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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1891)/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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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남동생 김연수 · 아들 김상만 · 아들 김상기 · 아들 김상흠 · 아들 김남
역대 선거 제2대 부통령 선거
설립 기관 동아일보(오너 일가) · 고려대학교
관련 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 국민총력조선연맹 · 한국국민당 · 한국민주당 · 민주국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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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민족지도자로서의 긍정적인 평가1.2. 역사학계의 평가1.3. 고려대학교 설립자로서의 평가1.4. 중앙고등학교 운영자1.5. 고향에서의 평가

1. 개요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김성수에 대한 평가를 다룬 문서.

1.1. 민족지도자로서의 긍정적인 평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의 당대를 직접 살았던 사람들로부터 각 방면에서 찬사를 받는 인물이다.

1991년 10월 11일 '인촌 탄생 100주년 추념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인촌 선생은 한 시대를 이끌어 온 각계의 훌륭한 일꾼을 수없이 길러낸 민족사의 산실과 같은 존재", "스스로 몸을 낮추어 항상 겸양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뒷자리에서 남의 공로를 드높여 주는 것이 인촌 선생의 인품이자 경륜이었다"라고 평한 적이 있다.
"인촌은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인촌은 동아일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을 계몽하여 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큰 힘을 주었다. 그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인촌은 오늘의 중앙고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치하에서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다. 인촌은 또한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1993년 8월 15일 '광복 48주년 특별기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위와 같이 말했다. 그 후 2000년 3월 31일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도 김대중은 김성수를 이렇게 찬양했다. "인촌 선생은 민족 민주 문화주의 3대 강령을 내건 동아일보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

한국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서 후에 고려대학교 총장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김준엽도 김성수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1]
내가 고려대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45년 광복과 더불어서이다. 귀국하자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드문 시절이라 서울대, 연대 등에서도 오라고 했지만 난 고대를 택했다.
그 연유는 나도 독립운동을 좀 했고, 평소 인촌선생을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시대, 그 당시에는 동아일보를 한국의 정부로 생각했었다. 말이 쉽지 일제의 탄압 아래서 신문경영, 학교경영, 기업경영 등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임시정부를 좀 알아서 김구나 이승만 등 지도자들을 많이 알았지만 인촌만큼 훌륭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인촌의 가장 존경할만하고 훌륭한 것은 사람 모으는 힘을 가진 지도자라는 점일 것이다. 근래의 역사 가운데 인재를 제일 많이 기르고 모은 분이라 생각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고대를 택했는데 올해(1984)로 35년째이다.

그러므로 김성수에 대한 평가절하는 동아일보의 정치성향 변화와 마냥 무관하진 않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김준엽과 비슷한 세대였던 이철승 또한 김성수를 온 몸으로 존경하고 있었는데 사실 이철승이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김성수의 지원 덕분이었다. 당시 이철승은 일본인 교사를 때려눕혔던 전적 때문에 대학 진학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었는데 김성수가 특별히 선심을 써서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학병 거부 운동으로 일제 당국과 마찰을 일으킬 때도 자신의 집에 직접 숙식까지 시켜줬다고 한다. 정작 김성수는 태평양 전쟁 시기 학병 동원을 권유하는 을 실었던 적이 있었던게 아이러니.[2]

한편 반(反) 독재 운동에 헌신하면서 조봉암을 밀어준 몇 안 되는 보수 정치인이기도 하다. 조봉암이 민주국민당(민주당의 전신)에 참여하는 문제를 두고 장면, 조병옥, 신익희가 그를 받아들이기를 꺼리자 김성수는 조봉암이 사상 전향을 공식적으로 성명한다면 참가하게 해줘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옹호해주었다. 김성수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조병옥과 신익희가 마지못해 허락했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성명 발표 전에 죽어버렸고 조봉암은 민주당 참여가 무산되어 따로 진보당을 만들었는데 이후에 일어난게 진보당 사건이다.

1.2. 역사학계의 평가

한국현대사 연구 권위자인 서중석 교수는 김성수의 정치활동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김성수가 없었다면, 아마 제1공화국은 더욱 썩어문드러졌을 거다'라면서 그가 주도해서 결성한 '호헌동지회'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박태균 교수는 자신의 저서 '한국전쟁'에서 정치인의 귀감이라고 굉장한 호평을 하였다.

친일파 문제에 적극적인 역사학자들도, 김성수의 친일행적은 인정하면서도 대한민국 정치인 김성수를 높게 평가하는 게 일반적이다.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노동운동가로 명망 있는 주대환 역시 김성수에 대해서 "독립운동가들 전부 김성수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덕을 많이 베풀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의 한계를 비판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족적을 지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의 선 자리가 그가 닦아놓은 기반 위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

1.3. 고려대학교 설립자로서의 평가

고려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사실 고려대학교의 전신(前身)인 보성전문학교의 창립자는 김성수가 아닌 이용익 선생으로,[3] 김성수는 당시 운영난에 시달리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이후 민족자본을 모아 건물을 세우고, 교수진을 갖추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며 지금의 고려대학교를 이끌어갔다.

