분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근대 대포로 목선을 쏴봐야 관통만 될 뿐이라 잘 안 가라앉는다. 판옥선보다 훨씬 크고 수십문, 많게는 100문씩 대포를 장착한 서양의 전열함들도 운 나쁘게 화약고나 흘수선에 명중하는 경우가 아니면 근접전을 벌였다. 사극에서 이순신 시대 수군을 고증하며 당연하다는 듯 재현하는 동거(童車)는 조선 후기인 19세기 사료인 융원필비(戎垣必備)에 등장한다. 이순신과 동시기 사람인 한효순이 조선의 화약무기를 망라하여 운용법을 서술한 신기비결(神器秘訣)에선 동거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으며 신기비결에서 소개하는 화포 사격법(화포 입구를 일자로 평평하게 해서 사격)은 일정 각도 이상으로 포구를 내릴 수 없는 동거가 있으면 불가능한 방법이다. 동거가 근대 서양군대가 이용한 포가에 비하면 훨씬 조잡한 물건인데 16세기 이순신 시대의 화포는 그 조차도 없어서 반동제어가 훨씬 취약했다.
단, 화포의 반동 문제는 판옥선이 어느 정도 구조적인 해결을 해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애초에 명종 대에 판옥선을 만든 이유가 기존의 대맹선, 맹선으로는 화포 운영이 힘들다보니 화포의 정확성을 높이고 배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정걸 등을 통해 이를 창안한 것이다. 특히 판옥선이 기존의 함선과 운영법이 달랐던 점은 이미 은퇴한 70세가 넘은 노장인 정걸을 굳이 이순신이 직접 찾아가 모셔왔다는 점에서 알기 쉽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판옥선이 기존의 함선에 비해 함포 사격에 유리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동거가 하는 역할을 판옥선이 해결을 하였거나 혹은 부분적으로 보완이 되었다고 봐야한다. 특히 맹선, 대맹선 시절에도 이미 조선군이 함포 사격을 통해 적선을 분멸하는 장면이 왕왕 등장하므로 함선과 함포의 운영에 대해서는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15]
화약 생산량도 심하게 부족했다. 화약에 들어가는 재료는 크게 3가지. 염초, 목탄, 유황인데 인도처럼 초석이 풍부하지도 못하고 서구 열강처럼 초석을 얻을 수 있는 식민지를 확보하지도 못 한 조선의 염초 생산량은 언제나 부족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참 뒤인 1635(인조 13)년, 병조판서 이서가 지은 신전자취염초방(新前煮取焰硝方)에서 소개하는 조선의 염초제조 방법은 오래된 집의 부뚜막이나 마루, 온돌 밑의 흙을 긁어내 사용하는 방식으로 민폐도 심하고 한번에 만들 수 있는 화약량도 적었다. 왜란 중에 바닷물을 끓이는 명의 화약 제조법을 도입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명에서 염초를 수입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방식은 숙종 시기 편찬된 신전차초방(新傳煮稍方)에서 길바닥의 흙을 사용하는 제조법을 소개하면서 개선이 이뤄어졌다. 그나마 염초는 자체 생산이라도 하지 또 다른 재료인 유황은 현종 시기 유황광산이 발견되기 전까진 조선에서 아예 생산이 되지 않아 주로 일본에서 수입하는 품목이었다.[16]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지은 행록에 따르면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직을 원균에게 넘기고 백의종군할 당시 삼도수군이 가진 화약량은 휴전 기간 수년동안 동안 열심히 제조했음에도 4천근에 불과했다. 1근=화약 16냥인데 천자총통이 한'발' 쏘는데 소모되는 화약만 30냥, 지자총통 한 발에 20냥 이다. 이순신은 발당 화약 4냥짜리 현자총통으로 주력 화포를 교체해서 천자, 지자는 임진왜란 초기를 제외하면 거의 쓰이지 않았으나 원균에게 인계할 당시 판옥선이 150척이 넘었기에 화약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였다. 화약제조량 이상으로 화포를 실은 전선이 늘어났기 때문. 더구나 현자는 소구경인 만큼 피해량도 적고, 사거리는 더 짧아진다.
