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17:22:52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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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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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103위 순교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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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B0039><colcolor=#fff> 제8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민덕효 뮈텔
閔德孝 | Gustave-Charles-Marie Mutel
M.E.P.
본명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Gustave-Charles-Marie Mutel)
출생 1854년 3월 8일
프랑스 제국 블뤼므레(Blumeray)
사망 1933년 1월 22일 (향년 78세)
경성부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재임기간 제8대 조선대목구장
1890년 9월 21일 ~ 1911년 4월 7일
제8대 경성대목구장
1911년 4월 8일 ~ 1933년 1월 22일
링크 파일:한국천주교주교회의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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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B0039><colcolor=#fff> 사제수품일 1877년 2월 24일
주교임명일 1890년 대목구장 임명, 주교서품(타마주카 명의주교)
1926년 개인자격 대주교 승품
파일:뮈텔 대주교 문장.jpg
순교자의 꽃을 피어나게 하라
(FLORETE FLORES MARTY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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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친일 행적 관련 비판
2.1. 안중근 의사 고해성사 거부2.2. 독립운동 밀고2.3. 3.1 운동 방해2.4. 우월 의식과 조선인 차별2.5. 이에 대한 옹호와 반론
3. 오해: 대학 설립을 거절한 것과 관련4. 후대의 평가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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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에서 조선에 파견된 가톨릭 선교사.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81년 조선으로 파견 와서 선교에 힘쓰다가, 1885년 파리 대학 학장이 되어 돌아갔다. 5년 후인 1890년에 제7대 조선대목구장인 장 블랑(백규삼) 주교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제8대 조선 대목으로 임명되어 다시 조선에 발을 디딘다.

천주교의 교세 확장을 위해 노력하며, 용산예수성심신학교를 창설하고 명동성당 등을 건립하였다. 1906년 경향신문의 전신인 구 경향신문을 한글로 발행하여 언론을 통한 선교와 계몽에 힘썼고, 독일베네딕도회에 조선 진출을 요청하여, 1909년 베네딕도회 독일인 수도자들이 서울 백동(現 혜화동)에 수도원[1]을 세워 활동하게 했다.

한국어와 한문에 능했고 한국 천주교와 관련된 역사 자료를 수집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토마스 의사와도 교류가 있었다. 그 외에 〈황사영 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뮈텔 본인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대해서 "조선 정부가 엄히 처벌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감평을 내놓기도 했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사료를 수집·연구해 교황청에 보고함으로서 1925년에 기해박해병오박해 당시의 79위 순교자가 시복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들 모두는 1984년에 시성됐다. 또한 본인 스스로 진솔하고 자세한 일기를 저술하여 일제 치하 서양인 선교사의 눈으로 바라 본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이러한 공적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며,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했지만 교리와 원칙마저 무시하고 행한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파로 더욱 유명하다. 1926년 대주교로 승품하였고, 1933년 사망하였다.

2. 친일 행적 관련 비판

교리와 원칙까지 어겨가며 독립운동가 밀고에 앞장선 친일파였기에 한국 천주교계의 부끄러운 3대 흑역사 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이재수의 난황사영 백서 사건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쪽이 좀 더 심각한데 다른 둘은 단발성의 사건들인 반면, 이쪽은 고의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며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이기에 최악의 흑역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2.1. 안중근 의사 고해성사 거부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천주교를 믿었다. 본래는 성리학 집안이었으나 1880년대 말 부친 안태훈 베드로가 세례성사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됐기 때문인데, 안중근도 19살 때 부친의 권유에 따라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 때 영세를 준 이가 프랑스인 니콜라 빌렘 신부였다.

이후 안중근 토마스는 열성으로 신앙 생활을 하며, 선교 활동도 열심히 했으며, 빌렘 신부의 복사 일도 맡아보면서, 성당을 건립하는 데도 집안의 힘을 보탰다. 이런 인연으로 안중근은 물론 집안 전체가 조선교구장인 뮈텔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이후, 니콜라 빌렘 신부의 장상인 뮈텔 주교는 안중근을 핍박하기 시작한다. 안중근은 일제의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게 되자, 순국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보기를 원했다. 일본인 관리도 이에 동의하였기에 안중근의 동생과 사촌이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 집전을 요청했으나, 뮈텔은 "안중근 토마스가 정치적으로 자신의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시인하지 않으면, 고해성사를 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아래 내용은 뮈텔이 당시 쓰던 일기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1910년 2월 16일자 일기

오늘 저녁 5시 경에 여순 재판소 일본 검사로부터 사형수 안중근과 니콜라 빌렘 신부의 면회를 허락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이에 면회를 허락해 주어 감사하지만 여순으로 어떤 신부도 보낼 수 없다 답하였다.

