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77년 1월 18일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광주고속 고속버스 화물칸에 실은 송금함에 들어 있던 광주고속 부산영업소의 수입금을 도난당한 사건.2. 사건 발생
1월 18일 부산직할시[1] 동구 범일동 소재 부산고속버스터미널[2] 오전 10시 50분 서울로 출발하는 전남 5바 1689호 고속버스 화물칸에 광주고속 부산영업소 직원이 여느 때처럼 서울 본사로 보낼 전날 수입금 2백 22만 4천원[3]이 든 철제 송금함을 실었고 버스는 5시간 40분 후인 오후 4시 30분 경 동대문고속버스터미널[4][5]에 도착하여 광주고속 서울영업소에서 송금함을 열었는데 그 안에는 현금 12만 4천원만 남아 있고 송금함의 자물쇠가 공구로 뜯겨진 흔적을 발견한 직원들은 부산영업소 측에 전화를 걸어 수입금이 얼마였는지 확인한 후 경찰에 도난 사실을 신고하면서 수사에 들어갔다.경찰은 해당 버스의 화물칸을 수색하여 담배꽁초와 타고 남은 성냥개피를 발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이 화물칸에 숨어들어 송금함을 뜯고 현금을 절취했으며 버스에 송금함을 실어 보낸다는 사실을 잘 아는 전직 운전기사나 직원이 범인일 것으로 추측하여 수사망을 좁혀 나갔다.
3. 범인 체포
좌측부터 범인 이봉안, 우영숙 |
범인 이봉안이 트렁크에 숨는 것을 재현하는 장면 |
결국 사건 발생 10일 만인 1월 28일 부산동부경찰서는 전직 버스 운전기사 이봉안(당시 59세)[6]과 그의 아내 우영숙(당시 39세)[7]을 특수절도 혐의로 체포하여 다음날인 1월 29일 구속기소 하고 범행에 쓰인 가로 83cm, 세로 44cm, 높이 39cm의 알루미늄 제 대형 트렁크와 훔친 현금 중 쓰고 남은 1백 67만원을 압수하였다.
당시 사건 보도
3.1. 사건 경위
범인 이봉안은 1972년부터 광주고속의 운전기사로 일했지만 회사 공금을 훔친 것이 발각되어 1975년 해고당했고 아내인 우영숙은 대구와 진주 등지에서 약 10년 정도 여관 종업원으로 일했으며 1959년 부산과 서부 경남지역을 오가는 경전여객의 시외버스 안내양으로 근무하다가 같은 회사의 운전사였던 이봉안과 눈이 맞아 동거 생활에 들어가면서 두 아이를 낳았다.광주고속에서 쫓겨난 후 부산의 월 6천원 짜리 사글세 방에 네 식구가 살면서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던 이봉안은 직장을 구하려고 이곳 저곳을 떠돌다가 "크게 한탕해서 집이라도 장만해야겠다"며 범행을 결심했고 아내 우영숙과 공모하여 사건 전날인 1월 17일 범일동 시장에서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만 한 대형 알루미늄 트렁크를 4천원을 주고 사들여 터미널 근처의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안에서 뚜껑이 여닫히게 개조한 후 사건 당일인 1월 18일 아침 짐꾼을 불러 이봉안이 숨어 있는 트렁크를[8] 터미널까지 갖고 가서 고속버스 화물칸에 적재하고 우영숙은 그 버스에 탑승하였다. 버스가 동래 톨게이트를 통과할 무렵 트렁크 밖으로 기어나온 이봉안은 성냥불을 켜서[9] 찾아낸 송금함 자물쇠를 드라이버로 뜯어내어 안에 든 현금 2백 22만 4천원 중 12만 4천원만 남기고[10] 2백 10만원을 챙겨서 다시 트렁크 안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이후 버스가 동대문 터미널에 도착하자 우영숙은 트렁크를 받아서 짐꾼으로 하여금 관악구 봉천동 소재 여인숙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이봉안이 훔친 현금을 정리한 뒤 트렁크를 버린 채 그날 야간열차로 부산에 돌아와 전세방을 얻어 세간도구를 사들였다. 이 과정에서 우영숙은 반지와 손목시계,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을 샀다고 한다.
