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11:41

최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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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대한민국 제43대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최윤희
崔允喜 | Choi yoon-hui
파일:최윤희차관.jpg
출생 1967년 9월 1일 ([age(1967-09-01)]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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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재임기간 제43대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2019년 12월 20일 ~ 2020년 12월 24일
학력 은석국민학교 (졸업)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 (졸업)
상명여자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체육교육학[1] / 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석사[2])
종목 수영
주종목 배영, 혼영
종교 개신교 (침례회)
가족 언니 최윤정
배우자 유현상, 장남 유동균, 차남 유호균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이후4. 정무직공무원 경력5. 수상 기록6. 방송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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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수영 선수 & 前 정무직공무원이다. 선수 시절 2번의 아시안 게임에서 도합 5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2. 선수 경력

언니 최윤정수영 선수였는데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동생이 금메달 딴 종목에서 죄다 은메달을 땄다. 최윤정초등학교 3학년인 만 10세 때 성인 국가대표로 선발되었고, 만 12세에 성인여자 배영 200m 대한민국 신기록을 세웠으며 만 14세에 출전한 1978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는 등 엄청난 기대주였으며, 최윤희가 없었다면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3관왕에 오를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스포츠계에서는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금메달을 따도 최윤정이 딸 것이라 기대했었다. 최윤희가 이전까지 언니를 이겨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도 이러한 예측을 뒷받침했다. 대회가 끝나고 언니는 "너 때문에 내가 금메달을 못땄다"고 아쉬움을 표시하자, 최윤희는 "내가 없었어도 중국이나 일본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언니는 금메달을 못 땄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이후 언니와 사이가 매우 나빠졌다는 후문이 있다.

특이한 것은 만 15세(중학교 3학년) 때인 1982년이 전성기였다는 점이다. 아시안 게임에서 3관왕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최윤희 개인 통산 최고 기록 또한 1982년 8월에서 11월 사이에 국내 대회 및 아시안 게임 본선에서 기록되었다.

불과 만 15세의 나이에 아시안 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하면서 향후 성장세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다.[3] 특히 그녀가 수영 선수로서 전성기에 이를 나이인 1988 서울 올림픽까지 감안하여 국가적인 지원을 받으며 육성되었다. 게다가 1988 서울 올림픽 이전에 열리는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소련, 동독 등 당시 올림픽을 휩쓸던 공산권 국가들이 모조리 불참을 선언했기 때문에 최윤희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했으며 당시 수영연맹이 최초로 미국 전지훈련을 실시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이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2관왕에 오르며 명예를 회복했다. 그러나 기록은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 미치지 못했다. 향후 올림픽도 마찬가지로 서울에서 열리기 때문에 이에 대한 기대 및 우려가 엇갈렸으나, 최윤희는 아시안 게임이 폐막한 후 만 19세의 나이로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조오련 이후 10년 만에 나온 아시안 게임 수영 금메달이라는 실력에 중학생이라는 어린 나이, 기승전뛰어난 미모와 나이에 비해 성숙하면서도 운동선수다운 탄탄한 체형 등으로 오늘날로 치면 국민 여동생 비슷한 위치에 오르며 당대 최고의 여자 스포츠스타가 되었다. 쉽게 말해 2010년대에 김연아가 군림했던 그 위치가 1980년대에는 최윤희의 몫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은퇴 후에는 포카리스웨트, 르까프 광고에 모델로서도 활동했다. 당시 최윤희의 모델료 1억원은 강남 아파트 2채 가격이었다. 물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수준의 세계적인 선수까진 아니었지만, 체육 인프라도 미약하고 해외여행도 못하던 시절 금메달 종목 자체가 적은데[4] 아시안 게임 금메달이라는 쾌거를 이룬데다 그때가 무려 청소년이었으니 향후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 당연히 국내에선 인기가 좋았다. ''아시아인어”라는 명칭이 괜히 붙은게 아닌 것.

당시만 해도 여자 스포츠 선수는 광고의 주인공이 되기 매우 어려웠지만 최윤희는 새로 출시한 신생 음료 브랜드인 포카리스웨트(1987년)과 스포츠 용품사인 르까프(1988년)의 CF 모델을 맡았다. 다만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당시에는 수영 2관왕에 등극했음에도 같은 대회에서 육상 3관왕을 차지한 임춘애에 스포츠라이트가 더 비춰졌다. 최윤희는 1982년 아시안 게임에서도 우승했던 반면 임춘애는 1986년에 등장한 깜짝 스타였고 불우했던 성장기가 알려지면서 큰 관심을 끌었다. 다만 임춘애는 미인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외모였고 곧 은퇴해 인기가 오래 가진 못했다.

3. 은퇴 이후

파일:external/dimg.donga.com/37792863.8.jpg
은퇴 이후 남편 유현상과 함께

1991년 6월 6일 경기도 남양주의 한 사찰에서 14살 연상의 가수 유현상과 비밀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었다.

록밴드 백두산 보컬 유현상은 록음악 매니아 사이에선 유명할지 몰라도 록 음악이라는 장르의 확장성이 적었던 탓에 대중적 가수는 아니었다. 대부분은 1980년대 백두산으로 활동할 당시 긴 머리에 가죽 자켓, 가죽 바지, 체인 등을 치렁치렁 달고 다니던 이미지나 1980년대 말 가요계를 뒤흔들던 여가수 이지연을 키운 음반제작자 정도로 기억되는 인물이 유현상이었다. 더구나 21세기 김연아에 비견될 만큼 전국적 스타덤에 올랐던 최윤희에 비해 유현상의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도 사실.

