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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장환

파일:허장환.png
1935년 7월 8일, 경주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초명 허면휴(許冕烋)
이명 허병훈(許秉勳)·허탄해(許呑海)·허한소(許寒嘯)
암상한(岩上寒)·허암상(許岩上)·산무부(山武夫)
주경(珠慶)
본관 김해 허씨[1]
출생 1896년 9월 24일
경상북도 장기군 내남면 전동리
(現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전동리[2] 310번지[3])
사망 1946년 5월 20일[4]
경상북도 경주군
학력 니혼대학 전문부 (사회학 / 졸업)
부모 아버지 허정, 어머니 김경룡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141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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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다.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6년 9월 24일 경상북도 장기군 내남면 전동리(現 경주시 감포읍 전동리 310번지)에서 아버지 허정(許梃, 1858. 5. 22 ~ ?. 2. 25)[5]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경룡(金慶龍, 1857. 4. 9 ~ ?. 7. 4)[6] 사이의 4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허병하(許炳夏, 1881. 9. 7 ~ 1952. 7. 15)[7], 허병주(許炳周, 1886. 6. 17 ~ 1972. 2. 28), 허병은(許炳殷, 1890. 10. 13 ~ ?) 등이 있었고, 아래로 여동생 허병수(許炳秀, 1898. 8. 17 ~ ?)가 있었다.

그는 1919년 7월 중 독립군과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전라남도 제주도로 건너갔다. 허장환은 제주도민들에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군 20만을 양성하여 9월 중 국내로 진격하여 조국을 독립시킬 계획이나 아직 7만 명이 부족하니 협조를 부탁한다'고 하였다.

그후 11촌 지간의 족질(族姪) 허만섭(許萬灄, 1899. 5. 28 ~ 1944. 10. 11)과 함께 하얼빈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려는 계획을 세워, 1919년 8월경, 군자금과 여비를 구하기 위해 경주군 경주면 읍내 북부의 어느 여관에서 양북면 용동리(현 문무대왕면 용동리)의 차경철(車卿澈), 양북면 호동리(현 감포읍 호동리)의 권정오(權正五) 및 양북면장 정호영(鄭琥永)의 사인 또는 직인을 위조한 후 그곳에서 양북면장 명의로 차경철·권정오의 민적등본 각 1통과 차경철·권정오· 양북면장 명의의 인감증명원서 각 1통을 작성하여 차경철·권정오 및 양북면장의 각 이름 아래와 기타 주요 부분에 앞서 위조한 도장을 각각 날인 및 위조하여 완성했다.

그는 허만섭과 이 위조서류를 가지고 경상북도 대구부(현 대구광역시)로 가던 도중 김헌명(金憲明)과 만나, 허장환은 차경철로, 허만섭은 권정오라 사칭하고 김헌명에게 각 소유한 땅을 담보로 하여 돈을 빌리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와 함께 대구부로 갔다.

한편, 김헌명이 돈을 마련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대구부 경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에서 예전부터 허장환, 허만섭 및 김헌명과 안면이 있던 김윤제(金潤濟)와 만나자, 김윤제가 자기들의 거짓 이름을 김헌명에게 말하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기에 우선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자기들의 범행에 가담케 하였고, 김윤제는 김헌명 앞에서 그들이 사칭한 이름을 부르며 김헌명에게 신뢰를 주었다.

김헌명은 그 사정을 알지 못하고 곧 허장환과 허만섭을 데리고 대구부 원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의 김경옥(金敬玉)에게 데리고 갔다. 그들은 사칭하고 각 소유지를 담보로 제공하여 돈 6,500원을 대여해 달라고 김경옥에게 부탁하고 위의 위조한 민적등본과 인감증명원서 등을 건네자 김경옥은 이를 믿고 승낙하였다.

