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01 22:07:05

김사미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4. 같이보기

1. 개요

金沙彌
(? ~ 1194)

고려 무신정권농민 봉기인 김사미·효심의 난의 주도자.

2. 생애

김사미의 출신에 대해서 뚜렷한 기록은 없지만 사미[1]라는 이름을 봐서는 승려 출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운문[2] 출신이라고 된 걸 봐선 운문사 관련 인물이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3] 세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1193년 7월 경상도의 운문에서 신라 부흥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초전에서 세력을 일으킨 효심과 합세했으며 경주 출신인 이의민과 내통[4]하여 8월에 이의민의 장남인 이지순으로부터 물자와 기밀 등을 제공받고 전존걸이 이끄는 진압군과의 싸움에서 그들을 연달아 패퇴시켰다. 그러나 상장군 최인, 대장군 고용지 등이 이끄는 진압군의 공격을 받고 타격을 입자 1194년 2월 직접 행영에서 나와 항복했지만 참수되어 목숨을 잃고 만다.

3. 대중매체에서

  • 소설 《김사미와 효심》에서는 인물 소개에 따르면 법성이라는 법명을 가진 승려이자 신라의 왕손으로 이름은 김대영. 경주 농민군을 이끌다가 관군에게 패해서 친구인 이학진, 박부라 등과 함께 운문사로 숨어들었다가 운문 농민군을 조직해 최고 지도자가 되었지만 병마사 행영인 강릉에 가서 항복했다가 병마사 최인에게 즉시 참수되었다.

4. 같이보기


[1] 沙彌, 구족계를 받기 위해 수행하는 동자승[2]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3] 신라의 부활을 목표로 했고 성이 김씨인 걸 보면 신라 국성경주 김씨일 가능성도 있으나 김씨 본관이 경주 김씨만 있는 건 아니니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이 영향 탓인지 아래 문단의 창작물들은 김사미를 신라 왕가의 후예로 각색한 게 많다.[4] 다만 이의민도 신라부흥을 지지했다기보단 나중에 이의민을 제거한 최씨정권이 반란죄를 덮어씌웠다는 설도 있다. 혹은 이의민이 본인이 찬탈을 하기 위해 신라부흥 세력을 이용하려고 했다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