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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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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
柳在夏 | Yoo Jaeha
파일:유재하1.jpg
<colbgcolor=#000><colcolor=#FFFFFF> 출생 1962년 6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 620[1]
출신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사망 1987년 11월 1일 (향년 25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강변북로 (한남대교 북단)
장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로 154-62[2]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풍산 류씨 (豊山 柳氏)[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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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유일청(柳一靑)(1922~1989)[4] 어머니 황영(1926년생)
형 유청하(柳晴夏), 유정석(柳政錫)
누나 유은순(柳銀順), 유은주(柳垠朱), 유은미(柳銀美)
여동생 유지수(柳知秀)
학력 은석국민학교[5] (졸업)
삼선중학교 (졸업)
대일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 학사)
소속 위대한 탄생
봄여름가을겨울
종교 가톨릭[6] (세례명: 미카엘)
병역 대한민국 육군 일병 소집해제 추정 (방위병)
서명 파일:유재하 사인.svg

1. 개요2. 위상3. 생애
3.1. 유년기3.2. 그룹 활동3.3. 솔로 활동3.4. 사망
4. 평가5. 음반
5.1. 1집 사랑하기 때문에5.2. 추모 앨범
5.2.1. 1997년 앨범5.2.2. 2017년 앨범5.2.3. 2023년 앨범
5.3.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6. 여담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유재하씨.jpg

대한민국싱어송라이터.

2. 위상

25세의 짧은 생애 동안 단 1개의 앨범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지만,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지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데뷔작이자 유작인 사랑하기 때문에가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의 방향성에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서도 이 앨범을 1위로 놓으며, '한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중요한 단일 작품'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현대에 와서 들어도 감탄할 만한 세련미와 단아함을 지녔으며, 어눌하지만 솔직하고 정직한 보컬, 절제를 아는 세션, 간결하고 담백한 노랫말들이 고루 인상적이다.

3. 생애

3.1. 유년기

1962년 6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現 안동시 풍천면 하회1리) 하회마을에서 유창물산(裕昌物産)주식회사 사장을 지낸 아버지 유일청(柳一靑)[7]과 어머니 창원 황씨 황영[8] 사이의 3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숙부 유시목(柳時沐)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조선 선조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의 14대손이었다.

참고로 소박한 이미지와는 달리, 김광민 등 생전 유재하의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집안이 탄광을 경영하는 사업가 집안으로 의외로 유복했다고 한다.[9]

안동에서 태어났지만 성장한 곳은 서울로, 서울 은석국민학교, 삼선중학교, 대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 진학하였다.[10] 전공은 순수음악으로,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 과제로 제출하기 위해 작곡한 곡을 보고 교수가 "아무리 급해도 모차르트를 베껴 오면 어떻게 하냐"고 혼을 냈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음악이 모차르트만큼 훌륭한 나머지 교수가 착각했다는 뜻이다. 그의 데뷔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의 수록곡들 중 5번 트랙 "Minuet"는 아예 고전음악이다.

그렇게 클래식 음악 전공이었지만, 그는 대중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작곡과 작사, 편곡 외에도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여러 악기의 연주에 능통했던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둔 1984년 클래식과 재즈를 대중 가요에 접목하는 음악적 지향점을 세웠다.

3.2. 그룹 활동

한양대 재학 중 '조용필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11]

이때 조용필은 훗날 유재하의 대표곡이 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자신의 7집 앨범에 먼저 취입했다.

7집이 발매되기 약 반년 전인 1984년 11월 일본에서 발매된 조용필의 <아시아의 불꽃> 앨범에 한국어 버전과 일본어 버전('芙蓉の花のように') 2가지로 먼저 실린 것.

이것은 유재하의 곡 중 최초로 레코딩된 버전이다. 하지만 조용필의 일본 공연 동행에 필요한 학교의 허가를 받지 못하여 위대한 탄생에서 탈퇴하게 된다.
파일:조용필_유재하.jpg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시절.(왼쪽에서 두번째. 유재하 오른쪽은 김광민과 송홍섭)

7집 발매 당시인 1985년 '위대한 탄생' 의 멤버였던 23살 새파란 청년 유재하의 재능을 꿰뚫어본 조용필이 "너 곡 좀 써봐라"라고 이야기하고, 유재하가 감격해서 10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한 곡만 쓰여서 유재하가 실망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런데 봄여름가을겨울은 이 에피소드를 조용필이 아닌 김현식과 연관 지어 얘기한 적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김현식 관련 문단을 참조할 것. 가요계의 썰 중 하나로 보면 될듯.

당시 위대한 탄생의 리더였던 베이시스트, 편곡자, 프로듀서인 송홍섭은 이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했다. 송홍섭이 유재하의 집에 방문하게 되었을 때 유재하가 그에게 자신의 노래를 조용필이 부를 수 있도록 소개해달라고 부탁했고, 악보를 전해 받은 조용필이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장조 발라드의 곡이라며 유재하 곡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녹음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재하가 조용필에게 준 곡은 '사랑하기 때문에'와 '우리들의 사랑'. 다만 유재하는 조용필이 녹음한 '사랑하기 때문에'를 듣고는 본인이 생각한 곡의 정서와 맞지 않아 아쉬워했다고 한다.[12]
파일:external/image.music.naver.net/121101_yjh_akbo_.jpg
수록곡 중 하나인 '우리들의 사랑' 악보
조용필에게 주었던 버전이다.

악보 상단에 적힌 2절 도입부 가사를 보면 현재 불리는 가사와는 다른 부분이 보인다.
위대한 탄생 시절 공연 영상[13]
오랫동안 유재하의 방송 출연은 젊음의 행진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위대한 탄생 활동 당시의 방송을 찾아보면 더 나올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유재하 본인부터도 전화로 지인들에게 "나 티브이에 나와! 꼭 봐!" 라고 좋아라 전화하던 것이 젊음의 행진에 나오던 거였듯이 본인은 슬쩍 말없이 얼굴 나오는 출연에 대하여 그것도 출연한거냐 싶은 듯 하다.

하지만 이 경우도 잘 뜯어보면 나름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단독샷은 유재하의 신스 솔로 파트인데 솔로 내내 유재하를 비추고 끝남과 동시에 풀샷으로 바뀐다.

