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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추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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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중국공산당 임시 중앙위원회 총서기
본명 <colbgcolor=#ffffff>취마오먀오(瞿懋淼, Qú Màomiǎo, 구무묘) → 취솽(瞿雙/瞿双, Qú Shuāng, 구상)
활동명 취추바이(瞿秋白, Qú Qiūbái, 구추백)
웅백(熊伯), 이후 추백(秋白)
출생 1899년 1월 29일
청나라 강소성 무진현
사망 1935년 6월 18일 (향년 36세)
중화민국 복건성 장전현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소비에트공화국 파일:중화소비에트공화국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외교부 소속 러시아어학교
직업 언론인, 정치가, 문필가
종교 무종교 (무신론)
총서기
재임 기간
(사실상)2대[1] 1927년 8월 7일 ~ 1928년 7월 11일
1. 개요2. 생애
2.1. 유년시절부터 공산주의 입문까지2.2. 러시아 특파원 생활과 공산당 입당2.3. 중국 내에서의 혁명 활동2.4. 최후
3. 후일담
3.1. 문혁 시기의 격하와 복권
4. 저서5. 여담6. 매체에서7. 관련문서8. 참고문헌

[clearfix]

1. 개요

취추바이는 구추백이라고도 한다. 중화민국 시절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언론인, 작가, 번역가로, 본명은 구무묘, 이후 구상, 자는 웅백, 또는 추백이었다. 1899년 강소성 무진현에서 태어나 1920년 러시아 특파원으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나는 등 소비에트 러시아의 형편을 중국에 널리 알리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192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1927년에는 임시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총서기 대행으로 공산당을 영도했다. 그러나 연이은 폭동 전략의 실패로 1928년 좌경맹동주의자, 교조주의자로 비판받고 물러났다. 1931년 리리싼 노선 비판을 통해 파벨 미프, 왕밍, 보구 등 28인의 볼셰비키들이 당권을 장악하면서 그동안 유지하고 있던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정치국 위원 등 당의 모든 지도적 위치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상하이에서 문예운동에 열중하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수도 루이진으로 이동해 교육부 부장, 선전부 부장 등을 역임하나 1935년 국민당의 손에 붙잡혀 죽음을 맞이했다.

2. 생애

2.1. 유년시절부터 공산주의 입문까지

어머니가 자살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후 나는 혈혈단신으로 북경에 갔다.[2]
1899년 강소성 무진현(오늘날 장쑤성 창저우시) 태생이다. 말에서 말까지 300년 동안 관리를 지낸 신사계급 선비 집안에서 6남 1녀 중 장자로 태어났다. 증조부 구석보(瞿锡保, 취시바오)는 도광 연간에 과거에 급제했다. 조부 구정포(瞿贞甫, 취젠푸)는 관청의 문서를 관리하는 문안 관직을 지냈으며 이후 조정에서 정5품 봉정대부를 하사받았다. 종조부 구갱포(瞿赓甫, 취겅푸, ?~1903)는 동치 9년(1870)에 과거 급제해 의창의 현 지사로 부임했고 광서 24년(1898)에 호북성 안찰사와 포정사, 이후 순무사 대리[3]에 임하였다. 백부 구세호(瞿世琥, 취쉬후, 1866~1930)는 저장, 소산, 상산의 현 지사를 역임했다. 그의 아버지 구세위(瞿世玮, 취쉬웨이, 1875~1932)는 서화와 검술, 의학에 능하였으나 아편 중독자로 일가를 돌보지 않아 백부가 일가를 이끌었다.

1903년 조부가 죽고 기울기 시작한 구씨 집안은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풍비박산나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가출했고 청말 고위 관료의 딸이며 시가에 능했던 어머니 금형옥(金衡玉, 진헝유)은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릴 길이 없어 1916년 2월 자살했다.[4] 1915년 관영소학교와 창저우부중학(이 때 훗날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초대 서기가 되는 장타이레이(張太雷, 장태뢰)와 함께 중학을 다녔다.)을 졸업한 뒤 17세의 나이로 우시 남문 근처의 양씨 소학교 교사로 일하다 베이징에서 공무원생활을 하던 사촌형 취춘바이(瞿纯白, 구순백)의 도움으로 한커우의 우창 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이후 마찬가지로 사촌형의 도움을 받아 베이징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학비로 어려움을 겪어 청강생에 머무르다 문관 보통고시에서도 낙방했다. 이 때문에 1917년 외교부가 개설한 학비가 없고 용돈을 지급하며 졸업 후 러시아 관련 업계에 유급채용을 보장해주는 러시아어 학교(아문수료관)에 입학했다. 그는 이 곳에서 처음 러시아어를 접했지만 줄곧 우등생이었다.

1919년 5.4 운동이 일어나자 북경 지역의 학생운동 지도자들 중 하나로 떠오른다. 5.4 운동의 와중에 그는 러시아어 학교의 학생총대표에 선출되었고 북경대중학교학생연합회(北京大中学校学生联合会)에서 활동했다. 이 때 평생 그의 족쇄가 될 폐결핵이 발병하였다.

