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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양현석 • 서태지 • 이주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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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그룹명 | 서태지와 아이들 | |||
Seotaiji and Boys Taiji Boys(영어) | ||||
장르 | 랩/힙합 | |||
리더 | 서태지 | |||
활동 기간 | 1992년 3월 23일 ~ 1996년 1월 31일 | |||
데뷔 | 1992년 3월 23일 정규 1집 난 알아요 (데뷔일로부터 [dday(1992-03-14)]일째) | |||
팬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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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대를 지배한 문화대통령
Mnet 레전드 100 아티스트
Mnet 레전드 100 아티스트
1991년에 결성되어 1992년 방송 데뷔한 대한민국의 3인조 음악 그룹. 성인가요나 발라드, 성인가요삘 댄스 가수가[3] 지배하던 1990년대 초반, 젊은이들 취향에 맞는 힙합댄스그룹[4][5]을 내세우며, 한국 가요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팀이다. 한국 가요계 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영미권 대중음악계의 너바나 혹은 마이클 잭슨 등에 못지 않다. 즉 장르 개척 혹은 대중화의 시발점. 이러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대중들과 평론가 모두에게 1990년대 최고의 문화적 상징이자 오늘날 한류 열풍의 중심인 K-POP의 진정한 시작을 알린 그룹으로 인정받고 있다.[6]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보컬, 작사, 작곡 및 연주, 프로듀서, 공연 기획 등 음악 및 활동 전반을 책임진[7] 서태지를 네임리더[8]로 둔 그룹. 서브보컬과 안무를 맡은 양현석, 이주노와 함께 1991년에 결성한 3인조 댄스 그룹이다. '서태지'라는 이름도 촌스럽고,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팀명도 병맛이라고 하던[9][10]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이러한 논란을 데뷔 앨범부터 갖춰진 탄탄한 실력으로 잠재웠다.
1992년에 1집 난 알아요로 데뷔했으며, 1996년에 은퇴 및 해체를 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해체 이후에는 각자의 음악활동들에 전념하였다.
특종 TV연예 1회 |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의 시작은, 1992년 4월 11일(토) MBC 특종 TV연예 1회 방송이다.[11] 특이한 것은 아침마당 진행자로 유명한 이상벽이 연예부 기자 직함을 달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상벽은 나훈아, 김지미의 결혼 특종도 냈던 연예부 기자이자 연예 평론가로서 책도 냈었다. 그의 이미지를 바꾼 아침마당은 이 방송과 거의 비슷한 시기 (1주일도 차이 안 난다) 에 시작했다.[12]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 방송으로 데뷔를 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데뷔하고 한 달쯤 지난 시점에서 방송한 것이다. 이 방송이 나오기 이전에도 여러 매체에 출연해서 노래도 했다고 당시 매니저였던 최진열이 증언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 3월 14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291회에서 첫 데뷔 무대를 가졌다. 이 무대는 팬들 사이에서 일명 팬들 사이에서 일명 ‘신호등 무대’로 불리고 있다.[13]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291회[14] |
2. 결성
시나위의 베이시스트였던 서태지(본명 정현철)는 시나위가 해체된 이후, 정통 락 뮤지션으로서는 드물게 198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유행했지만 한국에서는 생소하던 랩 음악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랩 장르를 바탕으로 한 획기적인 댄스 그룹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마이하우스라는 나이트클럽 업소에서 활동하는 무궁화 밴드의 멤버로 있을 때 같은 업소에서 일하면서 댄스 그룹 활동에 도움이 되고자 춤을 배우기 위해서 소개받은 양현석에게 자신이 작곡하고 있던 음악들을 들려 주었다.[15] 1년간의 군 생활 뒤 의병제대한 양현석은 서태지가 들려주었던 음악들을 잊지 못해 제대 후 다시 서태지를 찾아오고 때마침 댄서를 구하던 서태지와 합이 맞은 둘은 듀엣을 결성하기로 하고 녹음까지 완료했으나, 추가 멤버를 들이기로 하고 수많은 이태원동 댄서들을 둘러보다가, 박남정과 프렌즈로 활동했던 이주노(본명 이상우)를 최종 멤버로 영입하면서 3인조 댄스 그룹이 되었다.이주노가 나중에 합류하는 바람에, 서태지와 아이들 1집에는 이주노의 목소리가 없다. 이 사실을 양현석이 20년 만에 자기 입으로 말했다. 이 때문에 이 항목 상단부에 있는 영상에서 보듯 방송에서 사용한 '난 알아요' 음원은 앨범 음원이 아니라 이주노의 목소리까지 덧입힌 버전이며, '환상속의 그대'는 아예 여러 버전의 리믹스를 새로 발매하여 활동했다.[16] 사실 양현석은 이주노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형이었기 때문에, 팀내 불화가 생길까 염려되어 받아들일까 말까 망설였으나, 그래도 같은 댄서인데 통하는 데가 있으리라 판단하고 이주노를 팀에 받아들였다고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아이돌 그룹이 아닌 어떤 단체라 할지라도 굉장히 희귀한 사례인 막내가 리더인 그룹이었다.[17][18][19] 나이가 제일 어린 서태지가 팀을 통솔한 것이다. 이렇게 그룹명과 실제 멤버간의 나이 서열이 어긋나다보니 팬들 중에선 우스갯소리로 '서태지와 어른들'이라고 부른 경우도 간혹 있었다.[20]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그룹 이름은 리더인 서태지가 지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양현석은 힐링캠프에 출연해, 원래 이름은 "태지보이스(TAIJIBOYS)"였는데[21] 매니저가 멋대로 "서태지와 아이들"로 바꿨다고 회상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나 앨범 부클릿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표현은 1집에서만 등장하고 2, 3, 4집에서는 'Seotaiji and Boys'라는 영어식 표기가 대신 등장하며, 4집에는 TAIJI BOYS라는 영어식 명칭만 단독으로 표기된 제목의 곡도 있다.
아무튼 서태지가 중심에 놓인 그룹 이름과 막내가 리더라는 점에서 드러나듯이 서태지의 비중이 컸다. 장르나 스타일은 다르지만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과 비슷할 정도로 리더로써 서태지의 영향력이 지대했다. 서태지가 작곡을 넘어 안무 구성을 제외한[22] 음악이나 활동 컨셉, 공연 활동, 심지어는 스케줄 전반까지 활동 전체를 대부분 결정했다. 해피투게더에서 서태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수입 역시 3:3:4로 본인이 4를 가졌고, 음반은 본인이 제일 많이 관여했기에 2:2:6으로 6을 가져갔다고 밝혔다. 예외적으로 1집의 '이 밤이 깊어가지만'과 3집의 '널 지우려 해'는 양현석이 작사했으며, 3집부터 밴드 성향이 짙어졌음에도[23] 4집에 'Come Back Home'과 같은 힙합곡이 수록된 것도 마지막 앨범 활동을 힙합으로 해보고 싶어한 양현석의 제안이었다고 한다. 양현석과 이주노는 1, 2, 3, 4집의 대부분의 안무를 만들었다.
3. 영향력
3.1.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
'케이팝의 그 무언가'가 아닌 '케이팝의 모든 것'
빌보드매거진코리아 2호
빌보드매거진코리아 2호
Modern K-POP not only has an origin story, it has a birthdate.#
(현대 케이팝에는 기원이 되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생일도 있다)
롤링 스톤 -The 100 Greatest Songs in the History of Korean Pop Music
(현대 케이팝에는 기원이 되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생일도 있다)
롤링 스톤 -The 100 Greatest Songs in the History of Korean Pop Music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뒤 한국 대중가요계는 성인가요와 발라드 위주에서 10대 취향의 댄스음악 위주로 재편되었으며, 단순히 트렌드의 변화를 넘어 영미 팝이 한국 음악, 특히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지던 시절에 이들은 그 영향력, 특히 "10대~20대의 지분"을 송두리채 떼어 한국 가요로 가져오는, 혁명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현진영과 함께 "한국어는 구조상 랩이 불가능하다."라는 당시 전문가들의 선입견을 무너뜨리고, 댄스와 랩을 대중화했다. 2집 하여가에서 최초로 국악과 흑인음악(힙합), 헤비메탈을 접목하고, 3집에서는 랩 메탈, 4집에서는 갱스터 랩을 시도하는 등, 앨범을 들고 나올 때마다 새로운 장르를 도입, 소개하면서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에 신선한 변화를 가져 왔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기 직전 가요 톱텐에서는 태진아가 <거울도 안 보는 여자>로 1위를 했다. 물론 한국에서 보기 드문 다양한 음악색을 보여주던 조용필, 김연자 등의 성인 가요 네임드들이나 신승훈, 변진섭과 같은 세련된 발라드 가수들, 김수철, 신해철, 현진영 등 해외 뉴웨이브를 받아들이던 음악인들도 음악산업 주변부에서나마 힘을 썼으나, 이들 대부분은 대중매체인 TV보다 공연을 더 많이 했기에 당시 TV의 뒤쳐진 문화는 당시 10대·20대가 따라가고 싶던 힙합, 현대적인 댄스팝뮤직을 비롯한 "세계적인 트렌드"와 괴리가 있었다. 민주화된 1990년대에 새로운 유행을 따라가고 싶어 하고 구매력까지 갖춘 10~20대들은 있는데, 이들을 만족시킬 만한 콘텐츠가 한국에는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랩뮤직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된 1990, 91년 바로 이듬해인 1992년도에 '한국어 랩'과 '회오리춤'을 들고 서태지가 나타났다.[25] 10대, 20대들이 원하던 세계적인 트렌드와 한국 음악 사이의 간격이 기적과 같이 좁아지고, 억눌려 있던 젊은층의 수요가 한꺼번에 폭발하였던 것이다. 단순히 랩 음악을 한국에 반짝 유행시킨 정도가 아니라, 이로 인해 대한민국 가요계의 대세를 현대식 댄스뮤직과 랩뮤직으로 완전히 바꾸었다.
그 당시 문화 충격을 1990년대생 이후 세대들이 알기 쉽게 설명해 보자. 라디오는 7~8개[26]에 TV 채널은 지상파 5개[27]뿐이고, 인터넷과 케이블 방송도 없었으며[28] 인터넷 기능을 하던 전화접속 PC통신은 비싼 전화료가 문제였다.[29] 일부 부잣집에서 전화선과 별도의 ISDN 회선을 끌어다 썼지만, 이것도 대부분 PC통신 접속용이었으며 일반인들 대부분은 인터넷 접속방법 자체를 몰랐다.[30] 한국에서 인터넷이 일반화된 것은 WinSOCK을 기본 내장한 윈도 95가 널리 퍼지면서부터이다. 이런 이유로 신문 구독률이 여전히 70%대에 이를 정도로, 지면을 통한 정보 수집이 주류였다. 민주화되었다지만 사회 분위기 때문에 TV에서는 머리를 기르거나 염색한 남자도 못 나온다.[31] 한국 영화는 흔히 말해 "내돈 주고 보기 아깝다."라는 수준이고[32], 방송에는 트로트, 발라드, 템포만 빠른 정도의 댄스 가수 위주였다. 그런데 해외 팝 뮤직을 보면 한국과는 전혀 다르다. 형형색색 다양한 패션을 갖춘 형, 누나들이 훨씬 더 감각적이고 파격적인 음악을 했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멋진 춤을 추고, 신선한 장르의 강렬한 노래를 부른다. 발라드도 좋지만, 해외의 가수들처럼 젊은 사람들 구미에 맞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다행히 경제 수준이 좋아지면서 마이마이와 같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가 제법 보급되었기에, 예전보다 음악을 접할 통로는 많아졌다. 당시 카세트 플레이어는 지금의 닌텐도 스위치 가격 정도였고, 정품 카세트 테이프 앨범은 지금 물가 기준 대략 2만원 정도였으며, 레코더를 이용한 불법복제 테이프는 대략 5~7천원 정도였다. 정말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버거웠지만, 플레이어가 많이 보급되었다. 또한 휴대용 플레이어를 구하지 못해도, TV나 라디오는 가정당 1대는 살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내려갔기 때문에, 학생들이 TV나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휴대폰이나 삐삐가 부유층이나 직장인들의 전유물이었기에 늦은 저녁이 되면 친구와 집 눈치를 봐가며 집전화로 잠깐 대화를 하는게 전부였고, 저녁에는 가족끼리 둘러앉아 TV를 보고, 밤에는 별이 빛나는 밤에와 같은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게 문화생활의 전부였다.
