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치자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범국민적 운동. 대한민국에 있는 금을 국민들이 모아 시중에서 구입한 다음 한국은행의 금 보유고를 높여 그 금을 통해 국가신용도를 제고한 후 그를 바탕으로 외환보유고를 늘린다는 취지 하에 이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각자 집안에 있는 미국 달러를 포함한 외화 모으기 운동도 동시에 전개되었다.
2. 기원
1997년 11월 20일 새마을운동 단체 중 하나인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에서 선포한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이 시초가 되었다. 출처 1, 출처 2 1907년 대한제국의 국채를 갚기 위해 벌여진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회원들은 12월 8일까지 금으로 된 물건들을 모아서 국가에 헌납하기로 결의했다.12월 3일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비상경제대책추진위원회 회의에서 이러한 외환위기 극복 계획이 보고되었고 정부는 경제난 극복을 위한 민간단체 차원의 바람직한 활동으로 평가했다. 같은 달 10일 열린 헌납식에서는 금 2445 돈, 은 133 돈, 외화 28 달러, 한화 701만 2천원을 기부받아 총 1억 3천 95만여 원이 모였다. 모금액은 중소기업진흥청에 중소기업지원금으로 전달됐다.
새마을 금모으기 운동은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의 긍정적인 평가에 힙입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98년 1월 5일부터는 'KBS 금 모으기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종전의 헌납이 아닌 보상의 체계로 운동의 성격도 바뀌었다.
일각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을 제기하나, 자서전 중 내용에 대한 해석 중의 하나인 것으로 판명된다.
3. 경과
날마다 감동적인 일이 벌어졌다. 바로 전 세계를 감동시킨 금 모으기 운동이었다. 국민들이 장롱 속의 금붙이를 꺼내 은행으로 가져갔다. 전국의 은행마다 금붙이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금반지, 금 목걸이가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귀한 사연이 담겨 있는 소중한 징표들이었다.
국민들이 나라의 빈 곳간을 자신의 금으로 채우고 있었다.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젊은 부부는 아이의 돌 반지를, 노부부는 자식들이 사 준 효도 반지를 내놓았다. 운동선수들은 평생 자랑거리이며 땀의 결정체인 금메달을 내놓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추기경 취임 때 받은 십자가를 쾌척했다고 한다. 그 귀한 것을 어떻게 내놓으시냐고 주위에서 아까워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몸을 버리셨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 '김대중 자서전' 2권 중
국민들이 나라의 빈 곳간을 자신의 금으로 채우고 있었다.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젊은 부부는 아이의 돌 반지를, 노부부는 자식들이 사 준 효도 반지를 내놓았다. 운동선수들은 평생 자랑거리이며 땀의 결정체인 금메달을 내놓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추기경 취임 때 받은 십자가를 쾌척했다고 한다. 그 귀한 것을 어떻게 내놓으시냐고 주위에서 아까워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몸을 버리셨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 '김대중 자서전' 2권 중
1998년 2월 13일 서울 대치동에서 열린 ‘금모으기운동’에서 기탁된 1㎏짜리 금괴 관련기사 |
금 모으기 운동을 벌이던 가운데 여러 감동적인 에피소드와 해프닝이 벌어졌으며 많은 양의 금을 모았다.
금의 통계 | |
월 | 모인 금의 양 |
1월 | 165.65t |
2월 | 53.96t |
3월 | 5.38t |
4월 | 0.80t |
총합 | 약 225.79t |
4. 결과
전국적으로 351만여 명이 참여하여 약 227톤의 금이 모였으며 4가구당 1가구 꼴로 평균 65g(17.33돈)을 내놓은 셈이 되었다.금모으기 이전의 금 보유량은 10여 톤 정도였는데 무려 그 20배가 넘는 금이 모인 것이다. 2019년 6월의 한국은행 금 보유량은 104톤#이었으므로 20여년 전 모인 금이 20여년 후 한국은행이 보유한 금 보유량보다도 2배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만일 이걸 모두 금 보유고로 돌린다면 2019년 6월 기준 벨기에의 금 보유고와 맞먹게 되며 중앙은행 금 보유고로는 22위에 해당하는 양이다.
모인 금은 거의 대부분이 수출되었다. 금을 수출한 가격은 22억 달러이며 이는 1998년 1/4분기 수출액 3백 23억 2천만 달러의 7%다. 금 수출액을 빼면 고환율에도 불구하고 1998년 1/4분기 수출액은 1997년 1/4분기 수출액과 비교해서 8.4% 늘어났을 뿐이었다. 결국 수출증가분의 대부분을 금 수출액이 차지한 것이다. 참고로 1997년 11월의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고 20억 달러보다도 많으며 이때 IMF에서 차관으로 받은 210억 달러의 10% 정도에 해당한다.
금모으기 운동은 절대 공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금을 헌납하면 헌납한 사람에게 정부에서 실제 금값에 해당되는 돈보다 약간 더 얹어서 통장에 입금시켜 줬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고 아무 보상 없는 갈취식 헌납을 받았더라면 헌납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파산해서 길거리에 나앉았을 것이다.
