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03:15:52

사족

화사첨족에서 넘어옴

1. 蛇足2. 士族
2.1. 중국과 조선의 지방 권력자 계층2.2. 일본의 지배 계급
3. 四足4. 畲族5. 우타이테

1. 蛇足

고사성어
긴 뱀
고사성어의 하나로 직역하면 (蛇)의 (足)이다. 본래 4자로 화사첨족(畵蛇添足)이었으나 2음절로 줄여 말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중국에선 아직도 4자로 쓴다.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된 단어다. 소양(昭陽)이 초(楚)나라를 위해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공을 세운 뒤 제나라까지 공격하려고 하자 유세가 진진(陳軫)이 그를 만나, 초나라가 소양에게 더 높은 지위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자칫 실패하면 죽임을 당한다고 경고했다. 그때 든 비유가 이것이다.
楚有祠者 賜其舍人巵酒 舍人相謂曰 數人飮之不足 一人飮之有餘 請畵地爲蛇 先成者飮酒 一人 蛇先成 引酒且飮之 乃左手持巵 右手畵地 曰 吾能爲之足 未成 一人之蛇成 奪其巵曰 蛇固無足 子安能爲之足 遂飮其酒 爲蛇足者 終亡其酒

어떤 초나라 사람이 제사를 지내고, 집의 가신들에게 제사 술을 한 병 주었습니다. 가신들은 말하기를, "여럿이서 마시면 부족하고 한 사람이 마시면 충분하다. 땅에 뱀을 그리기로 해서, 제일 먼저 그리는 사람이 다 마시기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뱀을 먼저 그리고는 술을 마시려 하여 왼손으로 술병을 잡아당기고는, 오른손으로 뱀발을 그리며 말하길, "나는 발도 그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발을 다 그리기 전에 다른 사람이 뱀을 다 그리고는 술병을 빼앗으며, "뱀에게는 본래 발이 없거늘, 네가 어찌 발을 그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가 술을 다 마셔버렸고, 뱀의 발을 그리던 사람은 끝내 술을 마시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한학입문》(심경호 저, 황소자리 편, 2007)에서 발췌

위의 해석을 보면 '존재하지도 않는 걸 그렸으니 너 무효'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이미 완성한 것에 쓸데없는 것을 덧붙여 오히려 완성도를 떨어뜨렸다는 게 핵심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이 의미로 인용하고 있다.

글을 쓸 때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잡다한 정보를 끝에 덧붙이는 경우에도 이 말을 사용한다.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비슷한 고사성어로는 옥상가옥(屋上架屋)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지붕 위에 지붕을 씌운다는 뜻으로, 어떤 사물이나 일이 부질없이 거듭될 때 쓰는 표현이다. 둘 다 군더더기로 인해 마이너스로 작용한다는 점은 같지만 의미가 미묘하게 차이가 있는데 사족이 결과 면에서 마이너스로 작용한다는 뉘앙스가 강한 반면, 옥상가옥은 효율 면에서 마이너스로 작용한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신조어로는 인터넷 유행어 뇌절이 사족의 의미에 거의 정확하게 부합하며 TMI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1] 4절까지 말해서 4족

한편, 정말로 사족(蛇足)이라는 게 있는데 뱀이 도마뱀처럼 걷게 해주는 기계가 그것이다. # 뱀발

1.1.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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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士族

2.1. 중국과 조선의 지방 권력자 계층

조선에서는 조선 후기에 향촌 사회에서 농민을 지배했던 계층이다. 주로 조선 중기 이후에는 효율적인 토지경영을 위해 거주지 중심으로 모여 살던 양반을 가리키는 재지사족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그래서 양반하고 완전히 상통하는 말은 아니다.

중국에서도 조선과 비슷했지만 고대에는 아직 과거 제도가 없던 시절이다 보니 일종의 귀족 계급으로서 성격이 조금 더 강했다. 이들은 선진시대까지는 중세 유럽의 귀족들처럼 전사귀족으로서 탄생하여 성장하였다가[2] 춘추전국시대 관료제의 발달과 함께 점차 문관화가 이루어졌는데 문관으로서 사족은 주로 한나라 이래로 시행된 천거 제도의 대상자로서 인물평을 받은 뒤 천거를 받아 관직에 진출하는 사람들이었다.[3] 삼국지를 예로 들면 당대에 허소허정이 인물을 평가해주는 일로 유명했는데 한달에 한번씩 자신들이 평가해준 인물들과 평가한 내용을 써서 저자거리에 벽보처럼 붙였으므로 이를 월단평이라고 불렀다. 이 월단평 최고의 대박이 바로 다름아닌 조조로 그 내용은 治世之能臣, 亂世之姦雄(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었다.