파일:구추백20.jpg
1920년 3월 잡지 '신중국'에 실린 취추바이의 모습

1920년에는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론'을 읽고 리다자오 등이 북경대에서 동년 3월 조직했던 마르크스주의연구회에 가입해 마르크스주의를 접한다. 이때 그는 레프 톨스토이 문학과 아나키즘에도 빠져 있어서 평론가 겸 작가인 정전둬(鄭振鐸, 정진탁)와 함께 잡지 <신사회>를 발간하고 문학연구회 지도 간부로 활동했다. 그 해 9월에는 베이징의 신문 신보(晨報)에서 2천원의 연봉을 제시하자[5] 러시아어 학교를 중퇴하고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하게 된다. 모스크바 특파원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10월 18일 상하이를 떠나 러시아로 가던 중, 11월 7일 하얼빈 노동자들의 10월 혁명 3주년 기념 대회에 참석해 인터내셔널가를 처음 듣고 크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자서전 '부질없는 이야기'와 공산당에 제출한 자기소개서에 기초한 연보를 참고했다.

2.2. 러시아 특파원 생활과 공산당 입당

모스크바에 파견된 취추바이의 임무는 10월 혁명 이후의 소련을 살펴보고 중국에 알리는 것이었는데, 번역가로 활동하며 톨스토이 작품을 번역할 정도의 러시아어 실력을 가졌던 취추바이는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을 최초로 인터뷰한 중국인 기자였으며,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레프 톨스토이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문학에 심취했던 그는 톨스토이의 딸 소피야와 함께 야스나야 폴랴나의 톨스토이 생가에 방문했으며, 오페라 가수 표도르 살리아핀이 푸시킨의 시를 노래하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다.

1921년 1월 25일 모스크바 야로슬랍스키역에 도착하여 2월에 전러시아중국인노동자협의회에 참석한 취추바이는 3월 2일에는 크렘린을 방문해 교육인민위원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를 인터뷰했으며, 8일에는 전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6] 제10차 당대회에 참석해 기사를 작성했다. 6월 22일부터 7월 12일까지 코민테른 제3차 세계대회에 참석해 기사를 작성하고 중국 공산주의 운동을 소개했다. 이 당시 그는 복도를 지나던 레닌을 만나 짧게 대화했다. 또한 당시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을 하던 트로츠키와도 회견했다. 이 해 7월,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자 9월에는 코민테른 제3차 세계대회의 중공 대표로 소련에 온 뒤 모스크바에 머물던 중학교 동창 장타이레이의 권유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코민테른이 운영하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이 중국반을 개설하자 그곳의 통역 조교가 되었다. 그는 번역과 특파원 활동을 하며 22년 말까지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중국반에 재직하였고, 류사오치, 펑수즈(彭述之, 팽술지), 런비스(任弼时, 임필시) 등 조만간 중국 공산주의운동의 거목이 될 이들을 비롯, 60여명의 유학생들을 지도했다. 12월 23일에는 제9차 전러시아 소비에트대회에 참석해 기사를 작성했다.

1922년 1월에 그는 극동인민대표대회에 비공식 중국 대표로 참가했으며, 3월 27일 열린 러시아공산당 제11차 당대회에 참석했다. 동년 11월 5일, 천두슈가 중공 대표로 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에 참석하였을 당시 통역을 맡았다. 연말까지 그는 기자나 통역사 신분으로 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뿐만 아니라 이에 맞춰 개최된 모스크바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회의, 청년 공산주의 인터네셔널 제3차 세계대회, 적색 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제2차 세계대회에 참석했다. 이 와중에 천두슈에게 귀국하여 당에 공헌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1923년 1월 13일 함께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파일:1922comintern.jpg
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에 참석한 천두슈(아랫줄 왼쪽 끝)와 취추바이(맨 뒷줄 왼쪽 끝). 아랫줄 오른쪽 끝의 인물은 일본 대표단 가타야마 센(片山潛)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그는 ⟨공산주의인간화⟩, ⟨소비에트러시아의 경제문제⟩ 등 수십편의 문건과 기사들을 발표하고, 러시아 문학사 연구서와 특파원 수기인 《아향기정(饿乡纪程)》, 《적도심사(赤都心史)》를 저술하였다.

