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7 14:36:32

황교익/비판과 논란/평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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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용하는 용어와 개념
2.1. 미각과 맛2.2. 분별없음과 미개함, 정치와 평론의 결부
3. 평론의 주된 논지
3.1. 식재료 비판과 사회 문제3.2. 식문화 비판과 사회 문제3.3. 맛 비판과 사회 문제
4. 담론
4.1. 한식의 전통 부정과 이중잣대4.2. 일본에 대한 막연한 선망
5. 정리6. 번외편. 페이스북 및 블로그 근황

1. 개요

디워 사건”이후 나는 글쓰기 방향을 크게 바꾸었다[1]. 기왕에 쓰는 것, 한국인의 미각 수준이 얼마나 형편없는지에 대해 집중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당신들이 이런 것을 맛있다 하였지? 그런데, 그건 아주 형편없는 맛이야”하며 공격을 해대었다. 김재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트루맛쇼>에 출연하여서는 아예 작정을 하고 “한국인의 입맛은 천박하다”라고 하였다.

이후에 나온 <미각의 제국>과 <한국음식문화박물지>의 주요 내용도 그 생각의 연장에 비롯한 것이다. 한국인이 먹는 음식이 얼마나 형편없으며 한국 음식 문화 역시 얼마나 헛된 것인지 '고발'하는 정신으로 그 책들을 썼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이렇게 쓰니, 사람들이 내 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때까지 음식을 두고 맛있다고 쓰는 사람들은 많았는데, 대놓고 맛없다고 써대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것이다. 하여간, 그렇게 하여 나는 글을 쓰는 지면도 늘고 강연 자리도 많이 생겨 맛칼럼니스트가 된 이후 가장 바쁘다.
[맛콘연재2]당신의 미각을 믿지 말아야 하는 이유(글. 맛칼럼리스트 황교익)@
장황하게 자료를 가져다 붙였는데, 결론은 제 주장에 동의할 뿐이네요. 위 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맥적은 적족의 음식이고, 적족은 중국 북쪽의 소수 민족이다." 그 적족이 한민족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그도 하지 않았네요. 제 주장을 확장해서 반복하며 제 주장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글은 사람들이 속기가 쉽지요. 여러 자료를 붙이고 장황하게 쓰면 뭔가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잘 쓴 글은 짧고 단순하지요. 주제에 집중할 수 있는 자료만 남기고 함축적으로 글을 써야 하지요. 글쓰기를 더 배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글을 쓰는 버릇도 고쳐야 합니다. 자신의 무덤을 팔 뿐입니다.
"불고기라는 이름은 야끼니꾸에서 왔다"는 말을 하면 친일인가의 댓글 中, 2018.11.10. 11:33 황교익@[2]캡쳐본

황교익의 주장이나 글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서 논점이 전혀 없는 듯이 장황하게 자료와 썰만 일방적으로 풀거나, 앞에서 말한 내용이 뒤에서 말하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거나 어긋나는 등 문제가 많아, 글의 전개가 이상하고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다. 따라서 황교익이 작성한 '어떤 의도도 없이 다만 한국인들이 먹는 음식이 얼마나 형편없고, 한국문화 역시 얼마나 헛된지 고발하는 정신으로 작성한 수많은 글'들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래서 황교익의 평론은 글에 구체적인 의도가 없고, 다만 공허한 의식뿐이므로 '해석 없이 흘려보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황교익이 전문가를 자처하고 동시에 기울어진 음식 문화를 바로잡을 음식정치를 꿈꾸며 사단법인 끼니를 세우는 등 권력보다 영향력이나 헤게모니(주도권)을 지향한다고 한 바[3] 있으니 #, 그 시점에서 황교익의 글은 이미 의도와 초점이 존재하나 의도와 초점이 존재하지 않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다. 이런 양자중첩적인(이하 교익적인) 글들은 읽는 사람이 알아서 이해해야하기 때문에 교익적인 글을 써내는 황교익의 평론관리버스 엔지니어링하고 암호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끊임없이 나오는 의도 없는 글들을 빈도분석하고, 용어의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맥락 짚어보는 등의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통계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나 개념, 그리고 주장, 논지, 전제 등을 논점을 재정의하고 정리해두는 것은 교익적인 글을 해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치고는 영양가 없는 글이라는 것이 다소 안타까운 점이다.

물론 황교익의 글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아래의 용어나 개념 등은 황교익의 글을 쉽게 해석하기 위한 도구일 뿐임을 명심해야한다. 황교익의 글은 의도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기 때문에, 글을 읽을 때도 황교익의 의도를 읽어내면서도 동시에 못 읽어낸 상태로 그 글이 교익적으로 옳다고 훌륭한 글이라며 칭찬해줘야 맞다. 따라서 보통 사람은 이해하지 못해야 정상이다.

2. 사용하는 용어와 개념

2.1. 미각과 맛

무지개에는 세상의 모든 색이 다 있다.
인간의 시각으로 구분 가능한 색이 1,000가지는 되므로 그 무지개의 색을 1,000가지로 구획하여 이름을 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지개를 일곱 가지의 색으로 나눌 뿐이다.
자연에서 인간의 세계로 끌어넣을 수 있는 '문화적 시각'의 한계가 거기까지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지개를 단 세 가지 색으로 나누는 아프리카 민족도 있다.

맛을 흔히 오미 또는 육미로 구분한다.
이는 혀에 대한 생리화학적 연구 결과일 뿐이다.
오미 또는 육미 각각의 맛을 무지개처럼 띠를 만들어 겹치게 펼쳐놓고 그 중간의 변주를 일일이 구획하자면 색처럼 1,000가지의 맛이 족히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수만의 냄새까지 겹치게 하면 이 세상의 맛은 우주적 숫자의 조합 안에서 요동치게 된다.

맛을 오미 또는 육미의 구획 안에서만 느끼려는 것은 '생리화학적 미각'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과 같다.
자연을 향해 미각을 활짝 열어야 진정한 맛의 세계가 펼쳐진다.
맛, 미각의 제국
맛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신체기관이라고 믿을 것이 못된다. 혓바닥 돌기 아래 무수한 미뢰가 맛을 감지한다는 과학적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음식을 먹을 때 혀에서 느끼는 맛이란 입 안에서 수용성 물질이 되어 미뢰에 도달하는 일부분의 음식 구성물에 의한 것일 뿐이다. 음식 맛의 대부분은 향으로 느껴지는데 이를 담당하는 신체 부위는 코이다. 코를 막고 음식을 먹으면 맛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실험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것으로 안다. 어떻게 보면, 혀의 역할 중 상당 부분은 오히려 음식을 잘 씹을 수 있게 입 안의 음식물을 혼합 또는 분산시키거나 식도로 넘기는 데 있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해서 혀가 단맛, 쓴맛, 신맛, 떫은맛, 쓴맛, 구수한맛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혀에서 느끼는 그 맛이 음식물의 맛 전체 중에 극히 일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음식 맛은 오롯이 혀로 느끼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과학적 진실과는 관계 없이 우리 편한 대로 ‘의도적 왜곡’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의도적 왜곡의 이유는 단순하다. 입으로 음식을 넘기면서 음식 맛은 코로 느낀다고 설명하기는 부적절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코로 음식을 쑤셔 넣지 않으니까 생기는 의도적 왜곡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미각이 변함 없이 표준적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음식을 먹어왔어 어떤 음식을 두고 맛있다고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자신이 절대미각의 소유자인 듯이 나서는 이들도 있다.

인간의 감각은 외부의 환경에 의해 수시로 변한다.
듣기 좋은 음악도 어느 곳에서는 소음이 되기도 하고 훌륭한 미술품도 잘못 놓이면 이발소 그림이 된다.
이는 감각의 대상은 그대로인데 단지 감각 수용체인 인간이 환경에 의해 조정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미각은 시각이나 청각보다 더 심하게 주변의 조건에 의해 통제당한다
식당에서는 정상적인 미각 활동이 불가능한 이유
음식은 오감을 통해 내 몸에 들어온다.

가령, 밥이 맛있게 느껴진다는 것은..
솥을 열었을 때 솥바닥에서 자르르르 하고 밥알이 물기 날리는 소리가 들리고(청각),
하얀 쌀알이 기름기 자르르 흐르고 촉촉한 물기가 배어 있으며(시각),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 나고(후각),
입안에 넣었을 때 밥알이 낱낱이 살아 있음이 느껴지며(촉각),
혀로 밥알을 감았을 때 침이 고이면서 단맛이 더해지고(미각),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게 이빨 사이에서 기분 좋은 마찰을 일으키는(촉각)
밥이 맛있는 밥이라 할 수 있다.

컴퓨터 화면에서의 음식은 시각만 있을 뿐이다.
이도 예쁘게 찍은, 그래서 왜곡된 시각만 있을 뿐이다.
하나의 감각만 표현된 음식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내 글을 읽는 데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글만 있어 한편으로는 답답해 보이기는 한다.
그래도 한번 시도해볼만 한 일이지 않을까 싶어 이런다.
블로그에 사진이 없는 이유

우선 황교익은 평론에서 절대적인 미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미각은 신뢰할 것이 못되므로 맛을 보는 행위로 음식의 맛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맛을 보는 행위에서 자신의 미각이 표준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한다. 이러한 주장은 블로그 게시물 '요리사의 혀'에서 되풀이되고, 자기 글에 반박한 사람들에게 훈계하고 지적하면서 재차 강조한다.#@

물론 절대적인 미각을 부정한다고 하여도 미각이 미뢰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사람이 오감으로 맛을 느낀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는 점은 안다. 단지 이 모든 것이 기타 다른 요인의 영향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평론에서 '맛있다'와 '맛없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맛에 대해 어떠한 기준점을 가지고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 보인다.

그렇다면, "황교익 본인 또한 스스로의 미각을 신뢰할 수 없어야 하는데 음식의 맛을 평가하고 이를 표현하는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이 나올 것이다. 이에 대해서 황교익의 다음과 같은 말을 참조할 수 있다.
다음. 슬로푸드를 먹자면 미각 교육을 받아야 한다?
입맛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러나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단순히 몇몇 가지 음식에만 맛있다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음식재료라고 주장하는 한 요리사의 음식을 지인들과 맛보러 간 적이 있다.
산과 들에 자라는 이름없는 풀들과 생소한 해초들이 요리 여기저기에 박혀 있었다.
평소 다양한 음식을 맛보아 미각이 발달한 이들은 그의 요리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는 놀라움의 표정이 역력했다.
좋은 음식을 통해 마음속 세상이 확장되는 것은 좋은 음악과 미술, 문학이 주는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몇몇은 음식을 입에 넣지조차 못했다.
평소에 먹어보지 못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문화적 미치(味痴)들인 것이다.