4. 결과
이 사건을 담당한 부산지검은 범인 이봉안과 우영숙에게 특수절도죄를 적용하여 각각 징역 5년을 구형하였고 최종 재판에서 몇년형이 선고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아래에 링크된 수사반장 300회 특집에서는 남편은 징역 2년, 아내는 징역 1년의 실형이 선고되었다.5. 극화
해당 항목 참조.[1] 당시에는 정식으로 '부산직할시'의 명칭을 얻지는 못하고 경상남도에서 분리되어 직할시의 지위를 얻은 그냥 '부산시'였으나 그 시절부터 이미 '부산직할시' 라는 명칭이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2] 현 남포동 일대인 충무동에 최초로 터미널이 개설되었지만 교통정체 등의 이유로 당시 공장지대이자 나름 외곽 지역이었던 범일동으로 이전했다. 이후 범일동 일대도 개발되면서 교통난이 심각해지자 서울처럼 터미널 분산을 추진하였다. 1980년 경 고속버스 부문은 동래 쪽으로 옮겨 부산고속터미널이 되었고 시외버스 부문은 두 군데로 쪼개어 동부권 노선은 현재의 명륜역 일대의 부산동부시외터미널, 서부권 노선은 사상역 일대의 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로 이전하였다. 하지만 범일동에서 옮겨간 곳도 딱히 외곽 지역은 아니었기 때문에 전부 교통난을 유발하였다. 애초에 동래 일대는 부산의 대표적인 부도심이었고 서부터미널 이전지 역시 경부선 사상역의 존재로 인해 나름 번화가가 형성되어 있었던 곳이었다. 그나마 서부터미널은 고속도로 접근성이 워낙 좋아 살아남았지만 고속터미널과 동부시외터미널은 여러 모로 여건이 최악이라 결국 2000년대 초반 노포동 일대로 통합 이전하였다.[3] 2023년 7월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2천 180만원 정도이다.[4] 이 무렵 서울의 고속버스 터미널은 동대문, 서울역, 을지로, 용산 등지에 각 버스 회사 별로 흩어져 있었다. 이후 경부, 호남고속도로가 완공되면서 열차와의 경쟁 구도가 형성되어 도심지의 극심한 교통 정체가 유발되면서 터미널 이전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동대문터미널과 서울역터미널에 있었던 장거리 노선들은 당시 서울 외곽 지역이었던 반포동에 신축한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통합했다. 서울역터미널에 있었던 의정부, 문산 등 단거리 수도권 서북부 노선들은 홍제동터미널로 1차 이전한 후 다시 불광동으로 이전해 서울서부버스터미널이 되었다. 용산터미널은 서초동으로 이전하여 지금의 서울남부터미널이 되었다.[5] 을지로 터미널 등은 먼저 도로 정체로 인해 그 당시 나름 외곽지였던 마장동으로 이전하여 동마장터미널이 되었지만 1980년대 이후 서울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마장동 역시 번화가로 확장되면서 결국 동마장터미널은 동서울터미널과 상봉터미널로 분산 배치되었다. 동마장터미널만 분리된 이유는 당시 1일 최대 이용객 수가 3만명을 넘었고 노선망도 다양했는데 이미 강북 지역은 서울 팽창으로 인해 이 인원들을 모두 수용할 정도로 큰 단일부지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6] 1918년생[7] 1938년생. 최초 보도에는 구영숙으로 나왔지만 나중에 정정되었다.[8] 이봉안은 키 165cm, 몸무게 60kg으로 당시 대한민국 남성으로서는 제법 건장한 체격이었기 때문에 아내 혼자서는 절대로 그 트렁크를 옮길 수 없었다.[9] 당시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들은 "만약 범인이 성냥 대신 손전등을 사용했다면 단서를 찾지 못하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졌을 것"이라며 소감을 밝혔고 범인 이봉안도 화물칸에서 성냥을 사용하고 무심결에 담배를 피운 것이 꼬투리를 잡혔다며 후회했다고 한다.[10] 현금을 전부 가져가면 서울영업소에서 바로 수상하게 여길 것으로 생각하여 일부러 돈을 조금 남겨 부산영업소의 수입금이 그것뿐인 것으로 위장하려는 의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