근대적인 탄도학이 도입되지 않아서 사격에 제한이 있었다는 부분은 다소 고려해야하는 지점인데, 이미 문종 시기에 문종이 화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사 각도를 조정할 수 있도록 문종화차를 설계했고, 화약 무기의 운영에 있어서 탄도의 움직임이나 그 이해는 존재하였다. 특히 운영 방법에 대해서는 개발자인 문종이 직접 운영, 시험 평가를 하여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만큼 이미 고려말 최무선 때부터 함상에서 함포를 사격해 온 상황이므로 탄도 체계에 대한 이해는 분명히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이와 관련된 기록이 추가로 발견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근대적인 탄도학 체계가 발달하지 않았다고 해서 무작정 사격이 힘들었다고 간주하게 될 경우 오리엔탈리즘적 사고 방식이 될 수 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고려 말 최무선이 화약 무기를 개발한 이후로 수백년 동안 왜구와 싸우면서 함상에서 함포를 사격한 기록이 있고, 수조홀기의 경우 각 수영에서 제작된 전투 규범이기 때문에 왜구와의 접전이 빈번했던 하삼도의 경우에는 체계적인 함상 사격 훈련 방법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짐작키 힘들다는 점인데 19세기의 자료지만 수조 규식에서 200m를 최소 수치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탄도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분명히 있었으며, 최소한 그 정도의 거리의 목표물은 사격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무작정 조선 수군의 사격 실력을 폄하해서는 안된다.
안골포 해전에 참여한 일본군 장군이 남긴 조선해전기를 보면 조선군이 현자총통으로 날린 차대전은 겨우 3~5장(6~10m)거리에서 날아왔다. 결국 임진장초, 난중일기를 비롯한 모든 사료, 심지어 고려해전기 같은 일본측 사료에서도 조선 수군은 화포는 조총, 화전과 유효 사거리 차이가 없었고 적선 격파가 아닌 인마살상용으로 활용해 근거리 사격전을 벌여 적을 최대한 제압하고 적선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등선육박전을 벌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전투 양상은 굳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적지 않더라도 이미 중종 시기의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 정윤겸의 치계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중종실록 48권, 중종 18년 6월 1일 경자 2번째기사 1523년 명 가정(嘉靖) 2년전라도 수군 절도사 정윤겸이 왜선의 출현을 치계하다.]
5일 미시(未時)에는 대묵도(大墨島) 서변에 왜선이 정박하고 있으므로 신이 1백 보(步) 남짓한 거리까지 추격하였더니, 왜인 50여 명이 혹은 갑옷을 입고 혹은 흑개(黑鎧)253) 를 입고 혹은 철갑(鐵甲)을 입고 혹은 부채를 휘두르고 혹은 방패를 잡고 혹은 판엽(板葉)을 가리고, 각기 장검을 휘두르면서 서로 시끄럽게 떠들어 소리가 배 안을 진동하였습니다. 그래서 5∼6명이 서로 교대하여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목궁(木弓)에 혹은 철촉전(鐵簇箭)을 무수히 발사하여 혹 화살을 맞은 자가 있었으나 사상자는 없었습니다.
신은 처음부터 신기전(神機箭)과 총통전(銃筒箭)을 무수히 쏘고 장전(長箭)·편전(片箭)을 비오듯이 발사하였더니, 왜적 1명이 화살 10여발을 맞고도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3면으로 포위하여 왜적과 역전(力戰)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배안으로 숨어버리고 집(楫)·노(櫓)·기계(機械) 등을 챙기지 않고 내버린 채 배만 끌고 서서히 가기에 신이 화전(火箭)을 많이 놓았더니, 화염이 배 위에 치성하므로 불을 끄려고 물을 뿌리던 왜적이 화살을 맞고 즉사하였습니다.
그러자 왜적 1명이 단검(短劍)을 갖고 떠들면서 우리 배로 뛰어들어 칼을 들고서 격인(格人)254) 김구정(金仇丁)을 찌르려 하므로 곧장 팔을 휘둘러 칼을 빼앗아 버리니 왜인이 다시 저들의 배로 들어가므로 진무(鎭撫) 박동(朴同)이 그의 등을 쏘아 맞혀 그는 배에 들어가 곧장 죽었습니다. 신은 관솔[脂松]로 홰[炬] 50여 자루를 만들어 불을 붙이게 하여 왜선에 던지고, 또 초둔(草芚)255) 3백여 장[番]에 불을 붙여 던져 놓았더니, 시목(柴木) 등에 불이 붙어 창공이 환하도록 화염이 치솟았습니다. 이때 왜적 20명이 배에서 뛰어나와 물로 뛰어들어 헤엄쳐 가므로 모두 쏘아 잡았고, 또 16명은 화살을 맞고 익사하였으며, 배 안에도 화살을 맞고 불에 타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혹 그 배의 갑판 아래 살아서 숨어 있는 자라도 있을까 염려되어 배가 본판(本板)만 남도록 모조리 타버리기를 기다렸다 그날 밤 3경(更)에야 발선소(發船所)로 회군(回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왜인의 머리 20급(級)·왜전(倭箭) 14개·칠죽궁(漆竹弓) 1개·환도(環刀) 4자루·장검(長劍) 1자루·창(槍) 5자루·창병(槍柄) 1자루·호항(護項) 4개·갑상(甲裳) 1건·녹비 저고리(鹿皮赤古里) 1건·사을갑지(沙乙甲之) 6건·도초(刀鞘) 1건·반의(斑衣) 2건·비적(臂赤) 1건 등을 함께 봉해서 올려보냈습니다.>---
신은 처음부터 신기전(神機箭)과 총통전(銃筒箭)을 무수히 쏘고 장전(長箭)·편전(片箭)을 비오듯이 발사하였더니, 왜적 1명이 화살 10여발을 맞고도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3면으로 포위하여 왜적과 역전(力戰)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배안으로 숨어버리고 집(楫)·노(櫓)·기계(機械) 등을 챙기지 않고 내버린 채 배만 끌고 서서히 가기에 신이 화전(火箭)을 많이 놓았더니, 화염이 배 위에 치성하므로 불을 끄려고 물을 뿌리던 왜적이 화살을 맞고 즉사하였습니다.