또 그곳에서 돈을 일부 먼저 빌린다는 명분으로 돈 40원과 50원을 두 차례 빌렸는데, 50원을 빌릴 때 차경철, 권정오 명의의 차용증서를 위조하여 김경옥을 거쳐 전 주인인 대구부 북내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북내동) 아베 히츠타로(阿部筆太郞)에게 건네기도 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1919년 9월 7일 체포되었고, 그해 12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의 예심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면소를 선고받았으나 공·사문서 위조행사 및 사기 혐의에 대해서는 대구지방법원 합의부 공판에 회부되었다. 결국, 1920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 합의부에서 징역 1년 2개월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였으나 그해 2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원심 판결이 그대로 적용되면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4월 16일 출옥한 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고학으로 사립 니혼대학 전문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니혼대학에서 신사상을 접하게 되었으며,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자 잠시 조선으로 귀국했다가 1924년 다시 도쿄로 돌아가 유학하면서 공산주의 관계 서적을 탐독하고 공산주의자 등과 깊이 교제하면서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 도쿄에 있는 조선인 노동단체 및 사상단체의 간부로서 주의 선전에 힘쓰고 있을 때, 공산주의자로서 평소 친교가 있는 김용찬(金容贊)과 양명(梁明) 등이 중국 베이징에서 비밀결사 혁명사(革命社)를 조직하여 1925년 1월경 2회의 서신을 보내 그에게 가입을 권유하였다. 혁명사는 북경 고려공산당 계열 인물이 주도하던 북경 고려공산당의 표면단체이다.

1925년 3월, 허장환은 혁명사에 가입하여 도쿄지역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일본 전역의 노동운동과 사상운동 등의 상황을 조사한 후 본사에 보고하였으며, 또한 기관지 『혁명(革命)』에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등의 원고를 투고하는 한편, 재일본조선노동총연맹 외 각종 노동단체, 1월회·3월회·유학생학우회 등 각 사상단체, 요코하마·오사카·고베 등 각 도시의 노동단체 20여 개소에 기관지를 배포하였다.

허장환이 1925년 12월 중순 일본 도쿄의 공산주의자인 안광천과 남대관을 혁명사원으로 추천하자 김용찬은 안광천 및 남대관과 협의하여 1926년에 혁명사원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본사의 김용찬으로부터 기관지의 활용 효과를 높이기 위해 한글 활자의 구입을 부탁받아 1926년 1월 공산주의자로서 당시 일본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인 남대관(南大觀)과 협의 끝에 도쿄의 사상단체 1월회의 기관지 인쇄부인 '동성사'로부터 한글 활자를 분양받아 베이징 본사에 가지고 가려고 할 때, 도쿄에 있던 사상단체의 유력자인 한림(韓林)·하필원(河弼源)·박낙종(朴洛鍾)·김정규(金正奎) 등과 동행하여 각지의 사상단체들과 연락하여 단체간의 통일을 이끌어 내고자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 관헌의 엄중한 감시와 활자운반의 어려움으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1927년 7월경 요양을 겸하여 공산주의 선전을 위해 조선에 돌아오면서, 공산주의자 안광천(安光泉)과 남대관을 혁명사 동경지사의 책임자로서 김용찬에게 추천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허장환은 신간회 및 경주청년동맹 양북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8년 6월 1일 경주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1929년 8월 28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미결구류 180일 통산)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2년 3월 2일 출옥한 그는 1933년 10월 초에 경주적색농민조합 김두오(金斗五)에게 사회운동의 실천방법을 지도하였다. 허장환은 농촌에서 운동을 벌이려면 야학을 개설하여 농민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그들이 글자를 알게 되었을 때 서서히 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의 야학활동으로 인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1935년 8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불기소처분받고 곧 출옥했다.

이후 일제의 감시 하에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46년 5월 20일 경상북도 경주군에서 별세하였다.

3. 기타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사후 그의 유해는 경주시 감포읍 전동리 옥수골에 안장되었다가, 2009년 3월 1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1] 제학공파(提學公派)-지헌공파(智軒公派) 25세 환(煥) 휴(烋) 병(炳) 火변 항렬.[2] 김해 허씨 집성촌이다.[3] 1914년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의 당시 소유주는 허장환의 아버지 허정(許梃, 초명 허순(許淳), 1858. 5. 22 ~ ?. 2. 25)이었다.[4] 허씨대종보 4권 501쪽에는 9월 28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5] 초명 허순(許淳). 허씨대종보 4권 499쪽에는 1855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6] 김도순(金道淳)의 차녀이다.[7] 아버지의 첫째 부인 밀양 박씨 소생이다. 족보명은 허기휴(許沂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