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08:58:24

화두

話頭

1. 사전적인 의미2. 불교 선종(禪宗)의 수행법
2.1. 선종에서 '화두'의 의미2.2. 역사2.3. 구체적인 방법
2.3.1. 화두의 가짓수는?2.3.2. 하는 법2.3.3. 병통2.3.4. 견성(見性)2.3.5. 보림
2.4. 문제제기
2.4.1. 정통성 문제2.4.2. 접근성 문제2.4.3. 방법 자체의 문제
3. 같이 보기

1. 사전적인 의미

이야기의 말머리. 또는 참선(參禪)하는 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답을 구하려 애를 쓰는 문제.

본래는 불교용어이지만 현대에서는 이른바 '화제', '이슈'같은 의미로 ‘~가 화두가 되다’라는 관용적 표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1]

2. 불교 선종(禪宗)의 수행법

파일:attachment/화두/01.jpg

선종 중에서도 임제종간화선 쪽에서 중시하는 수행법으로, 깊은 의심을 통해 정신을 극도로 집중시켜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다. 공안이라고도 부르며[2], 영어권에서는 이를 일본식으로 읽은 고안(Kōan)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화두는 동아시아(특히 일본, 중국, 한국 등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불교 수행법 가운데 하나로, 대한민국 조계종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스님들이 화두로 수행한다. 일본에서도 화두가 꽤 보편화된 수행법이라고 한다.

2.1. 선종에서 '화두'의 의미

여기서 쓰는 화두란 단어의 한자는 1번 항목과 같지만 뜻은 약간 다르다. 수행법으로써의 화두는 ‘말(話)보다 앞서는(頭) 것’을 뜻하는데, 말 그대로 생각이나 말을 떠올려내기 전에 존재하는 자신의 마음을 찾아내는 방법이 불교의 화두수행이다. 이러한 화두수행법은 ‘간화선(看話禪)’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말 그대로 화두를 보면서(참구하면서) 공부한다는 뜻.

좀더 좁은 의미에서의 화두는 ‘태어나기 전의 내 모습이 무엇인가’ 나 ‘이빨에 털이 났다’ 등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어귀 등을 뜻한다. 화두수행자는 이러한 화두들 중 한 가지를 택해 수행을 하게 된다. 대부분의 화두는 옛날 조사들이 남긴 어록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2.2. 역사

화두의 기본적인 형태는 제6조 혜능 이후의 조사선[3] 당시 선사들의 어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당시 선사들은 제자들에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짧은 글귀 등을 던지곤 했다. 이 질문들은 대부분 상식으로는 절대 대답이 나올 수 없는 것들이 많은데,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로 어떻게든 형상과 개념을 초월한 공(空)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제자들 중에서는 그냥 저 질문 하나만 듣고도 곧바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년간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스승이 가르쳐주고자 한 경지를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몇몇 선사들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몸짓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깨달음을 묻는 사람에게 엄지손가락만 들어보인다든지, 주장자로 바닥을 내려친다든지,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는 등의 방법을 이용해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자리를 일깨우는 것이다. 좀더 과격하게는 제자들을 때린다든지, 코를 비튼다든지, 방망이로 후려친다든지, 더 심하게는 손가락을 베어버린다든지 하는 충격요법도 사용했다. 충격요법을 즐겨 활용한 선사들로는 대표적으로 마조, 임제의현, 황벽 등이 있다.

지금 우리가 아는 화두수행(간화선)은 남송 시대의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에 의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정립됐다. 당시 남송의 선종은 구두선[4]을 비롯한 각종 사이비 수행승들이 넘쳐나면서 말기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종고선사는 이때까지 역대 조사들의 어록을 화두로 이용해 제자들을 지도했다. 간화선은 스승에게 제대로 자신의 경지를 검증받을 수 있다는 점과, 화두를 일단 줘 놓으면 나머지는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하므로 편지 등을 이용해 원격으로 가르치기에 좋다는 점에서 수도에 머무르는 일이 많았던 귀족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또한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점, 굳이 경전이 필요없기 때문에 글을 몰라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간화선 중심의 수행이 정립된 뒤 오늘날까지 참선과 함께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전해지고 있다. 종파에 따라 다르지만, 조계종과 태고종에서는 대부분의 스님들이 간화선을 거의 유일한 수행법으로 삼고 있다. 원불교에서는 '의두성리(疑頭性理)'라는 이름으로 화두를 참구하며, 박중빈 소태산 대종사가 의두성리에 가까운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긴다. 대신 모두가 의두성리만 하는 것은 아니고, 단전호흡과 묵조선식 지관타좌를 조화시킨 '단전주(丹田住)'라는 명상도 한다.