패스트푸드의 가장 큰 해악은 바로 민족, 지역, 문화 가릴 것 없이 획일화된 맛을 강요하며 그 맛에 익숙해지게 해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없는 문화적 미치를 만든다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미각 교육이 필요한 것은 단지 맛있는 음식을 먹자는 것이 아니라 내적 세계의 확장을 통해 보다 풍요로운 삶을 꾸리기 위한 것이다.

미각 교육은 음식을 예술로 여기는 유럽, 특히 프랑스의 풍토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으나 자칫 그들의 음식만 예술인 듯이 여겨서는 곤란할 것이다.
슬로푸드와 한국음식@
오늘 식당에서 잠시 텔레비전을 보는데 요리사가 나와 "혀를 잘 간수하는 것이 요리사의 생명"이라면서 "그래서 자신은 담배를 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의 투철한 직업 정신에는 박수를 보낼 만하다.
그러나 그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찬성을 할 수가 없다.
내가 가장 존경하며 최고의 요리사로 꼽는 분은 담배를 핀다.
대화를 나눌 때면 줄창 필 때도 있다.
그러나 주방에서까지 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요리를 할 때 그 담배 냄새 나는 손을 씻고 몸을 털어 냄새를 날릴 것이다.
텔레비전의 그 요리사의 말대로라면 이 요리사는 혀가 망가졌을 것이니 음식을 잘못하지 않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이 요리한 음식은 아예 먹지를 않는다.
손님을 위한 것인데 제 입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면, 간도 안 본다.

내 경험으로는 훌륭한 요리사는 제 입을 믿는 게 아니라 제 머리를 믿는다.
혀는 신체기관 중 가장 믿을 수 없는 감각을 지녔다.
아침에는 달게 느껴지던 우유가 저녁에는 쓰게 느껴지기도 한다.
똑같은 된장찌개를 끓였는데도 어제 맛이 다르고 오늘 맛이 다르다.
이런 변화는 음식이 달라져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의 몸은 수시로 변하는데 그 몸의 상태에 따라 미각도 변화무쌍하니 그런 것이다.
이런 몸의 변화를 읽지 못하면 음식 탓만 하게 된다.
그러면, 믿어야 할 것은 머리이다.

수많은 식재료들의 맛을 머릿속에 데이터로 내장하고 있어야 하며 조리 과정에 따라 맛이 어떻게 변하고 어떤 배합일 때 어떤 맛으로 충돌하고 비껴가는지 머리로 그릴 줄 알아야 훌륭한 요리사이다.

음식 맛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굳이 입에 음식을 넣지 않아도 요리하는 과정이나 내놓은 음식의 겉모습만 보고도 그 음식의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 음식이 맛없게 느껴질 수 있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상정하고 음식을 대하여야 한다.

음식의 맛을 느끼는 곳이 꼭 혀에만 있는 듯이 말하면 음식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다.
음식은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미감이다.
그 미감이 깊고 넓을수록 좋은 음식을 요리할 수 있으며 음식의 맛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요리사의 혀@[4]
대체로 맛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경지는 교육에 의해 이루어진다. 음식을 먹으면서 그 음식에는 어떤 맛이 난다 하고 누군가로부터 듣는 것이 가장 좋은 미각교육이다. 미식가는 대물림이 된다는 것도 이 교육 덕분이다. 밥상머리 교육이다. 부모는 같이 밥을 먹으며 알게 모르게 그 자식들에게 맛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주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요즘은 부모도 자식도 바빠 이 가정 내 미각교육은 사라졌다. 2010년 대한민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미각교육을 하고 있는 것은 대기업의 식품 광고와 텔레비전 음식 프로그램, 외식업체 전단지 등이라고 봐야 한다. 이들 대중매체의 미각교육이란 대부분 상업적 자본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작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자극적인 맛을 앞세워 그게 진정한 맛인 양 호도하여 우리를 그 맛에 중독시킨다. 화학조미료를 두고 '고향의 맛' '어머니의 손맛'이라고 주입하고 있는 실정이니!
맛을 안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우리는 매일 세 끼의 식사를 하고 그 중간중간에 참 많은 음식을 먹는다. 그 음식을 먹을 때 입안에 느껴지는 감각에 조금씩만 집중하면 그 맛의 바탕을 깨달을 수 있다. 그 깨달음의 힌트를 오미를 기준으로 하여 정리해봤다.
맛이란 무엇인가@

황교익은 맛이나 미각이 훈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혀에 느껴지는 맛과 음식의 식감, 향, 모양새 등 정보를 정확하게 기억하여 이것을 머리 속에 미감으로 그려서 음식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각교육이 중요하고, 상업적 자본이 맛을 두고 세뇌하고 주입하는 내용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사람이 맛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이유이자 사람이 맛을 보기 위해 교육을 받고 깨어나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미감이란 깨달음에 나아가는 방법은 음식을 먹을 때 입안에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즉, 황교익 입장에서 말하는 맛을 본다는 행위는 신뢰할 수 없는 감각 때문에 절대적으로 이 맛이 어떠한지 알 수는 없지만, 신뢰할 수 없는 감각에 집중하는 훈련을 통해 자신의 머릿속에 감각을 추상시킨 어떠한 것(미감)을 절대적인 기준점으로 삼아 비교하는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개인마다 다르고 신뢰할 수 없는 감각을 기반으로하며 확실하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추론을 교육을 통해서 가르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황교익이 말하는 음식의 맛의 의미는 신뢰할 수 없는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느끼는 맛이 아니라 추상적이면서도 객관적이고 오감의 한계에 갇혀 있지 않은 상상의 맛을 의미하며, 이 틀 안에서 '맛있다'와 '맛없다'를 판별하는 유의미한 기준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은 취사선택의 연속이다.

쉽게 말하자면 황교익은 미각을 통해 느껴지는 음식의 맛이 자신의 상상이나 추억에 얼마나 유사한가로 맛있다고 평가하거나 맛없다고 평가하는 것이며, 자신의 상상과 벗어나는 맛에 대해선 세뇌나 최면이라고 하며 저항하는 것이다. 여기에 측정 가능한 정보, 혹은 황교익과 다른 의견은 단지 부수적인 정보일 뿐이다. 이것이 황교익의 평론관을 거대한 딜레마로 만든다. 감각 기관을 부정한다면, 맛있음과 맛없음을 나누는 가장 명확한 기준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맛의 상대주의로 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황교익은 맛의 상대주의를 결단코 인정하지 않는다. 황교익은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을 매우 단정적으로 가르며, 맛없는 음식에 대해서는 비난에 가까운 냉소와 공격으로 일관한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틀렸고 나는 옳아'하고 말할 수 있는 판단 준거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그마저도 황교익에게는 없다. 영양학적 정보, 사람들의 선호도 등을 대안으로 고려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황교익에게 중요한 원칙이라기보다는 언제든 필요에 따라 쓰고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비겁의 도구이다. 말하자면 부차적인 요소이다. 결국 황교익이 말하는 '추상적이면서도 객관적이고 오감의 한계에 갇혀 있지 않은 상상의 맛'이란, 증명할 수도 없고 보편적인 준거도 될 수 없는, 단지 황교익이 공감할 수 있는 추억에 매몰되어 있는 맛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주관은 '세뇌' 등을 명목으로 해 무시하기 일쑤에 소통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즉 황교익의 평론관에서 긍정되는 맛은 오로지 황교익 자기 자신의 맛뿐이며 이는 매우 편협하고 유치한 시각이다. 남들의 관점을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서 남들은 무조건 자기를 이해해야 한다는, 전문 비평가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질이 낮은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견을 독자들이 따라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생떼를 부리는 사기꾼의 말을 전면적으로 믿고 따를 이유가 없듯이 말이다.

2.2. 분별없음과 미개함, 정치와 평론의 결부

나는 한국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이 '분별없음'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민주공화정의 대통령과 왕국의 임금님을 분별할 줄 모르고, 자신이 노동자이면서 노동자 편을 드는 정당과 자본 편을 드는 정당을 분별할 줄 모르며, 전라도 경상도 나누는 지역감정이 이를 이용해먹는 정치인에게 이득이 있지 자신의 실제 생활에는 아무 영향이 없음을 분별할 줄 모르고, 농작물을 키운다는 행위가 자연인지 문영인지 분별할 줄 모르며, 우리의 밥상이 언제부터 이 구성이었으며 또 현재에도 이래야 하는지 분별할 줄 모르고, 우리보다 앞섰던 여러 산업사회의 식탁이 예전 농업사회의 식탁과 다르다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러니 현재의 우리 식탁에 고집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별할 줄 모르며, 내가 먹는 음식의 질과 양이 그 음식의 가격보다는 그 음식을 사먹을 수 있도록 하는 돈의 여유로 결정되는 것이며 그러니 더 좋은 음식 더 많은 음식을 먹자면 집값 사교육비 의료비 등등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분별력 있게 사고하지 못하고, 내 입안에 들어오는 음식이 그냥 먹을만하게 양념되어 있는 것인지 그 재료의 맛을 최대한 끌어내는 조리법을 실현한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며, 오락 방송이면 공공성은 아예 버려도 괜찮은지 어떤지 분별하지 못하고, 조선을 지탱시킨 경제 주체는 농민이며 대한민국은 그 농민의 자손들로 구성된 국가임에도 조선의 농민 중 그 누구도 먹었을 리 없는 조선 임금의 밥상을 두고 민주공화정 대한민국의 전통이라며 국가지정문화재로 삼고 있는 이 국가의 반근대적 문화행정을 분별하지 못하며, 지금의 이 '헬조선'이 누구에 의해 주어진 것인지 스스로 만든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며, 내가 분별없는 이유가 원래 분별없이 태어났기 때문인지 분별의 사고를 배우고 훈련받지 못한 탓인지 분별하지 못하며..