그러자 왜적 1명이 단검(短劍)을 갖고 떠들면서 우리 배로 뛰어들어 칼을 들고서 격인(格人)254) 김구정(金仇丁)을 찌르려 하므로 곧장 팔을 휘둘러 칼을 빼앗아 버리니 왜인이 다시 저들의 배로 들어가므로 진무(鎭撫) 박동(朴同)이 그의 등을 쏘아 맞혀 그는 배에 들어가 곧장 죽었습니다. 신은 관솔[脂松]로 홰[炬] 50여 자루를 만들어 불을 붙이게 하여 왜선에 던지고, 또 초둔(草芚)255) 3백여 장[番]에 불을 붙여 던져 놓았더니, 시목(柴木) 등에 불이 붙어 창공이 환하도록 화염이 치솟았습니다. 이때 왜적 20명이 배에서 뛰어나와 물로 뛰어들어 헤엄쳐 가므로 모두 쏘아 잡았고, 또 16명은 화살을 맞고 익사하였으며, 배 안에도 화살을 맞고 불에 타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혹 그 배의 갑판 아래 살아서 숨어 있는 자라도 있을까 염려되어 배가 본판(本板)만 남도록 모조리 타버리기를 기다렸다 그날 밤 3경(更)에야 발선소(發船所)로 회군(回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왜인의 머리 20급(級)·왜전(倭箭) 14개·칠죽궁(漆竹弓) 1개·환도(環刀) 4자루·장검(長劍) 1자루·창(槍) 5자루·창병(槍柄) 1자루·호항(護項) 4개·갑상(甲裳) 1건·녹비 저고리(鹿皮赤古里) 1건·사을갑지(沙乙甲之) 6건·도초(刀鞘) 1건·반의(斑衣) 2건·비적(臂赤) 1건 등을 함께 봉해서 올려보냈습니다.>---
조선군이 육박전을 기피하는 성향이 있었던 것은 류성룡의 징비록과 이산해의 치계, 경주성 전투 등에 직접 참여한 무장 이시언의 증언 등 다양한 기록에서 확인이 된다. 척계광의 기효신서 같은 중국기록에서도 왜구의 근접전 역량을 경계한다.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화포로 원거리에서 적을 제압했을 거라는 환상은 이런 기록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조실록 188권, 선조 38년 6월 7일 경술 2번째기사 1605년 명 만력(萬曆) 33년이시언이 북변의 상황과 군량 조달, 왜적의 전투력 등을 아뢰다]
왜적은 총을 잘 쏘지는 못한다 해도 아군이 활 두 발을 쏘는 사이에 별안간 앞에 나타나니 우리 나라 사람은 잘 쏜다고는 하지만 멀면 맞추지 못하고 가까우면 왜적의 칼을 두려워하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활을 쏘고 나서 단병(短兵)으로 달려들까 두려워하여 미처 쏘지도 못하니 활을 쏘는 것도 믿을 게 못 되는 실정입니다.