이에 사촌 안명근 야고보가 뮈텔을 찾아와 다시 부탁했으나 그걸 거부하면서, 자신의 일기에는 "안명근 야고보가 아주 무례했다"면서 비난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알아둬야 할 것은, 뮈텔이 고해성사를 거부한 것에는 일제의 어떤 압력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와 인연이 깊었던 니콜라 빌렘 신부가 뮈텔의 금지령을 어기고 뤼순으로 건너가 고해성사를 집전했다. 그러자 뮈텔은 빌렘 신부가 귀국도 하기 전에 "정치적인 일에 관여했다"면서 2개월간 성사 집전을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2] 가톨릭에서 7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은 주교에게 있고, 신부는 주교로부터 일부 성사 권한을 위임받는 것이다. 때문에 주교가 권한을 취소할 경우, 신부는 어떤 성사도 집전할 수 없다. 이에 빌렘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를 거쳐 교황청의 포교성성에 직접 탄원하였고, 교황청은 빌렘 신부의 행동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성사 집전 금지령을 해제했다. 뮈텔 주교가 내렸던 금지령을 교황청이 직권으로 취소시킨 것.

또한 당시 빌렘 신부는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뮈텔 주교가 교회법과 교리에 어긋나고 파렴치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뮈텔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아가 안중근 토마스 의사가 순국한 후 자신의 일기에,
1910년 3월 28일

토마스[3]의 사형 집행이 26일에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 시신을 유족에게 넘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라고 적었다. 민족적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아도 사제로서 매우 의문이 드는 발언이다. 또한 그는 이전부터 안중근 의사와 잘 아는 사이였는데도, "그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이며 그런 흉악한 자가 천주교 신자일 리가 없다"는 주장까지 했으며, 이토 히로부미신토식 장례에 선교 사제 3명을 데리고 참여하거나, 수녀들이 만든 조문 화환을 전시했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에 잘 보여서 교세 확장에 도움을 받으려 했다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 천주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뮈텔의 이런 태도는, 이후 천주교 내에서 안중근 의사가 수십 년에 걸쳐 직접적 조명을 받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4] 현대 한국 천주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안중근 의사를 평가하며 추도 미사를 집전하고 그를 살인자로 매도한 천주교의 과오를 공식 사죄한 것은 겨우 199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2.2. 독립운동 밀고

안중근 의사에게 세례성사고해성사를 모두 주었던 니콜라 빌렘 신부는 안중근 의사 집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 그 사촌이던 안명근 야고보 의사 또한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비밀 독립운동 단체였던 신민회와 관련이 있었고 당시 일본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 또한 천주교 신자였으므로 빌렘 신부에게 이 계획을 털어놓았다. 빌렘 신부는 이것을 뮈텔 주교에게 알렸다. 한편 여기에 대해 빌렘 신부가 '안명근의 고해성사를 누설했다'는 루머가 있으나, 이는 TV드라마에 나오는 고증오류일 뿐 근거 없는 낭설이다. 자세한 건 니콜라 빌렘 문서 참고.

이 말을 전해들은 뮈텔은 당시 날씨가 매우 안 좋았는데도 서둘러서 일본 헌병대에 밀고했다. 이 날이 1911년 1월 11일이라고 자신의 일기에 적혀 있다. 이 결과 국사책에도 나오는 105인 사건이 일어나고 신민회는 일망타진당하고 말았다. 이때, 수사와 관련해서 뮈텔과 헌병대는 긴밀하게 의논하며 협조했다는 사실이 뮈텔 본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대가로 조선총독부의 도움을 받아 명동성당의 진입로를 넓히고, 총독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

2.3. 3.1 운동 방해

1919년, 3.1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의 천주교 신학생들도 이에 가담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뮈텔은,
“그들은 나를 붙잡고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차라리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이라고 자신의 일기에 묘사했다. 이처럼 뮈텔은 동족의 고통에 울면서 애타하는 신학생들을 무서운 폭도처럼 묘사하고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요하고 이에 따르지 않는 신학생들은 퇴학시켰다.