"똥오줌을 가리지 못한다."
분별이 없으면 미개한 것임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분별없음을 지적하며 미개하다 하면 이를 거북해하며 그 지적에 저항하는 이들이 생긴다.
특히 이전의 사실 인지가 신념의 단계에 있으면 이런 심리적 반응은 당연한 일이다.
이 일은, 인지부조화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내가 이미 인지하고 있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대되는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되면 '심리적 불편'이 발생하고, 이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회피, 재확신, 자기정당화 등의 심리적 기제가 발동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간략히 들여다보면, 이렇다.

인지부조화이론 - 네이버 지식백과, 심리학용어사전

신념이 깊을수록 인지부조화로 인한 저항은 강력하다.
내 생애를 걸고 온통 믿어왔던 사실이 새로운 사실로 인해 수정을 하여야 한다면 당연히 큰 혼란이 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5]
"분별이 없으면 미개한 것이다."
이 문장 안에는 "우리는 미개하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냥 "우리는 분별이 없어요" 정도의 말로 유연하게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여서는 현재의 분별없음을 해소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아예 인지부조화를 강력하게 유발하여 분별없음을 각성하도록 하는 게 나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이른바, 위선 유도 전략이다.

황교익 “분별없는 음식은 미개하다” - 시사인@

"미개하다고 쓰세요."
한국음식문화와 관련한 인터뷰를 할 때에 기자들에게 대놓고 이렇게 말한다.
기자들은 대부분 이 말을 숨긴다.
인지부조화의 독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잘 알기 때문이다.
인신공격의 악플까지 감수하여야 하는 일이다.
시사인 기자는 역시 용감하다.
아예 제목으로 "분별없는 음식은 미개하다"고 달았다.
나는 이런 용감한 사람들이 참 좋다.
출처 : 분별이 없으면 미개한 것이다@
문화를 굳이 선진과 미개로 나눈다면, 그 기준은 '섬세'에 있다.
인간의 감각이 얼마나 섬세하게 훈련되어 있는가에 따라 그 문화의 결이 확인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감각은 인간 본연의 것으로 모든 인간에게 똑같을 것이라 여기면 안 된다.
타고난 감각 능력은 같아도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에 따라 그 섬세의 정도는 다르다.
음악, 미술, 문학 등등의 공부가 결국은 감각 훈련이고, 그것에 얼마나 열중하였는가에 따라 인간은 감성 등의 격이 달라진다.

음식문화도, 선진과 미개의 차이는 섬세에 있다.
음식재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 재료의 장단점에 맞춘 조리법이 얼마나 섬세한가에 따라 음식문화의 선진과 미개를 구별할 수 있다.

감자로 예를 들어보겠다.
어떤 감자는 분이 나고 푸석하며(분질 감자), 어떤 감자는 찐득하고 단단하다(점질 감자).
이는 품종의 차이이다.
시장에 가면 감자를 품종 구별 없이 판다.
요리를 해봐야 그 감자의 성질을 알 수 있다.
메쉬드 포테이토는 분질 감자가 적절하고 감자조림에 점질 감자가 적절하다.
이의 분별이 없으니, 찐득하고 알갱이가 진 메쉬드 포테이토를 먹으며 이 음식의 본디 맛이 그러려니 하고, 조림을 하며 깨어져나가는 감자를 보며 내가 요리 솜씨가 없나 보다 한다.

감각이 섬세해지려면 먼저 입에 들어오는 음식 그 낱낱에 대해 왜 이 맛이 나는지 따져물어야 한다.
구별하고 구획 짓는 일을 하는 것인데, 그 구획의 범위가 좁고 자잘할수록 섬세하다 할 수 있다.

설탕은 그 모든 음식을 동일하게 맛있게 한다.
설탕의 단맛이 입안에 들면 뇌가 즉각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이때에 단맛에 가려진 여러 맛은 그게 어떤 것인지 인간의 뇌는 분별하기를 포기한다.
단맛으로 맛있다 뇌가 인식하였으니 뇌는 그 다음의 미션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설탕을 빼면 미각은 음식의 여러 맛에 대해 이런저런 분류의 작업을 하게 되어 있다.
이 감자는 품종이 이래서 이런 조리로 하였으니 이런 맛이 날 것이고..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하려면, 섬세하게 구별하고 구획 짓는 작업을 위해 뇌가 부지런하여야 한다.
번잡하고 귀찮은 일이다.
그러나, 섬세한 인간이 되려면 그 정도는 감수하여야 한다.
섬세 이후에 얻는 희열은 크며, 그래서 다들 그 어떤 '문화적 행위'에 열심히 매달리는 것이다.

"단순하면서 맛있다".. 단맛 조리법에 대한 평들은 똑같다.
인생 뭐 별것 있나.
그리 살아도 된다.
섬세@
부산에 팥빙수 가게들이 참 많다.
과일에 아이스크림, 견과류, 미숫가루, 떡, 연유 등등으로 치장을 잔뜩 한 팥빙수가 아니다.
빙설 위에 팥 하나 달랑 올라 있는, 전통적인 팥빙수이다.
팥빙수는 원래 이러하였고, 또 이래야 한다.
'뒤죽박죽의 팥빙수'는 1970년대 제과점에서 만든 것인데, 비싸게 팔기 위한 전략의 상품일 뿐이다.
팥만 달랑 올린 부산의 팥빙수 가격은 거개가 2,500원이다.
1인분의 작은 그릇에 담겨 나온다.
이게 정상이다.
커다란 볼에 잔뜩 쌓아올린 과일이며 아이스크림, 견과류, 미숫가루, 떡, 연유 등등을 비벼서는 다 함께 떠먹게 만드는 팥빙수는 조화롭지 못한 맛뿐만 아니라 서로 침을 나눌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미개하기 이를 데가 없다.
정상의 팥빙수가 건재한 부산의 시민들은 복되다!

(후략)
생활의 달인에 나온 팥빙수@
(전략)

한국음식은, 무엇이든지 싼다.
쇠고기도 싸고, 돼지고기도 싸고, 오리고기도 싸고, 생선회도 싸고, 보리밥도 싸고, 닭발도 싸고, 젓갈도 싸고, 구절판도 싸고.. 국물 없는 것이면 무엇이든 싼다.
쌈을 두고 한국음식의 한 특징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나, 그 쌈들은 주요 재료가 무엇이든 짜고 달고 매운 양념의 맛으로 얼버무려진 것이라 재료의 개성을 살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미개하다.
식당에서 쌈을 선호하는 이유는 주요 재료의 품질을 감출 수 있다는 점도 한몫할 것이다.

막회라고 하여 반드시 싸서 먹을 것은 아니다.
잘게 썬 생선을 그 종류에 따라 된장, 초고추장, 간장, 액젓 등등에 찍어 먹게 하면 훨씬 더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흰살의 생선은 대체로 간장이 어울리고, 붉은살의 생선은 된장과 초고추장이 어울린다.
붉은살의 생선 중에 기름맛이 특히 강한 삼치나 고등어 같은 것은 액젓에도 버틴다.
해산물을 제법 잘 다룬다고 이름나 있는 식당임에도 이러고 있어 잔소리를 해둔다.
막회는 회쌈이 아니다@
(전략)

타다닥거리며 활활 타오르는 혼불에 넋을 놓고, 소주도 마시고, 떡도 먹고 하다가 아이들끼리 노는 자리 근처에 놓인 작은 탁자를 발견하였다.
아이들 먹으라고 과자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이 탁자 근처를 왔다갔다 하면서 놀았는데, 그들이 과자를 가져가는 방식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자기 입에 넣을 딱 하나의 과자만 집어들고는 친구들 틈으로 돌아갔다.
몇몇만 그러나 하고 시간을 두고 관찰을 하였는데, 다들 그러고 있었다.
당장에 자기가 먹을 딱 하나의 과자만 들고 말 뿐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다 같다.
단지 그 욕망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가에 따라 문명과 미개가 나뉜다.

......
우울하였다.
가고시마에서 보고 먹다 -4- 아이들의 과자@
인간에게 이성이 있고 그에 따라 합리적 행동을 할 수 있게 된 시기를 근대라 한다.
자신에게 이성이 있고 그에 따라 스스로 합리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행동하는 주체적 인식을 가진 존재를 근대적 자아라 한다.
이 근대적 자아의 개념은 서구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중세시대의 종교적 미몽에서 깨어나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구축할 수 있는 근간이 된 것이 이 근대적 자아이다.

이 대한민국에 근대적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봉건사회를 스스로 이겨낸 역사적 경험이 없다는 것이 근대적 자아 부재의 첫째 원인이다.
4.19와 광주항쟁, 6월혁명 등 근대적 자아를 세울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으나 이 사건들은 한국인에게 시대적 각성까지는 이끌지 못하였다.
조금씩 나아지는 민주주의.. 이 정도의 일을 만들었을 뿐이다.
노무현이 권력의 정점에 이르고도 나중에는 "깨어 있는 시민"(근대적 자아의 다른 말일 것이다)이 더 중요하다 한 것도 이 까닭이다.
유시민이 "한국은 빚을 진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아직 근대적 자아를 만들지 못하고 정치구조로 서구 민주주의의 형식만 가지고 있어 하는 말이다.

음식의 맛을 안다는 것도 이 근대적 자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음식을 선택하고 맛을 본다는 것은 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개개인들의 각성된 미각 경험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 개개인의 미각적 각성이 없으면 그 사회는 미개한 음식문화를 가질 수밖에 없다, 지금의 한국처럼.

근대적 자아는 스스로 선택과 행동을 하므로 책임까지 자신의 몫이 되는 사회를 꾸리게 된다.
음식을 선택하고 맛보는 일에 대한 책임도 고스란히 각 개개인에게 있다는 말이다.
영화 트루맛쇼에서 내가 그 엉터리 맛집이 횡행하는 이유를 소비자의 수준 탓이다 한 것은 이 까닭이다.
졸저 [미각의 제국]에서 "이 책은 내가 세운 미각의 제국이고 각자의 미각의 제국을 세우라" 한 것도 그 생각의 연장에 있는 것이다.