인도에서도 몇몇 힌두교 수행자들이 화두와 비슷하게 '나는 누구인가?' 등의 질문을 참구하면서 수행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직접적인 관련은 거의 없다고 보는 편.

2.3. 구체적인 방법

2.3.1. 화두의 가짓수는?

대부분의 화두(공안)는 옛날 조사들이 남긴 어록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송나라의 도원(道源)이라는 사람이 쓴 '경덕전등록'에는 조사 1701명의 어록 및 행적 등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1700 공안이라는 개념이 나왔다.[5]

간화선에서는 공안 하나를 힘들게 깨치고 나서도 이 1700개의 화두를 다 깨쳐 막힘이 없어야만 정말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인정해 준다. 한 가지 화두를 제대로 깨친다면 나머지 화두도 동시에 깨치게 된다고 하는데, 깨달은 스님이나 수행자들의 사례를 보면 여기에도 약간 개인차가 있는 것 같다. 숭산스님 같은 경우는 견성 후 1700화두를 전부 깨쳤는데도 스승인 고봉선사가 인정을 해 주지 않아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는 더 깊은 깨달음을 얻으면서 고봉선사의 법맥을 이어받게 됐다고 한다.

2.3.2. 하는 법

한국에서는 깨달은 스님을 찾아가 화두를 하나 청해 받는 식으로 수행이 시작된다. 화두수행은 특정 질문에 대한 선사들의 답을 바탕으로 '이 분이 어째서 이렇게 말했을까?'에 대한 의문(의정)을 키워가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만약 화두가 밑에서도 설명할 '이뭣고'처럼 질문 형식으로만 돼 있다면, 이 질문을 붙잡고 계속해서 의문을 키워가면 된다. 수행자들 사이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화두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부처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선사들의 대답
  • "개에게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조주선사의 대답
    • 없다(無)[6].
  • "부처나 조사를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여라(殺佛殺祖).[7]
  • "달마조사가 동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8]
  • ~가 무엇인가(是甚麽)?[9]
    • 태어나기 전의 본래 모습이?
    • 이 몸을 끌고 다니는 것이?
    •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가 돌아가는 곳은?
    • 선(善)도 악(惡) 도 생각지 않았을 때 나의 본래 마음은?
    • 두 손바닥으로 박수를 치면 소리가 나는데, 한 손바닥에서 나는 박수소리는?
    •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은 무엇인가? 줄여서 뭣고? 더 줄여서 ?[10] [11]

화두수행에는 의문(의정)이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유지하거나 키워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간화선에서의 의문은 항상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하고, 잡념을 끊는 장치로 쓰인다. 화두가 애초에 보통의 상식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답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순수하게 의문만을 키워 삼매(samadhi)에 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화두는 윤리학에서 등장할 법한 사고실험과 매우 유사한 형식을 띠기도 한다.

아무래도 의문을 기반으로 한 수행이니만큼, 퍼즐이나 큐브를 푸는 것보다 더욱 머리에 부담이 가게 된다. 이러한 삼매가 꾸준히 계속되면 자나 깨나 화두가 마음 속에 맴돌면서 내가 화두를 하는 건지, 화두가 나를 하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 경험까지 하게 된다.[12]