왜적이 칼을 잘 쓴다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 사람이 칼을 잡고 나아가면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 사람은 이렇게 하지 못하고 모두들 도망치는 것을 상책으로 알고 있는데,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왜적에게 살해되고 맙니다. 적은 우리 나라 사람이 도망치거나 죽는 것을 보고 싸우러 나가는 것을 즐겨 하는데, 이 때문에 왜적의 기세는 더 높아지는 데 반해 우리의 사기는 저상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적은 총을 잘 쏘지는 못한다 해도 아군이 활 두 발을 쏘는 사이에 별안간 앞에 나타나니 우리 나라 사람은 잘 쏜다고는 하지만 멀면 맞추지 못하고 가까우면 왜적의 칼을 두려워하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활을 쏘고 나서 단병(短兵)으로 달려들까 두려워하여 미처 쏘지도 못하니 활을 쏘는 것도 믿을 게 못 되는 실정입니다.
왜적이 칼을 잘 쓴다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 사람이 칼을 잡고 나아가면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 사람은 이렇게 하지 못하고 모두들 도망치는 것을 상책으로 알고 있는데,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왜적에게 살해되고 맙니다. 적은 우리 나라 사람이 도망치거나 죽는 것을 보고 싸우러 나가는 것을 즐겨 하는데, 이 때문에 왜적의 기세는 더 높아지는 데 반해 우리의 사기는 저상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임진왜란때 조선 수군이 수행한 백병전은 화포와 사수들로 적선의 전투력을 꺽어 놓은 상황에서 마무리 짓는 과정이었다. 일본군의 그 잘난 근접전 역량이 발휘될 여지가 없다. 쌩쌩한 일본군선에 냅다 도선부터 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극제작자들은 이점을 흔히 간과한다.
중종 실록의 기록과 전체적인 전투 양상을 종합해보면 조선 수군의 전투는 소구경 화포에 장전한 산탄과 궁시로 갑판위의 적이 어느 정도 제압이 된 상태에서 도선하여 잔적들과 단병접전을 벌여 처리하고 포로 구출, 노획 등을 수행했다. 상판이 모조리 불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아 있는 하판에서 물자와 인명을 구조, 살상한 적도 있었겠지만 포로 구출을 중시했기에 대부분은 위와 같았다. 문제는 이러한 단병접전을 이룬 기록이 오직 개전 초기부터 이순신 함대에서만 보인다는 것으로 결국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조선 수군에 큰 영향을 주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 [ 임진장초 한산 해전 ]
- 우리 배는 짐짓 물러나는 척하면서 돌아 나오자, 왜적들도 줄곧 뒤쫓아 나왔습니다. 그래서 바다 가운데로 나와서는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벌려서 진격하여 각각 지자․현자․승자 등의 각종 총통들을 쏘아서 먼저 2~3척을 깨뜨리자, 여러 배의 왜놈들이 사기가 꺾이어 물러나 달아나려 하였습니다.
여러 장수나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을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마구 발사하니, 그 형세가 바람과 우뢰같아, 적의 배를 불사르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거의 다 해버렸습니다.
순천부사 권준이 제 몸을 잊고 돌진하여 먼저 왜의 층각대선 1척을 깨뜨려서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고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10급을 베고, 우리나라 남자 1명을 산 채로 빼앗았습니다.
광양현감 어영담도 앞장서서 돌입하여 왜의 층각대선 1척을 깨뜨려서 온전히 사로잡아 왜장을 활로 쏘아 맞혀서 신이 탄 배로 묶어 왔는데, 죄를 묻기도 전에 화살을 맞은 것이 너무 심했고, 말도 통하지 않으므로, 그대로 목을 베었습니다. 나머지 왜적들은 머리 12급을 베고, 우리나라 사람 1명을 산 채로 빼앗았습니다.
사도첨사 김완은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았고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16급을 베었습니다.
흥양현감 배흥립이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8급을 베었으며, 또 많이 익사시켰습니다.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4급을 베었는데, 다만 활로 쏘아 죽이는데 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2척이나 쫓아가서 쳐부수고 한꺼번에 불태워 버렸습니다.
좌돌격장 급제 이기남은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사로잡고 왜적의 머리 7급을 베었습니다.
좌별도장이며 본영의 군관인 전 만호 윤사공과 가안책 등은 층각선 2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고, 왜적의 머리 6급을 베었습니다.
낙안군수 신호는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고, 왜적의 머리 7급을 베었습니다.
녹도만호 정운은 층각대선 2척을 총통으로 쏘아 배 밑바닥까지 꿰뚫었으며, 이것을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불태우고, 머리 3급을 베었으며, 우리나라 사람 2명을 산 채로 빼앗았습니다.
여도권관 김인영은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고, 왜적의 머리 3급을 베었습니다.
발포만호 황정록은 층각선 1척을 부딪치며 깨뜨리는데,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힘을 모아 불태워 없앴고, 왜적의 머리 2급을 베었습니다.
우별도장 전 만호 송응민은 머리 2급을 베었습니다.
