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8:48

고바야시 세이지(1958)

고바야시 세이지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4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방어율
1983년
후쿠마 오사무
(한신 타이거스)
2.62
고바야시 세이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20
1985년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드래곤즈)
2.65

한화 이글스 등번호 89번
이영우
(2012~2015)
고바야시
(2016)
윤학길
(2017~2019)
}}} ||
파일:external/kupilion.symphonic-net.com/kobayashi-seiji-83-co.jpg
현역 시절
파일:/image/001/2016/04/17/AKR20160417041800007_01_i_99_20160417160205.jpg
짧디 짧았던 한화 이글스 코치 시절
고바야시 세이지
[ruby(小林, ruby=こばやし)] [ruby(誠二, ruby=せいじ)][1]
小林聖始란 명의를 사용했다. 발음은 동일] | Seiji Kobayashi
출생 1958년 1월 22일 ([age(1958-01-22)]세)
히로시마현 히바군 다카노정[2]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히로시마 현립 히로시마 공업 고등학교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75년 드래프트 4라운드 (히로시마)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5~1980)
세이부 라이온즈 (1981~1983)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4~1988)
지도자 주니치 드래곤즈 2군 투수코치 (2005~2011)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16)

1. 개요2. 선수 경력3. 해설자, 지도자 경력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한화 이글스의 코치.

2. 선수 경력

1975년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1981년에 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해 중간계투마무리 투수로 활약했고, 1982년 세이부가 퍼시픽리그 우승을 결정지은 시합에서 마무리로 등판,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일명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

1984년에 다시 히로시마로 복귀, 중간계투임에도 불구하고 규정이닝을 넘긴 130과 2/3이닝을 소화하며 평균자책점 2.20 11승 4패 9세이브를 기록하며 생애 첫 개인타이틀인 평균자책점왕을 수상했으며, 동년 1984년 일본시리즈에서도 1경기에 등판해 구원승을 기록, 사상 최초로 센트럴, 퍼시픽 양대리그에서의 일본시리즈 승리를 거둔 투수가 되었다. 허나 1984년의 혹사로 인해 팔꿈치 부상을 입어 1988년 은퇴하였다. 통산 기록은 평균자책점 3.70 29승 15패 20세이브.

3. 해설자, 지도자 경력

은퇴 후 해설자를 맡았다가 2005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2군 투수코치를 맡았으나, 당시 감독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2011년 퇴임하자 같이 퇴단. 그러다가 2016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 저번 시즌 투수코치 니시모토 다카시에 이어서 한화 이글스의 1군 투수 코치를 맡게 되었다.

그러다가 2016년 4월 17일에 감독의 투수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팀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일부 코치의 월권행위라는 비판을 남기고 떠난 시점과 김정준 전력분석코치의 갑질 논란이 일어난 시기가 너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논란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또한 기사를 쓴 기자가 이경호 기자인데, 이경호 기자는 아이러브베이스볼에서 김정준 코치의 행위를 보도한 바로 그 기자다. 때문에 김정준 코치가 법적 대응 드립을 치자, 팩트로 받아친게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이런 고바야시 코치에 대해 박동희 기자는 4월 18일 야시장에서 "한국 야구를 우습게 본 것이다", "전쟁 중에 도망간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 야구에 다신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극도로 주관적이고 논점 일탈적인 해설을 내뱉었다. 이것은 투수관에 대한 충돌로 인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 고바야시 코치와 김성근 감독 사이의 쟁점을 흐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 동안 한국야구계에 몸담았던 고바야시 코치에 대한 극도의 무례라고 볼 수 있겠다.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박동희의 이 발언을 번역해서 고바야시 코치에게 알려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결국 박동희 기자는 23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김성근 감독을 비판하는 칼럼을 냈다. # 그러나 싸늘한 시선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귀국 후에는 J SPORTS 채널의 해설자로 활동 중이다.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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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퇴 후 2010년까진[2]쇼바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