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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G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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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전투항공단(Jagdgeschwader 52)

1. 개요2. 서부전선3. 동부전선4. 코카서스와 스탈린그라드 공세5. 쿠르스크 공세6. 미군 조종사들과 싸우다7. 외국인 의용병8. 전과에 관한 논란9. 역대 지휘관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독일 공군에 속한 전투비행단의 하나로, 항공전이 시작된 이래 모든 부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격추 전과를 거둔 것으로 전사에 이름을 남긴 부대로 유명하다. 독일군의 기록에 의하면 JG 52의 격추 전과는 물경 10,000~12,000대를 헤아리는데, 이를 뒷받침하듯이 공중전 역사를 통해 격추수 상위 3위까지를 차지한 슈퍼 에이스들인 에리히 하르트만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귄터 랄이 모두 몸담았던 부대이기도 했다. 또한 JG 52는 오직 Bf 109만을 이용하면서 이와 같은 엄청난 전공을 쌓아올렸다.

2. 서부전선

JG 52가 처음 창설되었을 때는 고작 2개 비행중대만으로 조직되었다. 대부분의 전투항공단은 3~4개의 비행중대가 모인 비행단 3개가 함께 모여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이처럼 실제 규모는 1개 비행단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규모 부대에 불과했었다. 따라서 활동 초기만 하더라도 JG 52의 전과는 지극히 평범했다. 프랑스가 항복한 후인 1940년 말까지 이 부대는 합계 177대라는 격추 전과를 얻었으나, 얼마 후 벌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는 53명의 조종사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고 행방불명되었다.

3. 동부전선

바르바로사 작전의 시작과 함께 JG 52는 동쪽으로 전개하였고, 이때부터 소련 공군을 상대로 전과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JG 52는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주로 우크라이나 남부와 러시아 중앙 전선, 그리고 남부 집단군을 지원했다. 1941년 9월까지 항공단은 고작 3개월 동안 격추수를 500대까지 끌어올려 놓을 수 있었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500대 중에서 323대는 6월 말에 동부전선에 와서 거둔 것이었다.

JG 52 제 I 비행단 같은 경우는 다른 비행단과는 달리 서쪽으로 전개해 북유럽 해안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아 한가한 후방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이따금 영국 전투기나 정찰기가 다가오면 온 부대원이 벌떼처럼 이륙해 쫓기도 했지만, 연일 격전이 거듭되는 러시아 전역과 비교하면 그것은 휴가나 다름없었다. 에리히 보이트케(Erich Woitke : 1912~1944 / 30대 격추) 대위가 이끈 제 II 비행단은 제27전투항공단(JG 27)을 지원하면서 처음 몇 개월 동안 소련 공군기를 270대나 포식했다.

동부로 파견된 제 III 비행단은 러시아 전선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비행단으로, 활동 범위는 흑해 연안으로 한정되었다. 1941년부터 1942년 사이에 독일 공군은 뒤떨어진 장비와 부실한 훈련, 무능한 지휘관들이 이끄는 소련 공군을 상대하면서 엄청난 개인 격추수를 올리며 연전연승하고 있었지만, 상대하는 소련 공군은 부숴도 부숴도 끝이 없었다. 러시아인들은 추락한 전투기는 금세 재보급했고 주로 지상군의 점령 지역에서 싸우던 조종사들은 낙하산으로 탈출하면 곧바로 전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엄청난 손실을 입으면서도 살아남은 소련 조종사들은 차츰 싸우는 법을 배우며 실전에 단련되었고, 전투기의 성능 또한 꾸준히 개선되어갔다고 하지만 성능의 압도적인 열세는 변함이 없었다.

1941년 6월부터 12월까지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부대는 49대를 공중전에서 잃고 5대는 지상에서 파괴되는 대가로 무려 881대의 소련 항공기를 쳐부쉈다. 1942년 초부터 JG 52는 제3전투항공단(JG 3)과 공동으로 동부전선의 광활한 남부 지역 제공권을 틀어쥐었장다. 이 시절 JG 52의 성공적인 임무 수행은 훗날 전설로 남게 될 엑스페아텐 에이스들을 여럿 배출하게 되는데, 기사철십자 훈장은 20명 이상에 곡엽 훈장 수상자는 7명이 나오게 된다. 1942년 5월 8일에 JG 52는 1,500대 격추를 달성했고, 6월에는 2,000대에 도달했다.