(후략)
트루맛쇼에 대한 엉뚱한 소리들@
(전략)

이 민속음식의 집에서 내게 제일 거슬린 것은 수저였다.
놋그릇에 밥을 비벼 먹는데 수저는 '스탱'이다.
한복 입혀놓고 힙합하라는 꼴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언발란스는, 어처구니없게도 소비자들이 만든 것이다.
놋그릇은 무형문화재의 것인데 놋수저를 손님들이 마구 가져가 할 수 없이 '스탱'을 쓰고 있다.

우리의 '미개한' 음식문화는 식당 주인과 손님들의 합작품인 것이다.
안동 헛제삿밥의 '티'@

내용과 주제의 문제 이전에 대체 뭔 말을 하고 싶은지도 이해하기 힘들다. 황교익이 고수하는 자신이 옳다는 태도, 그리고 불편한 진실이라는 말로 상대를 자극하는 것엔 상대가 미개하고 분별이 없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하려면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은 상대방의 인지부조화를 유발해 상대방의 태도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다는 확증편향에 의한 확고하고 독선적인 믿음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미개함과 분별력 없음은 무엇인가?

황교익은 무언가를 크게 비난할 때나 특히 상대방의 인지부조화를 자극하여 사람들을 계도해야 한다고 느낄 때 미개함이나 분별없다는 단어를 꺼낸다. 이를 위해선 황교익이 말하는 미개함의 반대인 선진의 정의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가 말하는 선진이란 다음과 같다.
  • 식재료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
  • 감각을 섬세하게 단련하는 것
  • 맛을 보는 것을 포기하게 하는 단맛을 경계하는 것
  • 분별력을 저해하는 조화롭지 못한 음식을 배제하는 것
  • 욕망을 통제하는 것
  • 각성된 미각 경험으로 근대적 자아를 각성하는 것
  • 미개한 식문화를 개선하는 것

그가 미개함을 말할 때 따라 붙는 분별력 없음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선진으로 나아가는 길은 곧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음식에 대한 인간의 분별력을 키워주는 행위는 단순히 이것이 맛있다, 저것이 맛있다 수준의 일이 아니라 상대방의 근대적 자아를 각성시켜 깨어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김치를 MSG와 사카린 맛으로 먹는다고 비판하는 것#도, 빙수국수가 미각을 마비시키는 것에서 유신정권을 연상하며 비난 하는 것#도, 공장제 춘장으로 만들어진 한국의 자장면이 평가 받을 자격이 없다고 단언하는 것#도 이러한 음식들이 분별력을 저해하고, 나아가 사람을 미개하게 만들며 근대적 자아의 각성을 방해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만 황교익이 정의하는 근대적 자아가 무엇인지 의문이다. 글만 보면 황교익은 근대적 자아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황교익은 나 이외의 다른 한국인은 모두 근대적 자아가 아니며, 근대적 자아를 인정하는 주체는 자신인데, 그 근대적 자아를 판명하는 기준은 음식과 맛에 대한 분별...이라는건데....무슨 말인지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한마디로 대책없는 나르시시즘이다.

황교익에게 근대적 자아라는 개념은 매우 심하게 뭉개져 있어서, 언어상으로는 근대적 자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학술 연구나 통찰력을 통해 획득하고 다른 사람들과 합의할 수 있는 근대적 자아 개념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아, 특히 근대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학, 철학, 사회학 등의 분야에서 '근대'를 보고 설명하는 관점이 매우 다양하고 치밀하기에 그만큼 전문가들은 근대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정의하는 데 비하여, 비전문가인 황교익은 마치 전시장의 관광객을 꾀듯이 '이것이 근대다!' 하고 자랑스럽게 외친다. 그러나 황교익이 말하는 근대가 과연 진짜 근대이고, 근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개념이냐면 그렇지 않고, 오히려 정의하기 어려운 것을 무턱대고 맞다고 외치면서 어떤 성찰도 하지 않고 내뱉기만 한 말이기 때문에 근대를 이해하는 데에 큰 방해가 된다. 결과적으로 위의 진술들을 종합하면, 결국 황교익은 우월한 근대적 자아(라지만 실제로는 알맹이가 없는 가짜 언어에 의탁해 가면서)인 자신이 특별한 역할을 맡게 되어 정치의 영역에 개입해야 하는 역을 맡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 더 잘 드러난다.
돼지는 먹이를 줄 때에나 사람 곁으로 온다.
먹이 주지 않는 사람은 경계의 대상일 뿐이다.

정치인은 먹이를 줄 수 있다고 주장하여야 국민이 곁으로 온다.
먹이와 다른 어떤 가치를 말하면 경계의 대상이 될 뿐이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하였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국가정보기관이 국가의 권력구조를 왜곡하는 미개국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일에 국민이 분노하여 미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어떻든 먹이만 주면 되는 것 아니냐는 국민들이 늘 다수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
미각스캔들, 엑스파일 때문에 여타 매체에서도 외식업체 음식에 대해 관심이 높은 모양이다.
내게 던지는 매체의 질문들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우리가 정직한 음식을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내 답은 한결같다.
"바른 정치"이다.
지금과 같이 오직 자본만이 독식하는 체제로는 정직한 음식을 기대할 수 없다.
식당 운영해봤자 건물주만 돈 버는 이 요상한 나라에서 정직한 음식을 바란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강도현도 내가 본 것을 보았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983
용산참사며 폭탄 돌리기.. 요즘 내가 늘 이야기하는 것을 그도 말하고 있다.

그러니, 정치에 관심없다는 말은 아무것이나 먹겠다는 뜻이다.
정직한 음식 먹자면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당신의 정직한 밥상을 위한 투쟁은 정치판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른 정치가 먹을거리를 바꾼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음식과 정치는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관계이다. 그래서 황교익은 음식이라는 작품을 해석하는데 맛이란 시점으로 접근하지만 가장 유용한 도구인 감각에 크게 공을 들이지 않는다. 그는 맛의 분별력을 키우고, 식재료의 성질을 일깨우고, 감각을 섬세하게 가다듬으라고 하지만, 실제로 음식을 맛보고 자신의 감각으로 어떤 게 중요한지 짚어주는 행위에 크게 관심이 없다. 그는 정작 인간의 감각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2(@)). 대신에 그는 자신의 분별력을 저해하고 욕망을 통제할 수 없게 만드는 것과 자신의 정치관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세뇌', '선동', '미개', '분별없음', '자극적', '고정관념'이란 단어를 꺼낸다. 감각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신뢰할 수 있는 자신의 정치관을 통해 역으로 사람들의 근대적 자아를 각성시키고, 나아가 미각을 각성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미각을 각성시켜 근대적 자아를 각성하는 것과 정치 수준을 끌어올려 미각을 각성시키고 근대적 자아를 배양하는 것은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이런 게 가능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만큼 깨어있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음식을 논한다. 평론가라기 보다는 차라리 정치인에 가깝다. 그러면서 얻는 지식인이란 타이틀과 함께 그가 가장 원하는 특정 집단 내 자신의 영향력을 얻을 수 있으니 황교익의 평론관에는 정치가 빠질 수가 없다.

그리고 그는 한국 식문화와 그 외 모든 문제들의 책임이 소비자의 수준 탓. 즉 깨어있지 못한 미개하고 분별성 없는 국민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상태를 넘어선 깨달음을 가지고 있기에 기준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어떠한 관념의 기준점은 기울어지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기준점의 입장에선 세계가 삐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은 인지부조화를 겪은 뒤 자기의 오류를 수정하지 않는 확증편향에 빠진 상태이며, 반대로 자신에게 칭찬과 격려와 응원을 해주는 사람은 자신의 분별없는 태도가 교정된 깨어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유저를 차단하고 중졸이나 초딩이라고 비하하며, 자신이 원하는 내용의 기사를 칭찬하며, 자신이 원하지 않는 내용의 기사를 자기 의도와 다르다고 비난하며 확고부동하게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황교익은 일반인이 이해하기엔 논점도 맥락도 잡기 어려운데(친절하지 않고) 지식도 높지 않으면서도 나르시시즘에 빠져 나 말곤 다 아랫것이란 선민사상이 포함되어 있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글을 평론이란 이름으로 내보내는 좆문가지만 그 글에 포함된 정치적 입장 때문에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셀럽들에 의해 지식인으로 띄워지고, 본인도 그에 편승하여 자신의 약점인 친일,낮은 지식을 정치로 보완하려 하는[6] 정치병과 결합된 좆문가이다.

3. 평론의 주된 논지

3.1. 식재료 비판과 사회 문제

치킨 중에서도 한국의 치킨이 가장 맛없다.
세계의 치킨용 닭들은 그 종이 유사하다.
그런데 한국은 이 닭들을 30일도 안 되었을 때에 잡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45일은 키운다.
닭 한 마리 크기가 다른 나라는 2.7킬로인데 한국은 1.5킬로.
이건 '영계'가 아니라 병아리이다.
닭이든, 어떤 짐승이든 그 몸이 성체에는 이르러야 맛이 난다.
한국의 닭은 맛이 들지 않은 상태에서 잡는다.
닭고기가 맛이 없으니 수십 가지 첨가물의 튀김옷을 입히고 이를 튀겨서는 또 양념으로 범벅을 한다.
한국의 치킨은 닭고기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튀김옷 맛, 기름 맛, 양념 맛으로 먹는다.
한국의 닭이 1.5킬로에서 도축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치킨을 마리로 파는 상술 때문이다.
2.7킬로든 1.5킬로든 한 마리는 한 마리이다.
굳이 사료 더 먹여 키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더럽게 맛없는 치킨을 그나마 먹을 만하게 만들려 한다면 부분육으로 무게당 판매하게끔 하여야 한다.
돼지고기, 쇠고기 음식은 무게 적시하고 파는데 왜 치킨은 그러지 않는가!
치킨밖에 못 먹는 세상이라 하여도 적어도 세계인이 먹는 치킨 수준 정도는 주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치킨은 보수이다에서 본문에 덧붙여진 말
송아지 고기, 어린 돼지 고기.. 특별난 기호이지 맛있는 고기인지는 의문입니다.
육향이 약하고 고기로서의 조직감이 부족합니다.
심지어 비리기까지 합니다.
특별나니 비싸게 받고 그러니 맛있다는 말이 번진 정도로 여깁니다.