흥양통장 전 현감 최천보는 머리 3급을 베었습니다.
참퇴장 전 첨사 이응화는 머리 1급을 베었습니다.
우돌격장 급제 박이량은 머리 1급을 베었습니다.
신이 타고있는 배에서 왜적의 머리 5급을 베었습니다.
한산도 승첩을 아룁니다 : 견내량파왜병장(三度閑山島勝捷啓本: 見乃梁破倭兵狀) -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승전 장계 中
"돌진하여 먼저 왜의 층각대선 1척을 깨뜨려서"라는 뜻은 충각전술을 사용했다는 뜻이며 "온전히 사로잡고"는 적이 불타거나 침몰되지 않았다는 얘기며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10급을 베고"와 "우리나라 남자 1명을 산 채로 빼앗았습니다"는 적선에 올라탔다는 의미도 될 수있다. 물론 총통과 화살 공격으로 인해 적이 항복하거나 전멸한 상태에서 머리를 베었을 수도 있지만 다음 내용을 보면 접선/월선/백병전이 있었을 가능성이 좀 더 높아진다.
광양현감 어영담도 앞장서서 돌입하여 왜의 층각대선 1척을 깨뜨려서 온전히 사로잡아 왜장을 활로 쏘아 맞혀서 신이 탄 배로 묶어 왔는데라는 내용을 보면 "앞장서서 돌입하여 왜의 층각대선 1척을 깨뜨려서"라는 내용처럼 먼저 충각전술을 사용해 적선에 접선했다는 의미이고 "왜장을 활로 쏘아 맞혀서 신이 탄 배로 묶어 왔는데"라는 부분을 보면 화살에는 맞았지만 아직 살아있는 왜장을 생포해왔다는 의미인데 이렇게 하려면 당연히 적선에 접선/월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당항포 해전 기록을 보자 단병접전과 수색전을 드러내는 구절들이 나온다. 보면 조선 수군은 어느 해전이든 교전이 벌어졌을 때 돌격을 했지 적선과 거리를 벌리려고 했던 적이 없다.
{{{#!folding [ 임진장초 당항포 해전 ]
(전략)우리의 여러 전선은 4면으로 포위하면서 재빠르게 협격을 가하고, 돌격장이 탄 거북선이 또 층각선 밑으로 달려가서 총통을 치솟아 층각선을 깨뜨리고, 여러 전선이 또 화전으로 그 비단 장막과 돛배를 쏘아 맞혔습니다.
그러자, 맹렬한 불길이 일어나고 층각 위에 않았던 왜장이 화살에 맞아 떨어졌습니다.
다른 왜선 4척은 이 창황한 틈을 타서 돛을 달고 북쪽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는데 신과 이억기 등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은 패를 갈라서 접전하며, 또 모조리 포위하자, 적선중의 허다한 적도들은 혹은 물에 빠지기 바쁘고 혹은 기슭을 타고 올라가며 혹은 산으로 올라 북쪽으로 도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사들은 창 칼 활 화살 등을 가지고 저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추격하여 머리 43급을 베고 왜선 전부를 불살라 버린 뒤에, 짐짓 배 한 척, 남겨둔 채 왜적들의 돌아갈 길을 개방해 두었으나, 이미 황혼이 짙어 어둑어둑하여 육상에 오른 왜적은 다 사로잡지 못하고, 이 억기와 함께 어둠을 타서 그 바다 어귀로 나와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중략) 우리편 배에서 먼저 지자 및 현자 총통을 쏘는 한편 장편전. 철환. 질려포. 대발화 등을 연달아 쏘고 던질 즈음에 왜적들은 마음이 급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등지둥 도망하려 하였으므로 요구금을 이용하여 바다 가운데로 끌어 내자, 반이나 물에 뛰어들어 죽었습니다.
왜선에 포로된 우리 나라 사람을 찾아내어 생환하게 하는 것은 왜적의 목을 베는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왜선을 불사를 때에는 각별히 찾아서 구해내고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고 약속하였습니다. 이번에 여러 장수들이 위의 지시에 따라 포로되었던 남녀 6명을 산채로 잡아내었습니다.
}}}
그러자, 맹렬한 불길이 일어나고 층각 위에 않았던 왜장이 화살에 맞아 떨어졌습니다.
