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5 13:10:54

계명대학교/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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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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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990년대
2.1. 1991년 등록금 인상 관련 사건2.2. 1992년 대명캠퍼스 의양관 화재 사망 사건2.3. 1997년 강의실 강간미수 사건2.4. 1998년 대구 여대생 사망 사건
3. 2000년대
3.1. 2000년 계명대 정문 버스 추돌 사망사고3.2. 2004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조난 사고3.3. 2006년 장기 인신매매 미수 사건3.4. 2007년 태권도학과 이명박 후보 선거운동 동원 사건
4. 2010년대
4.1. 2011년 중부권 폭우 사태로 인한 축제 중단4.2. 2015년 학생회관 추락사 사건4.3. 2017년 태권도학과 산하 시범단 내 폭행성추행 사건
5. 2020년대
5.1. 2020년 코로나 확진자 발생 상황 대면시험 강행 논란5.2. 2022년 학생회비 미납자 축제관람 차별 논란5.3. 2023년 남자 신축 기숙사 빈대 발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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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계명대학교의 사건사고를 정리한 문서.

2. 1990년대

2.1. 1991년 등록금 인상 관련 사건



당시 등록금 인상 문제로 대명캠퍼스 학생들이 농성 · 시위하는 과정에서 학생 한 명이 투신하여 교수 폭행으로까지 이어졌던 사건이다.

2.2. 1992년 대명캠퍼스 의양관 화재 사망 사건

1992년 5월 26일 오전 3시 30분경 당시 학생회관으로 쓰던 대명캠퍼스 의양관에서 불이 나 축제 준비로 학교에 남아 2층 동아리방에서 자던 학생 4명이 숨지고, 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망자들의 소속 학과는 국어국문학과 1명, 신학과 2명, 경영학과 1명이었다.[1]

이 화재의 여파로 축제는 취소되고, 그 날부터 강의가 바로 시작되었다. 운동권 측은 교내에 희생자들의 동상을 만들 것을 요구했지만 묵살되었고, 자그마한 추모비만 세워졌다.

사건의 진상은 27년이 지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대구 남부경찰서는 이 사건을 유야무야 덮고 넘어갔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총학생회 차원에서 '5.26참사 추모대회' 등을 개최하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지만, 그 이후에는 총학생회가 비운동권을 넘어 반운동권으로 돌아서고, 완전한 어용상태에 이름에 따라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사건이 되었다. 이후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 영암관 앞 화단에는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다. 하지만, 깊숙한 곳에 설치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졸업 때까지 이 추모비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계명대학교 건축물의 역사' 책자 142쪽에 짤막하게 이 사건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이 학교 측에서 이 사건에 대해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날짜가 잘못 적혀 있다.

2.3. 1997년 강의실 강간미수 사건

1997년, 인문대 영암관의 한 강의실에서 한 학생이 다른 학과 학생을 성추행한 사건. 여학생 혼자 있는 강의실에 범인이 들어와 문을 잠그고 범행을 저지르려 하였으나 피해자가 저항했고, 비명을 들은 학생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범행은 미수에 그쳤다. 결국 범인이 무릎을 꿇고 공개 사과를 하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2.4. 1998년 대구 여대생 사망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대구 여대생 사망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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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998년 10월에 일어난 사건이며, 피해자가 당시 계명대학교 간호학과 1학년 학생이었다.

3. 2000년대

3.1. 2000년 계명대 정문 버스 추돌 사망사고

2000년 12월, 재학생 1명이 계명대학교 정문 앞에서 U턴하던 시내버스에 치여 사망했다. 이 사고로 인해 2001년 1월 5일, 당시 계대정문에서 회차하던 305번, 504번, 508번, 524번, 549번이 개편되었다. 504번, 524번은 삼성명가타운으로 연장되었고[2], 305번, 549번은 계대동문으로 단축되었으며, 508번은 계명문화대학교로 종점이 변경되었다.

2006년 개편으로 504번, 524번[3], 549번은 폐선되었고, 305번은 방천리로 연장되었으며, 508번은 성서산단 내 신흥버스 차고지로 연장되었다.