2.3.3. 병통

간혹 수행법을 오해하거나 해서 화두수행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를 병통이라고 부르는데, 무(無)자 화두의 경우 보조국사가 10개의 병통을 정리해 놓은 것이 있다.
  • 유(有)와 무(無)에 대한 견해를 내고는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것
  • 무(無)라고 해서 '정말 아무것도 없는 어떤 상태'라고 견해를 내는 것
  • 상식이나 논리 등으로 따져서 불성을 알아맞히려 하는 것
  • 지식으로 알아맞히려 하는 것
  • 단순히 눈을 꿈적이게 만드는 내 마음 속의 무언가가 불성이라고 생각해서 더 이상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
  • 화두를 생각할 줄 알고 막대기를 들게 만드는 내 마음 속의 무언가가 불성이라고 생각해서 더 이상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
  • 언어를 통해서 깨달음을 알아맞히려고 하거나, 깨달은 척 말장난을 하는 것
  • 아무것도 안 하면서 앉아만 있는 것
  • 깨달음에 관한 글 등을 인용하면서 깨달은 척 하는 것
  • 열심히 수행도 안 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깨치기를 막연히 기다리는 것

사실 위의 10가지 병통은 모두 생각으로 인해 일어나기 때문에, 의심을 철저히 가져서 생각의 길을 끊어버려야 제대로 된 화두 수행이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2.3.4. 견성(見性)

이런 식으로 계속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생각이나 현상이 없어진 본래의 순수한 마음인 (空)의 마음을 알게 되는데, 이를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견성을 하는 순간에는 공통적으로 날카로운 칼날이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내리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이는 마음 속의 번뇌가 사라지면서 해탈을 향한 맑은 각성상태가 나타날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한다. 한번 나타난 각성상태는 그 상태로 사라지지 않은 채 앉으나 서나 누우나 계속해서 유지된다고.
견성= 숙명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부처님은 6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일반인은 제대로 해도 적어도 10년이 걸린다. 개인의 업장에 따라서 기간이 달라진다.
화두가 잘되고 있으면 염불이나 다라니 독송을 할 때와 같이 귀에 이명이 살짝 들린다. 그리고 머리와 눈이 개운해지는것을 느낄 수 있다.
화두를 계속 하다보면 마지막 단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화두가 머릿속에서 노란색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데 이걸 박살내야 한다.
이 순간이 왔을 때부터 견성하기 전까지 낮잠, 음식을 금해야 한다. 보통 1주일안에 성공이든 실패든 결과가 나오므로 굶어죽을 염려는 안해도 된다. 물론 이 단계에 들어서기 전까지 낮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평상시 졸음을 쫓기위해 커피는 마셔도 상관없다.) 오직 물만 마시며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한다.
스님들이 철야정진 하는 이유도 이 마지막 단계를 넘어서기 위한 준비운동이라고 보면 된다. 잠이 끝없이 쏟아진다.
견성을 하고 나면 앞에서 말한 화두에 대해서도 답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다만 지식으로 따져서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만큼이나 더욱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답변이기 때문에 스님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선문답을 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일반인으로서는 대략 정신이 멍해지게 된다. 언어를 벗어난 경지를 서로에게 드러내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할 수도 있고, 그냥 모순어법으로 아무렇게나 말하면 되는 게 아닌지 생각할 수도 있는데, 들어보면 모순어법으로 말을 마구 던지는 것 같으면서도 그 표현 하나하나가 깨달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고도의 '맥락'을 전제로 해서 대화가 오고가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스님들은 상대방이 정말로 깨달았는지 깨달은 척 하는 건지 상대의 선문답만 듣고도 바로 알 수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견성을 하고 나면 대부분의 스님들이 법거량을 하곤 한다. 법거량은 원래 선사들이 제자들을 지도하거나 깨달음의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나눈 선문답을 뜻한다. 화두수행은 스스로 수행하기에는 편하지만, 자신이 깨달았는지 아닌지 자기점검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선지식을 찾아 화두에 대한 답이 술술 나오는지, 그리고 그 대답이 깨달음에 부합하는지 등을 점검하기 위해 법거량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원래 뜻 이외에도 왠지 스님들의 경지 배틀처럼 쓰이는 경우도 왕왕 있다.

