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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남동생 김연수 · 아들 김상만 · 아들 김상기 · 아들 김상흠 · 아들 김남 | ||
역대 선거 | 제2대 부통령 선거 | ||
설립 기관 | 동아일보(오너 일가) · 고려대학교 | ||
관련 단체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 국민총력조선연맹 · 한국국민당 · 한국민주당 · 민주국민당 |
1. 개요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김성수의 일생을 다룬 문서.2. 일생
2.1. 생애 초기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당시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지주 집안(일명 '전라도 만석꾼')에서 사실상 장손으로 태어났다.[1] 그의 집안은 당시 조선 최대의 갑부 중 하나였다.김성수는 김경중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고 그렇게까지 많은 재산을 물려받을 운명은 아닌듯 했다. 하지만 위로 세 형이 모두 죽으면서 집안의 장남이 되었다. 게다가 백부인 김기중에게 아들이 없어 백부의 양자가 되면서 가문의 장손이 되었다.
김성수의 아버지 김경중은 김성수의 할아버지가 되는 김요협의 2남 중 차남이었고, 김성수의 큰아버지였던 김기중은 장남으로서 김경중보다 다섯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김기중은 후사가 없어서 김성수를 양자로 들이게 되었다. 때문에 김성수는 김기중의 양자이자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고, 또한 동시에 친부인 김경중의 집안에서도 여전히 장남 대접을 받았다.
김성수는 1906년 전라남도 창평 영학숙, 1907년 내소사(절)에서 공부했다. 1908년 10월 도쿄 세이소쿠 영어 학교에 입학했다가 1909년 4월 도쿄 긴조 중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1910년 4월 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한 뒤 예과를 마친 후 1911년 와세대대학 정경학부로 입학하여 1914년 7월 졸업했다.
대학 졸업 이후 그는 집안의 막대한 재력을 활용하여 방직, 교육, 언론 등 여러 사업에 뛰어들었다. 집안의 재력이 워낙 어마어마한 관계로 김성수 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인 김연수 역시 아버지 김경중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김연수가 물려받은 돈은 김성수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었지만, 그래도 김연수가 세운 기업이 바로 호남 대표기업으로 꼽혔던 삼양사다. 삼양사는 1950년대 대한민국 재계 순위 1위를 차지한 대기업이었다.
2.2. 일제강점기
2.2.1. 실력 양성 운동
1915년 4월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1917년 3월 교장에 취임했다.[2] 1915년 10월 윤치호로부터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하고 경영했다.[3] 1918년 3월 중앙학교 교장을 사직했다.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으며 1919년 10월 조선총독부로부터 경성방직주식회사[4] 설립 인가를 받아 회사를 인수해 경영하였다. 1920년 양기탁, 유근, 장덕수와 더불어 <동아일보>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1920년 7월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 일했다. 1921년 7월 조선인 산업 대회 발기총회에서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9월 <동아일보>가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사장을 사임하고 취체역(取締役=이사(理事))으로 활동했으며 <동아일보>를 매개로 1922년 11월부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고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회금(會金) 보관위원으로 활동했다.[5]
1924년 4월 <동아일보> 취체역을 사직했는데 그 이유가 친일 정치 깡패인 박춘금의 압력 때문이었다.[6] 그러나 1924년 9월 고문으로 <동아일보>에 복귀했는데 '박춘금의 동아일보 테러 사건'을 전후로 자치론, 민족 개량주의의 길로 접어들면서 이 노선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1924년 자치 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소위 '민족 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으로부터 반발을 받아 물의를 빚고 중단되고 말았다. 이어 1924년 10월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서 전무와 상무를 겸하다가 1927년 10월 사임했다. 1926년 또다시 자치 운동을 전개하다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커다란 물의를 빚었는데 이를 계기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이에 대항하기 위해 1927년 2월 신간회를 결성한다.[7] 신간회 결성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를 앞세워 신간회를 주도하고자 여러번 시도했으나 사회주의 세력의 거센 반발로 신간회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1928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이사에서 물러났다.[8]
1931년 9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했으며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뒤 1932년 6월부터 1935년 6월까지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다가 1935년 4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을 사임했다. 1935년 3월 '조선 문화 향상을 위해 도서 출판의 진흥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관장 겸 이사로 추대되었다. 1935년 11월 경기도청의 주도로 '경기도 내의 사상 선도와 사상범의 전향 지도 보호'를 목적으로 조직된 '소도회'의 이사에 선임되었다.[9]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는 정간되었고 사장 송진우가 현진건 등 소수 기자들의 실수였다고 조선총독부에 정간을 해제해달라고 부탁해 폐간을 모면한 뒤 송진우는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모든 활동을 그만둔채 칩거 생활을 했다. 1936년 11월 일장기 말소사건의 여파로 김성수 역시 <동아일보> 취체역에서 물러났다.