다른 왜선 4척은 이 창황한 틈을 타서 돛을 달고 북쪽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는데 신과 이억기 등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은 패를 갈라서 접전하며, 또 모조리 포위하자, 적선중의 허다한 적도들은 혹은 물에 빠지기 바쁘고 혹은 기슭을 타고 올라가며 혹은 산으로 올라 북쪽으로 도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사들은 창 칼 활 화살 등을 가지고 저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추격하여 머리 43급을 베고 왜선 전부를 불살라 버린 뒤에, 짐짓 배 한 척, 남겨둔 채 왜적들의 돌아갈 길을 개방해 두었으나, 이미 황혼이 짙어 어둑어둑하여 육상에 오른 왜적은 다 사로잡지 못하고, 이 억기와 함께 어둠을 타서 그 바다 어귀로 나와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중략) 우리편 배에서 먼저 지자 및 현자 총통을 쏘는 한편 장편전. 철환. 질려포. 대발화 등을 연달아 쏘고 던질 즈음에 왜적들은 마음이 급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등지둥 도망하려 하였으므로 요구금을 이용하여 바다 가운데로 끌어 내자, 반이나 물에 뛰어들어 죽었습니다.
왜선에 포로된 우리 나라 사람을 찾아내어 생환하게 하는 것은 왜적의 목을 베는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왜선을 불사를 때에는 각별히 찾아서 구해내고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고 약속하였습니다. 이번에 여러 장수들이 위의 지시에 따라 포로되었던 남녀 6명을 산채로 잡아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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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총통과 화살을 같이 쏘고 있는데, 중종 실록과 명종 실록의 기록과 달리 적선에 불을 지르기 전에 수색을 먼저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포로 구출을 우선시하는 양상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외에도 창, 칼이 분명히 언급된다.
다른 해전도 마찬가지다. 징비록이나 왜란종결자에서 묘사하는 편집증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화포로 적을 제압하는 조선 수군은 사료에 없다.
- [ 임진장초 부산포 해전 ]
- 그때, 부산성 동쪽 한 산에서 5리쯤 되는 언덕밑 3개소에 진을 치고 있는 대ㆍ중ㆍ소선을 아울러서 대개 470여척이었는데, 우리의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전선이 곧장 그 앞으로 돌진하자, 배안과 성안ㆍ산위ㆍ굴소에 있던 적들이 총통과 활을 잦고 거의 다 산으로 올라 6개처로 나누어서 내려다 보면서 철환과 화살을 빗발과 우박같이 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편전을 쏘는 것은 우리 나라 사람인 것 같았으며, 혹 대철환을 쏘기도 하는데, 주발덩이 만한 것이 우리배에 많이 떨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여러 장수들은 한층 더 분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어 돌진하면서 천ㆍ지자 총통에다 장군전ㆍ피령전ㆍ장편전ㆍ철환 등을 일제히 발사하며 하루 종일 교전함에 적의 기세는 크게 꺾였습니다.
이순신의 첫번째 해전인 옥포 해전 기록을 보면 조선군이 등선육박전을 개전 초기부터 실시한 것은 확인할 수 있다.
- [ 임진장초 옥포 해전 ]
- 좌부장 낙안 군수 신 호는 왜대선 1척을 당파하고 왜적의 머리 1급을 베었는데 배안에 있던 칼 갑옷. 의관 등은 모두 왜장의 물건인 듯 하였으며, 우부장 보성 군수 김득광은 왜대선1척을 당파하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되었던 1명을 산채로 빼앗았고,
(중략) 좌부 기전 통장이며 순천 대장인 전 봉사 유섭은 왜대선 1척을 당파하고 우리 나라 사람으로 포로되었던 소녀 1명을 산채로 빼앗았으며 (중략) 경상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왜선 5척을 당파하고 우리 나라 사람으로 포로 되었던 1명(3명-全書)을 산채로 빼앗았는데
이렇듯 전체 기록을 종합해보면 이순신 함대는 최초 원거리 사격 이후로는 치열한 근거리 사격전을 벌여 적선을 제압한 후 도선, 월선하여 단병접전을 벌이거나 배를 수색하여 상황을 마무리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적선에 나포되어 있는 조선인 포로 구출은 매우 중시하고 수급을 모으는 것을 차선으로 여겼는데 이는 크게 두가지 이유였다. 첫번째로는 수급에 눈이 팔려 적을 놓칠 위험이 있다는 점이었고, 두번째로는 수급을 취하는 것보다 적선을 불살라 해상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다. 특히 두번째의 양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전투가 앞서 언급된 부산포 해전이다. 여기서 이순신은 전적으로 적선을 불태우는 것에 집중했다. 물론 그 때문에 선조가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는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17]
반면 원균은 이를 무시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수급을 취하는데 중점을 두어 심지어 아군과도 다툼을 벌였다.
