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쿠로야마 키젠(玄山己善) |
이명 | 현기선(玄己善) |
본관 | 연주 현씨[2] |
출생 | 1911년 4월 16일 |
전라남도 제주군 신좌면 조천리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3] | |
사망 | 2001년 1월 22일 |
일본 치바현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683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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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2. 생애
현사선은 1911년 4월 16일 전라남도 제주군 신좌면(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아버지 현천학(玄千鶴)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도명(李道明)[4] 사이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신좌면(현 조천읍) 함덕리로 이주하였다. 아버지 현천학은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서당 훈장을 겸직했던 인물이다.그는 1940년 3월 제주도 조천면의 자기가 경영하는 잡화상점에서 동네 주민 쿄하라 오츠류(淸原乙龍) 등에게 일제의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론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꼬집어 비판하는 말을 하였으며, 같은 해 4월 말에는 중일전쟁의 전황에 관하여 "일본은 장기건설, 장기건설이라고 떠들면서 국민을 혹사시키고 더욱이 급박한 상황에 이르러 방법이 없게 되자 조선인을 전쟁터로 끌어낸다"고 말하여 한인 지원병제(志願兵制)의 부당함을 성토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경에는, "신문은 일본군이 중국의 임시수도인 중경을 30여 회나 폭격했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진짜 폭격했다면 당연히 함락되었을 것인데도 함락시키지 못하는 것을 보면 30여회 폭격이라는 기사는 진위를 의심케 한다"라고 말했으며, 이 밖에도 일본으로 도항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내선일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선일체라면서 조선인의 일본 도항은 종래에 통하는 엄중한 취체가 있지 않는가."라고 말하는 등, 수 차례에 걸쳐 반일사상을 표명하였다.
이를 이유로 1941년 9월 중순에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42년 8월 13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육·해군형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3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치바현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2001년 1월 22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현사선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7년 11월 6일에 본래 일본 치바현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이튿날인 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했다.#
[1] 연주현씨대동보에는[2] 중랑장공파 27세 선(善) 항렬.[3] 1942년 수형인명부에 따르면, 조천면 조천리 2355번지가 본적이고 조천면 함덕리 2914번지는 주소지이다.[4] 이종록(李宗祿)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