어떤 이는 "당시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직접 나서 퇴학당한 신학생들을 복교시켰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서울대교구 윤형중[5] 마태오 신부, 방유룡 레오 신부, 구천우 요셉 신부의 회고에 따르면, 하나같이 "만세운동 대열에 우리들도 끼고 싶었지만, 신학교 교수 신부님들과 주교님들이 퇴학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아서 그저 속으로만 외쳤다"고 한다. 이렇듯 신부들의 회고에서도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퇴학당한 학우에 대한 안타까움과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는데, 신학교에 다시 돌아온 사람을 복교시켰을 리가 있겠나?

이 만세시위에 동참하지 못하게 했던 조치는 다른 교구의 외국인 주교신부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6] 대표적인 예로 대구대목구의 초대 감목이었던 프랑스인 플로리앙 드망즈(플로리아노) 주교의 일기에서도 드러난다(출처).
한국 젊은이들이 전 황제의 장례식을 계기로 서울과 다른 곳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시위를 했다(3.1 운동을 말함).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됐지만 신문들은 절대적 침묵을 지키고 있다. 대구 신학교에서는 신학생들이 흥분돼 있다. 그들은 그저께 저녁, 운동장에서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고, 교장은 그것을 그만두게 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후 화가 나 있으며, 아마도 성소(聖召)[7]를 잃는 학생들도 나올 것이다.

9일, 아침에 대성당(계산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돌아와 식사를 한 후, 줄리앙 신부가 "신학교 상황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하러 왔다. 샤르즈뵈프 신부의 온갖 권면도 소용이 없었고, 신학생들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고, 시내에서 행진을 하기로 결정했다.

샤르즈뵈프 신부는 그의 권위가 무시된 것을 보고 의기소침해 있다.[8] 신부들을 포함해 전 신학생을 체육실에 집합하도록 지시하고, 교리 강의 때문에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 신학교로 갔다. 그들을 앉히지 않고 나는 그들에게 "순명하지 않는 신학교를 원치 않는다. 신학생들과 상관 없는 정치적 소요 같은 행동이 일어난다면, 유죄 / 무죄를 불문하고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신학교 문을 닫겠다."고 냉혹하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 후 교리 강의를 하러 갔는데, 거기에 경찰이 있었다.

2.4. 우월 의식과 조선인 차별

뮈텔 주교는 조선을 문명화되지 않은 국가로 여겼다. 이런 우월 의식을 바탕으로 그는 "프랑스인 신부가 한국 법정에 출두하게 되면, 조선인의 눈에 한 유럽인이 조선 법정의 재판권에 굴복한 것처럼 보여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는가"라면서 프랑스 신부들이 조선의 정부와 법정을 무시하도록 권유했다. 이러한 뮈텔의 지침 때문인지, 외국인 선교사들은 외국인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조선 관아에 난입해 죄수를 마음대로 데리고 나가고 건물을 부수거나, 신자들을 거느리고 비신자나 관리들을 폭행하며 타 종교의 상징물을 부수는 등의 파렴치한 행위를 일삼았다.

게다가 같은 천주교 신부라도 조선인이면 같은 사제라고 여기지 않았고, 조선인 신자들이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았다. 이러한 뮈텔 주교와 외국인 신부들의 행태에 대해, 당시 조선인 김명제 베드로(1908년 - 1960년)[9] 신부가 "청년들 사이에서 반발이 있다"며 편지를 쓸 정도였다.
제가 주교님께 감히 청년들의 상태를 대변하려는 것이 아니고, 제 생각에는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알려드릴 의향입니다. 그들은 선교사나 신부들뿐 아니라 주교들에게까지 "왜 프로테스탄트인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는 선업을 하지 않느냐"고 반대합니다. 왜 우리는 종교 기관 학교 하나 없는가? 서울 주교좌성당에는 적어도 학교가 하나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왜 우리 성직자들은 복음을 강론하지 않는가? 왜 복음화할 양식이나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가 등등. 그들은 신부들뿐 아니라 주교들에게까지 "조선 교우들에게 막 대한다"고 반발합니다. 왜 그들은 인사를 받지 않는가? 인사를 받아도 왜 베네딕도회 회원이나 프로테스탄트인처럼 하지 않는가? 등. 그들은 신부, 주교들에게 "청년들이 방황하고, 냉담하고,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간다"고 반발합니다.
김명제 신부가 뮈텔에게 보낸 편지(1921년 4월 20일. 『교회와 역사』 325, 4~5쪽).