소를 키우는 분들은 이런 말을 하지요.
"소도 익어. 개월수가 차야 맛이 나지." ㅎㅎ
치킨은 보수이다의 댓글에 대한 답글

몇 가지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우선, 가축은 나이가 찰수록 육향이 증가하고 고기의 조직감이 단단해지지만, 그 말은 반대로 노린내가 나기 쉬워지고 고기가 단단해져 식감이 좋지 못해질 수 있다. 고기를 간하고 재우고 숙성하는 행위가 필요한 이유이다. 거세와 같은 방법을 통해 가축의 고기에서 노린내가 나는 것을 억제할 수 있지만 양고기처럼 완전히 잡기는 어려운 경우도 있고, 식감이 단단해져서 부드러운 식감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어필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육질, 육향, 사용부위에 따라서 선호되는 조리 방법이 달라지고, 반대로 요리에 따라 요구되는 재료의 질과 상태가 달라진다는 것도 간과되고 있다. 그렇기에 유럽 역시 송아지 요리가 있다. 프랑스 요리 중 소스의 토대가 되는 폰(고기나 뼈를 삶아서 낸 육수 베이스)은 송아지 뼈를 쓰는 경우도 있다.

또한 근래에 최대한 식재료의 맛을 살린 요리법이 유행하고, 식재료 본연의 맛을 극한까지 살린 음식을 맛있는 음식으로 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양념이 있는 음식의 가치가 퇴색한 것은 아니다.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조리법이 높게 평가받는 것은, 그것이 양념을 썼을 때보다 절대적으로 더 좋은 경험을 제공한다기보다는, 양념을 사용한 요리와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는 것과 건강상의 문제, 요리의 난이도 등에서 기인한 것이다. 양념을 사용한 음식과 양념 사용을 최소화한 음식 중 어느 한쪽이 더 우월한 맛을 갖고 있어서 생긴 풍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요리의 맛을 평가할 때 양념의 맛을 일부러 배제하고 평가하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치킨의 맛을 평가하면서 '양념이 더해져서 더 맛있지만 닭고기의 맛만으로 평가해야겠다'는 식으로 양념과 그 이외의 재료를 분리하는 관점은 부적합하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맛있다고 느낀다는 것은 요리에 들어간 모든 재료를 총체적으로 감미한 뒤에 맛있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양념이 들어간 음식이 맛있다면 그 이유를 굳이 '양념 이외의 재료가 좋고 양념을 제외한 요리법이 적절해서'로 축소하는 것은 음식의 특정 요소만을 가지고 음식 전체를 평가하려는 어처구니없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는 우리가 음식을 먹는 방법과 완전히 유리되어 있기에 식생활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 실용적이지도 않다. 또 양념을 사용하는 것을 가리켜 식재료의 원형을 살리지 못했다고 비난한다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식재료의 맛을 살리는 조리법'인지도 문제이다. 양념이 안 된다면 구이는 되는가? 찜이나 훈제는 되고 튀김은 안 되는가? 여기에 대해 황교익은 일관적이고 논리적인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설명을 제대로 하지도 않거니와, '그냥 그렇다', '자연스럽다'고 지나가듯이 말하는 것에도 아주 익숙하다. 시덥잖은 잔소리는 이것저것 많지만 하나하나 정당성이 없는 떼쓰기다. 절대적 미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음식의 상대성에 대해 옹호하려면 식재료와 조리법에 대한 편견도 거두어야 할텐데 자신의 평론관에 식재료와 조리법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모습이다.[7]

그리고 이런 편견은 황교익 평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정치와 자본 그리고 국민의 의식수준에 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국민이 자기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맛없는 것들을 먹기 때문에 정치와 자본이 사람들을 속이고 있으며, 사람들은 거기에 속을 만큼 멍청하고 우둔하고 깨어있지 못하거나 그러한 것을 타파하고 의심하지 못할 만큼 보수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생각은 황교익이 식재료를 통해 사회 문제를 짚어내고 고발하게 되는 당위성을 제공한다.

3.2. 식문화 비판과 사회 문제

3.3. 맛 비판과 사회 문제

"치킨 맛없어요."
"에이, 사람들이 다 맛있다 하잖아요."
"맛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맛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게 그거잖아요. 맛있다고 생각하면 맛있는 거지."
"맛없는데도 맛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는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맛있으니까 맛있다 생각하는 것이지."
"인간은 자신에게 많이 주어진 것을 맛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어. 그게 맛있든 맛없든."
"맛있으니까 많이 찾는 것이고.."
"그럼 쇠고기를 더 많이 찾아야 하고 치킨집처럼 쇠고기집이 프랜차이즈로 쫘악 번져야겠지."[8]

치킨이 맛있다고 말해달라는 목적으로 나를 섭외하는 방송작가들과의 대화는 대충 이렇게 전개된다.
방송에서 치킨을 다룰 것이면 치킨은 맛있다는 지고지순의 진리를 건들면 안 된다고 여긴다.
작가가 '치킨교'를 믿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시청자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시청자가 보고 듣기에 불편한 내용이면 채널은 돌아가게 되어 있고, 시청률 떨어지면.. 그런 것이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이 방송에 나와 "치킨은 맛없는 음식입니다"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한 음식을 맛있다 하고 판단하는 데까지 참 많은 요소들이 간섭을 한다.

치킨 그 자체의 맛 성분 같은 것도 일부 작용을 하나 한 집단 안에서 다수가 맛있다 하고 판단하는 데에는 그보다 더 복잡한 것들이 얽혀든다.
그 여럿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집단의 구성원에게 넉넉하게 주어질 수 있는 음식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많이 주어진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다.
이는 인간의 안정 욕구와 관련이 있다.(인간의 욕구 단계설 등을 참고하시길.)
많이 주어진 음식을 맛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신의 집단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령, 한국인의 다수가 "치킨은 맛없으니 맛있는 쇠고기를 넉넉하게 달라"고 요구한다면 한국 사회는 어떻게 될까.

1만~2만원이면 한 가족이 오붓하게 치킨이라는 고기를 뜯을 수 있다.
이는 값싼 수입 곡물과 공장식 대량 사육의 결과로 얻은 것이다.
돼지며 소의 사육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사료 투입량 대비 증체량에서 닭이 최고로 우등하고 그래서 닭이 제일 싸다.
그러니 돼지며 소의 고기를 닭고기 가격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앞에 놓인 치킨을 쇠고기로 바꾸려 하면 수입을 왕창 늘리거나 현재의 수입에서 음식 비용을 더 넉넉하게 빼내는 방법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이니 각 개인이 열심히 노력하면 치킨을 쇠고기로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봤자 내 앞의 치킨이 쇠고기로 바뀔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 이 사회의 구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다.
"왜 나는 치킨밖에 못 먹는거야" 하는 생각이 사회 변혁 의지를 가지게 할 수 있고 이는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는 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니 여기까지 생각이 전개되지 않도록 멈추어야 한다는 욕구가 작동하게 된다.
"치킨은 맛있는 음식이야. 한국인이면 당연히 맛있다고 생각해야 해. 외국인들도 한국 치킨 먹는대잖아. 대한민국 치킨을,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해."
치킨으로 만족하자.. 그러니, 치킨은 보수와 통한다.
치킨은 보수이다@
어제 방송에 나가 이런 말을 받고 주었다.
"한국인은 닭 요리를 많이 먹지요. 닭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가.."
"닭이 싸니까요."

이 말은 나의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많이 주어진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다."

인간이 문명을 만들고 좁은 지역에 모여 살면서 먹을거리는 단순해졌다.
인간집단마다 그 구성원들이 두루 먹을 수 있는 주요 먹을거리가 정해진 것이다.
그 주요 먹을거리는 그 집단이 거주하는 지역의 자연환경과 그 집단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먹을거리의 선택에서 효율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개인이나 집단이나 똑같다.
민족이나 국가마다 주요 먹을거리들이 달리 나타나는 것은 그 민족이나 국민의 기호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이나 국민이 처한 자연환경와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한 결과일 뿐이다.

각 인간집단에 많이 주어진 먹을거리에 대해 그 구성원은 스스로 만족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가진다.
자신에게 주어진 먹을거리에 대해 불만을 가진다는 것은, 자연환경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그 먹을거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하며, 그 의심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안정을 해칠 수 있다는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집안에서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밥상에서 반찬투정을 하다가 분위기 망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 내 말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주어진 먹을거리에 불만이 있어도 집단의 안정을 위하여 입을 닫아야 하고, 또 곁의 누군가가 그 불만을 꺼내놓으려 하면 이 역시 집단의 안정을 위해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
반찬투정의 밥상에서 "야, 이거 맛있는데 뭐" 하고 집단의 안정을 도모하는 이가 반드시 있다.
그래 맛있다.. 맛있다.. 그렇게 집단최면 상태에 들어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많이 주어진 것을 맛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집단의 기호가 만들어진다.
닭이 많이 주어지니 닭이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집단 구성원 전체가 한 음식을 두고 공통으로 맛있다 여기는 관념은 대체로 그 음식이 충분히 제공되었을 때에 만들어진다.
구하기 힘든 음식을 두고 구성원 전체가 맛있다는 관념을 만들기 시작하면 집단을 유지하기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주어진 것만 맛있다 여기는 것이다.
향토음식 개발이란 게@
랍스터 의문의 1패

황교익의 평론관에는 자신의 관점에서 맛 없는 것들이 유행하는 것에 사회와 문화적으로 개인에 대한 압박과 핍박이 가해져 있기 때문이라는 명제가 있다.

즉, 어떠한 음식이 유행을 하고 그 음식이 맛있다고 여겨지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는게 실제로 그 음식이 맛있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이 처해있는 사회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억누르기 위해서 맛있다고 여기고 사회를 보존하기 위해 이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것을 참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어떤 나라나 지역에서 흔히 먹고 받아들여지는 음식 자체는 그 나라와 지역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로 얻어진 것은 맞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식생활과 환경에 적응하고 역으로 이를 개척해 온 것이지, 인간이 자신이 겪고 있는 불합리함을 외면하기 위해서 스스로 최면을 걸과 세뇌하면서 살아온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인간이 자신이 맛있다고 여기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온 모든 역사를 부정하고 있는 말이며, 여태까지 존재해온 모든 요리를 폄하하고 있는 말이다.

