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7 12:43:02

윤수일

파일:윤수일.jpg
이름 윤수일(尹秀一)
출생 1955년 2월 6일, 울산광역시 남구[1]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신체 178cm, A형
학력 학성고등학교
울산대학교 건축학과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사회과학 석사
데뷔 1977년 '사랑만은 않겠어요'
가족 부인, 슬하 1남 1녀
소속 락코리아, 누리마루 엔터테인먼트
종교 개신교
1. 개요2. 상세3. 대표곡4. 여담

1. 개요

대한민국가수, 싱어송라이터.
불후의 국민 가요 중 하나인 아파트로 대중적인 록 사운드를 선보이며 1980년대를 풍미한 가수이다.

2. 상세

윤수일은 1955년 2월 6일, 미군 공군 비행조종사였던 칼 브라울 어게스트 대위와 어머니 지복희 사이에 무녀독남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윤수일이 아직 태어나기 전 그의 친부는 임신중인 윤수일의 어머니에게 미국으로 데려갈 것을 약속하고 귀국을 하였다.[2]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비행 도중 사고로 사망하였다.

윤수일의 어머니는 이후 울산 시골 출신의 윤성환과 재혼, 윤씨의 성을 따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윤수일은 백인 아버지의 얼굴을 강하게 물려받아 이국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으며 당시 혼혈아가 시골 지역에서는 드물었기 때문에 윤수일은 원하지 않는 큰 관심을 온 동네로부터 받으며 성장해야 했다.

혼혈에 배타적인 당시 사회 모습 때문에 군 입대도, 공무원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던 그는 자신이 일반적인 경로(공부 등)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 예체능에 투신하기로 하고 학성고등학교 야구부에 입단하지만 불과 1년 후에 야구부가 해체하게 되어 그만둔다. 그런 그에게 음악 선생님이 재능을 알아보고는 가수의 길을 권하고 윤수일은 2학년때부터 '엔젤스'라는 밴드를 꾸려 지역에서 공연을 하며 알음알음 활동을 해나가기 시작한다.

당시는 그룹 사운드의 전성시대였는데 윤수일 역시 1976년 신중현 사단의 '골든 그레이프스'라는 혼혈아 중심의(멤버 6명 중 4명이 혼혈 출신) 밴드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골든 그레이프스는 함정필(건반), 함중아(기타, 보컬) 형제가 주축이 된 싸이키델릭 록 밴드였는데 함중아가 탈퇴하며 그 자리에 윤수일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3]

그러다 1977년 장충체육관에서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서 발탁되었고 당시 안타프로덕션의 사장이자 작곡가인 안치행의 눈에 띄어 음반 제작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원래 밴드명 대신 가장 스타성이 돋보였던 윤수일을 전면에 내세운 '윤수일과 솜사탕'이라는 이름을 썼고, 전 수록곡 9곡 중 8곡이 이 리더인 건반주자 함정필의 곡들이었는데 나머지 한곡이 바로 안치행이 작곡한 트로트곡 사랑만은 않겠어요였고 이 곡이 대히트를 친다. 앨범 전체적으로 골든 그레이프스 시절의 싸이키델릭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윤수일의 보컬이 전면에 나선 가요앨범으로 느껴진다. 이 때문에 밴드는 트로트 풍이 좀 가미되더라도 대중적이고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하고자 했던 윤수일과 정통 록 사운드를 지키고자 했던 나머지 멤버들 사이에 내분이 생겨 해체되고 그는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안치행의 프로듀스 하에 1978년부터 1980년까지 3년간 공식적으로 5장의 트로트 풍이 가미된 가요 앨범을 더 내면서 인기 가수 대열에 올랐다. 가요 프로그램은 물론 공개 코미디 등 TV 예능에도 자주 모습을 비추면서, 매력적인 보이스와 잘생긴 얼굴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던 1981년 윤수일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윤수일밴드를 이끌고 록 냄새가 물씬 풍기는 윤수일밴드 1집을 발표한다.
이때부터 윤수일의 음악인생의 정점을 달리는 시기가 시작되는데, 번안곡 2곡[4]을 제외한 나머지 곡들은 모두 윤수일의 자작곡이었다.
윤수일의 자작곡이 대부분이지만 솔로가수의 백밴드가 아닌 밴드 지향적인 음악으로 지금 들어도 근사한 기타리프를 선보이는 떠나지 마제2의 고향 그리고 같은 넘버에서는 블루지한 긴 기타 솔로가 들어있다. 제 2의 고향은 1967년 미국에서 인기를 끈 "TV" 락 밴드 Monkees의 "Pleasant Valley Sunday"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음반은 현재도 윤수일 최고의 명반으로 꼽힌다.