고려대학교는 그러한 김성수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인촌의 묘소를 고대 캠퍼스 내에 두었다. 이 묘소는 고대 재단-교수-학생이 합심하여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학생들에게서 사랑을 받아, 학생들은 나라에 슬픈 일이 있을 때, 그리고 개인적으로 아픔이 있을 때마다 그곳 인촌묘소에 가서 꺼이꺼이 울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85년 김준엽 총장 해임사태 후 고려중앙학원이 군사정권에 협조하면서 그러한 분위기는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1980년대 이후 인근의 도로개설로 인촌묘소의 지맥이 끊겼다는 말이 나오자, 1987년 12월 인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군 화덕면 금남1리에 마련된 새 묘소로 이장 됐다.[4]

그 외에도 고려대학교는 김성수를 기념하기 위해 본관 앞에 김성수 동상을 세우고 그 뒷편에 인촌기념관을 세웠다. 그러나 김성수 동상은 1989년 고대 내에서 분규가 있었을 때 조치원분교(세종캠퍼스) 학생회 임원들이 상경하여 동상에 줄을 매고 끌어내리려 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5] 그리고 인촌기념관은 1987년까지 김성수의 묘가 있던 자리에 1991년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학생들은 김성수의 친일행위를 문제삼아 이 건물을 인촌기념관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보이콧 하였다. 그래서 한동안 이 건물은 '4.18 기념관'으로 불리었는데, 이에 학교는 학생회관 옆에 진짜로 4.18 기념관이라는 건물을 지어버렸다. 학생들은 당연히 이 건물도 4.18 기념관이라 부르지 않고 '제2학생회관'이라고 부르는 보이콧을 결행하였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각 건물의 명칭이 학교측의 의도대로 인촌기념관, 4.18기념관으로 굳어진 상태가 되었다.

고려대학교 부근의 도로명은 '인촌로'였는데, 위의 친일 논란으로 인해 '고려대로', '안감내로' 등으로 도로명 변경이 추진돼 2018년 11월 '고려대로'로 개칭되었다. 이승로 성북구청장은 감사패까지 받았다.#[6]

1.4. 중앙고등학교 운영자

중앙고등학교의 운영자였다. 창립 자체는 국민에 의하여 민립사학으로서 1908년에 개교하였으며, 김성수는 1915년 자금난에 시달리던 중앙학교를 큰아버지 원파 김기중의 도움으로 인수한 것이다. 그래서 김성수의 동상과 인촌기념도서관이 이 곳에도 있다. 1918년 겨울부터 중앙학교의 숙직실은 3·1운동의 준비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김성수와 중앙학교는 3·1운동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김성수와는 정치적으로는 정반대에 있던 남로당 총책 박갑동도 중앙고 재학당시 기존에 진주에서 다녔던 진주고보와 달리 우리말로 수업을 진행하는 민족주의적인 분위기였다고 회고하면서 김성수의 학교 운영방식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1.5. 고향에서의 평가

지주로서 소작인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대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등 고향에서는 그럭저럭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반면 그의 밑에서 토지를 관리하는 마름 중 한 사람으로 일했던 서정주의 아버지는 지역 주민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7] 참고로 서정주와 김성수의 생가는 각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와 부안면 봉암리에 위치해 있어서 별로 멀지 않은 편이다.

[1] 인촌과 동시대를 살아갔고 김구, 이승만, 김성수를 지근거리에서 살펴본 한 시대의 지식인이 쓴 글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2] 하지만 당시를 살아갔던 인물들의 증언이나 회고록을 보면 <매일신보>에 학병 동원을 권유하는 글을 자주 실었던 것과 별개로 학병으로 차출되는 것을 거부하는 학생들을 나름 존중은 해줬다고 한다. 당장 가장 강경파였던 이철승만 하더라도 직접 총독부와 마찰을 일으킬 때 김성수가 직접 본인 집에 숙식을 시켜주면서 보호해주었고, 김준엽의 절친이었던 최기일 박사 또한 자신의 친구로부터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할지 말지는 학생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이 좋고 본인은 이를 존중해주겠다"는 말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성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전력 때문에 이철승은 "김성수는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적극적으로 김성수를 옹호하기도 했다.[3]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보성전문학교를 김성수가 창립한 것처럼 알고 있는데, 이건 상대적으로 김성수가 이용익보다 더 잘 알려져서 그런 듯하다.[4] 루머에 따르면, 1980년대에 고대 재단이 전두환 독재에 협력하기 시작하면서, 고대 재단에 반감을 갖게 된 학생들이 인촌 묘소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소변을 보는 일이 잦아 결국 이장했다고도 한다.[5] 당시 조치원분교(세종캠퍼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본교와 분교의 중복되는 학과를 없애고 세종캠퍼스를 본교로 통합하라는 것이었다. 서울캠퍼스 학생들과 학교 측에서 보기에 이는 말도 안되는 억지주장이었고, 당연히 고대 재단은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세종캠퍼스 학생들은 김성수가 친일파였음을 지적하면서 김성수 동상 아래에 무덤 구덩이를 파고 동상에 밧줄을 걸어 무덤 구덩이로 쓰러뜨리려 하는 퍼포먼스를 하였다.[6] 다만 이를 삐딱하게 본다면, 민생에 전혀 도움 안 되는 민족주의 선동을 위해 멀쩡한 도로표지판을 교체하면서 막대한 세금을 낭비한 행위라 할 수도 있다. 구청장이 이러한 관급공사를 갑자기 일으킬 때는 혹시 정치자금 마련 목적은 아니었는지 의심해볼 필요도 있다.[7] 일각에서는 서정주가 종놈의 자식이었다는 말을 한다. 마름의 자식일 뿐 절대 종놈의 자식은 아니다라고 하는데, 종놈의 자식이라는 건 서정주 본인이 시에서 '아버지는 종이었다'라고 개드립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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