그는 결국 자신의 평론을 통해서 대한민국 사회에서 국민은 보수적이고 사회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증명하고 맛 없는 음식을 자각하고 진보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기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와 맛 없는 음식이 사회에 유행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중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기호를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는 명제는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기 때문에 참이 아니며, 맛 없는 음식이 사회에 유행하고 있다는 명제는 스스로 절대적 미각의 존재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통계에 의존해야 하는데 어떠한 음식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은 그 음식이 사회 통념상 맛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참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황교익의 평론관에서 말하는 사회적 맛은 자신의 정치성향과 개인 기호에 어긋나는 맛을 의미한다. 절대적 미각을 통한 기준을 부정하였지만 자신의 기호와 생각이 음식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어긋나는 것은 올바른 자신이란 기준점에서 어긋나 있다는 뜻이 되어 그의 평론에서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논지를 다룰 당위성을 제공 한다.

4. 담론

4.1. 한식의 전통 부정과 이중잣대

(전략)

한국은 어떤가.
한국의 산업화도 서구처럼 전개되었는가.
산업자본에 의해 망가질 수 있는, 노동자를 위해 생산된 전통 농업사회의 먹을거리가 우리에게 있었던 적이나 있는가.
망가질 것도 없었는데 망가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의 산업화는 1960년대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 당시 농민이 70%였다.
한반도 5,000년의 역사에서 그 처음부터 1960년대까지는 전통 농업사회였다.
한국의 산업화는 급격하였고, 전통 농업사회는 그 인력을 순식간에 '산업의 역군'으로 빼앗겼다.

먹을거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반도의 실정상 전통 농업사회에서는 먹을거리 생산량 늘리는 데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의 먹을거리 시장에 공급할 가공식품의 생산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농민이나 노동자나 입에 풀칠하는 것이 급하였지 먹을거리의 질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다소 여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이다. ​
20~30년 동안의 그 짧은 기간에 농촌은 먹을거리 생산성 확보에 진력하는 데에도 버거웠고, 그렇게 산업화의 뒷전에 머물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산업자본은 노동자의 먹을거리 시장을 점령하였다.

서구의 노동자들은 먹을거리 시장을 두고 벌이는 싸움에서 산업자본과 대항할 수 있는 전통 농업사회의 노동자용 먹을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탈리아에서 "슬로푸드!"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도시 노동자들이 이미 슬로푸드를 먹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산업자본의 '맥도날드'가 안 들어와도 노동자들이 즐길 수 있는 음식이 가득하였던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노동자들이 먹을거리에 대해 다소 여유로워지기 시작한 1980년대 한국의 먹을거리 상황은 어땠는가.
햄버거에 치킨, 피자 등 패스트푸드가 가장 강렬하게 시장을 점령해나간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저가의 공장 생산 식재료를 기반으로 한 프랜차이즈 형태의 한국음식점이 이 시기에 탄생하였다. ​
전통 농업사회에서 노동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은 1차 농수축산물밖에 없었다.
"슬로푸드 하자" 하여도 슬로푸드 할 것이 거의 없는 게 한국의 실정이다.

(중략)

한국에서도, 서구에서처럼, 전통 농업사회의 음식에서 건질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통음식이니 향토음식이니 양반음식이니 농가레스토랑이니..
농어촌의 할머니들이 하는 음식은 웰빙에 로컬하고 슬로한 줄 안다.
아니다.
한국의 전통 농업사회는 한번도 넉넉하게 살아본 적이 없다.
5,000년 동안 겨우겨우 먹고 살았다.
먹을거리를 두고 ​요령 좋게 맛있게 조리 또는 가공을 한 경험이 없다.
제철의 신선한 식재료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맞으나 그 조리와 가공의 방법, 이를 먹는 방식을 보면.. 심란하다

(중략)

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다.
지키자 하여도 지킬 것이 별로 없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창조이다.
서구와 비교한다면, 산업화 초기의 상황과 흡사하다.
아니, 막강한 산업자본을 생각하면 한국처럼 '더러운' 상황에 놓였던 나라를 찾는 일은 힘들 것이다. ​
​전통 농업사회를 산업화 과정에서 조화롭게 흡수한 현재의 서구와 한국의 상황이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미래를 기획할 수 없다.
맨땅에 헤딩!
​한국 먹을거리의 지형을 바꾸려면 지금 이 정신이 필요하다.
한국음식은 망가질 것이 없다@
(전략)

한민족이 곡식을 자급자족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의 통일벼 시대 이후이다. 주식은 벼와 보리, 밀, 옥수수 따위 곡류이지만 항상 배를 채울 만큼의 곡물을 곳간에 쌓아둔 적은 없었다. 다른 것으로 배를 채워야 하는데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푸성귀였다. 한 끼를 해결하는 데 쌈처럼 간단한 음식이 있겠는가. 텃밭에서 상추 따위 푸성귀 솎아 씻고 된장 퍼서 종지에 담고 부엌문간에 걸어둔 보리밥 내려놓으면 식사 준비 끝이다. 국도 필요없다. 냉수 한 사발이면 된다. 가난했던 우리 민족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양반 쌈싸먹는 법@

위의 주장들은 황교익이 전통음식이나 향토음식에 대해서 다룰 때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블로그에서 비공개로 전환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한식대첩에 대해서 비하한 글에서도 등장하지만, 자급자족하기 어려웠고, 가난했고, 급격한 산업화를 겪었던 한국은 전통 농업사회에서 노동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은 1차 농수축산물 밖에 없었다고 하고 있다. 겉보기엔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산업 자본이 먹을거리를 장악하는 모습에 대해서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직후에서 황교익이 말하는 패스트푸드가 장악하기 시작한 1980년대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음식점들과 노동자의 가정은 모조리 1차 농축산물을 생식하고 있었단 뜻인가?

황교익은 조선시대에서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산업화가 한창 진행중이던 한국까지의 시대를 일방적으로 가난하고 못살던 시대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의 시대에 조리법이나 음식이 발달하지 못했을 거라는 가설 아래에 제철의 신선한 식재료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맞으나 그 조리와 가공의 방법, 이를 먹는 방식을 보면...이라고 말끝을 흐리며, 그 시절에 있었던 음식과 조리법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럼 다른 나라의 피지배계층은 어떤가? 질소고정법으로 화학비료를 생산하고, 콘크리트를 부어서 대규모 댐을 지어 수자원을 확보하고, 중장비를 동원해 대규모 관개수로를 설치하기 이전까지 인류의 농업 생산량이 특출나게 좋았다고 할 곳들은 제한적이다. 동남아시아 등에 식민지를 세우기 전엔 설탕과 향신로를 얻으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고, 호주나 아메리카 대륙을 개척해 소를 대규모로 방목할 수 있는 곳을 얻기 전까지는 고기를 인류가 만족할만큼 얻는 것이 어려웠던 것은 대동소이하다. 냉장고 발명 이전엔 제철음식이 아니면 못 먹는 게 당연했고 냉장고 발명 이후도 우리가 일상 가전제품으로 쓰이게 된 게 얼마 안된 건 물론이다. 가공법? 어차피 음식은 굽고, 삶고, 찌고, 끓이고, 데치고, 간하는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건 세계 공통이다. 심지어 대규모 역병이나, 잦은 전란, 정치적 혼란기 등을 겪어보지 않은 지역이나 나라는 존재하지 않다. 이런 나라들의 피지배계층 음식들은?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았건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었건 느리게 진행되었건 간에 피지배계층의 음식이 존재했고, 그것이 삶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서 예전엔 지배계층의 음식이었던 것들과 함께 가정식이나 전통식 등의 형태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의 조리법이나 식사방식은 문화로서 관광상품으로서 여러가지 매체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고 있다. 황교익은 한국에게만 원시적이라며 불공정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개량보다도 원상회복이 급한
세계에 자랑할만한 조선요리

2010년대 한식세계화시대의 외침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 1월 2일자 동아일보의 기사이다.
경술국치 이후 겨우 13년.. 세상이 얼마나 변하였다고 조선요리의 원상회복을 주장하는 걸까.
그 이후로도 90년이나 지났으니 현재 이 땅에는 조선의 음식은 아예 없다고 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왕직 전선과에 근무하는 이익환의 말을 받아 쓴 기사인 것으로 보인다.

전선과는 이씨 왕족의 행사며 음식을 챙기는 부서이다.
이익환이 전선과에 있은 지 16년이라 하니 명월관 안순환의 부하 직원이었을 수 있겠다.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숙수인 듯도 하고, 모호하다.
직접 쓴 글이 아닌 것으로 보아 숙수일 수도 있겠다.(숙수의 계급이.. 글을 알지 못하는.. 그 정도이다.)
비프 스테이크를 "소금이나 슬슬 뿌려 모닥불에 구워 먹는 방자고기"에 비교하며 "대단히 유치하다"고 툭 밀어치는 폼에서 '국뽕'의 장구한 역사를 읽는다.
그때에 벌써 세계에 자랑할만하였던 조선요리@

거기에 위와 같이 1923년 일제강점기 시절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하면서 그 시절부터 국뽕이 유행했다며, 조선요리의 원상회복을 하자는 주장에 대해 일축하고 90년이나 지났으니 조선의 음식은 아예 없다고 봐야 하지 않겠냐며, 음식 문화의 단절을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물론 거기에 식문화와 관련된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여 증명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피지배계층 외의 음식(즉, 양반이나 왕 등의 지배계층이 먹었던 음식)에 대해 좋게 평가했냐면 그것 또한 아니다.
(전략)

이 조선의 왕족은 일제에 병합당하면서 일본의 왕족과 합쳐진다.
조선의 왕족은 일본의 왕궁으로 들어가 일본 왕족으로 생활하였다.
모든 예법은 일본식으로 따랐으며 신사참배도 하였다.

조선 왕족의 음식에 대한 관심은 이 일제시대에 생긴다.
일본에서 공부한 한 신식 여성 학도가 조선의 상궁에게 왕족 음식의 흔적을 듣고 기록한 것이 그 시초이다.
나는 그 기록이 조선 왕족의 음식인지 그 상궁(또는 그 상궁의 집안)의 음식인지 따질 생각도 없다.
또 그 한 상궁의 기억이 조선 500년 모든 상궁의 기억을 총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싶지도 않다.
단지 그 음식이 조선에서 살았던 수많은 삶들과 과연 무슨 관련이 있는 음식인가 하는 것이다.
그게 조선을 대표할 수 있는, 나아가 이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음식인가 하는 것이다.