그나마 다행인 건, 김명제 신부의 편지를 보면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상대적으로 나았던 듯하다. 사실 이런 문제는 천주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개신교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장로회 조선인 목사들은 "서양인 선교사들이 우리를 하등인종 대하듯이 한다!!"고 항의한 일도 있었고 [10] , 구세군인종차별 문제로 분규를 겪기도 했다. 물론 이런 분란은 종교나 인종 문제를 떠나 “선교사라는 자신의 위치를 잘못 이해”하는 개인 인성의 문제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즉 뮈텔은 성직자라기보다는 제국주의 식민지에 온 특권층 입장에서 한국인들을 대했던 심각하게 잘못된 경우였다.

2.5. 이에 대한 옹호와 반론

새로운 상황에 항거한다는 이유 이외에는 다른 뚜렷한 목적없이 “의병”들이 투쟁에 나섰습니다. 조직도 잘 안되고 규율은 더 엉망인 그들은 처음부터 실패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의병운동은 겨울 동안에 강원도 산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만, 결국 의병으로 가장한 노략질과 강도질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11]
조선 황제의 양위와 조선 군대의 해산은 여러 지방에서 큰 소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군인들은 생활을 위해 일하려 하지 않고 항쟁으로 들어가 이미 전국을 휩쓸고 있는 소위 '의병' 들과 합세하였습니다. 선의의 소수 애국자들을 제외하면 자칭 이들 ‘의병’들의 대부분은 약탈자들이거나 산적들인 것이 틀림없습니다.[12]
일본의 한국 보호 정책은 드디어 한일합병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중략) 애국지사들은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한 항거를 해야 했겠으나, 불가항력의 상황 앞에서 그들은 지혜롭게 굴복한 것입니다.[13]

항일 운동에 대한 뮈텔의 관점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 한' 항거를 해야 하겠으나 만약 희망이 없다면 현실을 인정하고 '지혜롭게'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의병을 가장한 산적 등으로 인한 환멸감 등도 겹치면서 부정적 시너지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바로 민족반역자로 일본에 부역한 당시 친일파의 논리와 거의 같다. 불가항력이니 일제에 순응하면서 독립할 힘을 기르자,라는 것이 당시 친일파들이 일제에 순응한 주된 논리였기 때문이다.

또한 원인으로 추정 가능한 것은 정교분리론인데,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2월 초대 조선통감 취임식 때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를 초대해 “국가가 종교에 간여하지 않을 것이니 종교도 정치에 간여하지 말아 달라”는 정교분리를 제안한 바 있다. 결국 일제는 정치, 선교사는 종교’라는 역할 분담론에 뮈텔 주교와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그 정부가 어떤 형태이건 선교를 보장하고 교회 존속을 약속하는 한 정치 문제는 관여할 바 아니라는 입장을 정리해 정치불간섭주의 노선을 취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도 반론이 있는데 이러한 이유로 정치불간섭주의 노선을 취했다고 한들, 실제로는 정작 뮈텔이 총독부와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그 대가로 명동성당 확장, 각종 고문서 열람 등, 개인적인 연구나 천주교 차원의 큰 혜택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 방해 및 밀고, 교회법으로도 문제가 있는 안중근 의사 핍박은 분명히 '정치적'이다.

3. 오해: 대학 설립을 거절한 것과 관련

다만 뮈텔에 대한 비판 중에는 잘못된 사실 관계에 기반한 것도 있다. 뮈텔이 대학 설립을 방해하였다는 주장이다.
"지금 한국의 교인들은 학문에 어두워 교리를 전도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라의 앞날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합니다. 민 주교(뮈텔)에게 말씀드려 서양 수사회에서 박학사 몇 분을 청하여 대학교를 세운 다음, 나라 안의 유능한 자제들을 뽑아 교육시킨다면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반드시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 <안응칠 역사> - 40p[14]