2.2.2. 친일 활동
1937년 5월 김성수는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했으며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복간되었지만 이를 전후로 일제강점기 말기 전시 체제에 '어용 기관지'로 전락해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글을 여러 번 올렸다는 어두운 과거를 남기게 된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일전쟁의 의미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 강좌를 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담당했다. 1937년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으며 1937년 9월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 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 시국 강연에 나섰다.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에 참여하고 이사를 맡았으며 이밖에도 각종 전시 체제 협력 단체에 관해 상당히 많이 참여했다.김성수가 1937년~1945년 기간 동안 전시 체제 때 일제의 정책에 협력했었지만 그렇다고 1937년~1942년까지는 내심 민족 운동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는지, 그래도 합법적인 공간에서 최대한 실력 양성 운동에 관해 지원해주는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1930년대 후반 독립운동 단체였던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흥업구락부 사건에 관련되어 조사받거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이 무렵 한글 연구 단체인 조선어 학회에 비밀리에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조선총독부는 김성수를 배후 지원자로 보고 연행해 심문하였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투옥을 모면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40년 들어 한국어 신문은 <매일신보>만 남긴다는 총독부의 방침 아래 <동아일보>가 <조선일보>와 함께 8월 11일 폐간당하는 등 합법적 공간 활동이라는게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1942년을 전후로 김성수는 자포자기 심정인지 완전한 친일파로 변절하고 만다. 특히 1943년~1945년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경성일보>, 월간 잡지 <춘추> 등 총 25편 이상의 내선일체 찬양글, 학도병 권유문 글 등을 집중적으로 많이 썼다.[10] 이러한 점 때문에 김성수는 '선(先) 항일, 후(後) 친일' 인사로 분류되어 한국독립당원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 263명 가운데 1명으로 수록되었고 민간 단체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대한민국 정부 기관 친일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도 수록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조선에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 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
한편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다. 주로 일제 말 전시 국가총동원 체제에서 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김성수 명의의 기고문, 담화문과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친일단체 임원명단이 그를 친일인사로 판단하는 근거인데, 이것이 과연 김성수의 진의에 의한 것이었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고 해방 직후 친일로 인식되지 않았으며 일생에 걸쳐 애국적 삶을 살아온 그를 단순히 친일로 규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반론측의 주된 논거다.[11]
2.3. 광복 이후
1945년 8월 해방 이후에 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한국민주당 창당에 관여했다. 1945년 9월 미군정청 한국인 고문단 의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1월 <동아일보> 사장에 다시 취임했고 오랜 친구인 송진우의 사망으로 공백이 된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보성전문학교 교장, 1947년 2월에는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했다. 해방 정국 동안 김성수는 한국민주당을 이끌며 이승만과 함께 '반공, 반탁 운동', '단독 정부 수립운동'을 주도했는데 194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만든 국민의회에서 국무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12]2.4.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과 함께.[13] |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2월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9년 7월 <동아일보> 고문이 되었다. 그 후 초대 농림부 장관이었던 조봉암이 농지개혁법을 입안하고 대지주에게서 경제적인 토대를 완전히 몰수하려 하자 '당대의 조정자'로서 농지 개혁의 대세를 받아들였다. 당시 지주들은 농지 개혁에 결사적으로 저항하려 하였지만 최대 지주이며 한국민주당의 실질적 대표였던 김성수가 농지 개혁을 하자고 하니까 꼼짝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14][15]
1951년 6월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어 1952년 5월까지 재직했다. 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상당히 모범적으로 직무를 수행하여 이승만의 독재 장기화에 맞서고 구 악습을 타파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부통령 임기 만료 직전인 1952년에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위라며 이승만 정권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마침내 1952년 5월 29일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이 때 제출한 사임서는 제2대 국회 회의록에도 쓰여 있는 것처럼 당시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으며 민주당계 정당과 의원들이 김성수를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현 정부의 수반인 이 박사는 충언과 직언을 염오(厭惡)하고 아담(阿談)[16]만을 환영하며 그의 인사정책은 사적 친분으로 일관된 중에도 자기의 하료(下僚)조차 항상 시의(猜儗)[17]의 눈으로 보아 모든 국사를 그 자신이 일일이 직결하려고 하고 자신이 임명한 장관을 견제하기 위하야 그의 심복인을 차관에 배치하고, 차관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른 심복인을 국장에 임명하는 것과 같은 수단으로써 그의 밑에서는 아무도 가진바 역량과 포부를 발휘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읍니다.