2.3.5. 보림

그럼 '견성을 하면 곧바로 깨달음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법도 한데, 대부분의 선사들은 견성 이후에도 추가로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는 편이다. 견성 뒤에도 계속하는 수행을 가리켜 보림이라고 한다. 이는 견성으로 얻은 마음자리를 지켜나감과 동시에 아직 마음 속에 남아있는 미세한 번뇌를 지우는 수행을 말한다. 견성이 이뤄진 다음에는 보림이 저절로 이뤄진다고 한다. 단, 옛 습관이 짙게 남아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퇴전(退轉)이라 하여, 통찰을 얻었음에도 이전의 번뇌와 탐진치로 가득한 생활 방식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었기에, 예로부터 보림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선사들이 많았다.

한국 불교에서 깨달음이 단계적으로 찾아온다는 관점은 지눌[13]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실 처음 깨닫고 난 뒤에도 더 큰 깨달음이 찾아온다든지 하는 선사들의 사례도 많다.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하면서 '더 닦을 게 남았다면 깨달은 게 아니다'라는 요지의 주장을 한 적이 있지만, 이는 '견성하면 그걸로 끝'이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견성했다고 주장하기 전에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돌아봐야 한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성철 스님은 진정한 보림은 완전히 견성하고 난 다음에 이뤄진다고 말했다.

2.4. 문제제기

21세기에 들어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원문으로 쓰인 불경들이 한국어로 번역되고, 외국에서 유입되거나 소개된 다양한 명상 방법들이 소개되면서, 한국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간화선 수행법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증가하고 있다. 이 문단에선 한국 불교의 간화선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2.4.1. 정통성 문제

우선은 정통성 문제를 들 수 있다.

간화선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일단 간화선이 석가모니의 수행법과 거리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 중 대다수는 선종 자체가 초기불교 이후 몇백년 뒤에 수차례 의견분열이 일어나 생긴 대승 불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과, 간화선 자체가 석가모니의 수행법이 아닌, 남북조 시대 조사선의 전통에서 출발해 11세기쯤에나 체계적으로 정립된 수행 방법이라는 점을 근거로 든다.

석가모니는 호흡관찰[14]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으며, 제자들에게도 이와 비슷하게 감각을 통찰하는 수행법을 지도했다. 남방의 상좌부 불교에서는 4념처(몸, 감각, 감정, 법)를 전부 관찰하지만, 대승불교의 경우에는 마음만을 관찰한다. 이렇듯 초기불교나 남방불교, 대승불교의 '관찰'을 바탕으로 하는 수행법에 비해, 강한 의문을 바탕으로 하는 간화선은 방법 면에서 꽤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스님들의 경우 대부분 대승불교(자세히는 선불교) 측을 지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화두 수행에 대해서도 깊은 믿음 내지는 자부심을 지닌 분들이 많으며, 이 중 많은 사람들이 상좌부 불교티벳 불교 등을 폄하하는 경우가 있다. 80년대 후반 위빠싸나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됐을 때 조계종 대다수 스님들이 위빠싸나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화두선으로 수행하는 한국 스님들 중 많은 수는 화두선이 근기가 높은 사람을 위한 수행법이며, 관법이나 염불 등은 근기가 낮은 사람을 위한 수행법이라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15]예1예2

하지만 최근 세계화 추세 속에 위빠싸나 말고도 티벳 불교 계열 명상 등 다양한 수행법들이 한국에 유입되면서, 역으로 화두수행에 대해 폐쇄적이고 현대인들에게 맞지 않고 붓다 본연의 가르침도 아니라는 등의 비판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16]

하지만 불교 역시 긴 시간을 거치며 많은 변화가 있었고, 남방 불교 역시 석가모니의 뜻에 가장 가깝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현재 남방불교에서 가르치는 위빠싸나도 석가모니가 실제로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은 호흡 관찰법 이외에, 후대에 개발 및 발명된 각종 방법들이 많이 결합된 것이다. 다만 간화선 역시 발명의 산물이니만큼, 어느 한 쪽만이 가장 정통성이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현명한 자세는 아닐 것이다.