그만큼 곡의 전체 흐름을 이해하고 지금 어떤 파트가 솔로 중인지, 또 누구를 비춰야 할지를 카메라맨과 조정실에서 제대로 알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도 무대에서 기타 솔로를 대놓고 해도 가수를 찍거나 다른 곳을 찍는 경우가 허다한데, 저 시절 치고는 상당히 신경 써서 찍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양대 졸업 후 1986년에는 김현식봄여름가을겨울에서 활동하였다. 라디오 스타 김현식 특집에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당시 3집을 준비 중이던 김현식이 멤버들에게 곡 좀 써오라고 하니까 유재하가 그때까지 자신이 썼던 자작곡 10여곡을 다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형평성을 맞춘다고 멤버당 한 곡씩만 넣는다고 하자 유재하가 삐져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나갔다고 밝혔다. 이때 김현식이 받은 곡은 희대의 명곡이자 유재하 1집의 수록곡인 <가리워진 길>.[14]

그리고 유재하의 대타로 급히 영입된 박성식이 김현식 3집 때 내놓은 곡 또한 희대의 명곡인 <비처럼 음악처럼>이였다.

다만 유재하가 밴드에서 나간 뒤에도 김현식과 유재하는 술친구로 잘 지냈다고 한다. 김현식이 본인의 3집 앨범을 줄때도 '사랑하는 동생 배신자 친구 재하에게'라고 농담삼아 써서 줬다고 한다.

3.3. 솔로 활동

어쨌든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고 싶었던 유재하는 돈 800만 원[15]을 들여서 자신이 모든 곡의 작곡, 작사, 편곡을 한 솔로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1987년 8월에 서울음반을 통해 내놓는다.

당시나 지금이나 악기 한 두개씩 다루거나 미디를 하고 작사, 작곡을 할 수 있는 싱어송라이터들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악기 편성과 리듬, 코드 진행, 형식, 편곡에 노래, 앨범 컨셉까지 주위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다 해낼 수 있고, 자신뿐 아니라 다른 아티스트들의 프로듀싱이 가능하며, 대중의 인정까지 받은 이들은 유정연, 장기호, 김현철, 윤상, 신해철, 신승훈, 김동률, 정원영, 조동익, 고찬용, 나원주, 정재형, 박용준 (The Classic), 이승환(작곡가), 정재일 등을 제외하면 극히 드물다.

신중현이나[16] 조용필같은 가요계 거장들도 하기 힘든 작업을 유재하는 만 25살에 한 앨범 통째로 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유재하는 클래식 작곡 전공자 출신이었기에 그 어렵다는 관현악 오케스트레이션까지 했다. 드럼, 베이스와 오케스트라 반주를 제외하고는 피아노, 키보드, 기타 등 스스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들도 모두 자신이 맡았다.

오케스트라 반주 역시 유재하가 대학교를 다니면서 알게 된 후배들이나 지인들을 섭외해 녹음했다고 한다. 당시 유재하 앨범의 반주를 연주했던 후배들은 처음에 대중 음악의 반주를 녹음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당시 클래식 음대에서 학생들이 대중음악을 하는게 교수들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바로 퇴학 조처를 당하게 되어있었다.

1982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잃어버린 우산’으로 동상을 수상한 가수 우순실도 한양대 작곡과에 재학중이었는데, 가요제 출전 후 제적 통보를 받았다. 그래서 '이런 거 해도 되나? 이러다 걸리면 학교에서 짤리는 거 아냐?' 식으로 연주자들사이에 걱정도 많았다고.

유재하는 그런 후배와 지인들을 다독여주면서 앨범 녹음을 무사히 끝냈다. 실제로 사랑하기 때문에에 수록된 상당수의 곡들은 이미 유재하가 한양대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당시 연습실에서 만들어졌으며, 친한 동기들과 선후배들 앞에서 일종의 프레젠테이션처럼 연주를 해주기도 하였다.

오늘날 유재하가 수많은 후배 가수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이런 예술 작품을 만드는 듯한 정성스러운 자세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의 앨범은 시대를 초월한 세련되고 감동적인 음악으로 대중음악 뿐 아니라 대중음악을 금기시하던 클래식 음악계의 대중음악을 바라보는 시선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

사실 이 앨범이 처음 나왔을 때도 이래저래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당시의 몇몇 평론가들은 클래식과 가요를 접목한 유재하의 앨범을 높게 평가하지 않고, 특이한 앨범 정도로만 치부했다.

또한, 당시만 해도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TV 가요 프로그램에 나가기 전에는 PD들에게 사전 테스트를 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 테스트에서도 가창력 미달을 이유로 번번히 통과하지 못해 방송 출연에 제약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는 라디오를 통해 청취자들의 반향을 일으키며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이문세가 진행하는 MBC 라디오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는 한 주간의 신청 엽서와 방송 횟수를 집계해 가요 순위를 선정하는 '별밤 차트'란 코너가 있었는데, '지난날'이 장기간 1위를 질주하기도 했었다. 다만 사망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한편, 당시에는 팝송이나 클래식 음악을 고상한 문화예술로 치는 반면 가요는 대중 오락의 한 종류로만 치부하는 분위기였고, 클래식 전공자들 입장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던 유재하가 대중 가요를 만든다는 건 고상한 문화 음악을 포기하고 질 낮은 딴따라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유재하는 학교를 그만둘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그 여성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때려칠까..." 라고 유재하가 말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유재하가 1집을 녹음하기 직전 지인들이 유재하에게 작곡한 음악을 들려 달라고 부탁하여 유재하의 음악을 들을 때면 항상 유재하는 자신의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아요 형편없죠…" 하며 푸념했다고 한다.[17]

이 외에도 여러 에피소드가 있다. 유재하의 앨범 녹음 과정을 참관했던 여성의 증언에 따르면(명작스캔들 참조) 무척 수줍어하고 조용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술이 조금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면서 쾌활해지는 성격이었다고.

유재하는 술만 마시면 말도 많아지고, 피아노가 있는 술집에 가면 끝도 없이 즉흥 연주를 계속해 주인이 나가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김현식의 소속사 사장이자 유재하를 데뷔시킬 뻔 했던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유재하의 성격을 개그맨에 비유할 정도로 밝고 쾌활한 타입이라고 소개했고,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주위 사람들이 처음 보면 '바람둥이'같이 보일 것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여성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던 면모를 소개하기도 했다.

친한 누나였던 한영애가 공개한 일화에 따르면, 유재하는 항상 대중음악인들과 소통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본인한테 팬레터가 왔을 때도 그는 모두 모아놓으라고 하였고, 어제 뭐했냐는 질문에 팬레터 답장 쓰느라고 밤 꼬박 샜다고 한다.

그리고 친구였던 김종진 왈 유재하의 꿈 중 하나가 무대 위에 올라가서 딱 피아노를 쳤을 때 "오빠~!"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고 한다.