3.2. 2004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조난 사고

2004년 5월 18일, 개교 50주년을 맞이하여 꾸려진 등산부팀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속한 산악인박무택, 장민, 백준호 3명이 사망했다. 당시 이들은 엄홍길과 함께 한국에서 산악 등정 준비를 한 후 네팔에서 헤어져 에베레스트로 갔고 엄홍길은 15좌 얄룽캉에 등정하기 위해 흩어졌다.

3인의 사망 경위는 다음과 같다. 박무택 등반대장과 장민 대원 두 사람이 에베레스트 정상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던 해발 8,500m 지점에서, 장민은 탈진하고 박무택은 설맹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박무택은 후배 장민을 먼저 내려보내고, 산소 없이 밤을 지샌다. 그러나 장민은 하산 도중 실종됐다. 이를 무전을 통해 알게 된 베이스캠프에서 백준호[4] 원정부대장과 셰르파 한 명이 다음 날 박무택을 구조하러 가지만, 박무택은 동상이 심하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여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결국 셰르파는 먼저 하산하고 백준호는 박무택의 곁을 지키다가 홀로 하산했지만, 백준호마저 하산 도중 실종되어 세 명이 사망했다.

박무택과 절친한 사이였던 선배 산악인 엄홍길은 얄룽캉 등정 후 하산길에 이 소식을 듣고, 이 중 시신 한 구는 실종된 것도 아니고 암벽에 로프 째로 매달려 있어 다른 산악인들이 등정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지나치고 있다는 전언들을 듣는다. 엄홍길은 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어 1년 뒤인 2005년에 위에 언급된 3명의 시신을 찾아오려는 휴먼원정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박무택은 3대 독자라 그의 죽음으로 대가 끊어졌다. 박무택의 부모를 찾아간 엄홍길에게 부모는 "산에 올라가는 놈들은 후레새키야! 산가서 뒈지고 시체도 못 찾아올, 천하에 어리석은 짓을 하는 멍청이들이지!"이라고 분노를 담아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무택이 입던 유품에서 등산화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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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젝트는 전문 산악인 수십 명이 70일 가까이 진행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경비 마련을 위해 여러 기업과 언론사에서 스폰을 받게 되고 이들이 동행하면서 규모가 더욱 커졌다. 유례가 없는 시도로, 세계적인 등산가인 라인홀트 메스너[5]조차도 불가능하다며, '같이 산에서 죽어 묻히려는 것'이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6] 만약 엄홍길의 원정대가 기적적으로 무사히 박무택 팀의 시신을 모두 찾아왔다 하더라도 원정대의 성공에 고무받은 세계의 많은 산악인이 덩달아 도전한다고 한다면 또다시 많은 희생자가 생겨날 것이 분명했기에 이 도전을 만류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 과정은 당시 방송에 보도되기도 했고, 엄홍길도 컨디션이 매우 안 좋아서 고생하기도 했다.

오은선이 원정대와 관련 없이 단독 에베레스트 등정박무택의 시신을 발견해 베이스 캠프에 보고했다. 원정대는 2005년 5월 29일 실종자 2명은 끝내 찾지 못하고,[7] 위치가 파악된 박무택의 시신을 운구하는 데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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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정상 부근인 8,750m에 도착한 원정대가 박무택의 시신을 떼어내고 로프를 이용하여 십여 미터 밑으로 옮기는 데에는 성공하나, 얼어버린 시신의 무게가 무려 100kg이 넘어 상당했고 예보와 달리 기상이 급격히 악화되어 원정대원들의 안전이 위협되는 상황이 되자 더이상 진행하지 못했다. 결국 등반대장이던 엄홍길의 결정으로 시신을 전망이 좋은 양지로 옮기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 간소한 돌무덤을 만들어주고 대원들은 하산한다. 대원들은 유가족들이 챙겨준 유품들을 태우며 노제를 지내는 것으로 프로젝트를 마무리 했다. 기사. 게다가 이 휴먼원정대에서조차 희생자를 냈는데, 격려차 헬기로 캠프에 방문한 전문 산악인이던 계명대학교 산악회장 한승권이 고산병으로 급사했다.