2.4.2. 접근성 문제

화두수행이 현대인들(특히 현대 한국인들)에게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화두수행의 특징은 분명 빠른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그만큼 빨리 깨닫기까지 바쳐야 하는 노력이 엄청나다는 데 있다. 어중간한 노력으로는 몇 년 혹은 몇십년을 화두를 잡고 있어도 수행이 답보상태에 머무르다 보니, 웬만한 정신력이 아니고서는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 정신이 산만하거나, 결단력이 없거나, 신심이 부족한 사람들의 경우엔 화두수행이 더욱 어렵다고 하며, 화를 잘 내거나 욕망이 많은 타입 역시 화두수행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17]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역대 선사들은 앉아서만 하는 좌선은 이득이 없다고 했지만 한국에서는 집중 문제 등으로 인해 대부분 조용한 선방 같은 곳에서 좌선하는 식으로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현대인들이 불교 수행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대부분 산만함을 줄이고 싶어서, 화를 줄이고 싶어서, 욕망을 버리고 싶어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어서 같은 이유들인데, 이미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엄두도 못낼 수행이라는건 본말전도인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인들은 여러가지 일에 신경쓸 일이 많고, 스트레스도 많고, 여러 가지 면에서 감각적 자극도 많이 받는 시대에 살다 보니 전통적인 화두수행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문제에 대해선 신자들의 수준에 맞게 간화선 수행을 지도하려는 스님들의 노력이 절실하지만, 이 역시 미흡한 부분이 적지 않다. 우선 국내 스님들 대부분은 누군가를 가르치기보다는 자신의 수행에 더욱 전념하는 경우가 많다.[18] 그나마 서점에 간화선 관련 책들이 있긴 하지만, 책들 대부분은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꽤 불친절한 편이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한자어로 도배가 되어있는 책이 많다는 점도 한자에 무관심한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잘 어필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화두수행 방법 역시 거의 대부분의 스님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수행자를 배려한 맞춤형 지도가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19][20] 사실 여기에는 1700 공안 중 가장 궁리해서 답을 내기가 어렵고 또 조사들이 가장 즐겨 사용했던 화두들 몇 가지만 계속해서 돌려쓰고 있는 탓도 있다. 대부분의 화두들은 지식으로 답을 추리하기 쉽기 때문에, 아예 정상적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만 사용하고 있는 것. 위 문서 '하는 법' 부분에 기재된 화두들은 선가에서 현재까지 가장 많이 쓰는 화두들이다.

스승으로부터 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스승이 살벌하거나 냉랭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언어의 간섭을 최소한으로 하기+어느 순간이든 바짝 깨어있기 등을 연습시키기 위해선 살벌한 방법이 일정 부분 효과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선방에 앉아 참선하는 수행자들 사이를 스승이 죽비를 들고 지나다니다가, 수행자의 정신을 다시 환기시키기 위해 큰 소리로 죽비를 쳐서 법매를 때리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된다. 한국에서는 그냥 스승이 직접 손으로 죽비를 쳐서 소리만 내거나, 소리만 크지 살짝 치고 마는 정도로 끝나지만, 일본의 경우는 상당히 살벌하게 후려친다(...).[21] 밑의 동영상 참조(영어 압박 주의).

[kakaotv(26Qar0rF2-c$@my)]

내레이션 중 '스승은 이렇게 매를 때리는 것을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등을 찰싹 치는 것에 비유합니다.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이죠.' 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포인트.

화두선이 불교 교리와 연관되어 체계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수행하면서 마주치는 경지에 대해 어떻게든 설명하며 가르쳐야 되는데, 경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선종의 특성상 경전과 연동해서 설명하려는 노력이 별로 없었던 것. 화두선을 가르쳐 온 역대 스님들은 경전에 나오는 말보다는 선가에서 통용돼 온 고유의 개념으로 이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의심, 의정(疑情), 의단(疑團)[22], 은산철벽(銀山鐵壁)[23], 오매일여[24] 등등. 결국 경험에 크게 의존하는 형태로 전수가 되다 보니, '과연 불교의 가르침이 맞느냐'라는 비판도 간간이 나오곤 한다. 그래도 최근에는 화두수행을 하면서 나타나는 의식상태를 말라식[25], 아뢰야식[26] 등 유식학적 용어를 사용해 설명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간화선의 세계화에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스님의 수가 적다는 사실이다. 정말 제대로 결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스님들 대부분은 한문(혹은 좀더 드물게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 이외의 외국어를 잘 배우지 않는다. 통역의 수를 늘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깨달음에 더 가까이 있는 당사자가 직접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일 테니까... 스님들이 좀더 외국어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외국인을 상대로 한 포교에 있어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어쩌면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 목적인데 말이 안 통하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른다.[27]