이러한 사족들은 나름 능력으로써 특권을 누리는 계층이였기에 자신과 황족 이외의 다른 계층의 사람들[4]을 우습게 여기기 일쑤였다. 이를테면 환관의 가족인 조조는 이런 점 탓에 인생 초반에 사족들로부터 엄청난 비웃음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현실은 여전히 사족의 권력이 미약했는데 당장 삼국지의 지배자들 중 사족은 원소 정도 밖에 없었고, 많은 경우 황족이나 귀족, 지방 유력자들이었다. 대표적으로 동탁손견은 군벌, 조조는 환관, 유비는 황족이었다. 그나마 원소도 생모가 천출이라는 태생 탓에 얼자라서 사족 대우를 제대로 못 받았으므로 가문 덕보다는 본인이 직접 자수성가한 사례였다.

사족 중에서도 뛰어난 사족을 명사(名士)라고 불렀으며 크게 존경했다.

2.2. 일본의 지배 계급

신분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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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한국 일본 인도 북한 태국
왕족 성골 왕족 황족 브라만 백두혈통 왕족
귀족 성직자 진골 호족 양반 공가 다이묘 화족 크샤트리아 기본 군중 하이쏘, 승려
부르주아 기사 6두품 중인 사무라이 #s-2.2 타나 람 루어이
(신흥 부유층)
평민 양인 쵸닌 바이샤 복잡한 군중 로쏘
농노 천민
노비
부라쿠민 수드라 적대계급​잔여분자
노예 찬달라 }}}}}}}}}

에도 시대까지 봉건시대 일본의 신분제도에서 가장 상위에 위치한 계급이다. 같은 라고는 해도 조선선비와는 달리 무사(武士)를 의미한다.[5]

가마쿠라 시대부터 일본 내 율령제를 유명무실화하면서 천황귀족(공가)들을 권력에서 밀어내고 정계를 주름잡던 계급이었지만 대정봉환으로 막부가 무너지면서 몰락하게 되었다. 결국 세이난 전쟁을 끝으로 지배계급으로서의 사족은 종말을 고했다. 1947년 일본국 헌법이 제정되면서 신분제가 완전히 폐지될 때까지 사족이라는 신분 자체는 남아 있었으나 화족과는 달리 신분 상의 특전은 없는 명예직이었다. 사족 내에서도 실질적으로 상급 무사와 하급 무사 사이에는 격차가 존재했고[6] 메이지 유신 이후의 지배층에 편입되지 못한 사족들은 이름만 남은 신세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신분제의 잔재가 아직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사족 출신이라는 성분이 평민과 구별되는 보이지 않는 이점은 여전히 존재했다.

이들 중 사족의 최말단에 위치하고 있던 아시가루 등의 최하급 무사나 하급 가신들은 1870년 졸족(卒族)이라 하여 사족과 평민 사이 계급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신분이 세분화되고 실질적으로 구별의 의미가 거의 없었으므로 2년 뒤인 1872년에 폐지되었다. 졸족에 속했던 자들 중 무사 신분을 세습해 오던 사람들은 사족, 이외의 사람들은 평민의 지위를 받았다.

3. 四足

짐승의 네 개의 발이나 네발 가진 짐승, 또는 사지()를 속되게 이르는 말. '무슨 일에 반하거나 혹하여 꼼짝 못하다'를 의미하는 '사족을 못 쓰다'의 사족이 이 사족이다.

4개의 발로 보행하는 것을 사족보행이라고 하며, 대부분의 동물이 사족보행을 한다.

4. 畲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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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타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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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oo Much Information'의 약자인 'TMI'는 너무 많은 정보, 즉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과도한 정보를 의미한다. 안 하느니만 못한 수준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쓸데없는 것을 덧붙였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2] 라는 글자 자체가 원래 전투용 도끼를 든 병사를 가리키던 갑골문에서 비롯하였다.[3] 정확하게는 처음에는 족벌주의적 인사 제도인 임자제가 시행되다가 연고주의능력주의가 절충된 천거 제도로 이행하였다. 전근대 기준으로 상당히 능력주의적이었고 현대 인사 제도에도 영향을 준 과거 제도가 정착한 것은 보통 중국 중세사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송나라 시대의 일이다.[4] 군벌, 평민, 하인, 환관[5] 사실 士는 원래 중국에서도 원래는 하층 무사귀족계급으로 출발하였다가 그것이 춘추전국시대~시대에 이루어진 국가체제의 고도화와 문치주의로 말미암아 고대에 이미 무사와 무관한 관료계급으로 변모하였다. 일본은 이후로도 오랜 기간 분권적 정치질서와 군사문화가 짙게 남아 있다 보니 이런 인식이 유지되었다.[6] 가령 쇼군을 직접 알현할 수 있었던 하타모토에 비해 하급 무사로 분류되던 고케닌이나 반농민 취급을 당하던 향사 등은 같은 무사계급이라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