그렇지만 TV를 틀면 어제 뮤직뱅크에서는 여전히 송가인이 수십 년째 지겹게 들어온 트로트로 5관왕을 했고 역시나 임영웅이 트로트 메들리로 지상파 방송사 가요 차트를 쓸고 있는 상황이다. 또 발라드 가수들이 신스음 하나 없는 브라스 밴드에 맞추어 부르고 있다. 그런데 오늘도 송가인이 이겼나 임영웅이 이겼나 보려고 TV를 틀었더니 난데없이 오늘 방탄소년단(이하 BTS)이라는 신인 그룹이 '피 땀 눈물'이란 랩과 강렬한 비트를 토대로 군무가 잘 짜여진 노래를 들고 나왔단다. 심지어 19세밖에 안 되었다는 멤버 RM의 자작곡이란다. 바로 어제까지 텔레비전을 틀면 트로트와 발라드 말고는 다른 음악은 듣기가 힘들었는데, 평생 그런 것을 보지 못했고 외국의 것을 갈망만 했던 10대, 20대가 듣고 보는 충격은 어느 정도였을까? 1990년대생 이후 시점으로 쳐 보면, 다음날 학교에서 아이들이 BTS 이야기만 하고 있지 않을까?
상술한 것처럼 완전히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방송에서 봤다고 생각해보자. 1980년대 들어 영미의 팝음악은 다양한 장르의 탄생과 마이클 잭슨 등 대스타의 등장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국내에서도 이들 영미권 팝스타의 인지도는 특히 10~20대에게 대단해서 동네 레코드샵에서 빌보드 HOT 100 복사판을 나눠줄 정도였고 유로댄스 생소한 가수의 내한공연에 만석이었다. 인터파크 같은 온라인 예매도 없었으니, 시내 대형서점까지 한나절을 잡고 직접 버스타고 가서 티켓을 사오거나, 은행을 통해 입금예매하는 게 전부였던 시절에도 그정도 열의로 공연을 찾아다니는 음악 팬들이 증가했다. 반면에 국내 음악시장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부터 공윤의 검열 등의 영향으로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기보다는 정부가 지원하는 건전가요나 기성세대풍의 기존 음악 위주였다.
이렇게 세계의 유행을 좇아 새로운 장르를 받아들일 토양과 수요는 이미 1980년대 초중반부터 무르익었고, 구매력을 갖춘 10대들·20대들이 생겨났으나 한국 음악계가 거기에 맞추지 못한 것.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의 Wham!, Duran Duran, A-Ha, 바비 브라운 등등. 특히 그 당시의 10대 청소년들에게 뉴 키즈 온 더 블록(이하 NKOB)의 인기와 파괴력은 엄청났다. 서태지 데뷔 바로 한 달 전 NKOB 내한 당시 수십명이 부상당하고 깔려죽는 사망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져서 공연이 중단될 정도였다.[33]
오죽하면 당시 10대~20대 취향의 컨텐츠 부족 현상은 당시 합법적으로 수입이 금지되어 일반인들은 접하기 힘든 J-POP까지 손을 뻗치게 하여, 쿠와타 케이스케 등 당대 일본의 유명 음악 또한 1980년대 후반 암암리에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했을 정도다. 참고로 그 시절은 반일 감정이 지금보다 더 컸고, 인터넷 같은 정보 매체도 부족했다.
이러던 와중에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이 아닌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10대·20대 취향에 맞는, 그러면서도 서양 사람들의 전유물로만 생각되었던 랩이 들어간 세련되고 독특한 음악과 춤을 선보였던 그 신선함과 파괴력은 엄청났다. 이는 NKOB나 듀란듀란같은 영미권 팝 아이돌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통째로 떼내어 한국인이 가져온 기념비적인 사건인 것이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전에도 댄스 곡을 했던 가수들이 꽤 있었다. 나미, 민해경,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 등은 아이돌의 효시라 볼 수도 있고 빠른 댄스 음악을 선보였으며 이들도 분명히 의미와 진보가 있는 노래를 발표하고 보여줬다. 흑인 음악을 기반으로 데뷔했고 절정의 기량을 가진 현진영도 있었다.
# 한 블로거의 서태지에 관한 포스팅인데, 그는 서태지를 가장 위대한 한국 가수로 꼽고 있다. “서태지 이전과 이후는 하나의 단층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라디오에서 처음으로 난 알아요를 들었을 때는 평범했지만, 화면에서 봤을 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무슨무슨 장르를 도입했다는 말로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충격이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동안 흑인음악이나 댄스음악을 도입했던 것은 사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아니고 먼저 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파괴력이 달랐다. 실제로 10대 후반에서 20대는 물론이요, 1990년대 당시의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는데, 서태지의 '난 알아요'는 다같이 랩 가사까지 전부 외우면서 쉽게 불러도 정작 어린아이들이 들을만한 동요는 거의 모르고 관심도 없으니 어버버거리고 한 소절도 따라부르지 못했다.
가장 좋은 예시가 한국형 흑인음악을 시도한 현진영이다. 당시 흑인음악에 관한 탁월한 이해도, 서태지 이상 가는 가창력, 그리고 최고의 춤 실력을 가졌으며[34] 서태지와 아이들보다 상당히 먼저 데뷔하기까지 했다. 현진영과 와와 시절 그는 최고의 댄서인 구준엽과 강원래를 양옆에 거느리고 뛰어난 테크닉과 절정의 운동능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흑인음악 도입도 그가 서태지보다 먼저 했다. 꽤 잘생기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흔히 말하는 서태지의 성공조건과 같다. 그럼에도 그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서태지와 비슷한 급의 파급력은커녕 1류 인기가수라고 하기도 어려웠고 약간 이름을 알린 정도였다.
그가 인기를 끌게 된 것은 흐린 기억 속의 그대, 현진영 go 진영 go 등을 통해 서태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무대를 보여주면서였다. 완성형 가수로 데뷔한 현진영의 가창력과 춤 실력은 짧은 시기 사이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무대 구성이었다. 서태지 이전 야한 여자, 슬픈 마네킹 등의 무대와 서태지 이후 현진영의 무대를 보면 동일한 가수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크다. 나미와 붐붐도 인디언 인형처럼이 큰 인기를 끌었고 흑인음악 도입, 댄스, 붐붐의 랩, 쟈넷 잭슨의 영향을 받은 의상까지 꽤 인상적이지만 가요계의 조류를 바꾸지는 않았다는 것에서 서태지 이전의 현진영과 와와와 비슷하다. 이쪽도 글로 늘어놓는 조건으로 따지면 서태지와 아이들과 별 차이가 없지만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랩 역시 1990년에 인기가수였던 신해철이 방송무대에서 영어랩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특이함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재조명되는 소위 탑골 GD 양준일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흑인음악을 하고 춤도 추는 양준일도 서태지 이전과 이후의 무대는 전혀 다르다. 시대를 엄청나게 앞섰다며 양준일에 대한 칭찬이 쏟아지는 무대들은 죄다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이후의 무대다.
흔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성공조건이라 불리는 여러 조건들이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도 그것을 갖추고 있던 다른 가수들이 이미 있었음에도 가요계를 재편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이었고, 그 등장 이후에는 블로거의 표현대로 단층이라 할 정도의 차이가 생겼고, 한국 가요계는 서태지가 분출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세례를 맞았기에 더는 단순해질 수 없었다.[35]
이것은 그들이 무대에서 보여준 모든 모습, 그리고 무대 바깥에서 보여준 모습들이 기존 가수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단순히 적시에 적절한 음악 장르를 한국에 도입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36]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젊은 가수는 자기 색깔이 확고한 극소수를 제외한다면 단층 아래에서 도태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서태지와 아이들의 형식으로 재편된 모습이 현재의 K-POP이다.
또한 음악적으로도 서태지가 아니었으면 세계적으로 찬사받는 현재의 K-POP은 없었거나 그 모습이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서태지는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경쟁자를 찾기 쉽지 않을 만큼 다양한 장르를 같은 음반에 수록하거나 때론 아예 한 곡에서 소화하기도 했다.[37] 이를 철저히 연구한 SM에서 H.O.T.를 위시한 1세대 아이돌의 음악에 낮은 수준[38]으로 녹여냈고, 이것이 원형을 어느 정도 유지한 채 진화를 거듭하여 오늘날 SM Music Performance라 여겨지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다른 기획사들 또한 비슷한 전략을 썼고, 이는 오늘날까지 많은 부분에서 계승되어 K-POP의 주요 음악적 특징으로 여겨진다.
3.2. 방송국과 가수의 관계를 재정립하다
기획사 사장과 방송사 PD가 군림했던 20세기에, 서태지와 아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음악을 만들고 춤을 개발하여 유행시켰으며, 1집 이후는 스스로 소속사를 만들어 활동하며[39]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방송, 또는 음반업계의 관행, 지금보다 훨씬 엄격했던 검열, 기득권에 저항했다. 단순히 겉으로만 젊고 반항적인 이미지가 아닌 세상을 바꿀 능력과 자신감으로, 낡고 곪아버린 기득권 시스템을 몸소 깨부순 새시대의 상징이었다. 이는 K-POP이 아시아에 큰 영향력을 가지는 2010년 이후 지금 봐도, 어떤 가수도 달성하기 힘든 업적이다.이는 결코 다른 가수들을 폄하하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활동 방식이 지극히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가수들도 나름 높이 평가받을 부분이 있으나, 가수가 시스템에 맞서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서태지가 끼친 파급력은 넘사벽급이었다.
지금도 방송국의 권력이 강해서 몇몇 거대 기획사를 제외하면 동등한 입장에서 방송국을 상대할 수 없는데, 그것도 20대 초반 어린 가수가 직접 방송국을 향해 복장 규제를 하면 출연을 안 하겠다라든가, 코미디 프로그램 출연을 강제하면 안 나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지금도 괘씸죄로 찍힐 일이었다.[40] 그래서 당시 활동하던 댄스 가수들은 서태지와 아이들 덕분에 자유로운 스타일링이 가능해졌다고 고마워했다.
활동 후 잠적, 공백기를 가진 이후 다시 컴백이라는 이른바 '휴식기'라 불리는 현재의 대다수 아티스트, 아이돌의 활동 패턴의 시초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컴백, 휴식기 같은 개념이 없었다. 특히 트로트 가수들은 한 번 신곡을 내면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1996년경까지만 해도 가수들의 활동 기간은 굉장히 길어서, 가을에 나온 노래가 이듬해 여름까지 TOP 10을 폭격하는 사례가 잦았다. 심지어 노래의 인기가 식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사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당시로서는 감히 PD에 거스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거니와, 가수로서도 몇개월 사이 잊힐 수 있다는 공포가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이 발매되기 1년 전에 있었던 유현상의 사건이 대표적이다. 물론 그 당시 유현상과 최윤희의 결혼은 정말 9시 뉴스에 헤드라인으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대사건이라 이를 비밀리에 진행한 것이 큰 일이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당시 한국 헤비메탈의 리더이자 나름 중견급 프로듀서였던 유현상의 면전에서 방송국 PD가 유현상의 CD를 뽀개버리고 다시는 방송 못내보낸다고 엄포를 놓던게 불과 1년전 일이다. 지금도 방송국 PD가 갑이지만 그 당시의 방송국 PD는 연예인에게 사실상 노예주나 다름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자였다.