3.4. 사망

형, 잠시 나갔다 올게. 가수 됐다고 동창이 찾아왔는데 빨리 해치우고 올게~
유언[18]

1집을 발표하고 2개월이 막 지난 무렵인 1987년 10월 31일 저녁에 웬일인지 잘 가질 않던 동창회를 갑자기 간다고 나섰으며[19] 다음 날인 11월 1일 새벽에 술에 취한 친구가 몰던 현대 포니2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 차가 용산구 한남대로 근처 강변북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여 마주오던[20] 택시와 정면 충돌하는 바람에 현장에서 즉사했다.[21][22] 당시 25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사후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現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천주교 용인공원묘원에 안장됐다.[23]

유재하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를 만났던 사람에 의하면 유재하는 1집의 완성도에 아쉬워했고, 만약 2집을 발매할 수 있다면 그 앨범은 더 좋은 앨범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강한 의욕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음주운전을 하던 친구 성 모씨도 이 사고로 숨졌으며, 유재하 유족들은 음주운전자의 아버지 성씨와 충돌한 택시 업체인 한도콜택시를 상대로 4억 1,600여 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1988년 8월 3일 서울민사지법 합의 15부에서는 "승용차를 모는 친구가 술에 취한 것을 알고도 같이 타고 가다 사고가 났으면 피해자도 50%의 과실이 있다"며 "피고 성씨는 유씨 가족에게 4,460여 만 원을 지급하면 된다"고 판결했다.

유재하 사망 당시 65세였던 아버지 유일청[24]이나 61세이던 어머니 황영도 자식 잃은 슬픔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이를 보면 알겠지만 유재하는 당시 기준으로 엄청 늦둥이로 태어났는데, 아들이 음악을 좋아하여 연주하는 것을 시끄럽다고 꾸짖은 것이 두고두고 한이라고 1988년 한 월간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언급했다. 당시 아들의 생전 음반 연주 사진을 방구석에 두고 말없이 쳐다보던 아버지 사진이 이 잡지를 보던 유재하 팬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해당 잡지 스캔 자료[25]

이문세의 경우에는 유재하가 생전에 유명한 가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별이 빛나는 밤에서 울면서 뉴스를 전했다고 한다. 유재하는 이문세에게 1집과 3집에 각각 수록 된 그대 내품에[26]와 그대와 영원히 두곡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고 이문세는 유재하 노래 <지난 날>에서 코러스로 참여하기도 하는 등 음반 작업을 함께한 경험과 더불어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반응이 나온듯 하다.

유재하 사망 이후 라디오에서는 '사랑하기 때문에'와 '지난날'이 정말 많이 나왔다. 생전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27] 사후에 인지도가 올라가며 인기를 얻은 게 되었다.

4. 평가

발라드의 기준이 된 천재 뮤지션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 소개문구

오늘날 한국형 발라드의 문을 연 선구자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2008년 MBC FM4U의 '한국 대중음악, 시대를 걷다'에서 '대한민국의 발라드이영훈에 와서 문이 열리고, 유재하가 창작과 작곡, 편곡의 세계[28]로 발라드의 지평을 올렸다'는 식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김영대 평론가도 당시엔 잘 쓰지 않던 9th 코드 등 여러 화성학적 디테일을 발굴해내고 모던함을 연 모던 발라드의 선구자라고 평했다.

2021년 SBS에서 방송한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에서도 이영훈과 유재하를 한국형 발라드 계보의 시초라 평가하면서, 특히 유재하는 발라드에 팝적 요소를 가미하고, 단조 대신 장조 코드를 유행시키고, 브릿지 부분을 도입한 것을 높게 평가했다. 영상.

대한민국 대중음악사가 유재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까지 나오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그의 음악적 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드물었던 대중음악하는 음대 작곡과 출신답게 그의 음악은 세련된 오케스트라 선율이 들어가는 등 기존의 대중음악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는데, 쉽게 말해 기존 대중가요가 일률적으로 가졌던 소위 뽕끼가 그의 음악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29]

그의 노래 대부분이 다소 슬프고 애잔한 느낌을 주지만, 이전의 가요처럼 신파조는 아니다. 오히려 슬프지만 무언가 깔끔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한국 가요 발라드계의 양대 원조격인 이영훈의 음악들조차 사실 저 '뽕끼' 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했던 것을 고려하면[30] 유재하가 얼마나 앞선 감각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즉, 당대 한국 가요계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장르를 20대 중반의 나이에 개척했고, 이것이 주류가 되었다는 점이 그가 오늘날 와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단순하게 봐도 조용필이라는 대가수가 지배하던 당시 가요 지평에 그 조용필조차 뛰어넘으려고 시도했지만[31] 결국 완벽히 성공하진 못한 대중적 장르 깨기를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 주류가 된 가요(팝) 발라드로 성공시킨[32], 두 시초 중 1명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에 대단한 점이 있다.

알다시피 한국형 발라드는 지금도[33] 힙합, 댄스 아이돌 음악 등과 함께 대중음악의 주류 장르다. 물론 이들이 무슨 대형 기획사를 세웠다거나 후배 뮤지션들을 직접 기른건 아니라[34] 오늘날 대형 기획사만큼의 꾸준한 영향력을 가지진 못했지만, 예술적 영감을 줬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결코 작진 않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후배 가수들, 특히 1990년대 발라드 가수나 작사, 작곡가 등 종사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 역시 상당했다.[35]
  • 신승훈은 유재하 노래를 너무 좋아해서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일부러 11월 1일을 자신의 데뷔일로 잡았다.
  • 김광진은 1991년 발표한 자신의 첫 독집에 “너를 위로할 수가 없어”를 유재하에게 헌정했고 1998년 두번째 독집에 다시 리메이크#하여 싣기도 했다. 또 “내 마음 속에 비친 내 모습”을 1997년 유재하 10주기 추모 앨범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에서 더 클래식 멤버이자 피아니스트/키보디스트인 박용준의 편곡으로 부르기도 했다.
  • 김동률은 유재하의 죽음으로 한국 발라드 계열의 음악은 100년은 퇴보되었다고 말했다.
  • 이규호는 자신의 하나음악을 통해 1999년 발표한 첫 독집 음반에 유재하를 기리는 마음을 담은 자작곡, “영원한 길”을 수록하였다. #
  • 이적은 작곡, 작사, 음악을 대하는 자세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가수 중 하나가 유재하라고 한다.
  • 유영석은 유재하에 대해서 놀라움, 질투, 존경을 한 번에 느낀다고 한다.
  • 유희열이 클래식 음대를 진학하게 된 계기가 유재하라고 한다.
  • 정재형도 한양대 작곡과에 진학한게 유재하 때문이라고 밝혔다.
  • 윤종신라디오 스타에서 '이 사람의 노래를 듣고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고 마음 속의 라이벌로서 그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특히나 작사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는 이야기를 하였다.
  • 이상은도 유재하 노래를 상당히 좋아해서 특히 라디오 방송 같은데서 '사랑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등을 자주 부르곤 했다. 이문세가 내 노래중에 어떤 곡을 제일 좋아하냐고 이상은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대와 영원히(유재하 곡)'라고 답했었다.
  • 한양대 작곡과 후배이자 유명 대중음악 작곡가인[36] 김형석도 유재하 1집을 듣고 감명을 받아 클래식 음악에서 대중음악으로 진로를 바꿨다고 한다.