2.3. 중국 내에서의 혁명 활동

1923년 1월 귀국과 동시에 취추바이는 차이허썬이 이끌던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에서 활동하게 된다. 당시 중공의 중앙 기관지였던 계간 ⟨신청년(新靑年)⟩ 발행 업무를 맡아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선봉(前锋)⟩의 주필, 그리고 ⟨향도(嚮導)⟩의 편집자로도 활동했다. 광저우에서 열린 1923년 6월 중국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는 의결권을 가진 대표자로 참석했다. 대표대회는 6월 12일부터 6월 20일까지 열렸는데, 대회 기간중인 6월 15일 취추바이는 인터내셔널가의 중국어 번안 가사를 작사, '신청년'지에 발표했다. 이 번안 가사는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 이후 상하이로 활동 무대를 옮긴 그는 같은 해 덩중샤(鄧中夏, 등중하)와 함께 상하이 대학을 설립하여 교무주임 겸 사회학과 학과장이 되었다. 이 때 상하이 대학의 학생이었던 호남성 출신 왕젠홍(王剑虹, 왕검홍)을 작가 딩링(丁玲, 정령)의 소개를 받아 만나게 된다. 둘은 1924년 1월 결혼하지만 반 년 남짓 지난 그해 7월 왕젠홍의 폐결핵으로 인해 사별하고 만다.

1924년 1월에는 1차 국공합작이 이뤄지자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여 대회의 선언문을 기초하였고 공산당 추천의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에 지명되었으며, 7월에는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위원이자 정식 중앙집행위원으로 국민당 기관지 '민국일보' 편집진을 역임하며 국공합작에 힘썼다. 국민당 중앙이 자리잡은 광저우와 상하이를 오가며 활동하던 이 시기에 취추바이는 상하이의 국민당 정객 심정일의 집에서 기거하였다. 당시 심정일의 아들인 화가 션젠룽(沈剑龙, 심검룡)의 아내이며, 첫 부인의 친구이자 마찬가지로 상하이 대학 학생이었던 양지화(杨之华)와 사랑에 빠졌다. 양지화는 션젠룽과 이혼하고 그 해 11월 7일 취추바이와 결혼했는데, 션젠룽은 이 사실을 공인하는 광고를 두 번이나 ⟨민국일보⟩에 게재하면서[7] 자신과 취추바이의 우정은 변치 않을 것이라 공언하고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를 전하는 대범한 모습을 보였다. 12월 19일에는 부부가 조계지 경찰에게 수배를 당해 지하활동에 돌입했다.

파일:양지화 구추백.jpg
1924년 말 아내 양지화와 단 둘이 찍은 사진. 이후 그들은 수배 상태가 되어 지하로 들어가게 된다.

귀국 이래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정치국 위원[8]등 중요한 간부로 활동하게 된다.

1925년 1월 11일 상하이에서 중공 제4차 전국대표대회(4전대회)가 열렸다. 그는 당 강령과 규약(장정) 개정안 초안 작성을 맡았다. 대회에서는 노농동맹과 혁명의 영도세력 문제에 대해 발언했으며, 처음으로 중앙위원이자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다. 5. 30 운동의 와중에는 중공 최초의 일간 기관지 열혈일보의 창간을 주도하였다. 9월에는 전임 선전부장 차이허썬의 아내인 중앙여성부장 샹징위와 현 선전부장 펑수즈의 불륜사건이 차이허썬에 의해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 안건으로 올라왔는데, 총서기 천두슈는 함구를 부탁했으나 취추바이가 떠들고 다녀 당내가 큰 소동에 휩싸이는 일이 있었다. 11월 23일에 서산회의가 열려 국민당 내에서 그와 공산당의 입지가 위험에 처했다. 12월에는 곽말약과 교류했다.

1926년에는 상하이와 베이징을 오가며 활동했다. 2월 21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공 중앙위원회 비밀회의에 참석했다가, 폐결핵으로 상하이에서 장기간 입원하였다. 8월 8일에는 광저우로 이동해 국민당 정부의 2차 북벌을 지지하는 합동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던 중 1926년 11월 22일부터 12월 16일까지 열린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제7차 전체회의는 ⟨중국 정세에 관한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제7차 전체회의 결의⟩를 발표했다. 스탈린의 주도로 작성된 이 문건을 보면,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관계를 끊을 것, 농민대중을 무장시킬 것, 혁명정부를 건설할 것, 광범위한 노농대중 사이에 조직을 형성할 것 등을 결의하고 있다. 1927년 5월 열린 제8차 전체회의의 ⟨중국 문제에 관한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제8차 전체회의 결의⟩ 또한 대동소이했다.