이 주장에 의하면 뮈텔은 안중근의 대학 설립 주장을 거절함으로써 우민화에 가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뮈텔이 한국인 교육에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 것은 맞다. 1930년 당시 한국 가톨릭에는 42개의 본당과 39개의 학교가 있었고, 학교의 숫자는 본당의 수를 감안할 때 소수라 하기가 어렵다. 이 학교들이 초등학교들 위주라서 중등교육 및 고등교육과는 거리가 있으나, 1908년에 교육을 전담할 수도회를 물색하러 뮈텔이 열 달 동안 유럽을 방문하고[15] 여러 수도회들로부터 거절을 당한 끝에 어렵게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을 성사시키는 등 노력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16] 오히려 당시 경향잡지 글을 보면, 조선 가톨릭은 교중 사립학교(미션스쿨)를 설립하여 공립학교보다는 교중 사립학교에 신자들이 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종교적 교육문제

어찌하여 천주교인들이 교중 사립학교를 설힘하여야 되느뇨

일전에 본인이 남대문 통을 지나다가 어떤 철물 상점 앞에서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것을 들으니 갑이 을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철물상점으로 가신다 하니 여기 나의 친구의 상점이 있어 물품도 우량하고 가격도 헐합니다. 다른 데로 가지 말고 이 상점으로 들어갑시다.”라 하고 을은 말하기를 “싫소. 나는 아무 상점으로 가는 길이오. 그러하니 안녕히 계시오.”라 하더라. 그러나 갑은 또 말하기 “이 무슨 말이오. 어찌 나의 말을 신용치 아니하오. 내가 한 벗 이나 당신을 속였단 말이오.” 하며 연하여 말하는데 을은 누차 말하려고 여보 여보하다가 갑의 말이 다 끝난 뒤에 말하기를 “왜 그리하오. 당신이 친구를 위하여 신용이 있고 또 싸다 할 리가 있겠소. 다름 아니라 필경 내가 사려 하는 물건이 그 상점에는 없어요, 없어요.” 하니까 둘러서 구경하던 이가 다 웃고 본인도 또한 웃으면서 지나갔나이다.
본인은 마침 중학교에 교수하고 돌아오면서 교중 자질들은 불가불 종교적 특별 교수법으로 교육함이 필요함을 생각하던 터인 고로 그 갑, 을의 말다툼을 유의하여 재미있게 들었노라. 도리를 모르는 교우는 혹시 말하기를 “외인의 보통학교가 여기저기 많이 있는데 무엇하러 우리 본당신부는 구태여 불가불 성교학교를 없는 곳에는 설립하여야 쓰고 이미 있는 것은 부득불 유지하고 보존하여야 쓴다 하느뇨. 또는 주교각하께서 경향잡지의 기관으로써 가끔 논설케 하시기를 이미 인계한 중학교를 유지해 가야 쓰겠다 하시는고. 이는 막대한 금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뇨. 또 문 앞에 가까이 있는 외인의 보통학교에는 못 가게 하고 구태여 멸리 있는 성당학교로만 가게 하느냐.” 하니 이에 대하여 남대문 통에서 듣던 갑, 을의 언쟁을 다시 생각하여 종교적 교육문제를 해석할 펼요를 째달았노라.
우선 담화적으로 말하노니 우리 교우가 특별히 노력하고 딴 돈을 내고 먼 데로 통학 다니는 이유는 외인의 보통학교를 경멸하는 사상도 아니요, 경제상 관계도 아니요, 다만 우리 교우 자질들은 불가불 종교적 교육으로써 가르쳐야 할 터인데 우리 종교적 교육은 외인의 학교에는 없는 까닭인 고로 우리는 우리 자질틀을 교육시킬 당사자가 되어 불가불 따로 큰 노력을 쓰게 되고 불가불 교중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또한 유지하고 보존하여야만 쓰게 되는도다.