이 사건은 2015년 12월 16일에 개봉한 영화 히말라야영화화되었다.

이 사고 이후 산악회는 해외 원정을 가지 못했으나, 약 10여년이 지난 2014년에서야 원정대를 다시 조직했다.

3.3. 2006년 장기 인신매매 미수 사건


2006년에 있었던 사건으로, 각종 포털 사이트에 '계명대 인신매매'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내용이다. 참고

이 사건은 크게 두 가지 바리에이션이 존재하는데, 먼저 기사를 토대로 한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어느 학생이 우연히 길을 물어보는 '모자(母子)'를 만나 길을 가르쳐 주고 나서 감사의 표시로 음료수를 받아 마셨다. 근데 그 음료수에는 수면제가 들어 있었고, 깨어 보니 어느 외진 곳의 불법 장기 적출 시술소였다는 것.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학생은 이 사실을 바로 학생처장에게 알렸고, 학생처장은 이에 주의를 당부하는 문자 메시지를 교내 학생 대부분에게 전송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앞서 설명한 사건을 바탕으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붙는데, 연초 서울에서 내려온 신입생이 자취방을 알아보던 도중 한 아주머니로부터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신축 원룸을 싸게 내놓았다는 말을 듣고, 방을 보러 가기 위해 아주머니와 함께 온 승합차에 탑승하는데, 승합차 안에는 이미 같은 처지의 학생 3명이 더 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차 안에서 커피를 받아 마시고 가는 도중 잠이 들었고, 깨어 보니 역시 포항 어느 외진 곳의 불법 장기 적출 시술소였다는 것. 그리고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한 끝에 납치된 2명의 학생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나머지 2명은 실종, 범인은 현장에서 아주머니와 운전사를 제외한 2명만 검거되고, 현재 경찰서 조사 중에 있다는 이야기이다.

여러 가지 사건의 정황으로 볼 때, 아무래도 두 번째 이야기가 신빙성 있어 보이나, 인터넷에 돌아다니면서 여러 사람에 의해 인신매매에 관련된 괴담과 근거 없는 내용이 추가되고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8] 하지만 중요한 건 실제 이러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 충격과 공포. 낯선 자의 호의는 항상 주의할 필요가 있다.

2013년2014년에 각각 비슷한 내용의 괴담이 다시 한 번 유행했다. 내용은 약간의 변형이 있지만, 대충의 궤는 강창역 주변에서 봉고차수면제 등을 이용해 학생들을 납치하고, 장기밀매를 시도했다는 것.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장기밀매 괴담과 맞물려 주변 거주, 통학생들의 불안감을 자아냈다. 이후 학생회에서 직접 확인한 결과, 납치되었거나 실종된 학생은 없으며, 근거없는 괴담이므로 안심하라는 공지까지 했다.

3.4. 2007년 태권도학과 이명박 후보 선거운동 동원 사건

제17대 대통령 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2007년 11월, 태권도학과 학생들이 학과장에 의해 이명박 후보의 선거 운동에 단체로 동원된 사건이다. 당시 최모 학과장한나라당 경북도당 선거대책위원회 대학청년본부장 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태권도학과 1학년 학생들은 과대표 등을 통해 연락받은 뒤, 2007년 3~6월 사이에 이명박 후보가 참석하는 시의원 선거 지원유세장, 당원 교육 등에 5차례나 참석하고,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수업을 빼먹거나 주말에 동원되었다.

이 사건이 논란이 되자 최모 학과장과 한나라당 경북도당 사무처장은 "집회 참석을 강요하지 않았다"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체육대학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집단생활을 강요받는 체대 특성상 선거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이 어떤 불이익을 당하게 될지 생각해보면...