1927년 2월, 중앙선전부 부장 펑수즈를 비판한 문건을 발표하였다. 4월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의 지시를 알아챈 장제스가 먼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반공에 나서자 이에 호응하는 4.15 광저우 쿠데타까지 일어나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학살당했다. 4월 27일부터 5월 9일까지 우한에서는 중공 제5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중앙선전부를 대표해 참석한 취추바이는 중앙위원과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사전 제작한 총서기 천두슈와 펑수즈의 기회주의를 비판하는 소책자 '중국혁명중의 논쟁 문제'를 배포하였고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영도권 문제를 토론한 뒤 조직문제에 대해 발언했다. 5월 중순 마일사변이 일어나 공산당원들이 또 다시 학살당하고, 7월 12일 장궈타오 주도로 임시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열려 13일에는 국민정부에서 탈퇴를 선언하는 등 당조직이 궤멸당하고 지도부가 혼란하던 와중에 7월 15일 왕징웨이의 우한정부마저 분공을 결정하였다. 7월 26일에는 일시적으로 5기 임시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렇게 국공결렬이 일어나자 중국공산당은 8월 1일 난창 폭동을 일으켰지만 처참하게 실패했다. 취추바이는 직후 한커우의 소련 조계에서 열린 임시중앙위원회 전체회의였던 8.7 긴급회의를 주재하고 중앙위원회 대표로 사업보고와 결의문을 제출했다. 대표자들은 총서기 천두슈를 멘셰비키, 우경 투항주의, 기회주의자로 비판하고 전 선전부장 펑수즈와 함께 중앙위원회에서 제명했다. 여기서 그는 임시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정식으로 선출되었다. 8월 9일 열린 5기 임시 정치국 회의에서는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농민위원회와 선전부를 담당하게 되었으며, 당 기관지의 편집장으로 결정되었다. 이 때 아내 양지화도 여성부 책임자가 되었다. 이것이 1927년 8월 9일 저녁의 일로, 그의 나이 만 28세였다.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중앙위원회에서 부여한 정식 직위는 임시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장)로서 1년 남짓한 임기를 보내는 동안 취추바이는 여러 건의 폭동과 파업을 기획했으나 그 결과는 몹시 좋지 않았다. 임시 지도부가 처음으로 기획했던 9월 추수폭동부터가 실패였다.[9]

허나 취추바이의 당중앙은 1927년 11월, 상하이에서 5기 임시정치국 회의를 개최, 코민테른의 결의사항에 따라 지속적인 무장봉기를 주장하며 더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했고 국민당 좌파를 더 이상 칭하지 말고 소비에트 건설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9월 추수폭동의 일환으로 일어났던 11월의 만안 폭동, 12월 10일의 황마 폭동 그리고 12월 11일의 광저우 폭동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 광저우 폭동을 주도한 장타이레이가 사망하는 등 당에 막대한 손실만 입혔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취추바이는 코민테른에서 좌경맹동주의자로 비판받았고 1928년 5월 중순 비밀리에 소련으로 출국했다.

1928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6전대회)에서는 5기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이란 제목의 정치보고를 제출했다.[10] 여기서도 그는 중앙위원회와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이후 정치국 상무위원에는 들지 못했고, 샹중파(向忠發, 향충발), 리리싼 등의 공격을 받았다. 중앙위원회 총서기이자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는 샹중파가 선출되었다. 이후 당 노선은 샹중파-리리싼-저우언라이가 영도하였다. 7월 17일부터 열린 코민테른 제6차 세계대회에서 그는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원에 선출되었으며[11] 19일 열린 6기 1중전회의 결과에 따라 코민테른의 중국 대표단 단장으로 유임되었기에 모스크바에 남았다. 이후 귀국하는 시점까지 그는 국제레닌학교와 모스크바 손중산대학에서 강의했다.

1929년 1월에는 러시아어 계간지 '중국 문제'를 창간했다. 2월에는 폐결핵이 심해져 모스크바 근교 말리노의 레닌 요양원에서 요양했다. 7월에는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제10차 전체회의에 참석해 부하린을 비롯한 우익반대파를 비판했다. 11월에 천두슈가 당에서 축출되자 '중국의 청산주의와 기회주의'문건을 발표해 천두슈의 과오를 비판했다. 12월에는 '중국공산당사 개론'을 강의했다. 29년 트로츠키가 소련에서 추방당하자 손중산대학에서도 본격적으로 스탈린 반대파들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는데, 이 과정에서 무분별한 숙청을 반대하는 등 중재적인 태도를 보여 교장 파벨 미프와 제자 왕밍에게 비판받았다. 한편으로는 그가 트로츠키주의자 학생들을 밀고해 비밀경찰에 넘겼다는 주장도 있다. 이 사건에 대해 죽기 직전 쓴 자서전 '부질없는 이야기'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때 모스크바 중국노동대학(이전의 손중산대학) 학생 사이에서는 매우 격렬한 싸움이 일어났다. 나는 본래부터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없어서 단지 그 내분을 미봉하고 완화하려고만 했고, 상호 간의 폭로와 비판은 좋은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사정을 들어보니 가끔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 고의로 사실을 부풀려 상대방을 '타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 같았다. 나는 중재자 입장에 섰다. 이러한 나의 태도를 보고 그곳 당 지도부는 나를 기회주의자, 그리고 이색분자 옹호자로 여기게 되었다."[12]
이 때 형을 강하게 옹호하며 왕밍을 공공연히 비난하던 넷째 동생 취징바이가 당원증을 지역 당위원회에 반납당한 뒤 실종되는 일이 벌어졌다.[13]

파일:Qu_Qiubai's_family.jpg
1929년 모스크바에서 찍은 가족사진. 가운데는 딸 취두이(瞿独伊, 구독이).[14]

1930년 3월에 모스크바의 중국인 공산주의자들간의 상호 숙청이 일단락된 이후, 7월에는 숙청 과정에서 기회주의자들과 개인주의자들을 비호하였다는 비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코민테른 중국 대표단장 자리에서 해임되어 8월 26일 아내와 함께 중국으로 귀국했다. 대공황에 고무된 리리싼 등이 리리싼 노선을 전개, 1930년 7월 무리하게 창사 폭동을 주도했다가 실패한 직후였다. 상해에 도착한 취추바이는 9월 6일 중국공산당 6기 3중전회를 개최, 리리싼 노선에 대한 비판을 진행하나 그것이 불철저하여 '조화주의'라 비판받는다.