그런 엄혹한 시기에는 통신수단도, 교통수단도 불완전했기 때문에 가수가 활동을 중단하고 TV에 나오지 않으면 팬들로서는 정말로 그 가수가 '증발'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스스로 음악을 완전히 만들어야 했던 서태지였고, 또 그만큼 인기가 많았기에 가능했던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1집 이후 서태지가 이런 행보를 선택했을 때 걱정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서태지 은퇴 발표'로 기사가 나기도 했으며, 심지어 '사망설'과 같은 헛소문이 돌아도 팩트 체크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결국 중간에 "이밤이 깊어가지만" 뮤직 비디오를 제작하여 홍보하는등 징검다리 같은 행보를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 4. 데뷔해서 1996. 1. 은퇴기자회견으로 해체했으니 채 만 4년도 활동하지 않았지만, 앨범은 4장을 내고, 대형 콘서트에도 수 차례 참여했으니 지금 기준으로는 꽤 부지런히 활동한 것으로 보이고 '이게 신비주의인가?' 싶을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그 짧은 공백기간의 의미도 지금과 매우 달랐다. 지금이야 SNS를 통해 가수의 활동 정보가 활발하게 공유되고 사진 공유도 어렵지 않지만, 당시에는 가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수단은 TV와 잡지에 실린 사진 몇 장, 정말로 천운을 타고나야 가 볼수라도 있는 콘서트가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서 활동을 마치고 TV와 라디오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가, 몇 달만에 갑자기 '컴백'을 해서 지난 앨범과는 전혀 다른 콘셉트와 의상으로 '짠'하고 나타나는 모습은 당시 학생 팬들에게는 경이로운 수준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상표를 떼지 않고 입거나, 스쿨 룩 패션(1집), 레게머리 및 힙합 패션(2집), 치마 패션(3집), 염색 및 스노우보드 패션(4집) 등 매 앨범마다 음악에 따라 다른 컨셉을 시도했고, 또 이후 연예계에 일반화된 전속 코디네이터를 도입했으며, 많은 자본이 들어간 뮤직비디오의 질을 향상하는 [41] 등 1990년대 이후의 가요계뿐만 아니라, 사회 다방면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3.3. 가요계 트렌드를 재편하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한국의 대중가요계는 성인가요와 발라드 위주에서 10대~20대 취향의 댄스 음악 위주로 재편되었으며, 노이즈, 듀스, DJ DOC, 룰라와 같은 댄스그룹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테크노로까지 발전하며 1990년대는 대한민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많은 장르가 공존하였으며 가장 빠른 진전이 있었다. 또한 격렬한 안무, 각 멤버의 캐릭터 기믹 부여, 립싱크[42] 등 현재 한국 아이돌의 기원이 되는 많은 시스템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시작으로 이후 댄스 가수부터 본격 시작되었다.
3.4. 기성세대와 빚은 갈등
3집부터는 단순한 음악적인 시도를 뛰어넘어 사회문제에 대한 곡을 써내려가며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쳐 문화대통령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현재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말 그대로 가요계의 끝판왕이 갑자기 노선을 바꾸어 사회적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에 파장이 컸다. 통일을 노래한 '발해를 꿈꾸며'까지는 다들 긍정적인 모습으로 보았지만, 대한민국 교육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는 노래인 '교실 이데아' 활동이 시작되자 매스컴과 기성세대, 높으신 분들은 그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 시작한다.물론 그 이전에도 민중가요라는 사회 비판적인 가요가 대학가나 시위현장에서 많이 불렸고, 김광석이나 양희은 같은 유명가수들도 민중가요를 불렀지만 1990년대 중반 기준으로 청소년 취향은 아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은 청소년 취향에 맞는 음악이면서도 전국적으로 파급력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즉 최신음악에다가 민중가요적인 색채를 혼합한 시도였는데 이것도 히트를 치면서 불편해진 기성세대가 많아진 것. 다만 이렇게 갈등이 커진 것은 전두환 말기부터 시작해서 김영삼 시기까지 이어진 교복부활의 영향도 컸다. 1980년대에 전두환 정권이 3S정책의 일환으로 교복을 일시적으로 폐지하고, 두발규제도 완화했지만, 얼마 안가 학생지도에 어려움이 있다고 교복부활 및 두발규제 강화를 학교장 재량으로 실시하게끔 허가했는데, 이 때문에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각 학교에서 교복을 다시 입히는 것이 유행이 되었고, 두발규제도 다시 원상복구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당대의 청소년들 입장에서 몇년전까지 자율로 알아서 입으라 했다가 바지나 치마를 줄여 입었다고 체벌하고, 두발도 군인처럼 빡빡 깎으라 해 대는 학교가 많아졌으니, 주었다 뺐는 격이 되었다. 이것으로 세대갈등이 커졌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직접 부르지는 않았지만 DOC와 춤을이라는 노래가 히트를 했던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다.
3집의 이러한 시도는 대중성을 많이 포기한 대신, 충성스러운 매니아 팬들을 결집시켰다. 정작 서태지와 아이들은 파격적인 음악(락)과 가사로 인해 3집 당시 방송 금지를 받았고, 사실상의 3집 활동이 막혔다. 지상파가 거의 유일한 홍보 수단이었던 당시에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으나, 이것은 오히려 서태지와 아이들, 특히 서태지가 뮤지션으로서 영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대중은 다른 가수들, 10대·20대 가수들에게도 음악성과 함께 비판적인 가사 등을 다루어 줄 것을 요구, 또는 비교하게 되었다. 오히려 서태지가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것은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지 않은 1, 2집이었음에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이후 대중이 서태지를 기억하던 시각은 인기와 별개였다.
이는 1990년대 아이돌 그룹들이 사회 비판적인 노래를 부르는 데까지 영향을 준다.[43] 4집의 타이틀곡이었던 Come Back Home을 듣고 가출을 했던 청소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뉴스까지 나왔을 정도. 이후 이 앨범의 일부 수록곡들의 가사 문제로 판매가 금지된다는 얘기가 나오자 가출 청소년들의 부모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판매 금지가 부당하다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는 심지어 21세기 아이돌인 방탄소년단의 음악적 행보에도 영향을 주었다. 후술하겠지만, 실제로 외국의 케이팝 전문 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언급하는 부분이다.
그 당시 신문, 방송들, 심지어 서태지를 다룬 인간시장에서도 지금으로서는 상당히 단순한 서태지의 랩음악에 대하여 파괴적이고 위험하다라며 적개심을 드러 내었는데, 이처럼 당시 언론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과 행보에 긍정적이지 않았다. 매 앨범, 컴백 마다 달라지는 음악과 패션등에 대하여 머리색깔, 의상, 음악 스타일, 가사 등을 문제 삼으며 집중 포화를 쏟아 부었다. 사실 그 이전에도 락밴드가 장발로 출연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고, 수위가 높은 TV 프로그램이 꽤 있었는데도, 서태지만 까임꺼리가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기존 음반사들의 카르텔을 깨고 고수입을 올리면서 이들에게 밉보였고, 연줄이 있던 언론사로서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었다.[44] 1990년대는 신문이 구독률 70%에 육박하며 영향력이 대단했고, 3대 방송사도 광고시장의 성장에 따라 매년 매출액 신기록을 달성했으며, 그나마 대항매체라 할 수 있는 PC통신은 비싼 요금과 느린 속도로 파급력이 미약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사회에 울림을 주는데 성공했다는 점에 있어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위상이 어느 정도로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1970년대 이전 세대들에게 언론에 대한 불신감을 심어준 것이 땡전뉴스였다면 1970년대~80년대 초반 세대들에게 언론에 대한 불신을 심어준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 죽이기였다 할 정도였다. 청소년 때부터 톱스타들 대상으로 서태지가 알고보니 여자였다는 식의 저질기사나 내놓는 언론을 보면서 언론에 대한 불신을 뿌리깊게 심어 놓았고, 이후로도 해당세대들로부터 원한 쌓을 짓이나 하는데 언론에 대한 신뢰도 추락은 자신들이 자초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언론이 띄워줬기에 성공한 거라는 일반적인 인식이 아닌 이유는 윗 문단으로 알 수가 있다.[45] 이는 2000년도 이후 "한류", 또는 "K-POP"의 선봉으로 개인적인 처신 문제 외에 큰 제약을 두지 않고 오히려 "국위선양" 이미지까지 가지고 가는 현재의 아이돌 활동과는 천양지차로 다르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동했을 때와 K-POP이 세계적으로 흥행한 지금은 언론의 위상이나 세계적인 파급력이 천지차이로 달라진 것도 감안해야 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2000년대 중반 ~ 2010년대에도 똑같이 발생했다. 2007년 원더걸스의 Tell me가 대히트하며 한국 음악계는 아이돌들이 점령[46]했는데, 일부 기성세대들은 아이돌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한국 음악은 망했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주된 레퍼토리는 '외모로만 뽑혀서 실력이 없다'[47], '립싱크하느라 입만 벙긋벙긋하는 것들이 무슨 가수냐'[48], '다 똑같이 생겨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49], '떼거지로 몰려나온다'[50] 등등이었는데, 악플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생기기 이전이라 당시 아이돌들은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51]
그러나 한류의 핵심 동력은 드라마[52]도, 게임도 아닌 케이팝이었고, 케이팝이 인기 있는 이유는 아이돌이었다. 기성세대가 그토록 바라던 한국 문화의 세계화는 그들이 사랑하는 '진짜 가수'가 아니라 아이돌들이 이루어냈다. 그리고 빌보드 주간 차트 1위를 찍은 가수는 나훈아가 아니라 방탄소년단이었다. 아이돌을 그렇게나 비난하던 기성세대들이 방탄소년단의 성과를 보고는 180도 태도를 바꿔 '케이팝의 훌륭함'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덤이다.
비틀즈마저도 초창기에는 기성세대의 미움을 받았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대중문화의 흐름은 10~20대가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비틀즈를 들으며 자랐던 세대들이 서태지를 비난하고, 서태지를 좋아했던 세대들이 아이돌들을 비난했다.
4. 팬덤
자세한 내용은 IVY(서태지와 아이들) 문서 참고하십시오.5. 해체 & 은퇴
1996년 1월 중순, 4집의 가사, 이데올로기 등에 대한 온갖 탄압을 견디며 제2 활동곡인 <필승> 라이브를 뚝섬에서 마친 서태지와 아이들은 갑작스럽게 완전히 잠적하였다. 잠적 후 팬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뉴스에서 다뤄질 정도로 논란이 있었고, 멤버들이 죽었다는 설이 파다하게 나도는 등등 며칠간 굉장히 큰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 얼마 후...1996년 1월 3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 유림회관[53] 기자회견장에서 서태지의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보여주었다." 라는 말 한 마디로 서태지와 아이들은 은퇴를 선언한다.
직후 전국의 초, 중, 고, 대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와 허탈감에 빠졌으며, 심지어 3대 방송사 9시 뉴스의 메인으로 소개되었다.# 그래서 한때는 정치권의 외압이다,[54] 조직폭력배가 은퇴에 개입했다는 등의 소문이 돌았다.