다만 요절해서 상대적으로 음악적 성과가 적기 때문에, 일각에선 1집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뒤에 기량이 떨어진 가수들과 비교하며, 이른 나이에 사망한 아쉬움이 더해진 약간의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는 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 활동 이전부터 조용필, 김현식 등 거장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본인도 1집에 아쉬움이 있다고 2집 준비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을 보면, 그런 그가 겨우 1집밖에 내지 못한 채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 당연히 아쉬울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빨리 떠났기에, 몇몇 안티들이 이영훈 등에게 간혹 제기하는 표절 논란에서 자유롭다는 장점도 있다.

한편, 가창력은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 편인데, 오죽하면 당시 유재하가 음정 불안 등의 이유로 가창력 미달(...)이라고 방송 출연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 방송사의 병크라고 볼 수 있는데, 유재하가 무슨 고음을 탄탄하게 내는 그런 스타일의 가수는 아니었지만, 그 특유의 순수하고 담백한 음색은 오늘날까지도 독창적이라고 호평받으며, 그렇기에 그의 곡들은 가창력이 아무리 좋더라도 쉽게 따라부르긴 어렵다는 평을 받는다.

애초에 형이 밝혔듯 유재하의 가수보단 프로듀서였고, 특히 늘 같이 묶이는 가수가 유재하처럼 젊은 시절에 요절한 동시에 가창력으로 호평을 받는 김현식김광석, 그리고 신해철이라 좀 더 대비되는 면이 없지않아 있다.[37]

5. 음반

5.1. 1집 사랑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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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추모 앨범

5.2.1. 1997년 앨범

1997년 유재하 10주기를 맞아 김현철의 프로듀싱으로 추모 앨범인 "유재하를 추모하는 앨범 1987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가 발매되었다.

음악 포털 등지에서 1997, 1987을 혼용하고 있는데, 이는 1987의 8을 9와 8을 동시에 표현하는 문자로 디자인해 1997년에 1987년의 유재하를 추모한다는 의미의 앨범 타이틀이였다. '~그대를 위해' 등으로 기재된 곳도 있으나 이는 맞춤법에는 맞으나 원 앨범 제목과는 거리가 있다. 김현철이 전체 프로듀싱을 하고 그야말로 후덜덜한 라인업이 가창과 편곡으로 참여한 앨범. #

김현철의 프로듀싱 치고는 과소평가받는 앨범이지만 추모 앨범에서 흔히 일어나기 마련인 '보컬/편곡 미스매칭'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뿐더러 전체 프로듀싱을 한 명의 프로듀서가 담당함으로써 전체적인 완성도도 높다.

음악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서정적인 스트링 편곡으로 가요계에 새 전기를 마련한 유재하의 추모 앨범임에도 당시 김현철의 음악 스타일이던 도회적인 브라스 위주 편곡으로 원곡과 정서가 많이 달라진 곡들이 좀 있어서[38], 호불호는 좀 갈리는 편이다.

같은 해 발매된 신중현 헌정 앨범과 더불어 대한민국 대중음악 헌정앨범의 효시격인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수익금은 전액 유재하 기념 사업에 쓰였다고 한다.
  • 트랙리스트
  •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배훈이 작사작곡한 오리지널곡. 여러 뮤지션들이 소절을 나누어 부른다. 출연순으로 김현철, 나원주, 유영석, 한동준, 신해철, 일기예보, 김동률, 정재형, 김광진(더 클래식), 이적, 여행스케치, 이소라, 고찬용, 조규찬. 맨 마지막은 역대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들의 합창으로 이루어졌다.
  • 지난 날 (유영석)
  • 그대 내 품에 (나원주[39])
  • 텅빈 오늘밤 (신해철)
  •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더 클래식)
  • 가리워진 길 (일기예보&여행스케치)
  • 우울한 편지 (고찬용[40])
  • 우리들의 사랑 (이적&정재형)
  • 비애 (엉클(권혁진&한동준))
    한영애 2집 '바라본다(1988)' 에 실린 유재하의 곡. 이문세의 '그대와 영원히' 와 더불어 유재하가 쓰고 1집에 실리지 않은 두 곡 중 하나다.
  • 그대와 영원히 (이소라)
    이문세 3집 '난 아직 모르잖아요(1985)' 에 실린 유재하의 곡. 한영애의 '비애' 와 더불어 유재하가 쓰고 1집에 실리지 않은 두 곡 중 하나다.
  • Minuet (인공위성)
    연주곡이었던 'Minuet' 을 인공위성의 아카펠라로 연주.
  • 사랑하기 때문에 (조규찬[41])
  • 재하를 그리워하며 (inst.)
    앨범에서 브라스 편곡을 담당하기도 했던 뉴욕 출신의 재즈 연주자 올레 마티슨(Ole Mathisen)의 색소폰과 여성 백 보컬 중창, 오케스트라로 연주된 '사랑하기 때문에' 가 배경으로 흐르는 가운데 조용필, 이문세, 한영애, 빛과 소금의 박성식, 장기호, 봄여름가을겨울김종진, 전태관, 김민기, 조동진[42] 등 생전의 유재하를 아끼고 기억하는 여러 뮤지션들이 유재하를 그리워하며 육성을 녹음했다.

5.2.2. 2017년 앨범

2017년 12월 7일, 유재하 30주기를 맞아 김형석의 프로듀싱 하에 헌정 앨범 "유재하 30년, 우리 이대로 영원히"가 발매되었다.

앨범 제작과정을 수지가 브이앱으로 실황중계하며 관심을 모았다. 프로듀서 김형석이 자신과 친분이 있는 뮤지션을 대거 참여시킨 것도 특징이다.

다만 헌정앨범은 그 원곡의 감정선을 그대로 이어서 재편곡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에는 그대 내 품에, 우울한 편지, 가리워진 길을 빼고 나머지 곡은 아예 자기만의 색깔로 만들어서 곡 자체가 다른 것마냥 리메이크 되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물론 21세기 트렌드에 맞춰 힙합, 일렉트로니카, 실내악 등 다양한 장르를 편곡에 음악적으로 사용하여 의외로 세련되고 신선하다는 평가도 있으므로 들어보고 판단하자.

5.2.3. 2023년 앨범

2023년 6월 28일, 유재하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하며 데뷔 당시의 느낌을 되살린 앨범.