이듬해 1982년 아파트가 담겨있는 2집이 발매되었고 이 노래가 전국적인 대히트를 치면서 시대를 넘어선 최고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는 막 잠실에 우후죽순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 노래 역시 윤수일 본인이 작사 작곡 한 노래이며 친구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한다. 군대에 갔던 친구가 돌아와 보니 여자친구 가족은 그에게 연락도 없이 외국으로 이민 간 상태였고 아파트 초인종만 누르다 결국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이국적이고 수려한 외모로 1980년대 당시 몹시 큰 인기를 끌었고 떠나지마, 제2의 고향, 유랑자, 아파트, 황홀한 고백, 아름다워, 환상의 섬 등등 수많은 히트곡 및 명곡들을 남겼다. 초기엔 윤수일 본인이 언급하기도 했던 '락뽕'(락+뽕짝) 장르에 충실한 사운드로, 록에 트로트가 가미되었지만 결코 저급하거나 촌스럽지 않은 한국적인 록사운드를 선보였고, "아름다워"는 1980년대 초 미국에서 유행했던 Yacht rock (Kenny Loggins, Michael McDonalds 등을 중심으로 한, 소프트 록에 흑인 음악을 결합한 세련된 장르였다.) 장르의 곡으로 한국에서는 1983년 조용필이 이 장르를 시도하기도 했다. 80년대 중반 이후로 황홀한 고백부터는 댄스(라기 보다는 무대 액션)까지 가미된 조금 더 가요에 가까운 사운드를 선보였다.

2002년 무렵 다단계에 연루되어 벌금 500만원 형을 선고받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한동안 활동을 정지해야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2008년 항소심까지 가서 최종 무죄 판결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윤수일 본인이 몸무게가 10kg이 빠지고 머리털이 다 빠지는 후유증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후 다시 본격적인 활동을 재기한 그는 2008년 싱글 '터미널'이 나름대로 히트를 치면서 다시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데뷔 초보다 더 록에 근접한 사운드로 김종서, 박상민 밴드등을 거친 최정상급 세션 기타리스트 타미킴이 오랫동안 라이브에 참여하였다.[5]

3. 대표곡

  • 사랑만은 않겠어요 (1977)
  • 제2의 고향 (1981)
  • 떠나지 마 (1981)
  • 아파트 (1982)
  • 황홀한 고백 (1986)
  • 터미널 (2008)

4. 여담

  • 초등학교 시절 애국가를 불러야 하는 조회 시간이 제일 싫었고 '정말 내가 한국인일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정체성 혼란 때문에 괴로웠다고 고백하였다.
  • 어려서부터 외모 때문에 늘 이방인 대우를 받았다. 게다가 윤수일은 울산고향이며 가수가 되기 위해 타지인 서울로 상경하여 살고 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제2의 고향, 유랑자, 아파트 등 윤수일의 노래에는 이방인정서가 녹아있기도 하다.
  • 범서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했다. 범서고 문서에 기재된 내용에 따르면 윤수일과 범서고교 초대 교장선생님이 학성고 선후배여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교가가 트로트풍이어서 정작 학생들의 반응은 좋지는 않은 듯.
  • 홍콩 영화배우 황추생을 닮았다.


[1]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2] 그가 진짜 윤수일의 어머니를 미국으로 데려갈 의도가 있었을지는 불명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사망하기도 했지만, 어게스트 대위는 이미 본국에 미국인 아내와 아이까지 둔 상태였기 때문인데, 파병군인들이 현지 여성과 아이를 만들어두고 나중에 데려가겠다는 기약없는 약속만 하고 이들을 버려두는 케이스는 상당히 흔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80년대까지만해도 미군들에 의해 그런 일이 매우 흔하게 벌어졌고, 유사한 현상은 베트남전시기 한국인들에 의해서 발생한 바 있다. 심지어 주일미군이 주둔한 오키나와에도 비슷한 일은 꽤 많았다. 현직 오키나와 현지사나, 이라부 히데키등이 이런 케이스.[3] 이후 함중아는 함중아와 양키스를 결성하고 윤수일밴드를 결성한 윤수일과 여러가지 면에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4] 에릭 클랩튼의 Promises를 번안한 약속과 로드 스튜어트의 Passion을 번안한 침묵. 이 중 침묵은 어느 정도 히트하기도 했다[5] 박상민 밴드 시절 윤수일 메들리는 항상 연주되던 레퍼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