당시 대중의 반응은 그저 충격과 공포였으며 현재 현역으로 활동하는 아이돌 가수들의 팬들만 좌절한 수준이 아니라 거의 온 국민들이 아쉬워 했다. 10대~20대의 영원한 우상이라고 불리던 인기 최정상의 아이돌 그룹이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은퇴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굳이 2020년대로 비교하자면, 방탄소년단이 갑작스레 해체 및 은퇴를 선언했을 때 불러올 상상할 수 없는 파장과 전국민적 쇼크, 아니 그 이상이라 생각하면 된다.[55] 농담이 아니라 그때는 정말로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충격을 받고 어안이 벙벙해졌던 때였다. 한편 2000년과 2001년 나란히 거대 팬덤을 거느린 젝스키스와 H.O.T.도 해체해 서태지와 아이들 급은 아니어도 전국적인 파장을 일으켰었다.
이 서술의 내용이 단지 서태지와 아이들을 띄우기 위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과장을 조금 덧붙여서 거짓말이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이 하야했다는 것과 거의 비슷한 정도로 초등학생부터 20대 직장인은 물론 전 국민들이 큰 충격 또는 놀라움을 드러냈으며,[56]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한다니? 이젠 한국의 대중가요계가 텅 비었다" 같은 반응이 나왔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바로 1년 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보다도 임팩트가 크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은퇴가 확정된 것이 아닌 기자회견 발표만 났던 1월 20일~30일 사이 언론은 관련 소식을 사회면이나 방송국 메인 뉴스를 통해 연일 보도하였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야기는 학교 아이들 간 최고의 소재였다. 초중고교가 아직 겨울방학 기간이었는데도 그랬다. 나아가 은퇴 당일에 이 소식은 방송 3사의 메인 뉴스 프로그램 첫 꼭지를 전부 차지했다. 당시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킨 게 아닌 이상 9시 뉴스에 연예계 기사가 올라오는 일이 없었음에도 이런 소동이 났던 것.
당연히 골수 여학생팬들은 물론이고 남성 팬들까지 해체를 반대한다면서 매일 서태지와 아이들의 소속사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57] 일부는 집에 담을 넘어 들어가 서태지가 사용한 물건을 가지고 나오기도 했다. 이때 각 일간신문 사회면에서는 "X세대, '집단 히스테리' 증상", "난장판이 된 서태지 집 앞", "오빠부대 '집단 히스테리' 증상", "자살도 불사하겠다", "서태지의 결혼, 은퇴에 대비해 300여 명 자살 클럽 결성설" 등의 제하를 달아 보도했다.
당시의 증언을 빌리자면, 당시 초등학생 고학년이던 1980년대 초반생들 사이에서도 "도대체 왜 해체하는데?" 라는 말밖에 안 나왔다. 초등학생들도 저학년들은 시끄럽고 알 수 없는 노래를 한다고 싫어하는 친구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학년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싫어하는 반응은 거의 없었다. 이들의 형/누나뻘인 1970년대 중~후반생들조차 매일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을 들었고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아서 만화를 보면서도 TV에서 지상파 음악방송이 할 시간에는 당연히 채널을 돌리니까 노래 들으면서 랩 열심히 연습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당시 막 나타났던 엠넷이나 MTV 등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는 정말 지겹게 흘러나왔다.[58] 초등학생 고학년 정도라면 서태지와 아이들은 늦게나마 듣고 자랐기 때문에[59] 싫어하지도 않았고 무대에서의 퍼포먼스는 멋지게 느껴졌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 세대는 H.O.T.와 젝스키스의 데뷔를 보면서 1세대 아이돌을 응원하는 중심세력이 된다.[60]
이런 이유로 앞으로도 아이돌 가수들이 은퇴를 했을 때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큰 충격을 받는 대중의 반응은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라는 의견도 있었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높다.[61]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조윤진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광팬으로 나오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을 정도였고, 골수팬들의 충성도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동시에 10-20대 전체가 그들의 팬인 유일무이한 그룹이었다. 극 중에서 조윤진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하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예 식음을 전폐하자 삼천포가 못내 안타까워할 정도로 골수팬들의 반응은 거의 다 그랬다.
6. 계승되는 정신,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
하지만 이들이 남긴 자유와 도전정신은 죽지 않았다. 은퇴한 지 두어 달 뒤인 1996년 3월, 비영리단체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이하 서기회)'가 발족되어 전국적으로 13,000여 명이 모였다. 초대 회장이던 강민경은 <내일신문> 1996년 12월 4일자 48면 인터뷰 기사에서 서기회가 팬클럽이 아닌 서태지의 뜻을 이어받은 문화단체라 하며 "맹목적인 열광이 아닙니다. 서기회 회원들은 모두 '태지보이스 팬답게 행동하자'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라고 밝혔다.
이들의 활동은 1996년 노동법 날치기 때 PC통신상의 활동에서 드러났다.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얘기하는 게 서태지와 아이들의 정신'이라는 믿음으로 블랙리본 내걸기를 제안했고, 사회문제란인 '시대유감'과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는가'란 토론방에서 10~20대의 젊은 회원들이 총파업 지지글을 올리는 등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같은 시기 나우누리의 서태지와 아이들 팬클럽도 "태지보이스가 그렇게 부르짖던 자유와 도전은 모두 민주주의 아래서만 가능합니다. 이에 우리는 비민주적이고 국민을 기만한 노동법/안기부법 개악을 개탄하며 민주주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합니다"라고 하여 '근조 민주주의'라고 적힌 검은 리본을 내걸었다.
한편 같은 해 7월 30일에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도 당사 총재실에서 서기회가 준비한 영상 콘서트 축하 메시지[62]를 녹화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좋은 의미에서 우리나라 신세대의 대표적 존재로 보며 소중히 생각한다"며 "서태지와 아이들은 은퇴했지만 예술인이란 대중의 사람으로 대중이 원하면 하루 속히 복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특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대표곡 <발해를 꿈꾸며>에서 "언젠가 우리 작은 땅에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갈려진 땅의 친구들을 언제쯤 볼 수가 있을까"란 가사를 외우며 "이런 가사는 정말 감동적"이라 평했다.
그 외에도 태지보이스의 활동 내용을 담은 <보이는 길 밖에도 세상은 있다>[63]라는 책을 냈고, 인터넷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정기적으로 '무대의상 바자회'를 열어 사회 환원에도 힘썼다. 이들의 활동은 2000년 서태지 컴백 뒤까지 이어졌다.
7. 후대에 미친 영향
2010년대 이후 K-POP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고, 특히 방탄소년단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케이팝을 다룬 각종 매체나 서적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케이팝의 시초로 거론되고 있다. 안드리안 베슬리의 저서 <BTS(케이팝의 아이콘)> 서론을 보면, 방탄소년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먼저 1990년대 케이팝의 아이콘인 서태지와 아이들을 언급한다. 외국인의 시각을 알아보자는 의미로 소개한다.우리가 케이팝이라고 일컫는 한국음악은 1992년 시작되었다. 포문을 연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로, TV 쇼에서 '난 알아요'라는 노래를 발표하며 화려한 공연을 선보였다.
방송마다 피날레를 장식했던 이들의 퍼포먼스와 노래는 미국과 한국의 팝을 혁신적으로 섞어 표현한 것이었고, 음악챠트를 17주 동안 점령했다.
서태지와 아이들(후에 BTS는 서태지 공연에 초대되었다)은 미국 락, 팝, R&B 그리고 특히 1990년대 힙합 음악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새로운 그룹이었다. 미국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한국의 가요로 그들만의 특별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당시 한국은 보수적인 도덕적 잣대의 영향력 안에 있었고, 성적인 묘사, 마약 등은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의 미디어에서 금지했다. 그리고 사회 또는 정치적 이슈를 담은 음악 또한 금기시했다. 아티스트들은 그저 매력적이더라도 무해한 음악을 할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다른 행보를 선택한 선구자 격인 그룹이었다.
VOX가 제작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익스플레인: 세계를 해설하다' 1시즌 4화 <케이팝의 모든 것>(2018년6월13일)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전설적인 TV데뷔 무대를 보여주면서 케이팝의 기원으로 소개한다. 해당 프로 소개 영상방송마다 피날레를 장식했던 이들의 퍼포먼스와 노래는 미국과 한국의 팝을 혁신적으로 섞어 표현한 것이었고, 음악챠트를 17주 동안 점령했다.
서태지와 아이들(후에 BTS는 서태지 공연에 초대되었다)은 미국 락, 팝, R&B 그리고 특히 1990년대 힙합 음악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새로운 그룹이었다. 미국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한국의 가요로 그들만의 특별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당시 한국은 보수적인 도덕적 잣대의 영향력 안에 있었고, 성적인 묘사, 마약 등은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의 미디어에서 금지했다. 그리고 사회 또는 정치적 이슈를 담은 음악 또한 금기시했다. 아티스트들은 그저 매력적이더라도 무해한 음악을 할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다른 행보를 선택한 선구자 격인 그룹이었다.
해외 음악 웹진 VICE에서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방탄소년단과 같은 사회 의식을 다루는 케이팝 그룹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자세하게 다뤘다. 링크
2019년 10월에 올라온 틴 보그[64]의 케이팝 역사기사에도 언급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1990s: Seo Taiji and Boys
While the emergence of "true" K-pop can arguably be traced back to acts that debuted ahead of the '90s, it wasn't until the debut of one particular group that the genre as we know it officially blossomed into existence: the veritable kings of K-pop, Seo Taiji and Boys.
'진정한' 케이팝의 등장은 9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특정 그룹이 데뷔한 후에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존재한다. 그 그룹은 바로 케이팝의 진정한 왕,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While Korean music was far from flourishing before Seo Taiji and Boys, most of the country's culture was actually influenced by creations from American and Japanese folk music – given the country's roots in both countries.
한국(대중)음악은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는 번창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이 나라 문화의 대부분은 미국과 일본의 포크 음악에서 비롯된 창작물의 영향을 받았다. 이 나라(현대사)의 뿌리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Following South Korea's lift on travel restrictions for its citizens in 1988, it soon became much simpler for artists to research and take in musical elements from other cultures and foreign countries.
1988년 대한민국이 해외여행 자유화를 실시함에 따라, 아티스트들이 외국으로부터 음악적 요소를 연구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곧 훨씬 더 간단해졌다.
This would eventually result in more ways for artists to experiment in their music – thus paving the way for bands that had "new" sounds to them, i.e. Seo Taiji and Boys.
이것은 결국 아티스트들이 음악적 실험을 할 수 있는 더 많은 방법을 제공했으며, 따라서 '새로운' 소리를 가진 밴드들, 즉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밴드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The trio consisting of Seo Taiji, Yang Hyun-suk, and Lee Juno came out of the gate swinging with a fusion of American rap and Korean lyrics.
서태지, 양현석, 이주노로 구성된 3인조는 미국의 랩과 한국어 가사를 융합하여 활기차게 데뷔했다.
The Boys didn't fare very well during their first televised appearance on a talent show in 1992, receiving the lowest rating from the jury, but it didn't matter.
그들은 1992년 첫 출연한 TV 프로그램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Fans had heard enough to propel the outfit to stardom simply based on the song they performed during the show.
팬들이 그들을 스타덤에 올려준 배경에 그 TV쇼에서 선보인 노래가 있었다.
"I Know" hit the charts and remained there, skyrocketing to number one on the South Korea singles charts and dominating the position for over 17 weeks.
난 알아요는 차트에 올랐으며 한국 싱글 차트에서 1위로 치솟으며 17주 이상 그 자리를 지배했다.