1931년 리리싼과 취추바이를 불신하게 된 코민테른에서 파벨 미프가 파견,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함께 귀국한 제자들인 '28인의 볼셰비키'들을 지도해 1월 7일 6기 4중전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샹중파는 총서기 자리를 진소우에게 넘겨주었다. 리리싼은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당했고 취추바이도 조화주의자, 좌경 교조주의자로 왕밍, 보구 등에게 비판당하며 정치국원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1월 27일, 왕밍이 완전히 당을 장악하면서 취추바이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자아비판을 발표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그만둔다. 이 과정에서 그의 지병이었던 폐결핵이 심각해졌다.

그 길로 당의 활동 대오에서 완전히 물러난 취추바이는 폐결핵을 치료할 겸 상하이로 떠났고 9월에는 목에 현상금이 걸렸다. 상하이에서는 마오둔, 루쉰과 깊이 교류하면서 좌익작가연맹에서 활동하며 주요 사업이었던 대중문예운동을 조직했다. 1933년 연말까지 상하이에서 번역가, 문필가로 활동하였다.

1934년 1월 국민당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당중앙의 권유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수도 루이진으로 떠난다. 2월 5일 아내와 떨어져 홀로 루이진에 도착한 그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제2기 중앙집행위원, 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원, 인민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소비에트공화국 중앙정부 교육부 부장, 선전부 부장, 중화소비에트대학(34년 7월에 중앙당학교와 통합) 교장을 역임했다. 교육부 부장으로서 그는 <소비에트교육법규>를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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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의 취추바이

2.4. 최후

1933년 10월부터 국민당의 제5차 초공작전이 발동되자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국민당의 토치카 전술과 화력에 밀려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 이 때문에 주력 홍군은 1934년 10월 대장정의 길에 올랐으나 폐결핵을 앓고 있던 취추바이는 대장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중앙소비에트지구 선전부 부장의 자격으로 유격전을 영도한다며 잔류하였다.

1935년 2월, 국민당군이 날로 육박하여 1934년 11월에는 이미 수도 루이진이 함락되는 등 중앙소비에트지구의 완전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중앙소비에트지구에 잔류하던 소비에트공화국 중앙은 복건성 서부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탈출하기로 계획했고 돌파전에 적합하지 않은 이들을 피난시킨다. 취추바이는 당시 중앙소비에트지구 서기 샹잉(项英, 항영)의 권유에 따라 샹잉의 임신한 부인 장량(張亮), 59세의 원로당원이자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 허슈헝(何叔衡, 하숙형), 그리고 복건성 당위원회 서기 완용청(万永诚, 만영성)의 아내 서(徐)씨와 함께 민간인으로 변장한 채 상하이나 홍콩의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피난을 떠났다.

하지만 2월 24일, 일행은 복건성 장정현 수구에서 지역 민병대에 발각되었고 송시리안(宋希濂, 송희렴, 1907년 4월 9일 ~ 1993년 2월 13일, 49년 해방군의 포로가 되며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 사망)이 이끄는 국민혁명군 제36사단 병력에게 넘겨져 장정 감옥에 수감되었다. 허슈헝은 도망치며 저항하다 사살당했고, 폐결핵으로 인해 달릴 수 없어 현장에서 체포된 취추바이는 린치샹(林祺祥, 임기상)이라는 가명을 둘러대며 자신이 루쉰 가족을 만나러 가는 중인 의사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내 양지화와 동료 루쉰에게 체포 소식을 알려 밖에서 손을 쓰도록 했으나 4월 10일, 국민혁명군 제8사단 병력에 사로잡힌 서씨의 자백으로 장정 감옥에 취추바이가 수감 중이라는 정보가 새어나갔다. 국민당은 공산당원 출신의 전향자를 이용해 위장한 취추바이의 정체를 밝혀냈다. 국민당 측은 공개 전향 기고나 자백서를 쓰지 않아도 되며, 전향시 남경 국민정부 소속의 통역사로 채용하여 뒤에는 대학에서 평생 원하는 연구에 종사하도록 보장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당대의 다른 사례들에 비추어 보면 괜찮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취추바이는 전향을 거부했다.[15]