수록된 음원들은 마스터 릴테이프로 여러번 리마스터링을 거쳤다고 하며, 지금까지 나온 음원 중 음질이 제일 좋다.

앨범 재킷은 1987년 당시 초반 앨범 커버로 수록될 뻔했지만, 유재하의 음악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록되지 못한 소위 '담배연기 이미지'이다.
  • 트랙리스트
  • 우리들의 사랑 (2023 Remastered)
  • 그대 내 품에 (2023 Remastered)
  • 텅빈 오늘 밤 (2023 Remastered)
  •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2023 Remastered)
  • Minuet (2023 Remastered)
  • 가리워진 길 (2023 Remastered)
  • 지난 날 (2023 Remastered)
  • 우울한 편지 (2023 Remastered)
  • 사랑하기 때문에 (2023 Remastered)

5.3.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유재하음악장학재단 홈페이지

사후 유족들은 1집인 "사랑하기 때문에" 의 수익금을 이용해 유재하 음악 장학회를 세우고, 1989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재정 문제로 중단되었으나 2006년에 싸이월드의 후원으로 재개되었다.

2013년 역시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경연대회 개최가 힘들었으나, 100명에 가까운 이른바 '동문(역대 수상자들)'의 힘을 모아 겨우 개최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후원단체가 고정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힘들어질 상황이다. 2019년 30회 대회는 CJ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열렸다.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는 그동안 수많은 음악인들을 배출해냈다. 단순히 음악인이 아니라 한국 음악계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 그 라인업이 대중음악 레전드급인데, 조규찬, 방시혁, 루시드폴, 유희열, 이규호, 나원주[43], 정지찬[44], 심현보, 김연우, 정준일, 임헌일, 노리플라이, 오지은, 박원, 박세진, 고찬용, 스윗소로우,홍이삭등이 대표적 인물이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45]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가 배출한 인물

6. 여담


  • KBS 젊음의 행진에 나와 1집 앨범 수록곡인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부른 영상이 남아 있는데 이게 유재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송에 가수로서 출연한 모습이다.[46] 방송에 꼭 나가고 싶어했던 유재하는 알고 지내던 한영애에게 "누나 나 방송 나가!" 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참고로 한영애는 유재하 자신의 앨범에 싣지 않은 2곡을 받은 뮤지션 중 하나. 나머지 한 곡은 이문세가 받았다. 한영애가 받은 곡은 2집에 수록된 '비애'라는 노래고, 이문세가 받은 노래는 이문세 3집에 수록된 '그대와 영원히'다.
  • 앨범을 내기 전 레코드 가게 주인에게 데모 테이프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가게 주인은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가장 괜찮다고 했고, 유재하도 긍정했다고 한다. 근데 정작 타이틀 곡은 '사랑하기 때문에'인 것이 함정.[47]
  • 당시 시대상 가수들이 방송에 나갈려면 PD로부터 심사를 받았는데, 유재하의 경우 가창력이 떨어진다는 명목으로 방송 출연을 못했다. 이에 옥탑방 문제아들에서 김종진이 밝히길, 피아노바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가 노래 그렇게 못 부르냐고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물론 상기했듯 고음을 탄탄하게 내는 스타일의 가수는 아니었지만, 그 특유의 순수하고 담백한 음색은 오늘날에도 독창적이라고 호평받는다.
  • 당대 음악계 선배들이 유재하를 그토록 아꼈던 이유는 당시 기준으로 대중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음대 출신 음악가 후배였던 점도 컸다고 한다. 당시 대중음악계의 환경이라는 건 개인의 음악성과 음악을 만드는 기본기가 전혀 딴판이어서 대중 가수들 중 극히 일부를 빼놓고는 악보를 그려서 작곡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악보를 제대로 볼 줄 모르는 가수도 많던 시대였다. 그렇게 제대로 된 음악 교육 기회 없이 그저 개인이 가지고 있는 ‘끼’와 '삘'로만 음악을 하고 있었는데, 한양대 음대 작곡과 출신이 대중 가요를 한다고 떡하니 나타나 실제로도 잘하니 선배들 입장에서는 대중음악계의 큰 기대주로 보였을 것이다.