때문에 최윤희가 본인보다 덜 유명한 14살 연상 가수와 결혼한다는 흔하진 않은 조합에 당시엔 납치(...) 결혼설 등 온갖 루머가 쏟아져 나왔다. 참고로 유현상은 빠른 1954년생, 최윤희는 1967년생이다. 허나 이런 루머에 최윤희는 자신이 사랑했기에 결혼한 것이라고 말하며 의혹을 일축했다. 최윤희가 록 매니아였나보지 결혼 전 매일 밤 유현상이 꿈에 나타났다고 한다. 유현상에 의하면 최윤희는 무척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데이트 때 유현상이 걸어가면 최윤희가 한 발 물러나서 걸어갔다한다.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 것은 최윤희 부모의 반대 때문이었다. 유현상이 최윤희와 비밀교제를 하다 집에 데려다 주는 길에 처음으로 집 앞에 있던 최윤희 모친을 우연히 만났는데, 최윤희 모친은 유현상을 슬쩍 본 뒤 최윤희에게 "야, 윤희야. 상대가 되어야지."(...)라는 말로 유현상을 무시하고 최윤희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한다. 당시 최윤희 부모는 유현상과 교제에 반대해 외출을 금지시켰고, 이에 최윤희는 단식 투쟁으로 맞섰다. 그 와중에 수시로 집을 몰래 빠져나와 유현상과 데이트하며 식사를 해결하고 들어와 집에서 단식 투쟁을 이어갔다고 한다. 결혼식 당일 최윤희는 부모님에게 학원에 간다고 말하고 외출하여 결혼식을 올렸다.[5] 그리고 결혼식 후 부모에게 결혼 사실을 알리지 않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최윤희 부모는 지인인 한 다이빙 코치를 통해 딸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결혼 후 유현상이 처가를 찾아갔을 때에도 장모는 벽을 보고 앉아서 유현상이 무슨 말을 하건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몇분간 아무런 말도 안 했다고 한다. 결국 그냥 유현상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나올 수밖에 없었다. 유현상에 의하면, 장모가 결혼을 인정한 건 세월이 지나 출산한 자녀가 돌이 되고 나서 장모에게 데리고 갔을 때였다. 이것도 손자가 귀여워서 왕래를 허락한 것이지 유현상을 좋아한 건 아니라고 한다.

여하튼 결혼 생활을 하면서 슬하에 2남을 두었고, 2001년 두 아들과 함께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로 건너가 그곳에서 17년 간 육아 및 자녀 뒷바리지에 헌신했다. 훗날 한국으로 돌아오고 한 인터뷰에 의하면 미국에 17년 동안 살면서 오로지 아이들 교육에만 신경쓰며 지냈다고 한다.

다만 유현상은 아무래도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다보니 외로워서인지 방송에서 "가족은 같이 있어야 돼요. 같이 부대끼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있어야 그게 가족이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2017년 가을 미국 생활을 끝내고 귀국하여 17년 만에 기러기 부부 생활을 청산했다. 자녀들은 미국에서 생활하는데, 장남 유동균은 워싱턴 대학교 치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시애틀에서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고, 차남 유호균은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

2017년 은퇴한 여성 체육인들의 모임인 ㈔한국여성스포츠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4. 정무직공무원 경력

2018년 7월 3일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한국체육산업개발 대표이사로 취임하였다. 경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최윤희 대표이사의 선임을 두고 당시엔 보은성 인사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 최윤희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경력이 있다.

2019년 12월 19일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이 되었다.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 팀 집단 가혹행위 사건 발생 이후 문체부 최숙현 사건 특별조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다만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는데도 5일 동안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아 前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었던 도종환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이 최윤희 차관의 행동을 비판하기도 했다. 2020년 12월 24일 차관직을 사임했다.

5. 수상 기록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82 뉴델리 개인혼영 200m
금메달 1982 뉴델리 배영 100m
금메달 1982 뉴델리 배영 200m
금메달 1986 서울 배영 100m
금메달 1986 서울 배영 200m
동메달 1982 뉴델리 혼계영 4×100m 계주
동메달 1986 서울 혼계영 4×100m 계주
동메달 1986 서울 개인혼영 200m

6. 방송 활동



[1] 86학번[2] 석사 학위 논문: 국가대표 선수들의 스포츠 가치관에 관한 연구 (2002)[3] 최윤희 이후 12년 만인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여자 수영에서 금메달을 딴 조희연도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다. 하지만 최윤희와 마찬가지로 조희연도 이후 세계 무대에서 포텐을 터뜨리지 못했다.[4] 특히 한국의 여자 수영은 1970년대까지 아시아권에서도 명함도 못내밀 정도였다. 최윤희 이후로도 아시안 게임 수영에서 금메달을 딴 여자 선수는 조희연, 정다래, 김서영이 1개씩 딴 것이 전부이다.[5] 이후 제대로 된 결혼식을 다시 올리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본인은 당시 진지하게 결혼식을 했기 때문에 다시 올릴 필요를 못 느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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