이 때, 그는 전향을 권하는 국민당 측 인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人爱自己的历史,比鸟爱自己的翅膀更厉害,请勿撕破我的历史。
인간은 자기의 과거를 소중히 여긴다오. 새가 자신의 날개를 여기는 것보다 더 지독하지. 청하건대 내 과거를 찢어 부수지 마시게.
1935년 6월 18일 새벽, 장제스는 취추바이를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6월 18일 오전 8시, 36사단 사단장 송시리안이 옥에 들어와 총살 명령서를 낭독했다. 취추바이의 상해대학 교수 시절 제자였던 송시리안의 명령서 낭독이 끝나자 탈고되지 않은 시가 있으니 쓰게 해달라며 종이와 붓을 요구했다. 송시리안이 지필묵을 내주자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어젯밤 꿈속에서 산길을 걷고 있노라니 막 노을이 지려는 가운데 한기가 엄습했다. 문득 당나라의 시, ⟨석양명멸난산중⟩의 한 구절이 떠올라 거기에서 인용, 시를 한 수 짓는다.'

夕陽明滅亂山中
落葉寒泉聽不窮
已忍伶俜十年事
心持半偈萬緣空
석양이 난산에 명멸하니
낙엽지는 소리, 샘물 흐르는 소리가 제각기 다르구나
외롭게 견디어온 10년의 세월
마음 닿지 않아 모든 인연이 허망하여라[16]

시를 탈고한 취추바이는 차분하게 동료 수감자를 바라보며 "인생에는 작은 휴식이 있고 큰 휴식이 있소. 이제 나는 크게 쉬러 간다오."라 말했다고 한다. 그를 인솔한 사단장 송시리안은 죽음을 앞둔 옛 스승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형장인 장정현 중산공원의 정자 앞에서 은사의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9시 20분에 찍은 이 사진이 그의 마지막 모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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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리안은 취추바이를 풀어주고 자유롭게 중산공원을 산책하도록 한 뒤 만찬과 술을 준비했다. 산책에서 돌아온 취추바이는 이렇게 말했다.
全园为之寂静,鸟雀停息呻吟. 信步至亭前,已见菲菜四碟,美酒一甕.
공원이 온통 조용하니, 새들도 울기를 멈췄다. 정자로 걸어오는 길에, 소박한 요리 네 접시, 그리고 맛좋은 술 한동이를 보았네.
그 길로 그는 홀로 술을 곁들인 만찬을 즐겼다. 술을 반 동이 비운 뒤에는 크게 웃으며 농담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人之公余稍憩,为小快乐 夜间安眠,为大快乐 辞世长逝,为真快乐!
때맞춰 쉬는 것은, 작은 즐거움이요, 밤에 때맞추어 자는 것은 큰 즐거움인데, 때맞추어 죽는 것은, 진정한 즐거움이니라!

그는 이 와중에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10시 정각, 식사를 마친 그는 미소를 지으며 형장으로 출발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수갑을 찬 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마지막 담배가 다 타자 러시아어로 인터내셔널가붉은 군대의 노래를 부르더니 이어서 "타도 국민당!", "중국공산당 만세!", "중국혁명승리 만세!", "사회주의 만세!" 등 각종 구호들을 외쳤다. 중산공원 내의 작은 언덕 나한령, 언덕에 오른 그는 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 자리가 좋겠네." 이 말을 마지막으로, 취추바이는 집행관이 뒤통수에 총을 쏠 때까지 편히 앉아서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유해는 당일 오후 언덕 근처에 매장되었다. 향년 만 36세로, 그가 공산주의 정치활동을 시작한 지 15년째 되는 해였다.

그의 최후를 두고 루쉰은 자신의 유작이기도 한 유고집 <해상술림>을 편집하며 이렇게 썼다.
취추바이의 혁명정신, 그리고 당과 인민을 위하는 숭고한 품격은 죽일 수 없으니, 영생하는 것이다!

취추바이의 최후에 대한 묘사는 1937년 7월 5일 천진 '대공보'에 실린 기사 '구추백절명기'에 기초하였다.

3. 후일담

그가 죽은 지 3년이 지난 1938년, 대숙청 와중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중국공산당 숙청 계획 명단에 올라갔으나 해당 계획이 실행에 옮겨진 적은 없다.

신중국이 건설된 이후 1953년에는 취추바이의 문집이 간행되었다. 이 책에는 마오쩌둥이 발문을 썼다. 그는 취추바이를 높이 칭송하였는데, 1962년 최초로 전문이 출간된 그의 자서전을 읽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 이는 적에게 자수하고 전향한 글이나 다름없다. 왜 공개적으로 비판 선전하지 않는가"라며 크게 화를 낸 것을 생각해 보면 그전까지 취추바이의 자서전에 진위 논란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기이한 일이다. 그 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혁명의 곤란한 나날에 그는 영웅적 입장을 견지하며 굴복하느니 차라리 망나니의 칼에 죽기를 택하였습니다. 이러한 인민을 위해 일하는 정신, 이러한 불굴의 의지는 그가 남긴 글 속에 남아 영생할 것이며,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1954년에는 호남성 공안청에서 취추바이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였고 동년 10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 13국에 특별조사단을 설치했다.
1955년, 그의 유해가 중국혁명의 열사들이 묻힌 팔보산 혁명공묘로 옮겨졌다.
1964년, 장쑤성 창저우시에 그의 생가가 복원되어 관람객을 받기 시작했다.
1964년 10월 19일, 10년에 걸친 조사와 재판 끝에 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이 보고서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이 보고서는 1979년까지 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