4. 코카서스와 스탈린그라드 공세

7월 중순, 항공단은 새로 지급 받은 Bf 109G로 재정비하고 여전히 코카서스의 유전 지대를 공략하는 기갑 부대를 지원했다. 이 무렵, 제 I 비행단은 일종의 소방수 역할이 맡겨져 긴급하고 신속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역으로 급파되면서 흑해의 케르치 반도에서 모스크바 정면에 걸쳐 긴 전투 종심을 왕래하며 매우 자주 교전을 경험했다. 이 비행단만 따로 9월까지 무려 격추수 700대를 돌파했는데, 전쟁 초기에 후방에 머물렀던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전과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JG 52는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더라도, 제 III 비행단은 8월에서 9월 사이에 코카서스 남부의 유전을 함락시키는 작전에 참가했고 제 II 비행단은 1942년 말 제4기갑군단의 포위망 돌파를 지원했다. 이같은 격전을 치르면서 JG 52는 12월 10일에 4,000대라는 엄청난 격추수를 기록했는데, 이것은 독일 공군에서도 톱이었다.

1943년 상반기에 부대는 케르치 해협크림반도를 중심으로 활동하했다. 5월 중순, 아나파(Анапа)에 둥지를 틀고 있던 JG 52의 제 II / III 비행단에게는 쿠반(Кубань)에서 케르치 해협으로 이어지는 제17군(17. Armee)의 퇴로를 방어해 수 만명의 아군을 구해내야만 하는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 4월 20일에 부대의 에이스 귄터 랄은 5,000번째 부대 전과를 얻었지만, 사실 이때의 소련 공군은 만만치 않은 수준으로 성장해 있었고 JG 52에서도 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있었다.
"JG 52가 아나파에 있을 때는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죠. 그 당시는 독소전 초기와는 달리 적과 조우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던데 비해 일단 교전을 치르고 나면 손실이 컸습니다. 이건 단순히 젊은 초보 조종사들이 돌아오지 못하던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노련한 베테랑들도 마찬가지였다는 뜻이지요." - 헬무트 립페르트

5. 쿠르스크 공세

1943년 7월에 JG 52 제 I 비행단과 제 III 비행단은 쿠르스크 전투에 대비하여 우크라이나로 이동했다. 이 임무에는 8개의 비행단이 참가했는데, JG 52는 그중에서 2개 비행단을 보내 6,000번째 부대 전과를 기록했다. 제2비행중대의 요하네스 비제 같은 조종사는 이 전역에서 하루에 12대의 적기를 잡아내는가 하면, 7비행중대의 발터 크루핀스키는 그가 자신과 같은 11대를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일도 있었다. 연전연승하던 부대의 베테랑이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오지 못하고, 새로 보충된 신참은 첫 출격에서 곧바로 저승행 티켓을 끊는 일이 흔해진 것은 바로 이 때부터였다.

소련 공군에는 이제 Yak-9이나 La-5FN 같은 신형 전투기들이 배치되었지만 그 성능은 대단치 않은 물건들이었고 그나마 미국이 보내준 P-39는 조금이나마 위협적인 상대이기는 했지만 역시 대단찮은 물건임은 변함이 없었다. 소련 조종사들의 실력도 크게 향상되지 않아서 베테랑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된 일부 부대를 제외하면 형편없는 수준임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지상군이 수세에 몰리고 연합군의 전략폭격기 심해짐에 따라서 1943년 8월에 JG 3이 먼저 후퇴해버리고 나자, JG 52는 동부전선에 남아 있던 단 하나의 전투항공단이 되었다.

JG 52는 전선에 급하게 비행장을 가설하면서 계속 기지를 옮겨야만 했고 종종 기지에 포탄이 떨어지거나 소련 기갑부대에 짓밟힐 위험에 노출되었다. 11월에 드네프르 강을 끼고 벌어진 전투에서 키예프를 잃어 동부전선 남쪽의 균형이 무너질 때 JG 52는 전선 전체를 오가며 지원을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어졌고, 소모도 그만큼 빨라졌다. 이 시기에 부대에 보충된 신참 조종사들의 명줄은 1주일을 넘기는 법이 거의 없었다.