한편 이 사건이 한겨레를 통해 보도된 와중에도 매일신문과 영남일보 등 대구경북 지역 언론들은 사건을 애써 외면했다. 또한, 계명대학교 학보사인 계명대신문도 이 사건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4. 2010년대

4.1. 2011년 중부권 폭우 사태로 인한 축제 중단

2011년 중부권 폭우 사태로 인해 춘계 축제는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중단되었다. 참고

비는 축제 첫 날인 6월 1일에만 진행에 지장을 줄 정도로 내렸고, 다음날부터는 흐리지만 비는 내리지 않아 준비한 학과, 동아리 소속 학생들은 남은 일정은 그대로 진행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축제가 일괄 취소되자 분개하였다. 게다가 단순히 비 때문에 중단한 걸 총학 측에서는 기상상태 악화도 아닌, 자연재해라는 표현을 써가며, 축제를 중단시킨 사유를 정당화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총학 측에서) 미리 기상 정보를 알고 있었으면서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 아니냐'라는 비판과 함께 축제 관련 예산 회계 결과를 공개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4.2. 2015년 학생회관 추락사 사건

2015년 1월, 학생회관으로 쓰이고 있는 구 바우어관 건물 지하 1층 계단에서 졸업을 한 달 앞둔 학생[9]이 계단에 발을 헛디뎌 넘어져 머리에 피를 흘리다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 학생이 머리에 피를 흘리던 때 경비원이 두 번째 순찰을 하고 있었는데, 학생을 바로 발견해서 119구급대에 실려갔으나 결국 사망했다. 학생이 사망 직전 동료 직장인들과 학교 근처에서 술을 마시다가 만취 상태로 모교 생각이 난다며, 구 바우어관 밖을 배회하다가 계단에 헛디뎌 쓰러진 것이라 한다.

교직원들과 당시 근무했던 경비원들 사이에서도 취업도 했고[10], 곧 졸업을 앞둔 학생이 운명을 달리한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4.3. 2017년 태권도학과 산하 시범단 내 폭행성추행 사건


사건은 2017년 8월 24일, 한겨레의 보도 기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단독] 5시간 원산폭격 시키고 목검으로 때린 대학 선배들

한겨레에 따르면 태권도학과 산하 태권도시범단 소속이었던 신입생 7명(남학생 4명, 여학생 3명)은 4월 입학 후, 꾸준히 해당 학과 2~4학년 남학생으로 구성된 선배 6명으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들은 주로 동아리방에 해당 신입생들을 집합시켜 목검과 플라스틱 파이프 등의 둔기를 이용해 무자비하게 구타하였으며, 몇 시간 동안 원산폭격을 하도록 강요하는 등 가혹행위를 일삼았다. 위 기사에 포함된 사진을 보면 상당히 충격적인데, 신입생들의 다리는 멍이 들다 못해 시퍼렇게 색이 변했고 원산폭격으로 인해 두피머리카락이 벗겨진 처참한 상태였다.

이들이 이토록 가혹한 폭행을 당한 이유는 황당한데, 그저 선배를 보고 웃었다, 졸았다는 등의 이유였다. 또한, 가해자들은 과제를 대신 시키거나 자신들의 폭력행위가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갈 것을 염려해 휴대폰을 수시로 검사하기도 했으며, 여학생들에게는 성희롱, 성추행까지 일삼았다.

피해자들은 부모와 함께 고소장을 제출했으며, 가해자들은 특수폭행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고 불구속 입건되었다. 이들은 상습적 폭행은 물론 성추행 혐의까지 더해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사건이 보도된 지 약 5시간 후, 총학생회를 비롯한 대학 본부측의 입장문이 올라왔다. 내용인 즉, 총학생회가해자 처벌 및 피해자 보호, 재발방지책 수립을 대학본부 측에 요구하였으며, 대학본부 측은 특별조사위원회를 꾸려 진상규명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과거 총학생회나 대학본부 측의 대응에 비추어보면 이번 대처는 상당히 빠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해당 사건이 미칠 악영향을 우려해 발빠르게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2017년 9월 1일, 체육대 학장 및 학생처장이 해임됐다. 조사는 현재까지 진행 중이며, 징계를 받을 교수가 더 나올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5. 2020년대

5.1. 2020년 코로나 확진자 발생 상황 대면시험 강행 논란



5.2. 2022년 학생회비 미납자 축제관람 차별 논란

계명대학교 축제가 호화로운 연예인 라인업으로 화제가 된 가운데 수혜비(학생회비 등)를 안 낸 재학생들에게 좌석을 차별화하겠다는 공지를 써 올려 불만을 샀다. 학교 측은 재학생들의 불만이 거세지자 현재 관련 공지를 내렸다.