There's no "official" date on record for the turning point of K-pop, but many credit its origins to Seo Taiji and Boys' tumultuous television debut and the wave of success that followed.
케이팝의 전환점을 기록한 공식 날짜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기원을 서태지와 아이들의 떠들썩한 텔레비전 데뷔와 그 뒤를 이은 성공의 물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Seo Taiji and Boys melded Western-style pop music with lyrics in Korean that went above and beyond the cultural norms acceptable in popular culture at the time.
서태지와 아이들은 당시 대중문화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문화적 규범을 넘어서는 한국어로 된 가사와 함께 서양식 대중음악을 혼합했다.
Much of South Korea's early pop music had distinct American and Japanese influences, and a glut of artists was performing "trot" music, or tunes derived from American and British folk songs with Korean-language lyrics that, for the most part, featured lyrics that spoke out against the country's colonial authorities.
한국의 초기 대중음악의 상당 부분은 미국과 일본의 뚜렷한 영향을 받았고, 당시 넘쳐 나던 아티스트들은 "트로트" 음악, 즉 한국어와 한국어로 된 가사를 사용한 미국 및 영국 민요에서 파생된 곡들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이 곡들은 대부분 식민지 당국에 반대하는 가사를 특징으로 했다.
Combined with ballads and slower, country-type music, this was basically the status quo of the time.
발라드와 느린 컨트리 타입의 음악의 결합은 기본적으로 그 시대의 현상이다.
Seo Taiji and Boys' implementation of hip hop and new jack swing marked a turning point in the genre for their willingness to break tradition.
서태지와 아이들의 힙합 구현과 뉴잭 스윙은 전통을 깨고자 하는 의지로 장르적 전환점을 만들었다.
Their sound had a jagged, “urban” edge to it – musically, something similar to what you might hear from New Kids on the Block at the time in terms of a “hip hop” swagger – and as such, their popularity in South Korea opened up several doors for them as well as a number of groups that immediately sprang up looking to capitalize on or replicate their success.
그들의 사운드는 들쭉날쭉한 어반 엣지를 품고 있었다. 음악적으로 당시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힙합 스웨거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인기는 즉시 그들의 성공을 이용하거나 따라하려는 많은 그룹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Copycats began streaming in, all borne of the entertainment industry's desire to churn out the Next Big Thing – and what would ultimately be refined into the "idol culture" we know today.
카피캣은 모두 연예계의 차세대 거물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열망을 품기 시작했고, 궁극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돌 문화"로 다듬어질 것이었다.
(중략)
The first wave of idol groups came soaring in after Seo Taiji and Boys made their mark on history.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후 첫 번째 아이돌 그룹의 물결이 치솟았다.
In the late '90s, three music studios jumped onto the scene: SM Entertainment (or SM Town), the Yang Hyun-suk-founded YG Entertainment , and JYP Entertainment created by J.Y. Park, establishing the tried-and-true idol-making process that remains such a successful formula today.
90년대 후반, SM 엔터테인먼트(또는 SM 타운), 양현석이 설립한 YG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박진영이 만든 JYP 엔터테인먼트 등 세 음악 스튜디오가 현장에 뛰어들어 오늘날 성공적인 공식으로 남아 있는 시도와 진짜 아이돌 제작 과정을 확립했다.
(중략)
As entertainment moguls pushed further into the space, they continually took what they learned from pioneers of the genre like Seo Taiji and Boys and the bands that spawned from them and passed it on.
연예계의 거물들이 우주로 더 나아가면서, 그들은 계속해서 서태지와 아이들과 같은 장르의 선구자들로부터 배운 것을 가져다가 그들에게서 생겨난 그룹들에게 물려주었다.
(중략)
BTS has made it their business to adopt a model similar to the band that started it all, Seo Taiji and Boys, choosing to sing about more serious matters: relationships, societal pressures, and other narrative threads inspired by everything from Jungian philosophy to having a dream and pursuing it.
방탄소년단은 모든 것을 시작한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과 비슷한 모델을 채택함으로써 좀 더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 노래하는 것을 선택했는데, 그것은 관계, 사회적 압력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꿈을 추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카를 융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다른 맥락의 이야기도 있다.
While BTS is a product and natural result of a refined formula, the group also challenges K-pop history with their willingness to talk about things like mental health and politics.
방탄소년단은 정제된 공식의 산물이자 자연스러운 결과이지만, 이 그룹은 정신건강이나 정치 같은 것에 대해 기꺼이 이야기하려는 의지로 케이팝 역사에 도전한다.
While the emergence of "true" K-pop can arguably be traced back to acts that debuted ahead of the '90s, it wasn't until the debut of one particular group that the genre as we know it officially blossomed into existence: the veritable kings of K-pop, Seo Taiji and Boys.
'진정한' 케이팝의 등장은 9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특정 그룹이 데뷔한 후에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존재한다. 그 그룹은 바로 케이팝의 진정한 왕,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While Korean music was far from flourishing before Seo Taiji and Boys, most of the country's culture was actually influenced by creations from American and Japanese folk music – given the country's roots in both countries.
한국(대중)음악은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는 번창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이 나라 문화의 대부분은 미국과 일본의 포크 음악에서 비롯된 창작물의 영향을 받았다. 이 나라(현대사)의 뿌리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Following South Korea's lift on travel restrictions for its citizens in 1988, it soon became much simpler for artists to research and take in musical elements from other cultures and foreign countries.
1988년 대한민국이 해외여행 자유화를 실시함에 따라, 아티스트들이 외국으로부터 음악적 요소를 연구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곧 훨씬 더 간단해졌다.
This would eventually result in more ways for artists to experiment in their music – thus paving the way for bands that had "new" sounds to them, i.e. Seo Taiji and Boys.
이것은 결국 아티스트들이 음악적 실험을 할 수 있는 더 많은 방법을 제공했으며, 따라서 '새로운' 소리를 가진 밴드들, 즉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밴드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The trio consisting of Seo Taiji, Yang Hyun-suk, and Lee Juno came out of the gate swinging with a fusion of American rap and Korean lyrics.
서태지, 양현석, 이주노로 구성된 3인조는 미국의 랩과 한국어 가사를 융합하여 활기차게 데뷔했다.
The Boys didn't fare very well during their first televised appearance on a talent show in 1992, receiving the lowest rating from the jury, but it didn't matter.
그들은 1992년 첫 출연한 TV 프로그램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Fans had heard enough to propel the outfit to stardom simply based on the song they performed during the show.
팬들이 그들을 스타덤에 올려준 배경에 그 TV쇼에서 선보인 노래가 있었다.
"I Know" hit the charts and remained there, skyrocketing to number one on the South Korea singles charts and dominating the position for over 17 weeks.
난 알아요는 차트에 올랐으며 한국 싱글 차트에서 1위로 치솟으며 17주 이상 그 자리를 지배했다.
There's no "official" date on record for the turning point of K-pop, but many credit its origins to Seo Taiji and Boys' tumultuous television debut and the wave of success that followed.
케이팝의 전환점을 기록한 공식 날짜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기원을 서태지와 아이들의 떠들썩한 텔레비전 데뷔와 그 뒤를 이은 성공의 물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Seo Taiji and Boys melded Western-style pop music with lyrics in Korean that went above and beyond the cultural norms acceptable in popular culture at the time.
서태지와 아이들은 당시 대중문화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문화적 규범을 넘어서는 한국어로 된 가사와 함께 서양식 대중음악을 혼합했다.
Much of South Korea's early pop music had distinct American and Japanese influences, and a glut of artists was performing "trot" music, or tunes derived from American and British folk songs with Korean-language lyrics that, for the most part, featured lyrics that spoke out against the country's colonial authorities.
한국의 초기 대중음악의 상당 부분은 미국과 일본의 뚜렷한 영향을 받았고, 당시 넘쳐 나던 아티스트들은 "트로트" 음악, 즉 한국어와 한국어로 된 가사를 사용한 미국 및 영국 민요에서 파생된 곡들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이 곡들은 대부분 식민지 당국에 반대하는 가사를 특징으로 했다.
Combined with ballads and slower, country-type music, this was basically the status quo of the time.
발라드와 느린 컨트리 타입의 음악의 결합은 기본적으로 그 시대의 현상이다.
Seo Taiji and Boys' implementation of hip hop and new jack swing marked a turning point in the genre for their willingness to break tradition.
서태지와 아이들의 힙합 구현과 뉴잭 스윙은 전통을 깨고자 하는 의지로 장르적 전환점을 만들었다.
Their sound had a jagged, “urban” edge to it – musically, something similar to what you might hear from New Kids on the Block at the time in terms of a “hip hop” swagger – and as such, their popularity in South Korea opened up several doors for them as well as a number of groups that immediately sprang up looking to capitalize on or replicate their success.
그들의 사운드는 들쭉날쭉한 어반 엣지를 품고 있었다. 음악적으로 당시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힙합 스웨거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인기는 즉시 그들의 성공을 이용하거나 따라하려는 많은 그룹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Copycats began streaming in, all borne of the entertainment industry's desire to churn out the Next Big Thing – and what would ultimately be refined into the "idol culture" we know today.
카피캣은 모두 연예계의 차세대 거물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열망을 품기 시작했고, 궁극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돌 문화"로 다듬어질 것이었다.
(중략)
The first wave of idol groups came soaring in after Seo Taiji and Boys made their mark on history.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후 첫 번째 아이돌 그룹의 물결이 치솟았다.
In the late '90s, three music studios jumped onto the scene: SM Entertainment (or SM Town), the Yang Hyun-suk-founded YG Entertainment , and JYP Entertainment created by J.Y. Park, establishing the tried-and-true idol-making process that remains such a successful formula today.
90년대 후반, SM 엔터테인먼트(또는 SM 타운), 양현석이 설립한 YG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박진영이 만든 JYP 엔터테인먼트 등 세 음악 스튜디오가 현장에 뛰어들어 오늘날 성공적인 공식으로 남아 있는 시도와 진짜 아이돌 제작 과정을 확립했다.
(중략)
As entertainment moguls pushed further into the space, they continually took what they learned from pioneers of the genre like Seo Taiji and Boys and the bands that spawned from them and passed it on.
연예계의 거물들이 우주로 더 나아가면서, 그들은 계속해서 서태지와 아이들과 같은 장르의 선구자들로부터 배운 것을 가져다가 그들에게서 생겨난 그룹들에게 물려주었다.
(중략)
BTS has made it their business to adopt a model similar to the band that started it all, Seo Taiji and Boys, choosing to sing about more serious matters: relationships, societal pressures, and other narrative threads inspired by everything from Jungian philosophy to having a dream and pursuing it.
방탄소년단은 모든 것을 시작한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과 비슷한 모델을 채택함으로써 좀 더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 노래하는 것을 선택했는데, 그것은 관계, 사회적 압력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꿈을 추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카를 융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다른 맥락의 이야기도 있다.
While BTS is a product and natural result of a refined formula, the group also challenges K-pop history with their willingness to talk about things like mental health and politics.
방탄소년단은 정제된 공식의 산물이자 자연스러운 결과이지만, 이 그룹은 정신건강이나 정치 같은 것에 대해 기꺼이 이야기하려는 의지로 케이팝 역사에 도전한다.