(중략)

천주님을 믿는 자는 사주구령하는 도리와 규구와 방법과 행습을 자기 아동에게 이 시대 형편에 의하여 가르칠 일정 한 의무가 있음이라.
1. 이 지방에 생활하는 교우들이 자기 자질틀을 교육시키는데 본 신덕도리와 본성종향에 의하는 학교를 설립할 권리가 었음이라.
2. 학교교육을 사립학교에서 시킬 권리가 있고 사주구령하는 도리와 의무를 사립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의무가 각 인 교우에게 었다고 단언함이라.
3. 공립학교를 불선한 것으로 여기지 않음이라. 상술한 바 의미를 잘 알아들었으면 누구든지 우리 사상에 대하여 공립학교를 언짧은 곳으로 여긴다고 말하지 못할지라. 그러나 중대한 교육문제에 대한 특별 의사인 고로 몇 마디 말을 더 설명하노라. 우리 아동들은 다만 성교회에서 사립한 학교로만 보내어야 쓴다 하는 말은 공립학교로 보내지 말라 하는 말 같아서 혹 이 말을 오해하기 쉬우 나 남대문 통에서 갑 을이 말다툼을 하던 것을 생각하면 오해치 아니하리니 대저 무슨 물품이 좋기는 좋아도 내가 사고저 하는 물 품이 아니요, 내게는 소용이 아주 적다 하는 의미뿐이라. 논증컨대 공립학교를 설립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천주교인들도 다른 인민과 같이 수렴을 내지 않느냐. 이것이 공립학교를 반대하지 아니하는 증거이라. 그러나 천주교인이 원망하고 반대할 이유는 었다 할 수 있으니 대저 내 자질을 그 학교에 보내어 가르치기 싫어하는 학교를 위하여 수렴과 기부를 내게 하는 것은 불공명하다 말할 수 었음이로다. 철물상점 앞에서 언챙하던 갑 을의 사정과 같이 을이 만일 갑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여 원치 않은 물건을 억지로 사게 되었다면 공명한 일이라 판단할 자가 누가 있었을까. 또 혹 갑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거나 혹 화목을 잃지 않기 위하여 을이 그 상점의 물건을 부득불 사게 되었다면 억울하다 불공명하다 판단치 않겠느뇨. 이와 같이 우리 교우 신자들도 언민 간 치안방해가 되지 않기 위하여 원치 않는 교육비를 부담한 외에 또한 원하는 교육비를 부담하니 우리에게 대하여 불순한 인민이라 가히 말할 자가 있으리오. 속담에 이르기를 금전을 출급함은 진실함의 증거라 하느니 이제 우리 천주교인들이 공립학교를 위하여 돈을 낸즉 반대자라 이르지 못하리로다. 이 일에 대하여 천주교인들은 동포틀을 향하여 가히 이르되 “원통히 생각지 말고 마음도 상하지 말라. 우리는 비록 원치 않을지라도 공립학교 비(費)를 내노라.” 할지로다.

(중략)

이론상으로 말하면 아동틀을 무종교로 교육함은 국민에게 앙화이요, 장래에 위험한 형면이라. 그러나 이 나라의 특별한 형편을 실제로 살피건대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자연한 일이로다. 어떤 나라에서는 인민의 심정을 만족히 하여 주기 위하여 한 방침을 정하였으니 가령 영국, 서서국 같은 나라에서는 아동들의 교파를 따라 각 교파의 선교사가 학교에 와서 각 교파의 아동틀을 각각 모으고 본 종교의 학문을 교수하는 법이 있으며 백이의, 화란, 섬라 등 나라에서는 어느 학교든지 보통 정도 과정 외에 종교 학문을 교수하기로 허가하고 관립이나 공립이나 사립이나 도무지 생도 수효의 비례를 따라 경비를 당하여 주고 다 일체로 감독하니 이는 참으로 좋은 계책이요, 인민 자유주의에 적당한 법이로다.
《경향잡지》 506호~509호에서[17] 발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가톨릭에서 초등학교 위주였던 것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냥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1906년 3월에 있었던 통감 취임식에서 뮈텔이 한 말은 천주교 학교의 실태를 잘 말해준다. 통감이 뮈텔에게 “학교도 있습니까?”하고 묻자 뮈텔은 "초등학교뿐인데, 그것조차도 시설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다른 학교들을 세우기 위해 우리에게는 시간과 수단이 부족했습니다."라고 답했다.[18] 1922년에 남대문 상업학교[19]를 인수할 때에도 교구의 재정만으로는 불가능하여 신자들로부터 돈을 모금해야만 했다.[20] 뮈텔은 “고등학교의 유익성에 대해 나는 그들과 같은 의견이지만 우리를 주저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재정 문제”[21]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즉 당시 천주교는 대학은커녕 중등교육기관도 운영하기 어려울 정도로 돈이 없었다.

