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돌궐 관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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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와 돌궐(쾩튀르크)의 외교관계를 서술한 문서.양국은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함께 수나라를 견제했을만큼 서로 매우 우호적이었다. 한국 외교부 웹사이트에 올라오는 기고문이나 인터뷰 등에서는 한국과 튀르키예, 혹은 여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우호 관계를 언급할 때 고구려-돌궐 관계를 간략하게 언급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기고문] 터키/1,500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 김창엽 주터키대사 [인터뷰] 한-투르크메니스탄 수교 25주년을 맞이하여 국영 방송사와의 인터뷰 : 정태인 주투르크메니스탄대사
2. 역사
튀르키예 현지에서 열린 수교 60주년 학술·문화심포지움에서 한-터키 관계가 2,000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나, 기록으로 입증되는 구체적인 교류는 6세기 중엽부터라는 것이 양국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양원왕 7년인 551년 7월 돌궐이 백암성을 공격해 고흘 장군이 이끄는 10,000명이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다.[1] 또 56년이 지난 영양왕 8년인 607년에는 돌궐에 사신을 보냈는데, 그곳에서 수나라 양제를 만났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 보아 건국 초기에는 유연과 가까웠을 고구려를 의심했으나, 점차 수나라에 대응하기 위한 연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나라 제2대 황제로 즉위한 지 3년째인 양제가 계민 카간을 직접 찾아간 것은 북방 이민족들의 이간책과 위력 행사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사신은 돌궐과의 연합을 모색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는데, 양제는 자신보다 먼저 와 있던 고구려 사신을 보자 이를 눈치채고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기록이다. 이날 고구려 사신과의 만남에 대해 《수서》(隋書, 636년 장손무기, 위징 편찬 수나라 역사서)가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계민은 고구려 사신과 양제가 만나는 것이 꺼려지기는 했지만, 이 일을 숨겼다가는 더 큰 후환이 있을 것으로 판단해 고구려 사신을 양제에게 데려갔다. 이 자리에서 양제는 버럭 화를 내며 고구려 왕이 빠른 시일 내에 입조하지 않으면 군사를 거느리고 순행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고구려는 끝내 이를 거절했고, 훗날 수나라는 이를 빌미로 세 차례나 침략했다.
이날 양제와의 만남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8년인 607년 편에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돌궐과의 동맹이 이때부터 더욱 돈독해져 당나라에 의해 동돌궐이 패망하기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행정안정부 국가기록원 : 동양의 양 끝, 한 - 튀르키예 왜 형제의 나라인가?
수나라 제2대 황제로 즉위한 지 3년째인 양제가 계민 카간을 직접 찾아간 것은 북방 이민족들의 이간책과 위력 행사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사신은 돌궐과의 연합을 모색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는데, 양제는 자신보다 먼저 와 있던 고구려 사신을 보자 이를 눈치채고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기록이다. 이날 고구려 사신과의 만남에 대해 《수서》(隋書, 636년 장손무기, 위징 편찬 수나라 역사서)가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계민은 고구려 사신과 양제가 만나는 것이 꺼려지기는 했지만, 이 일을 숨겼다가는 더 큰 후환이 있을 것으로 판단해 고구려 사신을 양제에게 데려갔다. 이 자리에서 양제는 버럭 화를 내며 고구려 왕이 빠른 시일 내에 입조하지 않으면 군사를 거느리고 순행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고구려는 끝내 이를 거절했고, 훗날 수나라는 이를 빌미로 세 차례나 침략했다.
이날 양제와의 만남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8년인 607년 편에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돌궐과의 동맹이 이때부터 더욱 돈독해져 당나라에 의해 동돌궐이 패망하기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행정안정부 국가기록원 : 동양의 양 끝, 한 - 튀르키예 왜 형제의 나라인가?
돌궐 제2제국(후돌궐)의 비가가한 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무칸 카간의 장례식 때 고구려 조문사절단이 돌궐을 방문했다고 한다.
오르혼 비문은 ‘호쇼 차이담'(Khöshöö Tsaidam)이란 이름의 비석으로, 7세기 돌궐을 지배한 두 명의 왕자를 기리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당시 돌궐을 중심으로 한 주변국과의 역사와 상황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돌궐만이 아니라, 다른 유목민족은 물론 당나라와 고구려에 관한 기록도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고구려의 경우, 단 한 줄이 비문에 새겨져 있다. ‘돌궐의 왕이 죽자 로마, 중국, 키르키스… 고구려(Böküli)[2]에서 온 많은 조문객들이 방문해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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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인의 조상 돌궐(突厥, 튀르크의 한자 음차 표기)은 약 1,400년 전 한국인을 대거 받아들였다. 중국 역사서 인 《구당서》(舊唐書)는 7세기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유민이 당나라와 돌궐 등에 유입되었다고 기록했다.
수나라는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수 양제는 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의 막사를 찾았다가 고구려의 사신이 와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3] 두 나라가 손을 잡는다면 강대국 수나라도 위태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경험은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는 계기가 된다.
8세기에 제작된 돌궐(제2제국) 장군 퀼테긴(Kul tegin)의 비석에는 6세기 돌궐 제1제국 가한의 장례식에 동쪽에 있는 '뵈퀼리'[4]에서 사신이 왔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뵈퀼리는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통용된 고구려의 명칭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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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는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수 양제는 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의 막사를 찾았다가 고구려의 사신이 와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3] 두 나라가 손을 잡는다면 강대국 수나라도 위태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경험은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는 계기가 된다.
8세기에 제작된 돌궐(제2제국) 장군 퀼테긴(Kul tegin)의 비석에는 6세기 돌궐 제1제국 가한의 장례식에 동쪽에 있는 '뵈퀼리'[4]에서 사신이 왔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뵈퀼리는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통용된 고구려의 명칭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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