2.4.3. 방법 자체의 문제

화두선 자체가 좋지 않은 수행법이라는 주장으로, 다소 과격한 주장에 속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화두선 성립 당시부터 계속 존재했다. 같은 선종이지만 조동종 등에서는 간화선을 쓰지 않고, 대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방법인 묵조선으로 수행한다. 종고선사는 이러한 묵조선을 ‘죽은 선’이라 부르며 비판했는데, 묵조선 역시 간화선을 님들은 깨달음도 계단식으로 하나요[28]라며 맞받아쳤다.

그러나 최근에는 각종 불경들을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 원문으로 접할 일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현재 전해지는 화두선 수행법 자체에 대해서도 각종 문제제기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화두선 수행자들이 불교 계율을 깡그리 무시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신라시대에만 해도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고승이라도 가차없이 비판을 받는 분위기였지만[29] 화두선 특유의 탈규범적·탈권위적 분위기가 대세가 되면서 깨닫기만 하면 무애행(無碍行)이라는 이름으로 계율을 지키지 않는 것이 오히려 높은 경지로 존경받는 분위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한국 대다수 스님들 사이에서 '최고의 수행법'으로 평가받는 화두선의 권위에 비해, 화두선 수행으로 깨달은 사람이 의외로 얼마 안 된다는 점도 문제로 제기되는 경우가 있다. 일례로 한 스님의 조사에 따르면, 통합종단 출범 이후 50년간 조계종 출가자 50만 명 가운데 20여 명 정도만 깨달음을 얻었다고 인정받았다고 한다.기사 링크 심지어 간화선을 주력으로 하는 선원에서조차 수좌들의 40%가 다른 수행을 한다고 하니# 간화선 위기론은 더욱 커지는 상황이다. 그래도 할 사람은 한다.

한국 불교계 내부에서도 한국 선불교가 '좌선병'에 걸렸다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심지어 남방불교 기준이 아니라, 중국식 선불교 기준으로도 정도를 넘었고, 법거량이나 수행자 지도 같은 시스템이 마비된 지 오래라는 비판이다.법보신문의 기고문