    특히 선배들 중 김현식은 유재하를 무척이나 아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현식은 후배들을 호랑이 선생님 스타일로 이끄는 타입이었는데[48], 김종진이나 전태관 등 당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였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유재하는 항상 그 구타와 집합의 대상에서 열외였다고 한다. 또한 김현식은 유재하가 세상을 떠난 이후 슬픔에 빠져 과음을 하다가 사인이 되는 간경화를 얻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도 김현식은 유재하의 사망을 기점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다가 결국 유재하가 세상을 떠난지 정확히 3년 뒤인 1990년 11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 두 뮤지션에게 바치는 헌정곡으로, 2004년 에픽하이가 '11월 1일'이라는 노래를 자신들의 2집 정규 앨범에 수록했다. 타블로가 유재하를, 미쓰라가 김현식을 기리는 입장에서 랩을 하는 점이 특징이다. 두 뮤지션의 기이한 인연을 모르는 젊은 음악 팬들도 해당 곡을 듣고 비화를 알게 된 케이스가 상당히 있었다.
  • 파일:external/www.newshyu.com/11520_3525_111.jpg
    유재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위 사진과 영상에서도 보이듯 유난히 목이 굵고 길었다고 한다. 보통 목이 짧고 굵은 사람이나 가늘고 긴 사람은 많아도 목이 굵으면서 긴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영애는 후술할 10주기 추모앨범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에서 “사랑하기 때문에”를 배경으로 한 육성 녹음에서 “목이 길어 외로워보였다”고 회고했고 이문세도 실제로 유재하를 처음 봤을 때 무척 신기해했다고 한다.
  •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에 실린 곡들은 사실 유재하 자신의 자전적인 사랑 이야기로, 유재하가 곡을 바친 주인공은 바로 해당 앨범의 기악 파트 중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을 담당한 김애란이라는 여성 연주자라고 한다. 세간에는 한동안 한양대학교 1학년 때 그녀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그녀는 초등학교 동창이었으며 대학에서 기적처럼 재회했음이 라디오스타 유재하 편과 본인이 먼 지인이라고 주장하는 유튜브의 몇몇 댓글에 의해 밝혀졌다. 라디오스타 유재하 편에서 피아니스트 김광민에 따르면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그녀를 대학에서 만나 쓴 곡이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49]라고 한다. 어찌어찌해서 결국 그녀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유재하가 죽자 당시 사귀는 중이었던 이 여성은 큰 충격을 받고 한동안 잠적하며 은둔 생활을 하며 깊이 슬퍼했다고 한다. 그렇게 몇 해 동안 살다가 보다 못한 부모가 해외 여행이라도 하며 안정을 취하게끔 했는데, 스위스로 여행을 가서 한 카페에 들렀는데 난데없이 카페에서 유재하 노래가 나와서 기겁했다고. 카페 주인에게 이 노래에 대하여 묻자 한 한국인 여행자가 준 음반인데 가수나 가사는 몰라도 너무 애절하여 종종 틀어준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유재하와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닌 한양대 후배였던 한 저명 작곡가의 증언에 의하면 김애란이 나중에 좋은 짝을 만나 다행히 나름의 해피엔딩이 되었다고 한다. 다름 아닌 90년대 초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광민과 함께 일요 (수요) 예술무대를 만들어 우리 대중음악의 수준을 격상시켰고, 유재하와 한양대 작곡과를 같이 다니기도 했던 한봉근 PD의 친남동생과 결혼한 것이다.[50] 주위에서도 이같은 소식에 깜짝 놀랐다고 하는데 유재하와 김애란을 둘 다 아낀 한봉근 PD가 소개한 듯 하다. 한 여인이 진심으로 사랑한 연인을 잃은 깊은 상처로 몇 년간을 눈물로 방황하다 다시 사랑으로 인생을 치유한 아름답고 축복할만한 일이다.
  • 유재하의 이름을 한자로 풀면 柳在夏. 즉 원래 한자 표기대로라면 이름을 재하로 쓰는 게 맞지만 당시 'ㄹ'이 'ㅇ'으로 바뀌는 두음법칙으로 인해 대중들에게는 유재하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의 부친도 언론에 소개될 때는 류씨라고 표기했었다. 항렬로는 류시원의 조카뻘이다.
  •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서도호와는 초등학생때부터 각별한 친구 사이라고 하며 서도호는 유재하의 데뷔 앨범의 자켓 사진을 그려 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서도호의 미국 유학행으로 불발 되었고 먼 훗날 서 작가는 유재하의 추모앨범 커버 그림에 참여하였다.
  • '사랑하기 때문에'의 기타 연주는 유재하가 한 것이다. 동갑내기 친구였던 김종진에 의하면 원래 유재하는 기타를 칠 줄 몰랐고 본인이 먼저 기타를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배운 유재하가 기타 실력이 엄청나게 늘어나서 주위 사람들이 당황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악보가 없는 외국 기타리스트의 기타 연주를 순전히 하루만에 귀로 캐치해서 연주했다고 한다. (래리 컬튼의 Room335)
  • 보컬은 약간 음정이 불안정하고 어눌하긴 하지만, 그것조차 매력이라고 평가받는다. 유재하의 노래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에이, 이 정도는 나도 부르겠다'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직접 불러보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유재하 특유의 어눌하고 담백하고 순수한 느낌은 잘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노래 방식이기 때문. 이에 대해서 가수 박정현도 유재하의 음악을 듣고 단지 기교가 전부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 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인데 유재하의 '그대와 영원히'는 원래 가수 문관철[51]에게 1984년에 1집 앨범 작업을 위해 유재하가 주었다. 당시 문관철1984년 때 '시나브로'라는 카페를 운영 중이었는데 당시 한양대학교 작곡과 후배가 유재하였고 둘이 2살 차이였다. 그 카페는 대중음악인들의 아지트가 되어 김현식, 유재하, 들국화, 시인과 촌장, 빛과 소금, 봄여름가을겨울, 김광민, 한상원, 해바라기, 조하문, 권인하 등 많은 뮤지션이 찾아왔었다. 유재하는 1984년에 그대와 영원히라는 노래를 이문세보다 앞서 문관철에게 주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 본인의 자비로 자체 제작을 해서 늦게 앨범이 발매되었다. 결국 1985년 이문세 3집이 나와 그대와 영원히를 발표했고 문관철은 앨범을 본인 자비로 해서 1987년에 1집 앨범을 발매한다. 문관철은 이문세의 그대와 영원히가 있다는 것을 어느날 라디오에서 이문세의 그대와 영원히가 나오는 것을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문세가 어느 프로그램에서 이 일화를 언급했는데 술을 마시면서 이문세가 유재하에게 곡좀 달라고 하였고, 그래서 줬던 곡이 그대와 영원히라고 이문세가 가로챈 것도 아니고 그냥 유재하가 이문세에게 준 것으로 보인다.
  • 유재하가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한 것은 군 전역 이후였다.# 하지만 당시 육해공군 복무기간이 최소 30개월 이상이었고, 군 복무 기간에는 대부분의 활동이 제한되는 데도 불구하고 복무기간으로 추정되는 85~86년 사이에 음악활동의 행적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복무기간이 14~18개월 정도로 짧고 출퇴근이 가능했던 방위병으로 복무했을 가능성이 높다.[52]
  • 유재하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1997년, 신해철, 조규찬, 이적, 등이 참여한 그의 추모 앨범인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가 제작되었다. 물론 이 앨범도 서울음반을 통해 출시됐다.
  • 2011년 MBC 우리들의 일밤나는 가수다의 5월 26일 방송분에서 박정현이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 를 불렀다. 나는 가수다 스포로 그녀가 이 노래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지만 잔잔하게 이 노래를 소화해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박정현은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선물받은 것이 유재하 1집이었고, 그 때 많은 영향을 받았었다고 <나는 가수다> 방송 중의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 2011년 6월 28일 KBS의 명작스캔들에 유재하편이 방송되었다.
  • 2012년 11월 2일 방송된 KBS의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는 <땡스 투 유재하> 특집을 방영하여 유재하와 관련있는 가수들을 초청해 유재하가 만든 노래 거의 전곡을 TV 방송 최초로 공연했다. 이 방송에 출연한 이적의 말에 따르면 라디오 방송을 제외하고는 TV에서 유재하의 노래 전곡을 방영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다만 목록을 보면 정확하겐 전곡이 아니고 '텅 빈 오늘밤'과 '비애'는 부르지 않았다. 현악 연주곡인 'Minuet'도 제외. 대신 제1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금상작인 '무지개'가 추가되었다.
  • 2014년 10월 29일 라디오 스타에서 유재하를 주제로 한 유재하이기 때문에 특집을 방영했다. 일단은 토크쇼가 베이스다 보니 친구들(김광민, 장기호)이 들려주는 잡설(ex: 목소리가 맹구같았다[54])들과 나머지 게스트(조규찬, 박원)들이 들려주는 유재하에게 영향을 받은 점 + 바치는 노래까지 해서 재미와 감성을 둘 다 잡는데 성공했다.
  • 유재하 30주기를 기념하여 그를 소개하는 글이 올라왔다. 그의 음악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사랑하기 때문에 전 곡이 수록되어 있으니 읽어볼 만 하다. 30주기 기념 소개.
  • 유재하의 노래인 사랑하기 때문에와 동명의 제목을 가진 2017년 영화 <사랑하기 때문에>를 보면 주인공인 진이형의 삶이 유재하와 흡사하다. 일단 좋아하는 여자가 음악을 하는 사람이고, 참고로 진이형이 좋아하는 여자는 첫사랑인데 유재하가 좋아했던 여성도 첫사랑이다. 그리고 이 여성에 대한 순애보적인 면도 비슷하다. 사고를 당하는 장면도. 이런 거 보면 영화 제목도 그렇고 사랑하기 때문에가 OST인 것도 그렇고 이 주인공의 모티브는 유재하인 듯하다.
  • 2020년 유재하와 김현식의 인생을 다룬 '너와 나의 계절'이라는 영화가 제작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으나, 여러 이유로 난항에 부딪힌 걸로 보인다. 항목 참조.
  • 2022년 2월 11일부터 2월 18일까지 티빙 오리지널 프로그램인 '얼라이브'에서 AI기술로 그의 목소리를 복원하여 멜로망스와 같이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듀엣했고, 2월 17일에 사랑하기 때문에를 오케스트라로 재편곡을 해 음원 발매했으며, 가수 김나영과 같이 듀엣으로 "그대의 조각들을 담고서"라는 곡으로 무려 35년 만에 신곡을 발표했다. 다만 AI기술이 아직 유재하 목소리를 100% 재현했다고 보긴 어려워서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로 나중에라도 AI기술이 더 좋아지면 유재하가 작사/작곡하고 본인이 부르진 않은 2곡 '그대와 영원히'와 '비애'를 유재하 재현 목소리로 들어보고 싶다는 팬들은 꽤 많다.

