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규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983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 ||
1988 | 1989 | 1991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0번 | ||||
김기철 (1985) | → | <colbgcolor=#000> 김성규 (1988) | → | 장호익 (1989)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0번 | ||||
결번 | → | 김성규 (1989) | → | 김병조 (1994~1997)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번 | ||||
서창기 (1988~1989) | → | 김성규 (1990~1991) | → | 이용석 (1993~1994) |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13번 | ||||
결번 | → | 김성규 (1992~1993) | → | 허대욱 (1996) |
KIA 타이거즈 등번호 91번 | ||||
하세베 (2014) | → | 김성규 (2015~2019) | → | 서동욱 (2020~2021) |
김성규 金星圭 | Kim Seong-Kyu | |
출생 | 1965년 12월 9일 ([age(1965-12-09)]세) |
광주광역시 동구 지산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광주살레시오초 - 무등중 - 광주제일고 - 연세대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 입단 | 1988년 2차 1라운드 (해태) |
소속팀 | 해태 타이거즈 (1988~1991) 쌍방울 레이더스 (1992~1993) |
지도자 |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KIA 타이거즈 2군 수비·작전코치 (2015~2016) KIA 타이거즈 3군 수비코치 (2017~2018) KIA 타이거즈 2군 작전·주루코치 (2019)[1] KIA 타이거즈 잔류군 타격코치 (2019)[2] 홍익대학교 야구부 코치 (2020~2021) |
[clearfix]
1. 개요
前 KIA 타이거즈 2군 작전주루코치.2. 선수 경력
1983년 전국대회 3관왕(대통령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을 달성한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의 주장으로 활약한 선수였다. 대통령배와 황금사자기에서는 박준태가 최우수선수상, 문희수가 우수투수상을 수상했고, 봉황대기에서는 김성규가 최우수선수상, 문희수가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리더십이 뛰어나서 팀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던 선수. 호수비나 결정적인 순간에 큰 소리를 내면서 팀원들을 독려하던 선수였다. 실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연세대로 진학했다.[3] 그리고 1987년 해태의 지명을 받아 1988년부터 데뷔하였다.좌타자가 항상 부족해서 애를 먹었던 해태 사정 상 김성규는 데뷔 초반에 제법 많은 기회를 부여 받았으며, 실제로 1988년에는 타율 0.284를 기록하면서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데뷔하며 신인왕 후보에도 올랐다. 다만, 이 해는 서울 올림픽으로 인해 유능한 선수들이 프로에 바로 데뷔하지 못한 사정도 있는 탓에 실제로는 그리 인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해 이후로는 잦은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된 활약을 보이지 못하면서 1991년을 끝으로 방출되었고, 새롭게 둥지를 튼 쌍방울에서도 인상적인 활약 없이 단 2년만 뛴 후 은퇴하기에 이른다.
은퇴 당시 원래 쌍방울 구단에서는 1994 시즌의 주장을 맡기고자 했으나 한동화 신임 감독이 수석코치이던 시절부터 갈등이 있었고 "내가 감독이 되면 너를 방출시킬 것이다."라는 말도 들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동화가 정말로 감독이 되자 은퇴를 하게 되었다고.[4]
3. 지도자 경력
- 은퇴 후 개인사업에 종사했으며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 KIA 타이거즈, 홍익대학교 야구부에서 코치를 지냈다.
4. 여담
- 전설의 타이거즈에 송유석과 함께 2022년 9월에 출연했다. 대학 졸업반 당시 태평양 돌핀스에서 지명의사를 밝혔으나 태평양 구단 사무실을 찾아가 해태 타이거즈가 아니면 가지 않을테니 괜히 지명권 낭비하지 말라고 당돌하게 말했다고 한다. 프로야구선수 생활을 길게 하지 못했던 이유는 본인의 자만심이 원인이었으며 1년 후배인 송유석은 김성규를 일컫어 '너무 온실속에서 야구를 하셨던 분'이라고 덧붙였다. 고교 시절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때문에 노력하지 않고 안주했다는 평을 남겼다.
5. 관련 문서
[1] ~5월 16일[2] 5월 17일~[3] 문희수는 동국대에 진학하기로 했으나 해태로 틀었고, 대통령배-황금사자기 MVP 박준태는 1984년에도 황금사자기 우승을 이끌며 최우수선수로 선정됐고 동국대로 진학한다. 1984년 황금사자기 우수투수 수상자 이강철도 동국대 유니폼을 입었다.[4] 김성규가 쌍방울로 이적한 후, 김성규와 해태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박노준이 쌍방울로 이적하자 한동화는 선린상고 후배인 박노준을 밀어주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이 일화를 설명하면서 한동화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진 않았으나 수석코치에서 감독으로 승진한 분이라고 힌트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