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09:46:47

김녹휴

위정척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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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학파
金祿休 | 김녹휴
<colbgcolor=#820000><colcolor=#ffd400> 이름 김녹휴(金祿休)
출생 1827년 (순조 27년)
사망 1899년 (고종 36년)
본관 울산 김씨
관직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
치경(穉敬)
신호(莘湖)
가족 아버지 진사 김방묵,
어머니 전의 이씨,
참봉 김경휴,
부인 연일 정씨,
아들 형조좌랑 김흥환, 생원 김영환, 참봉 김주환, 주사 김준환, 주사 김종환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조선 후기 ~ 대한제국 시기 호남지방의 유학자. 본관은 울산 김씨, 자는 치경(穉敬), 호는 신호(莘湖).

조선왕조 최후의 위정척사파 중 하나인 노사학파를 이끌던 거두 중 한 사람. 사후에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되었다.

2. 생애

벼슬을 하는 것은 학문이 넉넉한 뒤에 해야 하는데, 아직 학문이 완성되지 않았는데 벼슬을 하는 것은 임금을 속이는 일이고 나의 뜻이 아니다.

관직을 수락하는것이 어떠냐는 권유에 대한 대답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9대손으로, 조선 전라도 장성도호부 황룡면 월평리 출신.

생원시에 합격한 둘째 형 김경휴(金景休)에게 어릴적부터 학문을 배우다 16살 때인 1842년(헌종 8) 향시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다.

1846년(헌종 12)부터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는데, 그때부터 위정척사 사상에 심취하여 외세 제국주의 세력과의 통교에 반대했다.

학행(學行)으로 명성이 있었으나 관직을 하지않고 산방(山房)에 들어가서 학문에 열중하였고, 전북 고창군 부안면 상암리에 상외정(象外亭)을, 전남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에 문향정(聞香亭)을 짓고 강학하였다.

1877년(고종 14)에 조정으로부터 선공가감역(繕工假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병환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1899년(광무 3) 세상을 떠났다. 임종 시 집안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유언은 다음과 같다.
"저 푸른 하늘은 본래 태허(太虛)한데, 불씨(佛氏)는 허(虛)하면서 무(無)하고, 성인(聖人)의 도(道)는 허하면서도 실(實)하다. 리(理)는 분정(分定)에 달려 있고 도는 수분(守分)에 달려 있고 복(福)은 수분(修分)에 달려 있다. 후세 음양(陰陽)·화복(禍福)의 설은 전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흐름만 천착하니, 몸과 집안을 망칠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는 더욱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는 노사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써 당대 영호남 지역에 이름있던 유학자였지만 평소 저술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나마도 후손들이 보관하던 글들 대부분이 한국전쟁을 거치며 소실되었기 때문에 훗날 간행된 문집도 겨우 3권 1책 분량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이 그마저도 학문을 본격적으로 논하는 글보다는 시와 서간들의 분량이 압도적인지라 그의 학문적 견해를 자세히 알아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장남 김흥환은 형조좌랑에, 삼남 김주환은 정릉참봉에 봉해졌다.

3. 기타

김녹휴는 시문에 뛰어난데다 호탕하고 인간적인 면모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랐으며 흉년이 들면 사재를 털어서 고을 백성들을 구휼하기를 좋아하였다.

또한 김녹휴는 풍류로 유명하였다. 특히 산천 유람을 좋아하여 전국의 명승지를 자주 여행하였는데, 합천 가야산, 양양 의상대, 청령포, 묘향산, 화순 적벽, 두류산, 부산 백양산, 부안 내소사, 채석강, 하동 쌍계사, 평양, 금강산 등을 여행하면서 지은 다수의 유람시가 남아있다. 그리고 그는 전국 각지에 정자를 지어놓고 조성가, 이응진, 김평묵 등의 동료 문인들과 함께 즐겼다. 이처럼 그는 예술가적 기질이 풍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김녹휴의 최대 공적은 스승 기정진이 조선후기 성리학의 흐름을 주도하는 한 축의 종조로써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은것이다.

류휴목의 [호남일록]을 보면 기정진의 노사학파를 이야기하며 그 제자 김녹휴가 기정진이 학문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모든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대목이 있는데, 그가 전라도의 사대부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부유한 집안이었으므로 가능한 것이라고 덧붙여 설명한다.

실제로 김녹휴는 문묘배향 성현의 후손이라는 배경에 개인적으로도 불과 16세에 향시를 급제할 정도로 제법 이름이 나있는 명사여서 어딜가든 충분히 받아들여질 만한 명성과 인맥이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김녹휴는 스스로의 의지로 아직은 미약했던 시절의 스승 기정진을 직접 선택하고 평생 큰 재물을 들여 뒷받침했으며, 조정에서 제수한 벼슬까지 거부하며 노사학파에 모든것을 걸었다. 사실상 자신의 전부를 기정진에게 투자한 셈이다.

만약 김녹휴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기정진은 수천명에 이르는 학단을 형성하지 못한 채 그저 구한말의 한사람의 학자로 기록되었을 확률이 매우높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노사학파가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건 오직 김녹휴 덕분이었다. 이쯤되면 노사학파는 곧 김녹휴라는 반석 위에서 세워졌다 해도 과언은 아니고, 실제로 구한말 위정척사의 흐름 속에서 누구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김녹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