7. 관련 문서


[1]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마을. 하회마을 경내 유재하 생가에 다녀온 네티즌의 증언에 따르면 하회리 620번지(신 주소 : 하회남촌길 54)에 유재하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으며, 사촌 형인 유운하(柳雲夏)가 소유자로 되어 있다. 인근의 광덕리와 함께 풍산 류씨 집성촌이다. 배우 류시원, 류돈우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천주교용인공원묘원. 이곳에 후에 한강 영화촬영 헬기 추락 사고로 요절한 배우 변영훈김수환 추기경이 안장되었다.[3] 찰방공파-문충공(文忠公) 서애종파(西厓宗派)-진철(進喆)파 27세 하(夏) 항렬.[4] 1989년 타계. 풍산류씨세보 3권 찰방공파 378쪽에는 1923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5] 現 은석초등학교.[6] 친구였던 장기호 교수 말에 따르면, 원랜 무종교였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십자가가 있길래 이거 뭐냐고 물었더니 여자친구가 같이 성당에 안 나가면 안 만나주겠다고 해서 믿게 되었다고 한다.[7] 초명 유시명(柳時洺).[8] 황순일(黃淳一).[9] 다만 친구들 증언에 따르면, 평소 차림은 노무자 스타일 점퍼를 즐겨 입었다고 한다. 본인은 나름 차려입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함정.[10] '잃어버린 우산'으로 대학가요제 동상을 수상한 우순실이 동기다.[11] 당시만 해도 순수음악 전공 학생이 가요계와 연결이 되면 퇴학 조치를 당하던 시절이라 카메라에 절대 잡히지 않는 조건을 걸고 시작했다.[12] 조용필과 유재하의 노래를 비교해 보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마음 당신 곁으로나 눈물로 보이는 그대와 같은 1980년대식 조용필 발라드의 형식이 강하다.[13] 52분 25초부터 약 20초간 단독 샷이 나온다.[14] 이후 김현식은 유재하 사후, 추모의 의미로 <그대 내 품에>를 자신의 4집에 수록했다.[15] 현 가치로 환산시 약 2,800만원[16] 노래가 많이 힘들긴 하다.[17] 다만 생전 유재하와 친분이 있다고 주장한 한 유튜버 댓글에 의하면 친한 사람에게는 노래를 들려주면서 "가사 잘 쓰지 않았냐?"고 했다는 말도 있는 것을 보면 겸손의 말일 수도 있다.[18] 동창회에 가기 전 수술 후 칩거 중이던 형에게 한 말.[19] 김종진에 의하면 유재하가 면허를 딴 기념으로 술자리를 가다가 사고를 당한 거라고 말하였다.[20] 어감상 중앙선을 침범한 주체가 친구 차인지 택시인지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21] 1980년대 당시에는 음주운전에 대한 인식이 2000년대 이후 지금처럼 철저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흡연과 비슷하다. PC방에 흡연실이 설치되기 전까지 초등학생들 간접 흡연되건 말건 옆자리에서 대놓고 담배 피던 것이 2010년대까지 이어져왔다.), 몇잔 한 정도로는 큰 죄의식 없이 음주운전을 하는 사람도 제법 많았다. 물론 유재하도 음주운전한 친구 차를 얻어탔기에 책임이 아주 없지는 않다. 다만 시대적 상황이나 동승자 입장일 뿐이라 이 부분에선 덜 비판받는 것일 뿐이다.[22] 당시 강변북로는 고속화도로가 아닌 현재의 서빙고로로 중앙분리대가 없는 일반도로였다.[23] 훗날 1993년 헬리콥터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변영훈과 2009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이 안치된다.[24] 유재하 사후 2년 뒤 아들을 따라 사망했다.[25] 네띠앙 메일로 된 주소가 나왔는데 2000년 초반에 스캔한 자료로 지금은 스캔 자료조차 레어가 된 셈이다.[26] 1집 앨범상에는 당사자들만이 아는 모종의 이유로 인해 작사 작곡이 이문세로 기재되어 있으나 노래는 유재하 곡과 같다. 이문세-그대 내품에
파일:리문세 1집 가사지.png
[27] 물론 음악 자체는 생전에도 라디오 등에서 나와 아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방송 출연 자체가 1회에 불과할 정도라 유재하 자체의 대중적 인지도는 낮았다. 애초에 1987년 8월 20일에 1집을 내놓고, 11월 1일에 사망했으니 생전 활동 기간이 채 3개월이 안된다.[28] 실제로 사랑하기 때문에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사상 최초로 한 사람의 가수가 작사, 작곡, 편곡을 ‘혼자서’ 그것도 '훌륭하게' 완수해낸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 셈. 참고로 이영훈은 그의 페르소나로 가수 이문세가 있었다.[29] 다만,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한세대 위의 가수인 조용필이 부른 '사랑하기 때문에'는 뽕끼가 상당히 느껴진다. 편곡이나 창법 차이도 있었던 것. 그래서 유재하가 더 평가받는 것이기도 하고.[30] 물론 뽕끼 자체가 무조건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팝송이 주류이던 시대적 흐름에서 정반합하지 못하고 구시대적으로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31] 조용필 역시 당대 팝송의 영향을 받아 부단하게 한국형 가요의 새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 뮤지션이긴 했다.[32] 다만 본인은 딱히 이것을 발라드라고 지칭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엔 발라드라는 말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는 1980년대 후반 직전이라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2017년 유재하 형의 인터뷰에 따르면 "제가 재하에게 '장르가 뭐야?'라고 물으니 '음악장르가 어딨어. 뭐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크로스오버랄까'라고 하더군요. '그런 장르도 있니?'라고 하자 '나 같은 장르' 라며 웃었어요. 음악적인 자존심이 무척 강했죠."라고 한다.