3.4. CG 및 세트
본 예고편. | 지리산 | 7광구 |
처음 티저 예고편이 나오고 나서 호불호가 갈리는 편인데 '기대된다.' '거북선과 학익진이 너무 보고싶다.' '정말 오래 기다렸다.'등의 긍정적인 댓글과 'CG 티가 명량보다 더 많이 난다.' 'CG 티 왜 이렇게 많이 나냐.'[18] '무슨 판타지물 보는 것도 아니고.' '고증이 나아진 게 없는 것 같다.' 등의 부정적인 댓글로 나뉜다. 전편 명량에서처럼 역사, 영화 덕후들은 CG나 고증 면에서 비판을, 일반 대중들은 대부분 기대를 하는 중.
현재 예상되는 최대 문제점. 바로 위에 있는 활을 쏘고 난 직후 이순신의 장면이나 아니면 아까 전투 묘사 부분의 전투 묘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금까지 공개된 예고편은 모든 장면이 그런 것은 아니고 예고편 전체에서 따지면 태클 걸 만한 씬은 3~4개 정도밖에 없다.[19] 대신 문제가 있는 씬들은 흔히 망작들을 거론할 때 놀림감으로 쓰는 망가진 장면들과 비등비등할 정도로 퀄리티가 좋지 않다. 우선 위에 나온 이순신 확대 장면의 경우 망작 지리산이나 7광구의 영상 최악의 씬들처럼 배경과 인물이 따로 논다. 그리고 부산포나 한산도 대첩 같이 멀리서 찍은 웅장한 씬들에서도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아라리요 평창의 비구름 낀 흐릿하고 칙칙한 분위기가 나타나며 CG도 좋지 못하다.
메인 예고편에서는 CG에 대한 우려가 많이 불식되었다. 발CG라고 태클을 걸을 만한 장면이 아예 없으며 명량 그 이상 수준의 퀄리티를 보여준다. 김한민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CG에만 100억 가량의 제작비를 썼다고 한다.
여수에 한국 사극영화 전용세트를 오픈세트로 지었으며 VFX 세트를 평창에 있는 스피드스케이트장 안에 만들었다고 한다. 김한민 감독에 따르면 '명량'을 바다에 배를 직접 띄우고 찍고 난 뒤 절대로 바다에 배를 띄우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매우 위험하고 날씨와 기상조건에 너무 많은 영향을 받고 통제도 안 돼서였다.
그래서 '한산'과 '노량'은 반드시 통제된 세트에서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사전시각화가 매우 중요해 워터캐논으로 물 특수효과를 사용한 것 외에는 실내 세트에선 전혀 물이 사용되지 않았다. 때문에 어떤 식으로 바다가 구현되고, 어떻게 배가 움직여야 할지, 또 원하는 움직임을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를 사전 시각화 작업으로 미리 준비해야 했다고 한다.
3.5. 실제 영화와의 비교
많은 부분에서 예측이 거의 대부분 맞았다.- 영화가 한산도 대첩만을 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한산도 대첩 직전과 직후의 전투인 사천 해전, 안골포 해전과 부산포 해전이 나올 수 있으며, 육전인 용인 전투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외 임진왜란 극초반의 동래성 전투 등이 나올 수도 있다.
- 예고편에서 언급되는 "사헤에"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보낸 첩자이거나, 한산도 대첩에 참전한 장수 와키자카 사효에(사헤에)이다.
- 한산도 대첩에서 백병전이 묘사될 것이다 vs 한산도 대첩은 백병전 없이 일방적인 포격전이었으며 예고편에 나오는 백병전은 어영담이 왜군 함대를 유인할 때 생긴 일일 것이다.