전주의 외식업소에서 개발된 그 오방색의 비빔밥을 두고 궁중비빔밥이라 억지를 부리고 떡을 간장에 볶아놓고 궁중떡볶이라 고집한다.
동아시아 민족들이 다 즐기는 신선로를 두고 조선의 궁중에서만 있던 것인양 떠벌리고 왕족에게 공출당했을 뿐인 특산물을 두고 궁중에 진상하였다고 자랑한다.
이 한반도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대다수의 평민 이하의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그 한 줌도 안 되는 족속들의 음식에 대해 경의를 표하라 한다.

그 왕궁 안에서의 탐욕이 우리들의 것이 아니었던 게 그리 아쉬웠는가.
노비로라도 왕궁에 들어 그들의 탐욕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이 시대가 못마땅한가.
정신 좀 차리라.
말끝마다 궁중궁중궁중 하는 사람들에게@
한국전통음식의 적통은 궁중음식에 있는 듯이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 생각을 깨기 위해, 강연회 때 참석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곧잘 던진다.
"여기 조선 왕가와 피가 섞였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 들어보세요."
이때까지 그 질문에 손을 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 줌도 안 되는 조선 왕족의 집안 음식을 두고 어찌 한민족의 삶을 대표할 수 있는 음식이라 여길 수 있는가..

조선의 권력서열로 보면 왕족 다음은 양반이 될 것이다.
이들 양반의 음식을 반가음식이라 하고 한국전통음식의 적통을 여기서 찾는 이들도 많다.
현재 한국인들은 스스로 다들 양반이라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최근에 나온 [노컷 조선왕조실록]이란 책에는 한국인의 대부분은 상놈의 자식이라 까놓고 말하고 있다.
나도 이 주장에 동의한다.
1600년대 조선의 계급 구성비를 보면, 양반 5%, 중인 20%, 천민 75%이었다.
1800년대 중반에 들어 양반이 급격하게 늘어나는데, 군역을 피하기 위해 족보를 사는 등 조선의 계급질서에 큰 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반 족보를 가졌다고 다 양반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권력은 여전히 몇몇 집안에 집중되어 있었고 대부분은 알거지의 양반들로 말만 양반인 상태로 있었다.
조선에서 권력을 쥐었던 몇몇 양반 집안의 음식을 두고 이를 한국전통음식의 적통이라 여기자는 생각은 곧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 대부분의 삶을 없는 것으로 하자는 것과 같다.
내 어버이 부끄럽다고 남의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싶은가.

지역에서 향토음식 스토리를 만들어놓은 것을 보면, 진상품 아니면 반가음식이다.
그 지역민이 즐겨 먹었다는 말은 없다.
자신의 조상을 부정하여야만 전통이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게 바로 노비 근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중략)

진주냉면에 육전이, 진주비빔밥에는 육회가 오른다.
이를 두고 양반의 입맛에 맞춘 것이라 여기는 순간, 이 형평사와 관련한 그 당시의 사회상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게 하여 진주냉면과 비빔밥이 시장에서 널리 팔렸던 것도 무시되고 만다.
결국은 양반들이 기방에서 먹던 음식 정도의 스토리만 만들어놓고 양반입네 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후략)
진주냉면과 진주비빔밥, 그리고 형평사@

향토음식 스토리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왕가음식이나 반가음식으로부터 한국 전통음식의 적통을 찾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기 위해 왕가음식이나 반가음식을 한국 전통음식의 적통이라 여기자는 생각은 곧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 대부분의 삶을 없는 것으로 하자는 것과 같다.고 일방적으로 단언하면서 자신의 조상을 부정하여야만 전통이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게 바로 노비 근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며 이러한 행위를 노비 근성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언하고 있다.

순식간에 한식이 노비 근성에 찌든 이들이 꿈꾸는 높으신 분들의 적통이 아닌 음식과 조리법이 발달하지 못하고 먹을만하지도 못한 원시적인 음식과 그외의 이 비난을 간신히 피할만한 몇가지의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되어버린 모습이다. 황교익이 왜 그렇게 전통음식을 비난하고 전통음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지 알만하다.##2 이러한 황교익의 주장은 몇가지 질문으로 간단하게 반박이 가능하다.

민주주의가 정착한 프랑스의 요리에서 우리가 아는 화려한 고급 음식들은 지배 계층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이런 프랑스 요리를 연구하고 조리하고 프랑스 전통 요리로 대접하며, 궁중요리가 현재의 프랑스 고급 요리로 변화해온 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설명하는 이들은 전부 왕정 복고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직 군주가 있는 일본의 왕가에서 비롯된 음식은 어떤가? 일본에서 그 요리를 만들어내고 연구하고 그 음식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는 사람들은 전부 메이지 유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인가? 하다못해 현재 전세계에 퍼져 있는 서구식 디저트와 간식으로 먹는 과자나 사탕 같은 기호식품 중 상당수는 고작 수 세기 전만 해도 왕과 귀족이나 부유한 사람 정도나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이다. 이것들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이들은 전부 제국주의 시대나 절대왕정 시대로 되돌아가고 싶어서 공부하는가? '피지배계층의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음식들을 연구하는 이들도 이런 억지를 부리진 않는다. 둘 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음식들의 각각의 유래와 조리 과정, 성격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고, 각 부류의 특색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장점을 더욱 살리거나, 반대로 두 부류의 특색을 접목해서 새로운 음식과 조리 방법을 개발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것이 정상적인 요리 연구가들의 자세이다.

그리고 옛날 음식을 연구하는데 왕가나 반가의 음식을 연구하게 되는 것은 무언가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사료가 필요한데, 옛날에 종이와 필기도구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그것을 책으로 만들어서 보관하고 보존할 수 있는건 사회 지배 계층 정도였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레시피를 책으로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그 만큼 부유한 사람이거나 그 만큼 부유한 사람 밑에서 일하던 요리사 뿐이란 건 세계 공통이다. 나머지는 구전이나 인습 등으로 전해지는 것들을 역사적 맥락을 짚어서 추측하고 가설을 만들어 증명하는 것이다. 딱히 황교익이 말하는 것처럼 조선이 백성의 삶을 보살피는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자신이 원하는 글을 써서 세상에 남길 수 있게 된 역사는 2018년 기준으로도 매우 짧은 기간이고, 인터넷과 같은 수단으로 자기 생각과 글을 널리 알릴 수 있게 된 건 수십 년도 안 된 일이다.

이는 음식 문화를 넘어서 역사학 전체와도 연관이 되는 부분이다. 앞서 말했듯이 각종 역사학의 증거로 활용하는 사료와 유형 문화재의 대부분은 당연히 이를 제작하고 보존, 전수할 여력이 있는 사회 지배층의 입장을 반영한 부분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학자들이 무작정 사료 및 문화재에 나타나는 지배층의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반대로 무작정 배제하지는 않는다. 단지 지배층의 입장이 어떠한지를 객관적으로 검증, 분석하고 그 사료에 우연이든 고의이든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피지배층의 입장을 찾아내서 지배층의 입장과 비교, 분석하고 있다. 이것이 정상적인 역사학자의 자세이다. 그런데 지금 황교익은 이 역사학에 비유를 하면, 한국사에서 제대로 남아 있는 사료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지배층의 입장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극소수의 지배층의 입장일 뿐이므로 무의미하다'라고 단언하는 한편, 정작 피지배층의 입장에 대해선 남아 있는 자료가 제대로 없으므로 그냥 지배층에게 눌린 채 수천 년을 아무 의미없이 살아왔다고 단언하며 아예 한국사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이중잣대를 보이고 있다. 결국 그가 한식이 발달하지 못한 원시적 음식이라 여기는 것에는 이런 불공정한 이중잣대가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게, 황교익의 이러한 태도는 황교익이 그렇게 비난하던 이승만-박정희 독재 정권의 풍토와 매우 유사하다. 이 때도 황교익처럼 산업화 이전의 한국사를 무작정 가난하고 비참한 시대로 단정하고 전근대 시대의 문화를 과거의 퇴물로 치부하는 태도가 매우 강하였다. 박정희 추종자들이 아직도 '단군 이래 5000년 가난을 해소하신 지도자'라고 칭송하는 것을 살펴보자. 박정희 찬양을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한국사 전체를 가난에 찬 시대로 여기는 태도이다.

4.2. 일본에 대한 막연한 선망

<조선잡기>는 혼마 규스케라는 일본인이 1893년 우리나라에 머물며 본 풍물들을 기록한 책이다.
1894년에 일본의 한 신문에 연재된 것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린 조선은 더럽고 추잡하며 미개하다.
그 당시 이미 '선진'의 대열에 들어선 일본인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 수 있다.
나는 그의 이런 시선이 버겁지만 조선 후기에 대체 우리의 실정이 어땠는지 아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에 음식점과 관련된 항목이 있다.

(중략)

요리점에 대해 "없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규스케가 감정적으로 적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의 책을 보면 그는 한반도 전체를 두루 돌고 있는데 먹을 것과 잠잘 것에 대한 묘사는 사실적이다.
또 있는 것을 굳이 없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종의 정보 보고서인데 그런 것까지 거짓으로 쓸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조선 외식업의 실체를 확인해주는 자료로서 유용할 것이다.

최근에 외식 업체에서의 한정식의 유래에 대해 정리를 하다가 이것이 일본의 요릿집 문화가 이식되어 한정식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미치자 내 스스로 화들짝 놀라고 있다.

특히 남도 음식이 한정식의 한 분류일 뿐인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전통으로 알고 있는 것의 실체는 왜 이리..
19세기 말 한 일본인이 본 조선의 '요리점'

그에게 일본은 먼저 근대화를 이룩한 선진국의 상징이다. 또한 어릴적부터 먹어온 그립고 익숙한 추억의 맛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가 바라본 세계에서 그가 태어난 나라 한국은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였고, 일본으로부터 기술과 차관을 들여와 일본에게 필요한 것을 일본에 판매하는 일본에 경제적으로 종속된 나라이다.#

그에게 한국화란 가난한 한국의 사정에 맞게 싸구려스럽고 촌스럽게 변한 것이고, 경제 대국인 일본으로부터 직접 들여온 것은 그 나라에 걸맞게 샤방샤방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선 일제강점기는 음식점 문화를 비롯하여 많은 기술과 기계와 문화가 일본에서 수입되었기 때문에 '미개한' 한국의 문화가 일본의 '선진' 문화로 대체된 시기인 것이다.