12월 말까지 JG 52의 전과는 8,000대를 넘어섰지만 그것은 많은 조종사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우만(Умань) 지역에서는 제 III 비행단이 60일간 50대의 적기를 격추했다. 제 III 비행단은 항공단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부대로 1944년 3월 21일까지 3,500대의 전공을 세우고 있어 부대의 마지막 버팀대가 되고 있었다. 이들은 월말까지 폴란드를 거점으로 삼고 제공권을 빼앗으려는 소련 공군을 홀로 막아내고 있었다. 1944년 5월 10일에는 9,000대째 전과를 거두었고, 9월 2일에는 수석 비행중대장인 아돌프 보르허스 대위가 전대미문의 1만번째 격추를 기록했다. 부대원들은 커다란 화환과 10,000기 푯말, 그리고 새끼돼지를 준비했다가 그가 돌아오자 헹가래를 쳐주며 환영해주었다.

6. 미군 조종사들과 싸우다

제 II 비행단 같은 경우는 철수가 빨라서, 5월에 마지막 독일 병사가 크림 반도에서 떠나기 보다 일주일 먼저 후퇴했다. 소련 야포의 지속적인 포격과 수없이 격추되면서도 계속 날아드는 소련 폭격기들의 공습으로 인해 주기된 항공기들까지 잃는 상황에 빠졌고, 부대는 곧 루마니아로 후퇴했다. 동유럽으로 밀려온 JG 52는 이곳에서 새로운 강적을 만나게 된다. 미 육군 항공군의 제15공군이 플로에스티 유전을 폭격하면서 B-24P-38을 마주치게 된 것이다.

미군 전투기들과 조종사들은 여태까지 싸운 소련 조종사들과는 또 달랐다. 6주일 동안 방공 전투에 매달리며 미국 전투기 15대를 격추시키는데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II 비행단의 보유 기체는 9대까지 줄어들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연합군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개시하자, JG 52는 3개의 비행단 모두가 서부전선으로 소환되었다. 부대는 재편성되면서 각 비행단은 3개에서 4개 비행중대로 규모가 확충되었지만, 이미 그들은 과거 일당백의 전투력을 발휘하던 베테랑들이 아니었다. 제 II 비행단은 제51전투항공단(JG 51)의 일부로 배속되어 중부 집단군을 지원했다.

1945년 봄, 제 I 비행단과 제 III 비행단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배치되었고, 제 II 비행단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했다. 패전 무렵 JG 52 제I 비행단과 III 비행단의 조종사들은 대부분은 미군에 투항했지만 미소간 협정에 의거하여 붉은 군대에 넘겨졌고, 이들 조종사들은 부상자나 환자 같은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면 소련의 지옥같은 형무소에서 10년간 투옥되었다. 물론, 다른 조종사들의 몇 배나 더 많은 소련 항공기를 쳐부순 에리히 하르트만 같은 수퍼 에이스들은 15년 이상으로 형기가 늘어나기도 했다.

7. 외국인 의용병

JG 52에도 다른 추축군에서 가담한 의용군 파일럿들이 있었다. 통칭 슬로바키아 중대(Staffel Slowakisches)라고 불리던 JG 52 예하의 제13비행중대(13./JG 52) 소속의 슬로바키아 조종사들은 1943년 동부전선에서 Bf 109G를 몰면서 소련 공군기를 215대나 격추시켰다. 체코슬로바키아 공군은 점령 직후 독일로부터 일선급 항공기를 다수 공여 받았고, 이탈리아로부터도 일부 군용기들을 넘겨받아 백-청-적색의 라운델과 꼬리와 날개 끝을 황색으로 칠하고 1939년 9월부터는 폴란드 침공 작전에도 기꺼이 참가했으며, 독소전 초기에는 소련 공군에 적잖은 피해를 입혔다. 이들을 훈련시킨 교관들은 스페인 내전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노련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일럿들이었다. 따라서 체코슬로바키아 공군 파일럿들은 그 실력에 있어서는 추축군에서도 톱 클래스에 가까왔고, 이에 따라 많은 에이스들을 배출했다.