[1] 그도 그럴 게 7년 전 명량을 촬영할 때도 20kg의 갑주를 입고 촬영하는 것이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데다기 정신적으로도 배역이 무려 '이순신'인 만큼 연기 대가라 하더라도 그 부담감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2] 거북선이 명량에 나온 것과 소신기전을 활로 쏘는 고증오류, 배설이 실제론 전후에 도원수 권율의 참수로 사망한 사건을 각색한 것 등.[3] 2020년에 촬영이 다 끝났고 편집과 CG도 길어도 1년이면 끝난다. 다만 모가디슈가 흥행한 2021년에 롯데엔터테인먼트가 다음 작품으로는 여름에 미국 지아이조 프리퀄을 들고 왔고, 이후 기적을 상영했다. 결국 한산도 대첩 430주년인 2022년 개봉을 확정했다.[4] 참고로 한산도 대첩은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 8월 15일 벌어졌다.[5] 저 장면이 당포해전 당시 권준이 쏜 화살에 죽은 도쿠이 미치유키를 적선으로 건너가서 목을 벤 김완의 일화를 표현한 장면이라는 말이 있다. 거북선 위에 송곳을 꽂아 놨을 텐데 어떻게 지나가느냐고 의문을 재기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에 앞서 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는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1일 경신 20번째기사 기록이 있다. 즉 거북선 위에서 길만 안다면 지나가는게 가능하다.[6] 칠천량 해전은 그 절망스러운 분위기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야 했고, 나름 대규모 해전이라 돈도 많이 든다. 무엇보다 명량 해전과 노량 해전에 비해 그 의의와 감동이 적어서 관객들에게 어필하기 힘들었다. 노량 해전은 명나라군이 등장하므로 명나라군의 마찰이나 협력 과정을 별개적으로 묘사해야 하며, 플롯상 일본군의 완전한 패퇴&이순신의 죽음이라는 굵직한 두 사건을 조명해야 했으므로 시간이 없었다.[7] (양력) 사천 해전 7월 8일->한산도 대첩 8월 14일->안골포 해전 8월 16일 또는 부산포 해전 10월 5일[8] 티저 예고편에서의 학익진 및 영화의 존재 의의.[9] 거북선의 첫 출정 및 충각 전술, 이로 인한 일본군의 경각.[10] 와키자카는 좁은 길목을 먼저 선점해놓고 적이 물러나면 추격해 친다는 2수 정도 내다보는 전술을 펼쳤다면 이순신은 그걸 간파하고 아군이 물러날 때 적이 추격해오면 도망치는 척하다 적을 포위섬멸한다는 3수, 4수 정도 앞까지 보는 전술을 펼쳤다고 봐야 한다.[11] 용인 전투로 보면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인 광교산 앞에 도착한 5만의 조선군이 산속으로 도망치는 와키자카 정찰병을 쫓아 선발대를 보냈다가 광교산 안 좁은 산길에 매복해있던 와키자카 본대를 만난 것과 같은 상황. 용인 전투에서는 이때 전투를 벌이고 패배함[12] 용인 전투의 지휘관는 광교산에 들어간 선발대가 패배하자 퇴각해 우회하는 걸 택했으나 와키자카의 기습에 당했는데, 이순신의 전술을 보면 마치 와키자카가 용인 전투 때처럼 할 것이란 걸 예상한 듯 유인 전술을 펼침[13] 하지만 첨자찰진 장면에서 기록된 55척과 달리 41척만 나오는것으로 보아 나머지 배들은 협선이거나 나머지 배들을 매복시켜둔 실전상황을 학익진 연습장면과 짜집기한것일수도 있다.[14] 다만 백병전이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는 틀린 단어이며 편의상 백병전이라 부르지 실제 역사용어로는 등선육박. 단병접전이 적절한 용어다.[15] 실제로 판옥선을 구현한 뒤 거기에 함포를 설치해 발사한 실험 결과는 여태까지 없기 때문에 판옥선의 함포 반동 제어능력에 대해서는 연구가 더 필요한 게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는 거북선 연구에서도 같이 드러나는 중이다.[16] 조선은 화포 제조에 필요한 구리, 각궁 제작에 필요한 물소뿔, 염초 제작에 필요한 유황. 모두 생산되지 않아 일본에서 많은 양을 수입해왔다. 일본과의 전면전인 임진왜란때는 대일 수입선을 중국으로 대체하느라 고생했다.[17] 이 당시까지 선조와 이순신의 관계는 원만한 편이었다. 다만 이 부산포 해전 이후로 이순신이 한산도를 지키면서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초점을 맞추면서 이순신과 선조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다. 역시 사극에서 간과, 과장하는 부분인데 선조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끌어내린건 선조와 이순신의 전략 구상이 달라서 자기가 구상하는 전략에 맞는(것처럼 보였던) 원균으로 교체한 것이지 매체에서 흔히 묘사되는 질투 같은게 아니다.[18] 대규모 전투라서 그렇게 느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투씬을 보면 안시성이나 7광구급 CG를 보여주고 있다. 트레일러 초반 부산포에서도 CG 티가 많이 난다. 진짜 전작인 명량보다도 CG 퀄리티가 좋지 않다.[19] 부산포, 위에 나온 이순신 씬, 학익진 전투묘사.[20] 용인 전투에서의 패배를 곱씹어 공성이냐 수세이냐를 두고 학익진=바다 위의 성 이라는 주제로 영화 전반에서 원균과 이순신이 여러 번 되새긴다. 작중에서도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제가 용인 전투를 어떻게 이겼는지 아십니까" 하는 장면이 나오고, 견내량을 용인 전투로 투영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