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함기용 咸基鎔|Ham Kee-yong | |
출생 | 1930년 11월 14일[1] |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사암리 | |
사망 | 2022년 11월 9일 (향년 91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강릉 함씨[2] |
학력 | 양정중학교 (졸업) 춘천사범학교 (제적)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상학 / 학사) |
신체 | 170cm, 68kg |
종목 | 육상 |
주종목 | 마라톤 |
병역 | 제2국민역 |
가족 | 아버지 함병현(1884년 출생) 어머니(1894년 출생) 5형제 중 막내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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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남자 육상 선수였으며, 육상 행정가와 지도자를 지냈다.2. 생애
1930년 11월 14일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사암리의 부농가[3]에서 아버지 함병현(咸炳賢, 1884. 1. 5 ~ ?. 1. 14)과 어머니 김해 김씨(1894. 1. 6 ~ ?. 4. 22) 사이의 5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춘천사범학교[4]에 입학했으나 3학년 때 신탁통치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무기정학 처분을 당했고, 이후 양정중학교에 스카우트되어 전학했다.1950년 보스턴 마라톤에 송길윤, 최윤칠과 같이 출전해 우승하였다. 송길윤은 2위, 최윤칠은 3위를 하여 1, 2, 3위를 한국 선수들이 나란히 하였다.[5] 이 우승은 1947년 서윤복에 이어 2번째이자 대한민국 수립 이래 처음으로 우승한 것이기도 하다.[6]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에서 환영하며, "외교관 몇백 명 보내는 것보다 훨씬 애국했다"라는 말로 선수단의 공적을 치하했다.
그러나 귀국 후 1주일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함기용은 보스턴 마라톤 우승으로 임택근 등과 함께 제2국민역으로 분류되었기에 징집은 면제받았지만, 마라톤은 포기해야 했다.
3. 은퇴 이후
1951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상학과(51학번)에 입학해 졸업한 뒤 1955년 산업은행에 입사했다가 곧 그만두고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고향 춘성군에 공천을 받았으나 얼마 뒤 열린 중앙상임위원회에서 후보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고, 이에 회의를 느껴 정계를 은퇴했다.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무위도식하다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요원 선발 고시에 합격해 사무관에 임용되었고, 재건국민운동본부 국민생활 개선과로 발령받아 예체능을 담당했다. 이때 재건체조를 만들고 김동진 등 유명 작곡가들과 협업했다고 한다. 그 뒤 해외개발공사로 자리를 옮겨 수석 검사역으로 근무했다.
1967년 대학 2년 후배인 장덕진 당시 재무부 이재국장의 권유로 1967년 기업은행 마라톤팀에 코치로 취직했다. 4년 뒤 팀이 해체되자 은행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과장의 직급을 얻었다. 그 뒤 사당동, 강남, 논현동 등의 지점장으로 재직하다가 1985년 정년퇴직했다.
정년퇴직 후에는 양정고등학교 2년 선배인 황명수 전 국회의원과 아산기획이라는 옥외광고 회사를 경영했다.
2019년 전국체육대회에서 성화 점화자로 선정되었다.
2022년 11월 9일 밤 10시경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발인은 11월 12일이었다.
[1] 음력 9월 24일이다.[2] 예판공파 50세 기(基) 항렬이다.[3] 300석을 지었다고 한다.[4] 당시에는 5년제로 운영되었다.[5] 이러한 특정 국가의 1~3위 동시 석권 기록은 무려 57년 후인 2007년, 케냐 선수들이 베를린 마라톤에서야 재현해냈다.[6] 한국은 그로부터 다시 반세기가 넘은 2001년에 이봉주가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하면서 3번째 우승자를 배출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