다큐멘터리 등에서 IMF를 다루며 금모으기 운동을 조명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자체의 효용성보다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자세가 국제적인 신용도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하는 당시 관련자나 외국 경제인의 평가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영상 외환위기 당시 국민들이 스스로 갹출하여 개인의 삶에 피해를 보더라도 국가의 빚을 보상할 만큼 돈을 갚을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점과 이렇게 신속하고 조직적으로 단결된 의지가 있다는 것은 곧 "내부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상환해 나갈 능력이 있다."는 평가로 이어져 실제로 IMF와 주요 투자기관들이 신용등급을 빨리 회복시켜주고 구제금융을 투입하는 결정을 내린 것. 특히 중국과 대만에서는 '자국상품 애용' 이라고 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한국에서의 현대차 점유율과 함께[2] 한국인들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칭찬할 때 나오는 단골 레퍼토리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도 국민이 국가를 위해 희생한 애국심에 활용하기 소재이므로 환구시보 같은 매체에서조차 금모으기 운동을 칭찬할 정도다. 하지만 국가신용도는 근거를 바탕으로 산정되므로 인상이야 개선될지 몰라도 외환보유고로 전용하지 못한 점은 신용도에 뼈아팠음을 여전히 부정할 수 없다.
이 금모으기 운동이 결정적인 도움을 준 분야가 있었다. 바로 국제통화기금이 시행했던 한국 초고금리 정책의 철회를 이끌어낸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은 1997년 11월 한국을 IMF 관리체제로 접수하면서 남아메리카에서 IMF가 했던 그대로 초고금리 정책을 펼쳐서 외국인들의 한국 투자를 이끌어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1998년 1월에는 한국의 기준금리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9월 6%에서 1998년 1월이 되자 한국 기준금리가 23%로 치솟아 버렸다. 이런 초고금리 정책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외국인 투자는 안 들어오고 한국의 기업의 침체와 도산만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 금모으기 운동에 따라 모인 금을 해외에 수출하여 IMF 구제금융 300억 달러 채무에 일부 상환하자 IMF는 초고금리 정책을 1998년 5월 철회한다. 1998년 5월 이후 23%였던 한국의 기준금리는 1999년 1월이 되자 5.25%까지 떨어져 외환위기 직전 수준을 하회하게 되었다.
5. 비판
5.1. 국민에게 책임 전가
기업 부채로 일어난 금융위기를 국민더러 갚으라고 등을 떠밀었기에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정부가 금값을 치르기는 했지만, 경제 위기에서 합리적인 경제 주체는 유동성이 높은 자산을 매각하고 가치 변동이 적은 안전자산을 구매하여 안정성을 확보하고 이런 상황 속에서 동서고금 최고의 안전자산 중 하나인 금은 집안 꼭꼭 숨겨두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 벌어졌기에 사회학자와 경제학자들의 주목을 제대로 끌었다. 개인보다 무조건 국가를 위해야 한다는 집단주의가 개인주의에 비해서 극도로 강했던 20세기의 대한민국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2008년 9월 대침체에서도, 그 뒤를 이은 유로화 사태에서도 이 같은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당연히 없었다. 중국계 경제학자 쑹훙빙이 쓴 유대자본 음모론 서적 '화폐전쟁'에서도 금모으기 운동을 매우 높이 보았다. 그 까닭은 아시아 금융위기를 국제금융자본의 음모로 보고 금모으기 운동에 대해 국제금융자본의 횡포를 국민들의 노력으로 저지하는 데 성공한 사건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국민들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정부와 기업이 감사하게 생각하고 기리지 않는다. 일단 재벌들은 국가 전체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은 주제에 그 와중에도 국민이 어떻게든 국가를 살리겠다고 모은 돈을 헐값매각을 통해 부가세 탈루를 추진하다가 걸렸다.
당시 걸린 대기업은 총 7개사로 LG상사, SK상사, 삼성물산, 현대종합상사, 한화, LS니꼬동제련, 고려아연(영풍)이다. 대기업 중에서도 최상위 기업이 5개나 포함되어 있는 것에서 막장성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볼 수 있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금을 헐값에 팔아 호구가 된 게 아니라 재벌들이 자기들 이익을 챙기겠다고 범죄 행위를 한 것이다. 이쯤 되면 그냥 매국노라고 불러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기사 참조.
사건 이후 해당 사건이 등재된 초등학교 교과서에 IMF의 원인으로 '국민의 과소비'를 '첫 번째'로 싣는 등의 사례를 보면 국민에게 감사하기보다는 국민이 문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아나바다 운동과 물부족 국가 선동으로 국민 과소비를 멈추겠다며 장려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떤 교과서는 이런 과소비로 생긴 IMF사태를 단결된 국민의 힘을 보였다며 애국심 고취용으로 미화하며 자화자찬하기만 한다.
