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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말레이시아 제3대 총리 후세인 온 حسين اون | |
이름 | <colbgcolor=#ffffff,#191919>후세인 온 Tun Dato' Hussein bin Dato' Onn حسين اون |
출생 | 1922년 2월 12일 |
말레이 비연합주 조호르 주 조호르바루 | |
사망 | 1990년 5월 29일 (향년 68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 |
학력 | 인도 군 협회 |
약력 | 말레이시아의 제3대 총리 |
정당 |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 무소속 |
종교 | 이슬람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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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말레이시아의 제3대 총리.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쪽은 그렇게 독재자로 분류되는 편은 아닌데 후에 등장하는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와 더불어 그나마 정상적인 총리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독재자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2. 생애
1922년 2월 12일 조호르바루에서 태어났다. 유력 정치가문 출신인데 아버지 온 자파르는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의 창시자이며 독립운동가이고 할아버지 자파르 무하마드는 조호르의 초대 총리대신이었다. 독재자 부자(父子)인 압둘 라작과 나집 라작과는 친척 관계이다. 혼혈인 출신인데 러시아, 터키, 말레이 혼혈이다.[1] 얼굴에서도 그 이국적인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싱가포르의 틀록쿠라우 초등학교에서 재학했고 조호르군에 입대하여 군 생활을 한다.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이었는데 영국령인 말라야의 군대에서 활동했던 그는 영국의 지시에 따라 인도로 건너가 거기서 잠시 활동했다. 전시 후에는 파키스탄의 라왈핀디에서 경찰로 재직하다가 본국으로 귀국한다.
당시 조국인 말라야가 영국의 지배를 받는 것에 큰 서러움을 느낀 그는 아버지가 창당한 UMNO의 청년대표로 일했다. 하지만 정작 창당의 주역인 아버지가 탈당하고 말라야 독립당을 창당하자 본인도 당적을 옮겼다. 후에 말라야 독립당은 국가당으로 개편되었고 해산될 때까지 그 당에 남아있게 되지만, 1968년 부총리이자 사촌인 압둘 라작의 권유를 받고 UMNO로 복귀한다. 라작의 전적인 지원으로 그는 당 지도부에서 큰 힘을 발휘하다가 1973년 부총리 이스마일 압둘 라만이 급서하자 부총리직을 승계한다. 이어 총리로 재직하던 라작마저 급서하자 총리직을 계승했다.
3. 총리
물론 말레이시아 독립의 일원인데다가 사실상의 최고권력자인 총리로 재직했음에도, 그는 타 총리들에 비해서 가장 존재감이 없다. 이것은 사후 집권한 총리들이 그를 다소 격하시키려 했던 것 때문. 독재를 강행한 다른 총리들과는 달리 이 사람은 독재자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상에 있는데 그래도 세습까지 강행한 친척들보다는 낫다. 그렇지만 그가 온전히 민주인사인 건 아니고, 여러모로 독재자들과 큰 차이는 없다는 점을 볼 때는 확실히 호치민이나 니키타 흐루쇼프에 가깝다.후세인은 재직 중 민족의 단결을 위한 정책을 펼쳤는데, 이미 이전부터 특히 말레이인과 중국인을 중심으로 한 갈등이 매우 심각했고 그는 이것을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전직 총리이자 독재자였던 압둘 라작이 만들어 놓은 인종차별 정책인 부미푸트라 정책을 바로 통과시켰고 이것이 과연 민족의 단결을 위해 노력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또한 개인우상화도 여느 총리들과 마찬가지로 강행되었는데 스스로를 "단결의 아버지"라고 칭했다. 자신의 치적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정작 자신의 치적 자체가 논란거리이니 이러한 호칭이 올바르냐는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다. 여하튼 그의 우상화 정책 덕분에 여기저기 그의 이름이 나붙게 되었다. 물론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것 자체가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다소 반목관계였던 마하티르 모하마드가 권력순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말레이시아의 독재자로 유명한 마하티르는 이미 라작 시절부터 학생운동 탄압을 주도했던 사람이었다. 물론 라작은 독재자였으니 그렇다 쳐도, 후세인마저 이를 묵인하면서 학생운동가들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가 인권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아무튼 1981년 건강악화로 사임했는데 후계자인 마하티르가 권력을 승계했고 이후 22년의 장기독재가 시작되었다. 여담으로 후세인과 마하티르는 반목관계였는데 이런 비주류가 후계를 하게 된 것은 그가 영어에 능통하고 충분히 리더십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 당연히 퇴임 후 마하티르와 잦은 갈등을 겪었는데 1987년 헌법위기 때도 주류계열을 지지했으며 이후 UMNO는 정당해산 크리를 먹게 된다. 마하티르는 이후 자신의 세력들을 축으로 한 신UMNO를 창당하지만, 그는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고, 이후 1990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게 된다.
[1] 다만 말레이시아는 이슬람 국가이므로 아랍이나 터키 등 중동 이슬람권 조상을 둔 사람들도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