8. 정규앨범 목록 & 메인 활동곡
<rowcolor=#fff> 연도 | 제목 | 활동곡 | 판매량 |
1992년 | Seotaiji and Boys | 난 알아요 • 환상 속의 그대 • 이 밤이 깊어가지만 Remix | 130만장 |
1993년 | Seotaiji and Boys II | 하여가(何如歌) • 너에게 • 마지막 축제 | 220만장 |
1994년 | Seotaiji and Boys III | 발해를 꿈꾸며 • 교실 이데아 | 150만장 |
1995년 | Seotaiji and Boys IV | Come Back Home • 필승(必勝) | 162만장 |
9. 음반 목록
서태지와 아이들 정규앨범 1집~4집 모두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순위에 들어가 있다. 거의 서태지 혼자 작사, 작곡하고 연주와 노래까지 한 셈인 네 앨범들이 고작 1년여 간격으로 4년간 4장이 나왔음에도 모든 앨범이 명반이라고 불린다. 보통 전문적인 싱어송라이터도 이렇게 짧은 간격으로 작곡을 하다보면 자가복제가 되기 쉬운데 앨범마다 곡마다 장르가 다르며 뛰어난 음악성을 보인다.[67][68]
9.1. 노래방 수록 목록
노래방에 수록된 곡에 대한 내용은 서태지/노래방 수록 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
10. 수상 경력
10.1. 시상식
- 1992년 TV저널 올해의 스타상 대상
- 1992년 서울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최고 인기 가수상
- 1992년 골든디스크 본상
- 1992년 KBS 가요대상 15대 가수상
- 1992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 (대상), 신인 가수상
- 1992년 SBS 스타상 가수부문 대상
- 1993년 서울가요대상 작곡상, 기획상, 올해의 가수상, 최고 인기 가수상
- 1993년 골든디스크 본상
- 1993년 KBS 가요대상 본상
- 1993년 MBC 한국가요제전 본상
- 1993년 SBS 스타상 가수부문 대상
- 1994년 MBC 한국가요제전 본상
- 1994년 KBS 가요대상 본상
- 1994년 서울가요대상 본상
- 1994년 골든디스크 본상
- 1995년 KBS 가요대상 본상
- 1995년 서울가요대상 최고 인기 가수상
- 1995년 골든디스크 최고 인기 가수상
- 1995년 MBC 한국가요제전 최고 인기 가요상 (대상) (Come Back Home)
- 1996년 MTV MUSIC VIDEO Asian Viewer (Come Back Home)
10.2. 가요 프로그램 1위
총 71회 1위 | |||
<rowcolor=#fff> 날짜 | 방송명 | 곡명 | 비고 |
1992년 | |||
6월 16일 | SBS 인기가요 | 난 알아요 (26회) | 데뷔 후 첫 1위 |
6월 19일 |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 ||
6월 23일 | SBS 인기가요 | 2주 연속 | |
6월 26일 |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 2주 연속 | |
6월 30일 | SBS 인기가요 | 3주 연속 | |
7월 1일 | KBS 가요톱텐 | ||
7월 3일 |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 3주 연속 | |
7월 7일 | SBS 인기가요 | 4주 연속 | |
7월 10일 |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 4주 연속 | |
7월 14일 | SBS 인기가요 | 1위 (5주 연속) | |
7월 15일 | KBS 가요톱텐 | 2주 연속 | |
7월 17일 |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 1위 (5주 연속) | |
7월 21일 | SBS 인기가요 | 1위 (6주 연속) | |
7월 22일 | KBS 가요톱텐 | 3주 연속 | |
7월 24일 |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 1위 (6주 연속) | |
7월 28일 | SBS 인기가요 | 1위 (7주 연속) | |
7월 29일 | KBS 가요톱텐 | 4주 연속 | |
7월 31일 |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 1위 (7주 연속) | |
8월 4일 | SBS 인기가요 | 1위 (8주 연속) | |
8월 5일 | KBS 가요톱텐 | 1위 (5주 연속, 골든컵) | |
8월 7일 |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 1위 (8주 연속) | |
8월 11일 | SBS 인기가요 | 1위 (9주 연속, 당대 최다 1위) | |
8월 14일 |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 1위 (9주 연속) | |
8월 18일 | SBS 인기가요 | 1위 (10주 연속, 최다 1위) | |
8월 21일 |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 1위 (10주 연속, 역대 최다 1위) | |
8월 25일 | SBS 인기가요 | 1위 (11주 연속, 신기록 달성) | |
9월 11일 |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 환상 속의 그대 (16회) | 1위 |
9월 18일 | |||
9월 25일 | |||
10월 2일 | |||
10월 4일 | SBS 인기가요 | 1위 | |
10월 9일 |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 1위 (5주 연속) | |
10월 11일 | SBS 인기가요 | 1위 | |
10월 18일 | |||
10월 21일 | KBS 가요톱텐 | 1위 | |
10월 25일 | SBS 인기가요 | ||
10월 28일 | KBS 가요톱텐 | ||
11월 1일 | SBS 인기가요 | 4주 연속 | |
11월 4일 | KBS 가요톱텐 | ||
11월 8일 | SBS 인기가요 | 1위 (6주 연속) | |
11월 11일 | KBS 가요톱텐 | ||
11월 18일 | 1위 (5주 연속, 골든컵) | ||
1993년 | |||
7월 18일 | SBS 인기가요 | 하여가 (13회) | 1위 |
7월 25일 | |||
8월 1일 | |||
8월 6일 | MBC 결정 최고 인기가요 | 1위 | |
8월 8일 | SBS 인기가요 | ||
8월 11일 | KBS 가요톱텐 | ||
8월 15일 | SBS 인기가요 | 1위 (5주 연속) | |
8월 18일 | KBS 가요톱텐 | ||
8월 22일 | SBS 인기가요 | 1위 (6주 연속) | |
8월 25일 | KBS 가요톱텐 | ||
8월 29일 | SBS 인기가요 | 1위 (7주 연속) | |
9월 1일 | KBS 가요톱텐 | 1위 (4주 연속) | |
9월 10일 | MBC 결정 최고 인기가요 | 1위 (통산 2주) | |
1995년 | |||
11월 3일 |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 Come Back Home (16회) | 1위 |
11월 5일 | SBS TV 가요 20 | ||
11월 8일 | KBS 가요톱텐 | ||
11월 10일 |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 2주 연속 | |
11월 12일 | SBS TV 가요 20 | 2주 연속 | |
11월 15일 | KBS 가요톱텐 | ||
11월 17일 |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 1위 (3주 연속, BEST OF BEST) | |
11월 18일 | KMTV 쇼 뮤직탱크 | ||
11월 19일 | SBS TV 가요 20 | 1위 (3주 연속) | |
11월 22일 | KBS 가요톱텐 | 1위 | |
11월 25일 | KMTV 쇼 뮤직탱크 | ||
11월 29일 | KBS 가요톱텐 | ||
12월 2일 | KMTV 쇼 뮤직탱크 | ||
12월 6일 | KBS 가요톱텐 | 1위 (5주 연속, 골든컵) | |
12월 9일 | KMTV 쇼 뮤직탱크 | 4주 연속 | |
12월 16일 | 1위 (5주 연속, 최강자) |
11. 공연실황
자세한 내용은 서태지/콘서트 문서 참고하십시오.'92 1집 정규공연, 마산야구장 마산MBC 초청 콘서트, '92 내일은 늦으리, 2집 컴백스페셜(MBC 특종 TV연예), '93 2집 정규공연 '마지막 축제', '94 컴백 공연 '새로운 도전', '95 3집 정규공연 '다른 하늘이 열리고', 4집 컴백스페셜(MBC), 1995 빅쇼(KBS), 그 외의 다양한 자선 공연 등이 있다.
12. 근황
서태지는 미국으로 떠난 후 1998년 5집을 발매한다. 이후 2000년 6집 발매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솔로 서태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서태지컴퍼니를 설립해서 NELL, Pia를 발굴해냈으며 서태지컴퍼니 소속 밴드들이 모두 독립한 뒤에는 2004년 7집, 2008~2009년 8집, 2014년 9집을 내며 본인의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비활동기에는 늘 그렇듯 세상에서 증발한 것마냥 조용히 가족들과 지내고 있다.하지만 아티스트로서 훌륭한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는 서태지와는 달리 나머지 2명은 온갖 범죄행위를 벌여오면서 서태지 덕분에 쌓아온 이미지를 모조리 날려먹게 되었다.
양현석은 처음에는 연예 기획 사업가로 대성했으며, YG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해서 본인의 솔로 1집을 낸 뒤, 킵식스, 원타임, 지누션의 육성을 시작으로 거미, 휘성, BIGBANG, 2NE1, 위너, 아이콘, 블랙핑크 등 수많은 뮤지션을 육성했다. 그 덕분에 본인은 이수만, 박진영과 같은 연예계 최정상의 제작자들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수준까지 올랐으나 최고의 인기 그룹의 대형사고와 자신이 주최한 데뷔 오디션 프로그램 믹스나인에서의 온갖 악행들과 해당 프로그램에서 데뷔하게 된 유닛의 데뷔를 말 그대로 묵살내버리는 행동을 보이고 있어서 이미지가 급추락 중이었고,[69] 급기야 버닝썬 게이트과 마약 및 성매매 알선의혹이 터지면서 더 이상 연예기획사가 아닌 범죄조직 수장으로서의 활동에 매진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현재는 자신의 회사를 나와 잠적한 상태였으나 2022년에 공개된 BABY MONSTER 티저에서 YG에서 아직 남아 있음이 밝혀졌다.
이주노는 1996년부터 제작자로 활동하면서 아이돌 댄스 그룹 영턱스클럽을 인기 가도에 올려놓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후 솔로로 활동한 임성은, 그룹 익스트림 스파이 등은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이후에는 간간히 TV에 출연하며 안무가, 무용가로서의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지만, 이 사람 역시 가정폭력, 성폭력, 사기 등 온갖 범죄행위로 몰락해버렸다. 그나마 여전히 막대한 부를 누리는 양현석에 비해 이주노는 활동으로 모은 돈 대부분을 탕진한 상태라 더욱더 초라하다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모두 나이차가 엄청난 연하의 신부를 맞이했다. 서태지는 신부와 16년 차이이며, 양현석은 띠동갑 차이, 이주노는 위에 거론되었듯이 무려 23살 차이다. 총합 51년 차이이며 평균으로 따지자면 17년 차이가 된다. 허나 이주노는 2015년 사기혐의로 피소되었고 2016년에는 성추행 혐의로 피소되어 상황이 좋은 편은 아니다.
덕분에 현재로는 사실상 서태지만 조용하고 깔끔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며[70], 나머지 2명은 위에도 거론했듯이 상황이 가장 좋지 않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현재 사람들은 해당 그룹은 사실상 서태지 혼자만 감당해왔던 그룹이라면서 그냥 그룹 이름을 "서태지" 내지 "서태지와 그 새끼들"로 취급하고 있다. 거기다 서태지와 아이들 당시 서태지가 둘에게 배분했던 수익이 엄청 관대했음이 알려지면서 서태지가 저 돈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는 반응도 있다.