3.1. 문혁 시기의 격하와 복권

1964년,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에 의해 변절자로 몰렸다. 위에서 언급한 자서전에 대한 비판이 공개된 것은 강소성에 있는 그의 생가가 관람객을 받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였다. 생가는 문을 닫았고, 1967년에는 홍위병들이 몰려와 팔보산 혁명공묘에 있던 그의 조각상을 부수고 무덤을 파헤쳤다. 이 와중에 그의 양친의 묘 또한 파헤쳐졌다.

1976년 문혁이 끝나고 4인방이 타도된 직후 아내 양지화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이 중공 중앙에 재평가(평반)를 청원하였다. 1979년,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중공중기위)는 취추바이 문제를 재심하는 임시 기구를 꾸려 조사를 시작하였다. 1980년 1월 7일부터 25일까지 당시 중공중기위 제3서기였던 후야오방이 의장으로 임하여 열린 중공중기위 제2차 전체회의에서 ⟨류사오치, 취추바이 동지의 복권 및 평반보고(关于刘少奇、瞿秋白同志的复查平反报告)⟩ 문건을 동년 2월의 중공 11기 5중전회에 제출하기로 결의하였다. 2월 23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중공 11기 5중전회에서는 류사오치의 복권만 심의하였으나 이 때 취추바이도 사실상 함께 평반, 복권된다.

1982년 9월 열린 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에 제출된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업무보고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취추바이 동지가 1935년 국민당에 체포된 후 소위 '자수하고 전향하였다는' 문제에 대하여 새롭게 조사하였습니다. 취추바이 동지는 우리 당의 초기 저명한 영도자들 중 한명이었기에 당 내외에서 그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그의 체포 전후에 대해 사실적으로 조사하여, 취추바이 동지가 체포 이후 불요불굴하는 투쟁을 견지하였기에 그로 인해 적에게 살해당했음을 밝혔습니다.
이 시점에서야 취추바이는 완전히 복권되었다.

2009년 9월 10일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중앙조직부, 중앙통일전선부, 중앙문헌연구실, 중앙당사연구실, 중화인민공화국 민정부, 인력자원사회보장부, 전국총공회,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 전국부녀연합회,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등 11개 부문조직들이 뽑은 '100인의 신중국성립에 있어 놀라운 공헌이 있는 영웅적 모범인물과 100인의 신중국성립이래 중국을 감동시킨 인물들'중 '100인의 신중국성립에 있어 놀라운 공헌이 있는 영웅적 모범인물'중 한 명으로 뽑혔다.

4. 저서

취추바이는 당대 중국에서 가장 유능한 러시아어 번역가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자 문학비평가였고 언론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저작들은 러시아 문학과 정치문헌들의 번역서나 정치적 문건, 논문, 팜플렛 등으로도 많이 남아있다.
  • ⟪아향기정(餓鄕紀程)⟫(1921)
  • ⟪적도심사(赤都心史)⟫(1924)
  • ⟪다여적화(多餘的話)⟫(1935),[17] 한국에서는 ⟪부질없는 이야기 - 다여적화⟫라는 제목으로 번역출판되었다.
  • 구추백논문집(瞿秋白论文集)(1927)
  • 유고집으로 루쉰이 편집한 ⟪해상술림(海上述林)⟫(1936)이 있다.
  • 이현복 선생 번역으로 '취추바이선집'이 번역출간되었다. 선집에는 '신아국유기新俄國遊記'와 '적도심사赤都心史'가 수록되어 있다.
  • 유명 논문으로 <호남농민혁명> 서문(1927), ⟨중국 혁명과 중국공산당⟩(1928), ⟨중국혁명중 공산당 내의 문제⟩(1928)
  • 루쉰이 기초한 중국 특유의 에세이 형식인 '잡문' 선집인 <루쉰잡감선집>(1933)을 편집하고 발문을 썼다.

5. 여담

홍군 지휘관이자 중앙소비에트지구 서기였던 샹잉의 아내 장량은 탈출 과정에서 체포되어 3년 뒤 보석으로 석방, 다시 홍군에 합류했지만 취추바이를 국민당에 팔았다는 오해를 받아 남편의 손에 처형당했다. 실제 취추바이의 소재를 자백한 자는 장량이 아닌 복건성 당위원회 서기의 아내 서씨였다.

그의 고향 장쑤성 창저우 시 종루구 관하동로상권 연릉서로 188번지(江苏省常州市钟楼区关河东路商圈延陵西路188号)에 그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사망 50주년을 맞아 1985년 6월 18일에 정식 개관하였다.