이른바 국개론인 것이다. IMF 외환위기는 국가와 대기업들의 경영진이 무능했고 그에 비해 지나치게 큰 과욕으로 인해 빚은 참사다. 노동자는 금모으기 운동뿐만 아니라 강도 높은 정부의 긴축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으니 사태 해결에 기여한 바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며 적어도 IMF 사태로부터 국가를 지킨 영웅으로 대접해 줘도 모자랄텐데도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후일 각종 자국 혐오의 원인이자 국민들이 '국가 위기 상황'에서 '더 이상 극복에 나서려 하지 않는' 원인의 한 가지로 작용하기도 한다. 배신감 때문인데 이때 국민들이 경제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금을 내놓는 동안 높으신 분들은 공적 자금을 빼돌리거나 자식이 군대에 가지 않게 하기 위해 국적포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현재도 건재한 몇몇 대기업들은 당시 성금을 탈세하려다 발각되기도 했다. 입맛이 쓴 후일담인데 금모으기 운동을 한 지 딱 10년이 되는 해인 2007년의 가을에 주요 경제지가 일제히 보도한 사건이다. 높으신 분들은 돈이나 빼돌리고 있었고 정부는 국민에게 책임 전가나 하고 있었다는 게 널리 알려진 만큼 앞으로 IMF 사태와 유사한 사건이 또다시 일어난다면 그때는 국민들도 나라가 어찌 되든 상관없이 정부나 기업이 그랬듯이 자기 살길 찾으러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5.2. 기업들의 파행
운동의 실무 측면에서의 비판도 있다.본래 금모으기 운동의 골자는 기업이 수집한 금을 예탁받은 뒤 예탁증서를 발급하고 예탁기간이 끝난 뒤 수익을 배분하는 골드뱅크 업무였다고 한다. 즉 금을 외환보유고로 확보하여 신용도를 확보한 뒤 외국에서 돈을 빌려 유동성 문제가 해결하면 정부가 구제금융을 통해 기업의 빚을 갚아줄 수 있고 이후 경제가 정상 궤도에 오르면 기업에 수익을 배분하고 기업은 수익금으로 구제금융을 변제하는 식.
하지만 2월 6일에는 한국은행에서 모인 금을 수집하여 외환보유고로 활용하려고 하니 기업들이 자기들 빚 갚는데 급급해서 모인 금을 급하게 수출해 버려 남은 금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은행은 모인 금 가운데 겨우 3.04t만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금의 양이 13.4t에 불과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것도 매우 많은 양이기는 하지만 227t의 금을 모두 한국은행에 집중해서 외환보유고로 전용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한 점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특히나 금은 안전자산으로 유사시 최종결제 수단이라 IMF 외환위기와 같은 비상사태에서 더더욱 빛을 발하고 IMF 외환위기가 진정된 다음 금 시세는 급등하였으니 이때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었다면 한국의 국익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임이 자명하다.
게다가 국제 금 시장의 시세를 교란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금이 한순간에 시장에 유통되면서 시장 교란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시세 폭락으로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한 것은 물론이요, 한국 기업들도 시세 폭락으로 제값 받고 팔지 못한 바람에 벌이가 신통찮았다고 한다. 하다못해 파는 속도에 완급이라도 조절했음 좋았을텐데 자기들의 원죄가 있어 제발이 저린 기업들이 국가가 뺏어갈까봐 급하게 팔아치웠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재벌그룹 종합상사들이 IMF 구조조정의 표적이 되자 수출 실적을 부풀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재무재표를 뻥튀기하여 구조조정을 피해 보고자 금을 사들여 되파는 짓거리들을 자행했다.
한편 약 5년 뒤 주요 경제지들이 금모으기 운동의 뒷사정을 일제히 대서특필해 가며 대기업 종합상사들의 비리를 까발렸는데 그 시기가 절묘해서 딱 공소시효가 지난 다음이었다.
한마디로 도움이 되긴 됐으나 국민 이외에는 다 딴 생각을 하고 있어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6. 여담
- 구한말의 국채보상운동이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직후 프랑스의 전쟁배상금 반환 운동과 비슷하다는 평가가 있다.
- 금모으기 운동 때문에 1980년대 후반~1990년대생들은 돌반지가 없는 경우가 많다.
- 나중에 금값이 크게 오르고 상기했듯 진짜 주범인 기업들의 책임은 무시한 채 외려 국민들을 욕하자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금을 헐값일 때 팔아버린 것을 후회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 국회에서도 동참하였는데, 총 13kg(...)이 모였다. 당시 국회의원의 총원이 288명이었으니 1인당 약 45g(12돈)을 모았는데 국민 1인당 평균보다 적다고 당시 언론에서 맹폭격을 당하였다.
- 사실 같은 반도 국가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기에 유사 사례가 이미 있다.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의 결과 영-프 연합국이 이탈리아 왕국에 부과한 어설픈 경제제재는 오히려 이탈리아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만 강화시켰고 자발적으로 금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유럽 추축국의 패망이 목전에 다가온 1945년 4월 무솔리니가 파르티잔에 잡혀 죽던 날에 메라 하천에서 한 어부가 이 금반지들을 발견했다.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은닉했다가 도주하면서 유기한 것이다.
- 2018년 5월 31일 말레이시아가 국가 부채를 줄이고 재정파탄을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을 상대로 모금 활동에 나섰다. 월스트리트 저널에서는 해당 기금조성을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을 연상시킨다고 전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