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중아 咸重亞 | Ham Joong-ah[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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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함종규(咸鍾圭)[2] |
본관 | 강릉 함씨 |
출생 | 1952년 5월 13일[3] |
경상북도 영일군 연일면 생지리 (現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연일읍 생지리)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사망 | 2019년 11월 1일 (향년 67세) |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2가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 |
신체 | 171cm, 71kg, O형 |
병역 | 불명[4] |
데뷔 | 1978년 '안개속의 두 그림자' |
소속 그룹 | 함중아와 초록별들(1977년 ~ 1978년)[5][6] 함중아와 양키스(1978년 ~ 1982년)[7] 함중아와 무서운아이들(1982년 ~ 1994년) |
직업 | 기타리스트, 작곡가, 작사가, 가수 |
가족 | 아내[8], 슬하 1남 1녀 |
학력 | 연일초등학교 (졸업) 중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울산대학교 (기계공학 / 중퇴) |
종교 | 불교[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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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1970년대 말 침체되어 있던 대한민국 가요계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며, 작사, 작곡, 보컬은 물론 기타리스트로서도 유명했다.
2. 생애
1952년 5월 13일 경상북도 영일군 연일면 생지리(現 포항시 남구 연일읍 생지리)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10]고아원 시절 함께한 혼혈아 친구들 그리고 그의 친형인 키보디스트 함정필과 함께 그룹사운드 골든 그레이프스를 결성한다. 결성 후, 무작정 신중현 사무실에 찾아간 이들을 신중현은 악기 제공은 물론 거처까지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골든 그레이프스는 72년에 음반 데뷔를 했는데 이 음반은 신중현이 모든 곡을 만들고 리드기타 연주, 그리고 게스트 보컬로 참여한 전형적인 신중현 사운드의 앨범이었다. 어쨌든 이 앨범은 함정필의 넘실대는 키보드 사운드를 위주로 한 사이키델릭 록의 진수를 보여준다.
음반 발표 이후 신중현은 곧 밴드에서 빠지고 팀의 주축은 함정필, 함중아(기타, 보컬) 형제로 재편되어, 나이트 클럽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이후 함중아는 밴드를 탈퇴하고[11] 자신의 밴드 함중아와 양키스를 결성, 1978년에 안개속의 두 그림자로 데뷔하게 된다.
그 후 내게도 사랑이, 풍문으로 들었소 등 다수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1980년의 인기스타가 된다.
2.1. 사망
함중아는 사망에 앞서 간경화 등의 질병으로 투병생활을 이어오다가, 2018년 9월 TV조선 '마이웨이'에 출연해서 "과거 일년에 366일 술을 마셨다"며 "5년 전 간 건강 이상이 발견된 후 금주하며 회복에 전념하고 있다"고 전했다고 한다.2019년 11월 1일, 암[12]으로 사망했다.[13]
▲ 2019년 11월 2일 빈소[14] |
빈소는 부산 영락공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11월 4일에 진행되었고 경북 경주시에 있는 공원묘원에 묻혔다.
3. 수상내역
- 2012년 제2회 대한민국 다문화예술대상 10대 예술인상
- 2011년 제1회 대한민국 다문화예술대상 10대 예술인상
- 2011.09 제2회 광무제 무술축제 홍보대사
4. 저작물
4.1. 대표곡
- 내게도 사랑이 (1978)
- 안개속의 두그림자 (1978)
- 풍문으로 들었소 (1980)
- 조용한 이별 (1980)
- 그사나이 (1980)
- 뜬소문 (1988)
- 카스바의 여인[15] (1994)
- 잡지마라 (2005)
- 어리석은 여자 (2009)
- 형산강[16] (2018)
4.2. DVD, CD
4.3. 디스코 및 도롯도
- 앵콜!함중아 디스코 1 (1992)
- 앵콜!함중아 디스코 2 (1992)
- 앵콜!함중아 디스코 3 (1993)
- 앵콜!함중아 디스코 4 (1993)
- 앵콜!함중아 디스코 5 (1993)
5. 사건사고
- 마약 투약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는데, 2014년 여유만만에 출연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는 자신에게 돈을 뜯으려는 경찰의 계략이었고 이후 정상적인 마약 검사를 받아 음성 판정을 받아 혐의를 벗게 되었다. 그리고 해당 경찰은 감옥에 갔다고 한다. #
6. 기타
- 생전에 신장이 171cm, 체중이 71kg였으며, 골프와 스키 타기가 취미였다고 한다.
- 본인은 사실 혼혈아가 아닌데 고아원에 들어간 이후로 혼혈아로 알려져 말년에서야 그 사실을 밝혔다.
- 노래방 운영 당시 폭음과 몇 건의 외도가 있으나 아내의 용서로 해로했다. 아내가 팬이기도 했다고.
- 중학교도 못 갈만큼 지독하게 가난했던 터에 당시 둘째 형이 있었던 파주시 파주읍의 용주골로 올라가 중국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먹고 자는 것이 해결되었다는 점에서 짜장면 원없이 먹었었다고 말했었다. 그러던 중 펄 벅 재단의 고아원으로 배달을 갔다가, 얼떨결에 해당 고아원에 입소하게 되었고, 그렇게 고아원에서 친구들과 결성한 밴드가 함중아와 양키스인 것이다.
- 고아원 시절때 혼자서 검정고시를 치렀다.
- 70~80년대에 함중아와 윤수일이 라이벌이 된적이 있다. 둘다 경상도 특징에 혼혈이라는 비슷한 점으로 종종 착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1] 세계적인 기타리스트까지는 힘들고 아시아는 내가 할 수 있겠다 싶어 무거울 중(重)에 버금 아(亞)를 써서 '중아'라는 예명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2] #[3] 음력 4월 20일.[4] 본인이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어린 시절의 생활고 때문에 병역면제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5] 데뷔 하기전에 맴버다.[6] 대학가요제에 결성 한뒤에 함중아와 초록별들이 이름이 바꾸고 지금은 함중아와 양키스를 부르게 되었다.[7] 1992년 제데뷔[8] 1958년생 이다.[9] 한때 침례교 신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사후에 정정되었음에도 지금도 수시로 개신교와 불교를 왔다갔다 한다. 링크.[10] 한때 울산 출생으로 쭉 알려져 있었다.[11] 그의 후임으로 윤수일이 들어가게 된다.[12] 언론사에 따라 폐암이라는 곳도, 간암이라는 곳도 있다.[13] 공교롭게도 다음달 1일 함중아와 양키스의 멤버였던 정동권이 폐암으로 사망했다.[14] 여기 영정사진 보고 있는 사람이 가수 인순이.[15] 원곡은 윤희상의 곡이다. 1992년 윤희상이 취입했으나 큰 인기를 얻지 못한 것을 함중아가 94년에 디스코 리듬으로 리메이크해 인기를 끌게 된다.[16] 함중아 마지막 곡이다.[17] 현재는 휴게소에서 DVD 가끔 팔때 있다. 요즘에 USB 및 SD카드로 팔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