그가 1933년까지 거주하던 상하이 훙커우 구 사천북로(上海市虹口区四川北路山阴路山阴路133弄12号)에도 그의 고택과 기념관이 있다. 바로 길 건너에 그의 평생 지기였던 루쉰의 고택이 있고 루쉰 고택에서 한 블럭 정도 걸어가면 루쉰 공원(옛 훙커우 공원)과 루쉰묘가 있다.

그가 처형당한 푸젠성 룽옌 시 창팅 현 서외가(福建省龙岩市长汀县西外街)에 또한 구추백열사기념관과 기념탑이 있다.

6.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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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인민해방군의 창건일인 난창 폭동 90주년을 기념하는 선전영화 건군대업에 나온 취추바이. 중국배우 백객(白客)이 분했다.


2011년에는 두번째 아내 양지화와 취추바이의 사랑을 다룬 영화 추지백화가 개봉했다. 감독은 후오지엔치. 샤오홍, 타이베이에 눈이 온다면 등을 감독했다. 여기서는 중국배우 두효(竇驍)가 취추바이 역을 맡았다.

7. 관련문서


8. 참고문헌


[1] 1927년 8.7 긴급회의에서 5기 '임시'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이전에 축출된 5기 중앙위원회 총서기 천두슈를 대신해 직무를 수행하였기에 공식적으로는 '임시 총서기'이다. 중앙위원회 총서기는 전국대표대회에서 선출한다. 공식적인 제2대 총서기는 샹중파[2] 취추바이 지음. "부질없는 이야기 - 다여적화". 조현국 옮김. 밀물과썰물. 2018. p. 16[3] 청나라 시기 한 지방의 군사와 행정을 모두 담당하던 총독 아래에서 한 성의 행정을 총괄하던 관직이 순무사, 그리고 순무사 아래에서 성의 민정과 재정을 책임지던 관직이 종2품 포정사, 그리고 그 아래 재정을 담당하던 관리가 정3품 안찰사[4] 이 때까지도 구씨 집안은 먹을 쌀이 없었음에도 여종을 부리고 있었으며, 그의 가족은 가사노동을 해 본 적이 없었다.[5] 1922년 기준 순경의 월급이 3원, 중간 등급 쌀 1석(150근)이 약 5원이었다. 쌀값으로만 따지면 무슨 갑자기 연봉 2억원(...)[6] 훗날의 소련 공산당[7] 이혼 공고 한 번, 결혼 공고 한 번[8] 중국공산당의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은 초기엔 중앙집행위원회, 중앙국 등, 지속적으로 이름이 바뀐다. 일단 통칭으로 서술.[9] 다만 호남으로 파견되어 9월 9일부터 폭동 지휘를 맡았던 마오쩌둥의 패잔병들이 정강산을 점거하고 정강산 투쟁을 전개하며 해방구를 건설하는 결과를 낳긴 했다.[10] 참고로 6전대회에서 코민테른 대표자 자격으로 참석한 니콜라이 부하린이 <중국공산당과 공산당의 임무>라는 정치문건을 발표하여 중국혁명의 현 단계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11] 코민테른 문서 자료집을 보면, 당시 취추바이는 Viktor Strakhov와 Tsiu Vito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12] 취추바이 지음. 같은 책. p.40[13] 넷째 동생 취징바이도 형이 교수로 있는 상하이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25년 대학에서 공산당에 입당, 당 중앙 서기처에서 회의록 속기를 담당하며 형을 충실히 보좌했다. 지금은 복권되어 중국 혁명의 열사로 인정받고 있다.[14] 양지화가 전 남편 션젠룽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 부모를 따라 귀국하지 않고 소련에 잔류, 미하일 보로딘 부부의 보살핌을 받았다. 1941년 귀국, 46년 옌안에서 공산당에 입당하여 1982년에 은퇴하기까지 신화통신의 러시아 특파원, 지국장 등을 역임했다. 2021년 민간인 당원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의 훈장인 '7월 1일 훈장'을 수훈하고 동년 11월 26일 100세의 나이로 베이징 자택에서 별세했다. http://www.news.cn/2021-11/26/c_1128105219.htm[15] 체포된 이후 작성해 5월 23일 완성한 회고록 '부질없는 이야기'에는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책 몇 권 읽은 것을 가지고 10여년을 보냈다." "나같이 신사계급 의식을 시종일관 버리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무산계급의 전사가 될 수 없다."고 자책하며 자신의 총서기 활동이 "악몽"이자 "역사적 우연"에서 비롯되었고, 자신 같은 불철저한 사람은 당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하다고 썼다. 다만 공산주의 신념 자체를 버리거나 공산당에서 탈당을 선언하지는 않았다.[16] 첫 행은 당나라 시인 위응물의 인용이며, 2행과 4행은 당나라 시인 낭사원, 3행은 두보의 인용이다.[17] 그가 체포 이후 한 달동안 저술한 회고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