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년 ~ 1025년 (향년 26세)
1. 개요
일본 헤이안 시대의 시인. 이즈미 시키부의 딸. 모친과의 구분을 위해 코시키부(小式部)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아버지가 타치바나노 미치사다(橘道貞)이기에 타치바나 씨(橘氏)에 속한다.2. 생애
타치바나노 미치사다(橘道貞)와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 오에 씨(大江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 모두 지방관 계급 출신이었는데, 우대신(右大臣) 후지와라노 사네스케(藤原實資)의 일기인 《소우기(小右記)》에는, 남편 미치사다가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에게 신임을 얻어 미치나가 집안의 사무를 도맡아 보던 가신(家臣)이었다고 전해진다. 미치사다가 이즈미노쿠니(和泉國)에 부임했을 당시 아내인 오에노 마사무네(大江雅致)의 딸도 동행하면서 남편의 부임지인 '이즈미'와, 아버지의 관직명 '식부'에서 따온 '이즈미 시키부'로 불리게 되었다.미치사다는 999년부터 1003년까지 이즈미 지방관에 머물렀으나, 《영화 모노가타리(榮花物語)》에 따르면 1001년 교토에 전염병이 맹위를 떨쳐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당시 레이제이 덴노(冷泉天皇)의 3남 타메타카 친왕(爲尊 親王)은 그 난리통에 이즈미 시키부와 신츄나곤(新中納言)을 비롯한 많은 여성들과 호색한 행동을 벌이다가 결국 1002년 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즉 이즈미 시키부는 처음에는 남편을 따라갔지만 1~2년 만에 교토로 돌아가 타메타카 친왕의 애인이 된 것이며, 당연히 이들의 관계도 끝난다. 이 사건은 엄청난 스캔들이라서 이즈미 시키부가 부모와 절연당했을 정도였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남편에게 새 아내가 생기면서 결별한 것이라고 한다.
미치사다가 이즈미 지방관의 임기를 마친 것은 1003년 봄인데, 이미 다음 해인 1004년부터 무츠(陸奥) 지방의 지방관으로 내정되자, 미치나가는 미치사다를 위해 3월 18일에 축하와 송별회를 겸한 연회를 열어주었다고 자신의 일기인 《미도칸파쿠기(御堂關白記)》에 기록하고 있다. 또한 미치사다가 임지로 출발한 지 7개월 뒤인 윤달 9월 16일, 뒤이어 교토를 출발하는 그의 처자에게 선물로 옷가지 등을 보냈다고 전한다. 여기에 이즈미 시키부는 포함되지 않았기에 아무리 늦어도 이 무렵에는 이혼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미치사다가 도호쿠(東北)의 무츠라는 먼 변방으로 떠나는 것을 우려해 “원래대로라면/나도 함께 떠났을/무츠 지방의/명소 코로모노세키/그저 말로만 듣네.”もろともに/立たましものを/陸奥の/衣の關を/よそに聞くかな(《이즈미 시키부집(和泉式部集)》 847)라는 와카를 읊는 등 애착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즈미 시키부는 남편인 미치사다가 교토로 돌아온 1003년 타메타카의 남동생 아츠미치 친왕(敦道 親王)의 애인이 되고, 1004년 그로 인해 그의 정실이 친정으로 가출하는 사태에 이르는 등의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1007년 아츠미치 또한 요절하고, 1009년 이즈미 시키부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요청에 따라 이치조 덴노(一條天皇)의 중궁(中宮) 후지와라노 쇼시(藤原彰子)의 뇨보(女房)로 출사하고, 그곳에서 만난 후지와라노 야스마사(藤原保昌)와 재혼한다. 야스마사는 야마토(大和) 지방관을 거쳐 1020년 단고(丹後)로 부임하자 어머니인 이즈미 시키부도 단고로 동행한다. 한편 아버지 타치바나노 미치사다는 1016년 4월에 사망했다.
한편 고시키부노 나이시는 이즈미 시키부가 단고로 건너가 있을 무렵에 후지와라노 쇼시의 궁녀로 입궁해 그녀를 모셨는데, 그녀 역시 어려서부터 시와 노래에 능해 엄마가 대신 지어줬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와카 실력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시키부노 나이시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아들이자 쇼시 중궁의 남동생인 관백(關白) 후지와라노 노리미치(藤原教通)의 눈에 들어 아들을 낳게 된다. 《이즈미 시키부집(和泉式部集)》에 따르면, 이때 미치나가는 손자를 낳은 고시키부를 '며느리'라고 호칭하는 글을 써서 이즈미 시키부가 담동했다고 한다. 사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어머니 토키히메(時姫)도 지방관 계급 출신이라서 하급귀족이라고 멸시하기도 좀 그랬지만.
후지와라노 킨나리(藤原公成)와 혼인했으며 1025년 11월, 난산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고시키부의 나이는 겨우 26세였다.
留め置きて/誰をあはれと/思ひけん/子はまさるらむ/子はまさりけり
먼저 간 딸은/누굴 더 애달프게/생각할는지/어미보다 자식일까/역시 자식이겠지
《이즈미 시키부집(和泉式部集)》 (485)
먼저 간 딸은/누굴 더 애달프게/생각할는지/어미보다 자식일까/역시 자식이겠지
《이즈미 시키부집(和泉式部集)》 (485)
이즈미 시키부가 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남긴 와카다.
3. 기타
백인일수 60번에 수록된 그녀의 와카에 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노래대회(歌合)에 초대된 코시키부노 나이시에게, 후지와라노 사다요리가 "단고에서 어머니의 편지가 아직 오지 않았더냐"라고 그녀를 떠보았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직 시 안 써줬나 보넼ㅋㅋ" 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다요리 앞에서 바로 시를 지어 읊어주고 넉다운[1]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를 보아 코시키부노 나이시가 꽤 당찬 성격이었던 모양.4. 백인일수
百人一首 백인일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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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번 코시키부노 나이시(小式部内侍)
[ruby(大江,ruby=おおえ)][ruby(山,ruby=やま)] いく[ruby(野,ruby=の)]の[ruby(道,ruby=みち)]の [ruby(遠,ruby=とお)]ければ まだふみもみず [ruby(天,ruby=あま)]の[ruby(橋,ruby=はし)][ruby(立,ruby=だて)]
오에 산 넘어 너른 벌판 지나는 먼 길이기에 편지 왕래는 물론 가본 적도 없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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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산 넘어 너른 벌판 지나는 먼 길이기에 편지 왕래는 물론 가본 적도 없다오
[1] 사다요리는 답가를 하지 못하고 물러나 망신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