대구에 소재한 계명대학교는 지난 16일부터 18일까지 교내 대학축제 '2022 대동제 What's your calla'를 진행하고 있다. 행사에는 싸이, 아이브, (여자)아이들, 10cm, 칼라 워터파크, 디헬, 베이식, 할리퀸 등 국내 유명 연예인들이 섭외되면서 화제가 됐다.

하지만 계명대 총학생회는 축제 과정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재학생들 중 수혜비를 납부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공연 좌석을 차별화하겠다고 공지해 논란이 됐다.

인사이트 "학생회비 안 냈으면 공연 뒤에서 봐라"...계명대 축제 '차별' 논란

5.3. 2023년 남자 신축 기숙사 빈대 발견 사건

2023년 하반기에 유럽에서 빈대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뉴스로 보도가 된 가운데 2023년 9월 중순부터 계명대학교의 남자 신축 기숙사에서 빈대가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빈대가 나온 기숙사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10층 규모다. 328실에 남·여 학생 652명이 살고 있다. 계명대 관계자는 "전문가 확인 결과 빈대로 확인돼 기숙사뿐만 아니라 강의실을 포함하여 대학 전체를 소독할 방침이다" 이라고 밝혔다.#, #, #

[1] 출처: 영암관 앞 작은 비석,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2] 얼마후 524번은 2015년 개편때 521번을 통해 원래 번호를 되찾아 매곡리공영차고지까지 연장되어 운행중이다.[3] 2015년 개편때 다시 복귀[4] 당시 대구광역시 수성구 수성동4가에서 삼겹살 식당 운영 중이었다. 지하의 단체 손님석에는 그의 다른 산악 등정 사진이 있었다. 사고 후 나중에 그 식당은 사라졌다. 적어도 2006년 4월 말경에는 운영 중이었으나, 그 이후 2010년 이전에 없어졌다. 박무택을 구하러 올라갔다가 변을 당했기 때문에 2005년 대한민국 최초 산악 의사자(義死者)로 선정되었다. 영화 히말라야의 박정복 역의 모티브가 되었다. 2016년 모교(중·고등학교(학창시절 산악부에 소속했다))에 동상이 세워졌다.[5] 라인홀트 메스너도 아우인 귄터 메스너를 비롯하여 많은 친구와 동료를 여러 히말라야 산맥에서 잃었다. 귄터는 1970년에 형 메스너와 함께 낭가파르바트 정상 등정 후 하산 중 눈사태에 휩쓸려 실종되었다. 그나마 귄터의 시신은 실종 35년 만인 2005년에 눈이 녹으면서 떠내려와 현지인들에게 발견됐고, 이후 시신이 착용한 등산화로 신원을 확인한 메스너가 수습할 수 있었다. 메스너는 귄터의 시신을 베이스캠프 근처에서 화장하고 재를 히말라야에 뿌렸다.[6] 고산에서 시신은 눈과 얼음에 얼어붙어 100킬로그램을 훌쩍 넘게 되므로 발견해도 수습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1990년대까지는 그걸 잘 몰라서 시신 수습하러 원정대가 가서 또 죽고 다치는 일이 있었다. 고산의 시신들이 괜히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7] 이들의 시신은 나중에 중국인 등반팀이 발견했다.[8] 실제로 승합차수면제가 든 음료 등은 인신매매 관련 괴담의 단골 요소[9] 부산에 취업도 했고 취업 교육을 받다가 모교 생각이 나서 모교로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10] 이 때 술모임이 취업 축하 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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