12.1. 20주년 기념
2012년으로 결성 20주년이 되어 서태지와 아이들 최고의 곡을 뽑는 투표를 실시했는데, 압도적인 표차로 2집의 타이틀곡인 하여가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후를 이을 만한 그룹이 20년 내에 나오겠는가?"라는 투표에서는 다수가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만큼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전설의 그룹이라고 할 수 있겠다.기사
리더인 서태지도 20주년을 기념하여 팬들에게 메세지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서태지입니다. 오늘 이렇게 많은 분들이 데뷔 20주년을 축하해주셔서 너무나 기쁘고 감사합니다. 데뷔시절엔 이렇게 오랫동안 음악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는데 지금까지도 음악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 새삼 신기하네요 ^^ 긴 시간 동안 제 음악에 귀 기울여 주시고 또 계속 음악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리고 가슴 벅찬 나의 팬들에게 진심으로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오늘은 어쩐지 1집으로 데뷔하던 스무 살의 두근거림으로 마음이 설레이네요 ^^ 이런 마음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딱딱해진 세상에서 음악을 통해 서로에게 위로가, 또 행복이 되기를 꿈꿔봅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3월 23일 서태지. |
비록 20주년 기념 앨범은 나오지 않았지만, iTunes Store에서# 8집까지 있었던 음악 중 몇가지를 추려서 넣어논 음원이 있다. 당연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들을 수 없고 외국 아이튠즈 스토어를 통해야 하며 링크는 호주. 아마도 15주년에 나왔던 서태지 마스터 콜렉션 때문에 무산된 듯 보이며 팬들은 서태지 온라인 기념관과 브라질 인근에 서태지숲을 조성했다. #
13. 여담
이 그룹의 명칭을 표기할 때 띄어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헷갈린다는 사람이 간혹 있다. 무슨 소린가 하면, 서태지와 아이들은 합성어이니까 붙여 쓰는 게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를 띄어서 쓰면 그냥 서울에 있는 대학교가 되는 것처럼, 서태지와 아이들이라고 적으면 서태지가 자녀를 두 명 이상 두었다고 오해할 것이라 생각한 듯하다. 여담으로 서태지는 남자인데도 곱상한 외모와 신비주의, 그리고 휴식기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당시 시대상으로 인해 서태지가 사실은 남장 여자이고, 활동이 끝나면 한동안 잠적하는 이유가 출산을 하기 위함이다라는 괴상한 루머가 퍼진 적이 있었다.실제로 과거 기사 중에 일부러 서태지와아이들이라고 붙여서 표기한 기사도 있었다. 다만 그 이후에는 다시 종전대로 돌아온 것을 보면 대부분이 이걸 이상하게 여긴 듯하다.
실제 국립국어원 규정에 따르면 오히려 띄어 써야 맞는다. 한글 맞춤법 제49항에 따라 성명 이외의 고유 명사는 단어별로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하되, 단위별로 띄어 쓸 수 있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명칭은 처음부터 띄어쓰기로 표기해 왔다.
고유명사를 붙여서 쓰는 건 배달의민족처럼 애초에 이름을 지을 때 붙여서 표기한 경우밖에 없다.
따라서 서태지와아이들이라고 적는 것은 잘못된 표기이다. 즉 기자가 과잉수정을 한 것.
워낙 서태지의 존재감이 독보적인 팀이었던 탓에 "○○○와 아이들" 혹은 "○○○와 ○○○들"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도 이러한 이름은 많았으나, 워낙 서태지와 아이들의 인기와 영향력이 막강했기에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신조어로 정착했다. 특정 팀에서 혼자만 비정상적으로 뛰어나거나 인지도가 높은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N.EX.T를 신해철과 넥스트와 같은 식으로 소개하자 빡친 신해철이 활동명을 Crom으로 바꾼 이야기라던지... 김구라가 YB를 윤도현과 기타 등등, 윤도현과 떨거지들(...)이라 불러 멤버들이 진지하게 해체 논의를 했다던지... 심지어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는 '빅토르와 가수들'이라는 이름의 독일 밴드가 등장한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구한성이 술회하기를 해태 타이거즈가 전반기 프로야구 1위를 기록하면 팀에 특별 보너스 1억 5천만원을 주기로 했으나 0.5게임차로 OB 베어스에 뒤지며 2위에 그치자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태음료 전속모델 CF 계약금으로 다 돌아갔다고 한다.
14. 둘러보기
[공식] 후술할 내용이지만, 2집 때까지 존재했으며 후에 상업화 및 권력화를 우려한 서태지의 의견에 따라 해체했다. 이후 누구나 팬클럽을 만들어 인정받을 수 있었다. K팝 아이돌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432-2번지 4층에 위치했다.[2] YOYO 등은 여러 팬클럽 중 규모가 컸던 팬클럽일 뿐이고, 실제로는 간단한 등록 절차만 거치면 누구나 팬클럽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었으며, 그 지위는 모두 동등했다. 이는 서태지의 복귀 이후에도 이어져, 서태지는 요즘엔 인디밴드나 유튜버조차 있는 팬덤 공식 명칭조차 없는 뮤지션으로 남아 있다.[3] 다만 댄스 가수들이 분명 인기가 오르던 시기긴 했으나, 서태지와 아이들이 수상한 대상 등 당대 부동의 톱스타라고 확실히 인증할 만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가수는 없었다. 당시 가요계는 사실 성인가요도 슬슬 쇠락하던 시절로, 이문세, 유재하, 변진섭, 신승훈 등 1980년대 후반부터 태동한 K-발라드가 대세로 치고 나오던 시절이었다.[4] 음악 자체는 정통 힙합이라기보단 서태지 본인이 락 밴드에서 활동한 경력 때문인지 락부터 국악(하여가)까지 끌고 오는 등 여러 장르가 섞였다. 한 곡에도 실로 다양한 장르가 섞인 하이브리드 음악이 다수였으머, 앨범마다 색채를 바꾸기도 했다. 이는 은퇴 번복 후 돌아온 뒤에도 현재까지 계속된다.[5] 서태지 특유의 하이브리드 스타일 음악은 H.O.T. 등 1세대 아이돌을 통해 다소 열화된 형태로 계승되었으며, 이후 특징을 유지한 채 다듬어져 오늘날 K-POP의 주된 특징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SM Music Performance의 기원으로 볼 여지도 충분하다.[6] 서태지와 아이들에 영감을 받아 몇몇 기획사들이 기획해 내놓은 1세대 아이돌 그룹들이 오늘날 K팝의 시작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였던 양현석은 아예 본인이 기획사를 차려서 YG엔터로 키워냈다.[7] 2집 이후부터는 직접 기획사를 차려 스케줄을 비롯한 활동 전체를 직접 관리했다.[8] 이름이 들어간 멤버를 푸쉬하기 위해 기획되었거나, 해당 멤버의 지분율이 절대적인 팀. 다만 이름이 들어간 멤버를 제외한 구성원은 덤 느낌이 강하다보니(사실 2명의 멋진 안무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흥행하는데 일정 지분은 있었다), 훗날 양현석은 오디션 예능프로에서 팀명 맘에 안든다는 참가자에게 본인도 그랬다고 농반진반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9] '〇〇와 △△'식의 팀명은 1970년대에도 었었고, 당시까지도 '함중아와 양키스', '신중현과 엽전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현철과 벌떼들', '이치현과 벗님들', '강병철과 삼태기', '현진영과 와와', '나미와 붐붐' 등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특히 '아이들'이란 단어가 들어간 팀명은 1992년 당시에도 촌스럽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10] 그래서 당시에도 영어 이름인 태지보이스 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11] 상술된 내용처럼 롤링 스톤에서는 이 날을 현대 K-POP의 생일로 칭하기도 했다.[12] 참고로 이 영상에서는 런닝맨에 나오는 그 지석진도 나온다. 나중에는 지석진 본인도 "여기서 서태지랑 대결해 본 사람 있으면 나와 봐!"라는 식으로 농담삼아 여러 번 써먹는다.[13] NELL의 김종완이 이 무대를 언급하며 서태지의 찐팬 인증을 한 적이 있다. 기사[14] 당시 함께 무대에 섰던 가수는 역시 3인조 그룹 코스모스와 제갈민과 울랄라였다.[15] 이때 양현석은 서태지에게 당시 기준 거금이었던 450만원을 선불로 요구했고, 서태지는 이를 일시불로 지불하였으나, 양현석은 이를 돌려주지 않은 채 입대해버렸다.[16] 여러 버전의 리믹스곡들을 내는 건 서태지의 취향이기도 하다. 서태지 특유의 편곡 덕후 성향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만든 곡을 원곡 그대로 두는 법이 없었고, 대부분의 활동곡을 상황과 멤버에 맞게 리믹스했다. 1집 활동 후에는 리믹스 곡과 라이브 실황을 합쳐 Taiji Boys Live & Techno Mix 앨범을 내기도 했는데, 현재까지도 아는 사람은 아는 숨겨진 명반으로 꼽히고 있다. 심지어 은퇴 후 복귀하며 낸 6집 수록곡 전체를 4억이나 들여 재녹음한 음반을 내기도 했다.[17] 이와 비슷한 영미권 밴드의 사례로는 흑인음악 레이블 스택스의 세션맨 그룹인 '부커 T 앤 엠지스', 뉴웨이브 밴드 토킹 헤즈가 있다.[18] 어지간해서는 집단에서 막내를 리더로 세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금도 이러한 구성을 가진 그룹은 WINNER외엔 찾아보기 힘들다. 리더이기 이전에 막내로서 연장자들과 충돌이 일어날 위험이 크기 때문. 그래서 대체로 단체에서는 어지간히 문제가 많지 않은 이상 연장자를 대표나 리더격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19] 다만 WINNER의 리더인 강승윤은 막내긴 해도 동갑내기 송민호보다 생일만 느릴 뿐이며, 맏형 김진우와 둘째형 이승훈과의 나이 차이 역시 3살, 2살로 크지 않다.[20] 여담으로 이원복은 자신의 만화인 '한국 한국인 한국경제' 및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 편' 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패러디한 그룹인 동태지와 어른들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부르는 노래는 난 몰라요![21] 서태지가 흠모하던 락그룹 비스티 보이즈에서 착안하여 만들었다. 이들도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락 사운드에 힙합과 랩을 덧입혀 가요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굳이 더 따지자면 런던 보이즈나 백스트리트 보이즈처럼 그리 드문 그룹 이름은 아니었다.[22] 당연히 개별 안무야 각자 짜지만, 서태지가 가장 춤실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군무만큼은 서태지의 의견이 많이 들어갔다고 한다. 양현석과 이주노도 서태지의 수준에 맞춰서 안무를 짰다.[23] 3집을 처음 들어본 이주노는 “태지야 이건 아니잖아.”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지만 그런 음악에도 멋진 안무를 짰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를 둘고 메탈 음악에도 안무를 짜야만 했던 한국 가요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며 평했으나, 2010년대 이후로는 해외ㅣ에도 이런 스타일의 그룹들이 등장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이쪽의 선구자가 된 셈이다.[24] 2018년에 스포츠동아가 창간 10주년을 맞아 방송, 영화, 가요 등 엔터테인먼트 각 분야 콘텐츠 제작자, 프로듀서, 평론가, 마케팅 등 전문가 100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다. 참고로 6위는 조용필, 7위는 방탄소년단, 8위는 유재석이었다. 물론 서태지는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솔로 활동 시절엔 여전히 스타긴 했어도 예전만큼의 독보적 인기를 끌지는 않았기에 (그래도 복귀 발표부터 음반의 장르, 활동 하나하나가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몰고 왔던 6집이나, 2004년 당시 10만여장 차이로 그 해의 음반판매량 1위를 차지했던 2007집까지는 당시 최고 스타였다고 봐야 한다), 단순한 인기나 스타성같은 것을 넘어 그가 남긴 업계 영향력과 위상 등이 종합적으로 감안된 평가라고 봐야 할 것이다. 1위와 3위를 합하면 27표로 독보적이다.[25] 힙합의 원류인 미국 본토에서도 이전까지는 대중들이 힙합을 '요 근래 주목받는 특이한 구조의 비주류 댄스 음악'이라고 인식했다. 