#[33] 물론 꾸준한 변화와 발전, 락발라드 등 장르적 혼합도 있어왔지만[34] 후술되어있듯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있긴 하지만, 이건 사후 유족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대회라 생전 직접적인 연관은 없긴 하다.[35] 오늘날에도 유재하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증언하는 후배 뮤지션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재미있는건 R&B 쪽에서도 이런 반응이 제법 있다는 것인데, 유재하가 멘토라는 정엽이나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 유재하 1집이라는 태양, 유재하를 가장 존경한다는 베이빌론 등이 대표적이다.[36] 이런 점에선 유재하의 간접적인 후계자라고 볼 수도 있다. 김형석은 훗날 인터뷰에서, 실제 대학 시절 만난건 2~3번 정도에 대선배라 그때도 음악 얘기만 나눴지 개인적으로 친해지진 못했다고 매우 아쉽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2023년 영상에서도 유재하를 멘토라고 표현하며 여전한 존경심을 드러냈다.[37] 유재하가 워낙 일찍 요절한 탓에 유재하가 이들 중 제일 어릴 것이라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는데 사실 김현식과는 고작 4살밖에 차이가 안 나고 김광석보다 2살, 신해철보다 6살 더 많으며, 이는 유재하가 이들 중 유일하게 20대라는 비정상적으로 어린 나이에 사망했기에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다만 넷 모두 사인은 다른데 유재하는 교통사고, 김현식은 병사, 김광석은 자살, 신해철은 의료사고로 생을 마감하였다.[38] 대표적으로 '지난 날'[39] 제 7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 대상 수상자[40] 제 2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 대상 수상자[41] 제 1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 금상(당시 최고상) 수상자[42] 전태관, 조동진 두 분 이젠 고인이 되었다.[43] 남성 듀오 ‘자화상’의 멤버로 현재는 작곡가, 피아니스트, 영화음악 감독으로 활동중이다.[44] 나원주와 함께 ‘자화상’의 멤버[45] 박수홍도 유재하를 동경해 개그맨이 되기 전 가수를 꿈꾸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 참가했는데 얼마 안가 떨어졌다고 고백한 바 있다.[46] 단순 출연까지 포함한다면 위대한 탄생 멤버일 때의 방송 출연도 포함된다. 하지만, 상술되어있듯 유재하 본인은 이때 장면을 일종의 보조 출연 정도로 여겼는지 주변에 그다지 자랑하지 않았기에, 본인이 지인들에게 방송 나간다고 자랑한 건 이 젊음의 행진 출연 장면이 유일했다.[47] 후술된 여자친구 썰과 이어서 연관지어 보면, 초등학교 이후 대학에서 다시 재회한 연인을 위해 '사랑하기 때문에'를 타이틀로 선정했을지도 모른다.[48] 김현식은 기본적으로는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한 번 화가 나면 매우 무서워지는 성격이었다고 하며, 특히나 아들에게는 더욱 엄격한 사람이었는지 아들의 회고에 따르면 김현식은 상당히 무섭고 엄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다만 후배들의 회고나 1980년대 자체가 선후배의 위계질서가 지금보단 매우 강했던 시대였음을 고려하면, 당시 기준으론 김현식이 유별나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군기잡기 등이 잘했다는건 아니지만, 어찌됐든 당시 군기반장 역할을 했던 김현식조차 유재하는 건드리지 않았다는 소리.[49] 사랑하기 때문에에 동일한 가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해당 곡의 데모 버전 격인듯 하다.[50] 참고로 유학 오기 전 부모를 교통사고로 여읜 김광민은 미국에서 유재하의 부고 소식을 듣고 “지구에서 온 편지”를 작곡해 헌정하고 자신의 첫 앨범 타이틀 곡으로 쓰기도 했다. 김광민은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회고하며 “수요예술무대 같이 했을텐데… 잘 지내지?” 라고 하기도 했다. # 1992년 MBC에서 첫 방영을 한 일요예술무대 (나중에 금요-수요 예술무대)가 상업성이 없어 심야프로이긴 했어도 90년대 문민시대를 맞아 진정한 문화에 대한 시청자들의 열망에 발맞추어 김광민 자신의 음악뿐 아니라 팻 메시니 그룹, 끌로드 볼링, 척 맨지오니, 밥 제임스, 칙 코리아, 정원영, 한상원, 한충완, 정재일 등의 수준 높은 국내외 대중음악을 우리 공중파에 처음 보급한 역사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미국 NBC에서 1988년부터 90년까지 방영된, 색소포니스트 데이빗 샌본이 진행하고 베이시스트 마커스 밀러가 음악감독을 맡은 ‘Sunday Night (나중에 Night Music)’##이라는 SNL의 스핀오프격으로 라이브 공연 무대와 CG 포맷등을 그대로 차용한 전설적인 주말 심야 음악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재즈뿐 아니라 점차 모든 장르의 뮤지션들을 초청하며 크로스 오버를 지향했는데 일요예술무대가 아무래도 이에 아이디어를 영향받지 않았나 싶다. 일요예술무대가 물론 당시 귀국해 활동을 펼치던 미국 유학파들의 영향을 무시 못하지만 당시 국내 대중음악인들과 음악 팬들에게 미친 크나큰 영향을 생각하면 유재하가 조용히 뿌린 새로운 대중음악의 씨앗이 그대로 이어져 90년대 이후 우리 대중음악을 풍요롭게 꽃피웠다고 볼 수도 있다.[51] 김장훈이 불러 히트시킨 '오페라'의 원곡 가수이다. 또한 해당 음반의 발매가 사정상 늦어진 사이에 김현식이 노래를 듣고 작곡가에게 곡을 부르게 해달라고 사정해 먼저 음반을 내버리고 유명세를 가져간 명곡 비처럼 음악처럼이 있다. 여러모로 명곡이 두 번이나 사람을 비껴간 셈.[52]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조교를 했다고 한다. 아마도 방위병을 대상으로 훈련조교를 했던 듯 하다.[53] 한국어 위키백과를 참조 및 인용.[54] 완전히 맹구같진 않고, 실제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던 음성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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