3. 같이 보기



[1] 이걸 오남용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애초에 언어라는 것 자체가 그 사회에서 많이 쓰다보면 표준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달리 보면 별 의미없는 소리다.[2] 엄밀히 말하면 공안 자체는 단순히 '선사들의 문답 기록'에 가까운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문답 중 일부 구절을 두고 참구하며 수행하는 간화선, 즉 '화두'와는 다소 의미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일본의 영향으로 오늘날에는 공안과 화두라는 두 용어가 혼용되어 쓰이고 있는 상태.[3] 스승과 제자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전수하는 방식을 말한다.[4] 역대 선사들의 어록을 따라하면서 말로만 깨달은 채 하는 것을 말함.[5] 18세기에 편찬된 '종감법림'이라는 공안집에는 무려 2720개에 달하는 공안이 실려있다고 한다![6] 일명 무(無)자 화두. 대혜종고 선사가 즐겨 사용한 화두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질문에 대해 조주선사는 물어보는 사람에 따라 '있다'라고 답한 적도 있는데, 이 역시 화두로 쓰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無자 화두가 더 자주 쓰인다.[7] 임제선사의 대답이다.[8] 본래는 측백나무라고 한다[9] 한국에서는 이 뭣고라는 번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일반인들 중에서도 불교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은 들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말은 현대 중국어의 조상격인 당(통일왕조)북송대의 백화체(白話體)로 된 말이다. 현대 중국어 발음으로 하면(성조 포함) 'shi4 shen2 me?'[10] 여기에서 이것 혹은 가 무엇인지 참구하는 것이다. 그냥 이것이나 이라고 서술한 이유는 참나(진아)라거나 진여라고 하면 자신도 모르게 폐단이 생긴다. 무슨 폐단이냐면 자신도 모르게 단어에 집착하는 폐단이다. 모든 화두 공안은 이 뭣고 화두로 돌아온다. 이 문제를 풀면 모든 화두 공안을 타파한 것이고, 무생법인을 깨친 것이다.[11] 이 뭣고 화두는 성철스님이 생전에 들던 화두이다. 이뭐꼬라는 책까지 나왔다.[12] 이런 상태까지 와야 화두를 타파 할 수 있다. 화두 타파한 스님들의 말 중에는 화두를 참구할 때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화두를 일념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13] 지눌은 실제 3번에 걸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14] 팔리어로는 아나빠나삿띠(anapanasati)라고 한다. 한문으로 안반수의(安般守意), 수식관(數息觀)이라고도 한다.[15] 심지어 어떤 스님이 쓴 책에는 석가모니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자기도 모르게 화두수행을 하다가 깨달았다는 식의 이야기도 버젓이 실려 있기도 하다![16] 선종의 유래로 자주 언급되는 염화미소 등의 일화가 실린 '대범천왕문불결의경'도 현대에는 위경으로 분류된다.[17] 불교의 생활불교화를 위해 노력한 불교인들 중에서는 화두 수행을 권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불교인이자 정치인이었던 백성욱 박사는 화두 수행을 "탐심(욕심)이 꽝 터질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일 뿐"이라고 칭하면서, 제자들에게 화두 수행을 권하지 않았다.[18] 그나마 최근에는 템플 스테이 등으로 일반인들에게 불교를 알리려는 노력을 하는 사찰이 늘어나고 있지만.[19] 예를 들어 수학을 정석만 가지고 공부했을 때, 어떤 학생들은 분명 정석의 덕을 봐서 높은 성취도를 보이지만, 반대로 정석이 너무 불친절하다고 느껴서 수학이라는 과목에 전혀 감을 붙이지 못하는 학생 역시 꼭 생긴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될 듯.[20] 숭산 스님 같은 경우는 미국인들이 기가 세다 보니 화두만 고집하지 않고 위빠싸나나 티벳 불교식 만트라 등 다양한 요소를 수행자의 체질에 맞게 이용해서 지도했다고 한다.[21] 다만 이렇게 후려치는건 간화선보다는 주로 묵조선 계통이 더 심하다.[22] 의심->의정->의단 순으로 의심의 농도가 진해진다. 의단 이후에는 의단이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는 '의단독로'라는 중간단계를 두기도 한다.[23] 화두수행을 계속한 끝에 말문이나 생각이 벽에 가로막힌 듯 완전히 막혀버리는 것을 말한다. 원래 뜻은 '은으로 된 산과 쇠로 된 벽'. 화두선을 가르치는 스님들은 화두 하나를 해결하는 것을 은산철벽을 통과하는 것에 비유하곤 한다.[24] 자나깨나 화두수행이 계속 유지되는 상태. 스님들도 이 경지까지 가는 데 의외로 많이 힘들어 한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생전에 오매일여가 되지 않으면 깨달음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25] 자아의식. 제7식이라고도 한다.[26]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27] 실제로 고 숭산 스님의 콩글리쉬가 언어에 얽매이지 말라는 화두선의 가르침과 맞물려 외국인 선교에 본의 아니게 도움이 되었다고.[28] 1700개의 공안을 하나하나 타파해야 한다는 점에서.[29] 삼국유사에도 신라시대 경흥국사라는 스님이 말안장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왕궁에 갈 채비를 하다가 거지 중으로 위장한 문수보살의 꾸중을 듣고 뉘우쳤다는 전설이 실려 있다. 왠지 요즘 외제차 타는 스님들과 좋은 비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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