또한 위의 인용된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황교익은 대한민국에 근대적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봉건사회를 스스로 이겨낸 역사적 경험이 없고, 4.19와 5.18, 6.10 등 근대적 자아를 세울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으나 한국은 민주주의로의 약간의 전진을 했을 뿐 시대적 각성을 이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역사관에 있어서 여태까지 미개하고 분별없는 국민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미개하고 분별없는 정권들만 가득한 한국은 아직도 전근대적이고 분별없고 미개한 국가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식에 냉소를 보낸다. 한국의 전통 식재료는 미원이나 미풍 같은 화학 조미료를 넣는 것#이라며 비아냥 거리며, 죽통밥이 1990년도에 태국 음식 카우람을 카피한 것# 같이 많은 음식들이 전통의 탄생이나 한정식처럼 조작된 전통#이란 과정을 거쳤다고 이야기하며 현재의 식탁에 등장하는 음식의 얄팍한 정통성을 공격하면서도, 일상과 현재 식탁에 있는 음식을 아끼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문헌에만 등장하는 '죽은 음식'을 쫓는 것은 전통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등의 이중성을 보이며 말이다.

그런 황교익이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통도 있다. 그것은 각상으로 그가 싫어하는 두레상과 공용반찬의 배제를 위해 옹호된다. 한국에서 외상(각상)문화는 일제강점기에 유교적 율법에 의한 폐습이 제거되면서 그 자리를 근대적 가정생활이 자리잡는 과정에서 사라졌지만, 문제는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 공용반찬과 두레상이라는 지적이다. 황교익이 짚는 문제는 이런 공용 반찬은 식기가 부족한 현실 때문에 도입된 것이지 섬세하지도 않고, 미개하며, 분별력 없고, 비위생적이란 것이고, 그는 전통 아닌 전통인 두레상과 공용반찬을 폐지하고 다시 일본과 같이 섬세한 각상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2@

문제는 일본 또한 근대화 이후 서민 가정에서 각상을 사용하는 전통은 사라지고, '차부다이'(ちゃぶ台)라는 일본식 두레상에서 먹는 문화로 바뀐 적이 있다는 것에 대해선 황교익은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두레상을 비롯한 근대적인 가정생활이 일본을 통해 받아들여진 문화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축소하고 넘어가고 있다. 황교익이 일제강점기가 오늘날 한국의 식문화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일본을 통해 상당수의 문화를 들여왔다고 곡해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두레상이 전통이 아니라는 점만 타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세히 읽어보면 (일본을 통해 들여온) 근대적 가정 생활과 두레상, (일본이 철폐 시켜준) 유교적 폐습, (일본을 통해 다시 배워야 하는) 각상, (근대적 가정생활과 두레상이 밀어낸) 외상을 주제로 글이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각상이란 조선 시대의 외상이나 소반 같은 조선 시대의 가정 문화가 아니라 현대 일본 식당의 각상 문화 자체를 의미한다. 전통문화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옹호가 아니라 일본의 영향중 긍정적인 부분만 강조한 뒤에 그러니 일본 문화를 들여와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항상 일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에게 있는 것은 섬세하고 선진적인 미래의 문화이며, 한국에 남아있는 것은 분별없고 미개하거나 일본을 배워 개조해야할 전통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5. 정리

음식이란 시대의 산물이다. 그 시대의 생산물과 경제, 정치, 문화의 모든 여건이 어우러져 담겨 있는 게 음식이다. 다시 말해 음식에는 당대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 내가 보기에는 조선시대의 궁중음식, 즉 그 전통음식 연구가가 책에 실었다는 효종갱, 열구자탕, 석탄병, 석류탕, 수정회 같은 음식은 외려 '죽은 음식'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시대의 음식이 있고,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에는 또 다른 음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대찌개는 국적불명인 것이 분명하지 않을까? 찌개 안에 소시지, 햄 따위가 주재료로 들어가 있으니 언뜻 보기에는 국적불명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를 전통음식으로 여긴다. 부대찌개가 전통음식인 이유를 풀면...

먼저, 대체 '전통'이란 뭔지부터 알아보자. 사전 등등을 뒤적여보니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날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사상, 관습, 행동 따위의 양식, 또는 그것의 핵심을 이루는 정신"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니까 전통이란 '양식과 정신'! 즉,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란 말이다. 예를 들어, 신선로를 전통음식이라 함은 신선로라는 음식 그 자체를 이름이 아니라, 신선로라는 음식을 조리하고 먹는 양식과 정신이 우리의 전통음식의 그것(양식과 정신)에 합치한다는 말이다.

전통의 개념이 정리되었으니 이제 이런 시각으로 신선로를 다시 보자. 신선로는 탕류이다. 탕은 우리 전통 조리 양식 중 하나이다. (고기와 야채를 넉넉한 물에 푹 끓여 먹는 음식이 탕이다. 서양의 스튜나 수프와는 조리 과정이며 조리 이후의 모양새가 사뭇 다르다.) 그래서 신선로는 전통음식이다. 다시, 이런 시각으로 부대찌개를 보자. 재료는 서양에서 온 것이라 해도 고기와 야채를 넉넉한 물에 넣고 푹 끓이는 탕이라는 우리 전통 조리법에 합치하는 음식이다. 그래서 부대찌개는 우리의 전통음식이라 할 수 있다.
(후략)
음식에 문화라는 접미어가 붙는 까닭@

그는 음식이 시대의 산물이며, 그 시대의 모든 여건이 어우러져 있는 문화라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편견으로 음식을 해석한다. 그가 하는 주장의 모순은 자신의 논리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주장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며, 그는 맛에 대한 주관성과 상대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이 보는 맛의 절대성에 대한 믿음이 기저에 있다. 그에게 있어서 평론이란 결국 자신의 정치적 욕구를 해소할 수단이다.

그는 인문학의 처음처럼 무엇을 설파하는 대신 모르고 있다는 것을 끝없이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소크라테스적 저널리스트#라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고작 섬세함과 분별없음, 선진과 미개라는 흑백사고의 오류로 이루어진 평론관을 갖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6. 번외편. 페이스북 및 블로그 근황

2018년 11월 2주에 당신들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친일분자에 부역하는 자들이라는 도발적 글을 올렸다 각각 알쓸신잡의 전라도 음식에 대한 폄하의 변명과 친일 논란에 대한 변명[9]을 올리며 자기 비판을 하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거나 오히려 이놈들이야 말로 친일에 가담하는 인간이라는 등 비현실적인 글을 올리고 있다.
12월 쯤에는 블로그의 몇몇 논란이 된 글들은 이웃공개로 돌렸고 댓글 기능은 off시켜서 이젠 댓글을 작성은커녕 볼 수도 없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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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게 디워는 한국 음식을 다룬 영화가 아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소재를 마구 가져다 엉터리로 붙인 것이다.[2] 아카이브에서 댓글을 확인하려 할 경우 레딧으로 연결되어버리니 주의할 것[3] 이미 인터뷰 맥락상 황교익이 말하는 영향력과 헤게모니가 음식문화를 개변할 수 있는 사회 지배적인 권력을 의미하는데 무슨 차이가?[4] 동일한 논지의 글을 당신의 미각을 믿지 말아야 하는 이유(글. 맛칼럼리스 황교익)@맛은 배려다@라는 제목으로 (사)푸드포체인저와 중앙일보에 올린 적이 있다.[5] 이 글에서도 황적황이 드러난다. 황교익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이 믿어왔던 걸 부정 당하는 혼란 때문에 반발 작용으로 그러는 거라고 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일반인이나 전문가가 객관적 정보로 지적하면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차단하는, 황교익 자신이야말로 그 논리에 들어맞는 인물이라는 것이다.[6] 실제로 그를 향하는 비판이 자기와 정치적 성향이 같다고 옹호하는 사람이 있다.[7] 돈 스파이크도 치킨은 양념맛으로 먹는거라 자기 취향이 아니라는 말을 한적이 있으나, 먹는이들을 비난하지는 않았으며 백숙을 영업했다. 황교익과 정 반대인 아주 모범적인 평론이라 할 수 있다.[8] 황교익의 전형적인 오류가 나타나 있다. 1. 타인이 맛있다고 하는 것은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 '최면'일 뿐이고, 자신이 맛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짜 맛있고 옳다. 2. 치킨이 맛있으니 많이 찾는거 아니냐는 주장에 반대한다면 많이 찾는데 맛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논리적인데, 엉뚱하게 자기가 혼자 '맛있다'고 판정내린 쇠고기를 가져와서 그럼 왜 쇠고기는 많이 찾지 않느냐? 왜 쇠고기 프랜차이즈는 없냐? 따라서 치킨은 맛이 없다!고 논점일탈을 하고 있다. 쇠고기 프랜차이즈가 없는 이유는 맛 뿐만 아니라 가격, 산업구조, 국민의 기호 등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텐데 자신이 치킨은 맛이 없고 쇠고기는 맛이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쇠고기 프랜차이즈가 없는 현실조차 치킨이 맛이 없는 반증이라고 가져오는 것이다. 자기만의 생각인 '맛' 하나로 논리를 극단화시키고, 극단화시킨 논리를 뒤집어서 반례가 있냐고 되묻는다. 황교익 주장대로라면 그가 극찬한 전갱이 구이 프랜차이즈가 없기 때문에 치킨이 맛없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이런 비논리적인 주장을 방송가에서는 아무도 반박을 못하고 모셔오기 바빴다는 얘기가 된다.[9] 해명이라고 표현하기엔 좀 뭣하다. 왜냐면 자신에게 불리한 점은 아예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쓸신잡의 경우 유시민에게 어려서 부터 맛없는 음식을 못 먹었구나 꼰대질이나, 친일 논란에는 유사과학보다 못한 썰로 일본 음식을 추켜세우며 한식을 폄하한 망언은 결코 없다.[10] 당시 유튜버로 활동한다는 기사에는 소통이라고 주장했는데 블로그는 막고 유튜버 수익을 얻겠냐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당연히도 황교익tv 영상 모두 비판과 비추로 난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