본격적으로 미국 음악계 주류로 편입되고 열광하는 매니아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 이후라고 봐야 한다. 당장 미국 서부 힙합의 메이저화를 알린 The Chronic의 발매가 1992년 말로,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보다 몇 개월 더 느리다.[26] 서울 기준으로 KBS, MBC, SBS, CBS, PBC, TBS, BBS, 그리고 AFKN. 전국망 라디오는 KBS와 MBC뿐이고 AFKN 외에는 아예 지방에서 들을 수도 없었다. 일부 남해안 지역에서는 차라리 일본 방송이 더 잘 잡혔다.[27] KBS1, KBS2, MBC, SBS, EBS. 그나마 SBS는 이제 막 개국한 방송사였고, 지방에서 송출되지 않았으나 93년부터 중계유선방송을 통한 테이프넷이 허용되었다. AFKN은 일부 지역에서만 수신되는 영어방송이라 논외.[28] 1995년 3월 출범.[29] 1990년 통화 도수당 부과되던 전화요금이 1분당 요금으로 바뀌며 전화세 폭탄을 맞았다.[30] 당시는 PC통신 에뮬레이터로 모뎀 다이얼 업 -> PC통신 서비스 접속 -> 인터넷 서비스 메뉴 접속 -> winsock 프로그램 구동 -> 넷스케이프 같은 웹 브라우저를 구동해서 월드 와이드 웹(요즘 인터넷이라 말하는 것)을 켜거나 혹은 고퍼, 텔넷 서비스 이용 순이었다.[31] 김종서는 장발이라는 이유로 KBS에서 출연금지를 당한 적도 있다.[32] 당시에는 스크린 쿼터라고 해서 의무적으로 한국 영화를 일정 기간 상영해야 했으며,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사전심의도 받아야 했다. 참고로 한국 영화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1999년 영화 쉬리의 등장과 이후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시작부터였다.[33] 당시는 공연에 대한 노하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당시 공연을 주관한 국내기획사 관중통제를 전혀 하지 못했다.[34] 다만 이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구성원 중에 이주노와 양현석이 있다는 것을 간과한 지적이다. 특히 이주노는 이후 '무제'를 자칭했을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춤꾼이었다. 양현석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운 당대의 춤꾼이었고.[35] 서태지보다 어렸거나 동년배인 안혜지, 윤영아 같은 아이돌형 댄스가수들이 있다. 수많은 어린 댄스 가수들이 그 급격한 단층에 적응하지 못해서 사라졌을 때, 흑인음악적 기본기가 탄탄한 현진영은 서태지를 엄청나게 연구한 SM과 함께 잘 적응해서 초인기 가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연구성과가 고스란히 투입된 그룹이 바로 H.O.T.[36] 그런 문법으로만 말한다면 양준일과 현진영은 서태지보다 먼저 초인기가수가 됐어야 했다.[37] 이 정점으로 평가받는 곡 중 하나가 바로 하여가다.[38] 화학적 융합 측면에서는 투박하지만 물리적으로는 어떻게든 접합해낸 스타일[39]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서태지가 단순히 작곡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음반을 프로듀싱 할 수 있었다.[40] 이런 압력을 거절하지 못한 가수로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최고의 아이돌 이상은이 있었다. 원하지 않는 모습을 계속 TV에서 보여줘야 하는 것이 너무 싫었고 강제로 스케쥴을 이행해야 하는 것이 정말 고역이었다고 이야기했다.[41] 이전에는 뮤직비디오를 소속사에서 별도로 촬영하지 않고, 방송국에서 만든 거리나 세트장에서 임시로 촬영한 여러 영상을 뮤직비디오랍시고 갖다 썼다. 사전에 꼼꼼히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즉석으로 촬영된 비디오에 가깝다.[42] 사실 1980년대에 방송무대로 진출한 댄스가수들 덕분에 립싱크는 이미 대중 속으로 들어왔다. 1980~90년대 쇼 프로그램이었던 퍼포먼스 위주의 프로그램은 대부분 립싱크를 할 수 밖에 없었고 립싱크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1996년 하반기부터는 음악방송에서도 라이브 비중이 늘어나기도 했다.[43]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최고의 그룹으로 불리는 H.O.T.의 앨범을 보면 꼭 하나씩 그런 내용의 노래가 들어간다.[44] 조선, 중앙, KBS를 비롯한 주요 언론사에서 1991년 분신정국을 잠재우는데 성공하면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까지 만들었는데 이들에게야 서태지는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일개 유명인사였다.[45] 반대로 언론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즉ㅡ 서태지 등장 직전 NKOB가 거하게 사고를 쳤기 때문에 청소년들의 관심을 한국의 대중문화로 돌리기 위해 서태지에게 상당히 편의를 봐 준 것도 있다는 것이다.[46] 원더걸스 이전에도 동방신기 (2003년 데뷔), 슈퍼주니어 (2005년 데뷔) 등의 보이그룹이 인기를 끌었지만, 대중음악계에서 주류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아이돌이 한국 음악의 메인스트림으로 떠오른 분기점은 원더걸스와 빅뱅, 그리고 소녀시대이다.[47] 아이돌 시장이 처음 형성된 1990년대 일부 기획사들은 정말 그런 식으로 아이돌 그룹을 런칭했지만(이런 경우엔 보통 노래 실력이 되는 멤버를 같이 붙이고 그 멤버에게 노래 분량을 몰아줘서 보정했다) 시장이 성장하고 정립되기 시작한 00년대 이후 부터 연예 기획사에서는 아이돌을 뽑을 때 얼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실력도 같이 본다.[48] 2세대 아이돌들은 립싱크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음악방송에서 춤을 추며 라이브까지 잘 소화했다.[49] 이는 해당 그룹을 처음으로 봐서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다 똑같이 생겼다고 여기는 것이다.[50] 이 비판은 그룹형 가수에 대한 부정적 편견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51] 위의 각주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기성세대들이 2세대 아이돌들을 비판한 주요 레퍼토리는 거의 대부분이 편견에 기반한 것이다. 이후 2010년대 중반에 들어 3세대 아이돌들이 등장하자 2세대 아이돌들을 좋아한 세대들이 3세대 아이돌들을 비판하는 일이 늘어났는데, 이들이 3세대 아이돌들을 비판하는 주된 원인은 '과도한 팬덤+해외 활동 위주의 전략 등으로 인해 국내에서의 대중성이 부족하다' 등 사실상 팩트폭력에 가깝다. 심지어 이들이 3세대 아이돌들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2세대 아이돌들의 전성기였을 당시 유치원생~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어린 나이였던 2020년대 기준의 10대들도 동의하는 경우가 많다.[52] 겨울연가와 대장금의 대히트 이후 언론에서는 한국 드라마가 대인기라고 대서특필을 했지만 2000년대 내내 막장 드라마들이 최고 시청률을 찍는 바람에 한드의 질이 크게 하락했다. 한국 드라마가 다시 경쟁력을 가지게 된 것은 2012년 TVN의 응답하라 1997이 히트하면서부터이며, 이후 JTBC와 TVN이 명작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드라마 한류도 재개되었다.[53] 유림회관이 은퇴회견장으로 잡힌 것도 너무나 급작스럽게 전격적으로 해체하는 바람에 당일 장소를 대관할 곳이 이 곳밖에 없어서였다고 한다. 우연이지만 기성세대에 대한 도전의 상징이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기자회견장이 기성세대 문화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교문화의 상징적인 장소인 성균관인 것도 아이러니다.[54] 서태지가 3집에서 발해를 꿈꾸며를 발표하며 통일 주제에 관심을 보였고, 교실 이데아에서는 한국 교육의 실태를 비판하였는데다 4집에서는 시대유감 사전심의 사태로 당시 집권당이던 신한국당과 제대로 척을 졌고, 이 반대급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태지에게 관심을 가졌다. DJ는 2004년 서태지의 컴백쇼 '라이브와이어'에 메시지 영상으로도 등장한다.[55] 서태지와 아이들은 단 4년도 안되는 짧은 활동기간을 이어왔으나 역대 최정상을 논하는 위치에 오른 20대 중반의 젊은 가수가 돌연 기자회견을 갖고 은퇴를 선언한 것이었기 때문에 파장이 어머어마했다.[56] 서태지의 가장 유명한 별명 중 하나가 ‘문화 대통령’이다. 음악 대통령이 아니다.[57] 당연하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남성 팬들도 정말 많았다.[58] 당시 엠넷과 엠티비는 선진적 음악 프로그램을 지향하고 있어서 오히려 지상파보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시기 두 방송사에서 서태지와 아이들과 더불어 지상파보다 더 크게 조명되던 아티스트가 당시 N.EX.T의 리더인 신해철과 015B. 사실상 현대 대한민국 음악계에서 이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두 방송사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59] 시기상으로 봤을 때 교실 이데아, 필승, 컴백홈 정도는 알고 있을 나이대이며 3집과 4집으로 활동했을 때다.[60] 당시의 초등학교 고학년~중고생들도 성인들 못지않게,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되었다는 사실에 충격 받은 것은 똑같았다. 사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이후 H.O.T.는 1996년, 젝스키스는 1997년에 데뷔했다. H.O.T.의 팬들과 젝스키스의 팬들이 서로 반목하는 관계로 유명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하고 그 중심 세력이 H.O.T.의 팬들과 젝스키스의 팬들로 서로 갈라진 것일 뿐,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약하던 시기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했다.그리고 그 전에 아주 잠깐이나마 거세게 타올랐던 '영턱스 클럽'도 있었다.[61] 서태지와 아이들의 가장 큰 소비계층이었던 10~20대가 받은 충격은 물론이고 30~40대를 넘어 그들에게 가장 반감이 심했던 기성세대 및 노년층도 "...왜?" 라는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당장 당시 모든 정보를 독점한 매스 미디어로서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급력이 강했고, 메인 뉴스 프로그램에 연예계 뉴스를 내보내는데 매우 소극적인 공중파 방송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자기 채널 메인 뉴스의 첫 소식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기자회견 소식을 담았다. 스포츠 신문뿐만 아니라 메이저 신문사들도 1면에 기사를 넣는 수준이었다. 현재의 방탄소년단이나 임영웅도 이 정도는 불가능하다.[62] 당시 1부는 1~4집의 베스트 뮤직비디오들을 상영하였으며, 2부는 초대가수 공연 및 모창대회, 유명인사 축하메시지 상영으로 각각 이루어졌다.[63] 1996년 4집 수록곡 'Taiji Boys'의 가사 중 일부. 이보다 앞선 1995년 1월 "다른 하늘이 열리고" 콘서트 당시에도 '길 밖에도 길은 있었다'라는 제목이 함께 고려되었다. 서태지의 음악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라고도 할 수 있다.[64] 유명 패션지 보그의 10대판이다.[65] 92 환경콘서트의 타이틀이다.[66] 1집 활동 시절 발매되었는데, 곡의 스타일은 3집 스타일의 랩코어에 더 가깝다.[67] 이는 서태지에게 크나큰 부담이 되어 데뷔 당시부터 늘 생각했던 해체 혹은 은퇴를 은퇴로 굳히도록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68] 원래 서태지가 은퇴를 생각하고 만든 음반은 3집이며, 당시 <굿바이>의 역할로 만든 곡은 바로 <영원>이었다.[69] 특히 이 믹스나인은 역대 오디션 프로그램들 중 가장 최악으로 평가받는 프로그램이다.[70] 서태지 본인에 대해서 음악적 평가, 사회적 영향에 대한 비평이 갈리기는 하지만, 다른 2명이 사실상 범죄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서태지는 사생활의 논란도 없고 굉장히 청렴한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서태지가 2014년 9집 활동과 2017년 25주년 기념 콘서트 이후 더 이상 공개적으로 방송 활동을 하지 않은 채 가족들과 조용히 지내는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