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8:00:30

FC st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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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FC+Start+-+Escudo.png

1. 개요2. 결성3. 죽음의 경기4. 엉뚱한 왜곡5.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유로마이단 이후의 평가6. 영화

1. 개요

FC 디나모 키이우의 직접적인 전신.[1] 나치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위대한 스포츠맨 정신을 지켜낸 일화로 유명하다.

2. 결성

FC start의 전설적인 일화를 소개한 블로그에서 내용을 참조하였다. #

파일:external/sites.duke.edu/les-joueurs-du-fc-start-.jpg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디나모 키예프 선수들은 독일군과 교전을 벌이면서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역부족으로 패전하고 도시가 점령됐다. 독일계 출신으로 빵집에서 일하던 미콜라 투르세비치가 다시 축구를 하고 싶은 마음에 먹고 살기 위해 근근히 지내던 선수들을 다시 설득하여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FC start를 결성했다.

3. 죽음의 경기

파일:external/www.matrixgames.com/2E05700330424FCC9391B1463870B2FF.jpg

실력이 어찌나 좋았는지 경기를 할 때마다 그 지역 일대에서 그들을 이긴 팀이 없었고 이들의 경기를 지켜보던 나치도 나치 군인 팀들과 시합을 벌였지만 매번 완패하였고 이 일들은 슈츠슈타펠의 귀에까지 걸려서 나치에서도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는 공군팀flakelf을 불러 축구 시합을 벌인다.

역시 이 경기마저 이겨 버린 선수들을 상대로 열받은 슈츠슈타펠 간부는 재경기를 제의하고 그 경기의 심판을 맡았는데 경기 전 FC start 라커룸으로 가서 "경기할 때 우리의 방식대로 할테니 항의하지 마라.(사실상 맘대로 한다는 뜻) 이긴다면 어떻게 될지는 상상에 맡긴다."는 협박을 날렸다. 선수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경기 전 나치의 깃발로 장식된 무장한 나치 군인들이 지켜보는 경기장에서 나치식 경례도 하지 않고 경기를 했다.

축구를 빙자한 나치 선수들의 무자비한 태클과 폭행에 전반에 한 골을 먹으면서 하프타임이 되자 경기를 주선한 간부는 선수단에게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경기를 포기하고 몰수패를 한다는 조건에 승낙하라고 협박했지만 선수단은 당당히 싫다며 협박을 거부했다. 후반이 시작되어도 나치 선수들은 무자비한 반칙과 폭력 축구를 했지만 선수단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4:2로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경기 후 화를 억누르고 기회를 한 번 더 준 슈츠슈타펠 간부는(거의 최후통첩) 나치군으로 결성된 루크팀과 재대결했다.

이 경기에서 FC start는 8:0이라는 엄청난 스코어로 승리를 장식하면서 슈츠슈타펠 간부를 결국 열받게 했다.

결국 게슈타포는 선수 전원을 체포해 취조실로 끌려가서[2] 혹독한 고문을 했는데 FC start의 결성을 주도했던 미콜라가 고문 끝에 죽고 나머지는 결국 시레츠 수용소로 끌려가 1943년 반독 파르티잔들과 결투 끝에 4명이 죽었고 나머지 선수는 항전을 거듭하면서 종전된 후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파일:attachment/FC start/Example.jpg

구 디나모 키예프 경기장에 세워진 FC start 기념탑. 디나모 키예프 투어 담당자는 구장을 들린 사람들과 원정팀에게 이곳을 들러 보라고 권유한다고 한다.

4. 엉뚱한 왜곡

사랑의 학교에 나오는 협박을 받고 고의로 경기를 져야 하는데 결국 이기고 국민에게 기쁨을 준 후 축구장에서 사살당하는 선수들의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 따 온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소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지만 어쨌든 우크라이나에서 전체적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화이고 아직도 디나모 키예프 선수들은 이들을 전설로 여기고 존경하고 있다.

이원복의 사랑의 학교에는 폴란드 선수들로 나온다. 이원복이 은근히 이런 오류를 저지른 사례가 많기 때문에 실제로 착각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경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팀원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가 마침 수용소에서 발생한 폭동을 틈타 일부 탈출에 성공해서 유격대에 합류했다. 실제로 집단처형 명령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으나, 많은 팀원들이 수용소에서 죽은 것은 사실이다.

사랑의 학교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이 이야기가 와전되기도 했다. 1979년작인 실록 축구 전사(実録 サッカー戦士)란 만화로서 월간 코로코로 코믹에 연재되었다.

5.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유로마이단 이후의 평가

그럼에도 1991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에서 독립하면서 반소 성향이 심한 서부에서는 이 일화를 소련의 프로파간다라며 부정하는 여론이 생겼으며(특히 극우 수정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서부의 네오 나치들은 쭉 소련 시절의 거짓말이라고 부정하면서(...) 급기야 위키백과 문서까지 반달했다. 사실 이건 설명하기 좀 복잡한데 대충 요약해 본다면 우크라이나에서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나치의 꼬붕 노릇을 하던 인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냉전 시대에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자유의 투사로 둔갑되고[3] 이러한 게릴라전이 좌절당하자 서방 각국으로 도주하여 우크라이나 이민자 사회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면서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의 토양을 닦아냈고 소련 붕괴 후 우크라이나에 이러한 사상이 역수입되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즉 우크라이나 대기근처럼 진영논리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는 일이 일어난 셈이다.

6. 영화

파일:external/footballk.net/300px-%EC%8A%B9%EB%A6%AC%EC%9D%98_%ED%83%88%EC%B6%9C.jpg

이들의 일화를 모티브로 헐리웃에서 1981년에 승리의 탈출이 개봉되었다.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로 주연은 실베스타 스탤론이고 축구영화라서 그런지 유명 축구선수들이 총출동한 영화였는데 이 중에는 펠레도 있다. 작중에서는 나치 하의 파리를 배경으로 다국적 포로[4]들이 나치와의 축구 대결에서 승리하고 실제 사건과는 달리 경기는 4대 4로 비겼으나[5] 경기를 관람하던 파리 시민들이 단체로 경기장으로 몰려들어와 환호성을 지르면서 선수단 전원을 데리고 경기장을 뚫고 나가 버리면서 끝나는 해피엔딩이다.

논스톱의 자우메 콜렛 세라가 리메이크 연출을 맡을 예정이다.#
[1] 정확히 말하면 1927년에 창단된 동명의 클럽이 나치의 침공으로 한번 해체된 뒤 FC start를 거쳐 다시 디나모 키이우 이름으로 돌아왔다고 볼 수 있다.[2] 소련군 경찰이라는 억지 혐의를 씌웠다.[3] 사실 이들이 나치의 꼬붕 노릇을 했을언정 소련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한 것 자체는 사실이긴 하다.[4] 펠레가 흑인인 데다 2차대전과 거리가 먼 브라질 사람이라 이런 설정이 나왔을 거라는 추측이 있다.[5] 이것도 나치측의 억지로 한 골을 무효화시켰기 때문에 사실상 5대 4로 이긴 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