이지돌 코바릭(28대 격추), 얀 게르트호펠(26대 격추), 프란티섹 브레지나(14대 격추), 안톤 마투섹(12대 격추), 요셉 스타우델(12대 격추), 파볼 제레낙(12대 격추) 같은 에이스들은 20대에서 30대에 달하는 연합군기를 격추시켰고, 훗날 연합군의 공습에 맞서 요격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도 루돌프 보직(13대 격추), 블라디미르 크리스코(10대 격추), 알렉산데르 게릭(9대 격추), 요셉 얀코빅(7대 격추), 프란티섹 하노벡(6대 격추) 처럼 쌍발이나 4발 폭격기, 또는 스핏파이어 같은 고성능기를 격추한 에이스도 탄생하게 된다. 이들은 더블 에이스 6명을 낳았고 4명은 트리플 에이스 이상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중에서 격추수 37기로 단연 우뚝 선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체코 공군의 탑건 얀 레즈냑이었다.

또한 크로아티아 조종사들은 프라뇨 찰(Franjo Džal) 대령이 지휘하는 제15비행중대(15./JG 52)라는 독립 부대를 구성해 5,000소티를 출격하면서 합계 300대의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1942년 10월에 츠비탄 갈리치(Cvitan Galič) 중위의 지휘 하에 JG 52에 배속된 이들은 소련의 쿠반 강에 전개한 크로아티아 군단(Croatian Legion : 제386 특임보병연대)의 지원을 주임무로 맡았는데, 마토 듀코바치(Mato Dukovac) 같은 에이스가 그를 보조했다. 둘은 곧 로테(Rotte)를 짰고, 이곳에서 소련 공군을 상대로 분전을 펼쳤다. 곧 갈리치 듀코바치의 편대는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페어로 불리며 함께 에이스 파일럿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듀코바치는 44기의 격추수를 기록하였고 갈리치는 38기의 격추수를 자랑하여 제15비행중대의 양대 에이스에 등극 하였다. 하지만 1944년 4월 갈리치는 격추되어 전사하고, 듀코바치는 시간이 갈수록 탈영하는 크로아티아 파일럿들 때문에 비행대의 출격이 제한되자 같은 해 9월 오스트프로이센 아이히발데 기지에서 드 해빌랜드 훈련기를 몰고 이탈리아 북부로 탈영하여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8. 전과에 관한 논란

상기한 대로, 이 부대의 전과 대다수는 소련 공군과의 전투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하지만 전쟁 말기에는 루마니아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상공에서 조우한 미 육군 항공군과 싸워 이룬 것도 적지 않았다. 독일군은 패전이 임박하자 전쟁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막대한 분량의 전투보고서와 관련 기록을 삭제하고 소각했는데, 루프트바페 또한 마찬가지여서 1944년 말부터 1945년 5월까지 기록은 거의 모두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JG 52도 종합 전과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없으나, 전쟁 동안 678명의 조종사를 잃었다는 사실은 학자들의 추적과 연구로 밝혀진 바 있다. 소련 공군이 독소전 동안 손실한 항공기 중 전투손실은 4.5만대 정도였던 탓에 독일인들의 주장대로라면 1개 연대급에 불과한 JG 52가 소련 비행기의 20% 이상을 격파했다는 이야기된다. 다만 소련 공군의 비전투 손실률이 이상할 정도로 높아서 전투손실의 일부가 사기 하락을 우려해 비전투 손실로 집계된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기는 하다.

9. 역대 지휘관

1. 후베르투스 메르하르트 폰 베르네크(Hubertus Merhardt von Bernegg) 소령(1939년 8월 19일~1940년 8월 18일)
2. 한스 트뤼벤바흐(Hanns Trübenbach) 소령(1940년 8월 19일~1941년 10월 10일)
3. 빌헬름 레스만(Wilhelm Lessmann) 소령(1941년 10월 15일~1942년 6월 2일)
4. 프리드리히 베크(Friedrich Beckh) 중령(1942년 6월 3일~1942년 6월 21일)
5. 헤르베르트 일레펠트 소령(1942년 6월 22일~1942년 10월 28일)
6. 디트리히 흐라박 중령(1942년 11월 1일~1944년 9월 30일)
7. 헤르만 그라프 대령(1944년 10월 1일~1945년 5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