다음은 뮈텔 당시의 조선 가톨릭이 처한 재정상황에 대해 이해를 도울만한 글이다.
뮈텔의 토지운영은 외면상 한 종교집단이 토지를 매개로 수익사업을 벌였다는 비판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뮈텔은 외국으로부터 오는 후원금을 한국인을 위한 교육과 의료사업에도 투자하였지만, 동시에 농지를 소유하는데도 이용하였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선교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교육과 의료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함으로써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한국 사회 안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개신교와 비교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의 내면을 보게 되면 토지운영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국에 천주교회가 생겨난 이래 계속해서 교난(敎難)을 겪으며 살아온 신자들은 1870년대에 이르러 선교사들이 다시 들어왔을 때 한국 안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천주교회의 재정 자립은 물론이고 다른 사업을 위한 자유로운 구상을 제한하는 요소였다. 한국인 신자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선교를 시작한 개신교와는 상황이 달랐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산간 벽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내서 돌보는 일을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여겼다. 이런 제약 조건을 가지고 있던 한국천주교회는 뮈텔이 부임했을 당시에 인력과 재정 모든 면에서 자립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프랑스는 1870년부터 1914년까지 무려 60번이나 정부가 바뀔 만큼 정치적으로 불안했고,[22] 1905년의 정교분리 선언으로 천주교회는 프랑스의 국교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로부터 오는 후원금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 재정 자립도를 높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서 뮈텔은 토지를 이용한 수익사업을 선택하였다. 이것은 수익만을 목적으로 한 사업이 아니라 교난으로 흩어진 신자들을 다시 모아 새로운 신자 마을을 건설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뮈텔이 재정의 자립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농지들은 해방 후의 농지개혁으로 대부분 농민들에게 분배되었다.
천주교 대전교구 김정환 세례자 요한 신부 석사논문, 〈귀스타브 뮈텔의 사목활동〉[23]

4. 후대의 평가

뮈텔이 입국한 1880년은 아직 조선에서 가톨릭이 박해를 받고 있던 시기이다. 그런 상황에서 뮈텔은 목숨을 걸고 조선에 와서 신자들을 담당했고,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진 공적 역시도 사실이다. 일부의 비판과는 달리 뮈텔이 차마 신앙인이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며, 뮈텔 주교의 행동원리에서 1순위는 프랑스 공화국도 일본제국도 아닌 조선 가톨릭 교회였음은 분명하다. 아주 간단한 예시로, 독일계 수도승들(베네딕도회 오틸리아 연합)을 조선으로 부른 장본인이 뮈텔 주교다. 만약 뮈텔 주교의 1순위가 프랑스였다면, 19세기말-20세기초 프랑스의 최대 적국인 독일 출신 수도승들을 데려올 이유가 없다.

실제로 뮈텔의 사목 기간 동안 조선 가톨릭은 꾸준히 현지인 성직자 인프라를 늘렸으며, 규모는 작아도 충분히 자립이 가능할 정도로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했다. 그로인해 뮈텔 사후 9년만에 현지인 주교(노기남)를 갖추게 되었다. 일제측에선 서울에 일본인 주교를 세우고 싶었지만, 뮈텔의 후임자인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 주교가 교황청에 손을 써서 서울만큼은 조선인 주교를 두는 데 성공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파리외방전교회의 존재 의의이다. 파리외방전교회는 해외에서 새 신자를 늘리자는 전교회가 아니다.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여 외국인 없어도 자립할 수 있게 하는 게 목적인 곳이다. 이건 아예 회칙에서 최우선순위라며 뒤집지말라고 명시한 것이다. 가톨릭 특유의 사제 양성 조건 때문에 조선 개신교의 목사 양성보다는 속도가 더디었지만, 조선 가톨릭이 한불수교로 박해가 풀린지 약 50년만에 현지인 주교를 갖춘 건 파리외방전교회 덕분이다.

그러나 뮈텔 주교의 어둠은 너무 지나치게 현지 공권력에 협조적이었단 것이다. 뮈텔 주교는 구한말엔 조선 정부에 협조했고, 강점기에는 일본 정부에 협조했는데, 제3자인 프랑스인 입장인 점을 감안하면 인간적으로는 이해의 여지가 있으나[24] 조지 쇼 등 서양인 독립운동가들과 비교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는 근래 들어서는, 천주교에서도 뮈텔 주교를 영웅적으로 미화하기보다는, 한국 가톨릭 주도로 사료(뮈텔 일기)를 번역하고 발간하여 공적도 문제점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뮈텔 일기의 번역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최석우 안드레아 몬시뇰이 시작했으며, 한국교회사 연구소에서 발간했다. 참고로 몬시뇰은 명예적으로는 주교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 일기의 내용을 생각하면 번역, 발간한 천주교가 진실규명에 앞장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011년도에는 그와 관련된 심포지움도 개최되어 여러 사학자들의 연구가 발표되었다. 또한 그가 수십년에 걸쳐서 남긴 일기는 구한말 ~ 일제강점기한국 천주교 역사뿐 아니라 독립운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5. 여담

  • 제3대 성공회 조선교구마크 트롤로프 주교와 한국행 배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더 놀라운 점은 이 사실이 <성공회신문>에 뮈텔 주교가 기고한 글로 인해 밝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당시에도 천주교와 성공회의 관계가 상호우호적이었음을 말해 주는 귀중한 사료 중 하나이다.

[1]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자리. 이후 베네딕도회함경남도 덕원으로 갔다가, 남북이 분단되고 북한 공산당 정권이 종교를 탄압하자 월남, 현재는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위치하고 있다.[2] 이 과정에서 뮈텔은 어떤 절차도 지키지 않았다.[3] 안중근 의사의 세례명이다. 안중근 의사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주장한 뮈텔이, 정작 일기에는 세례명으로 안중근 의사를 부른다.[4] 1972년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기념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성대하게 봉헌되는 등, 안중근 의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 자체는 예전부터 많이 이루어졌기는 하다.[5]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은 소년 시절, 마르크스주의유물론에 대해 들으며 신앙이 흔들렸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47년 사순 시기명동성당에서 윤형중 마태오 신부의 강의를 듣고 크게 깨달아 신앙심을 굳건히 다지게 되었다고 한다. 윤형중 신부는 이후 <상해천주교요리> 같은 한국 천주교의 유명 교리서를 집필하고, 무교회주의 성향의 퀘이커파 개신교도였던 함석헌과 <사상계> 지에서 정치, 종교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말년에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잠시 가담했다가 1979년 사망하였다.[6] 하지만 앙투안 공베르 신부처럼 만세운동을 격려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을 보호해준 사람도 있긴 했다.[7]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뜻. '성소'란 넓은 의미로는 직업, 직분, 가정 생활, 독신 생활 등 다양한 삶의 형태를 가리키며, 어느 것이건 하느님의 부르심이므로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만 흔히 가톨릭에서 (좀 더 구체화시켜 좁은 의미로 말하는) 성소란, 사제수도자의 길로서의 부르심을 뜻한다.[8] 신학생들을 달래면서 "본국에서 수도원장 주교직도 포기하고 이 조선에 왔는데, 신학교 문 닫아버리면 나는 어떡하란 말이냐"라고 한다.[9] 16번째 한국인 사제. 천주교 부산교구 소속.[10] 다만 상담의 편지에서도 나왔듯이 가톨릭보다는 덜 했던것 같다.[11] 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서울교구연보』, 천주교명동교회, 1987, 31쪽.[12] 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서울교구연보』, 천주교명동교회, 1987, 81쪽. 1910년도 보고서.[13] 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서울교구연보』, 천주교명동교회, 1987, 44~45쪽. 1907년 보고서.[14]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기 전 쓴 자서전이다.[15] 뮈텔일기 1908년 1월 12일~11월 15일.[16] 베네딕도회의 진출 목적은 교육 사업 담당이었다.[17] 1922년~1923년[18] 뮈텔일기 1906년 3월 28일.[19]동성중학교, 동성고등학교[20] 경향잡지 496, 1922, 275~276쪽.[21] 뮈텔일기 1921년 11월 23일.[22] (논문 내 주석)콜린 존스, 방문숙·이호영 역,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시공사, 2001, 262쪽[23] 훗날 내포교회사 연구소 소장[24] 실상 거의 모든 선교사들은 현지의 정치 문제에 의견을 피력하기보다는, '국제적으로 합법적이라 인정 받는 공권력'에 협조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한국인으로선 아무리 분통이 터진다 해도) 일본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