(중략)
원컨대 앞으로 국가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는 일개 평민의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전제군주적 독재정치화의 위협을 제거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전 자유세계의 동정과 원조를 획득하여 항구적인 자유와 평화의 복락을 이 나라 이 겨레에 가져오도록 하기 위하여 국민 대중과 함께 결사분투할 것을 맹세하는 바입니다.
1952년 5월 29일, 제2대 국회 67차 본회의에서 발표된 김성수의 부통령 사임서
(중략)
원컨대 앞으로 국가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는 일개 평민의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전제군주적 독재정치화의 위협을 제거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전 자유세계의 동정과 원조를 획득하여 항구적인 자유와 평화의 복락을 이 나라 이 겨레에 가져오도록 하기 위하여 국민 대중과 함께 결사분투할 것을 맹세하는 바입니다.
1952년 5월 29일, 제2대 국회 67차 본회의에서 발표된 김성수의 부통령 사임서
이후 호헌동지회를 결성해 범야당 세력을 결집시키며 반(反) 독재 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1954년부터 뇌질환 등으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호헌동지회를 기반으로 1955년 9월에 민주당이 결성되기 이전인 1955년 2월 18일에 심근염, 뇌일혈, 위장병 등의 합병증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출판사 삼성당에서 나온 김성수의 전기에 따르면 유언이 "독재는 막아야지..."였다고 한다.
2월 24일 동대문운동장에서 국민장이 엄수되었다. 이후 고려대학교 교내에 안장되었다가,[18] 1987년 남양주시(당시 지역은 미금시)로 이장되었다.
[1] 하서 김인후의 13대손이다.[2] 중앙학교 인수를 조선총독부에서 인가해주지 않자 마침 방한한 와세다대학 교수들에게 부탁하여 조선총독부와 교섭하여 인수를 마무리지었다. 학교 신축시 현재의 안국역 쪽에 교사를 짓자는 고하 송진우의 의견과 달리 김성수는 현재의 계동 중앙중고교 위치에 짓자고 했으며 공사 시작 후 김성수 본인이 직접 벽돌을 날랐다는 일화가 있다. 인수 후에는 본인이 교장을 맡지 않았고 대신 본인이 학생들에게 수신(윤리) 과목을 가르쳤다. 휘문의숙 숙장을 역임한 유근이 1915년 4월부터 1917년까지 교장을 맡았다.[3] 식민 치하의 조선 백성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조선에 유행하던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 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족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 자본 육성 계획을 세웠는데 그 발로점이 1917년 방직기술자였던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 인수한 경성직뉴주식회사의 경영이었다.[4] 기존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던 광목제조회사인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하여 만든 회사이다.[5] 이 기간 동안 김성수는 개념인이었다. 비록 안재홍 같이 비타협적 자세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실력 양성 운동에서 만큼은 커다란 공적을 남겼으며 언론계에서는 좌우에 편향되지 않도록 노력하기도 했었다. 예를 들어서 여운형의 평생 친구인 조동호를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시켜 대접을 해줬다거나 인권 변호사로 신망이 높은 허헌을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밀어주기도 했었다.[6] 1924년 4월 11일에 <동아일보>가 박춘금 등이 만든 친일 정치 깡패 집단인 각파유지연맹을 비난했는데 박춘금이 사장 송진우와 취체역(이사) 김성수를 요정인 '식도원'으로 유인하여 권총으로 협박 및 구타를 가했다. 그 충격으로 송진우와 김성수는 사장직과 이사직을 그만두어야 했었으며 김성수와 송진우가 충격에서 벗어나 다시 동아일보 업무를 맡기까지의 공백 기간에 <동아일보> 사장직 대행을 맡아준 인물이 허헌이었다.[7] 당시 신간회는 <조선일보> 인사들이 적극 주도했었다.[8] 경성방직주식회사는 이후 동생인 김연수가 경영을 맡아 흑자로 전환시켰으며 삼양사를 차려 독립하자 김성수의 매제(막내여동생 김점효의 남편)인 김용완이 경영을 맡았다.[9] 그러나 이건 당시 사회 활동상 어쩔 수 없었다고 봐도 좋다. 당시에는 신문사 경영을 비롯해 학교 교장직이라는 것 자체가 민족 운동인 시절이었기 때문이었고 신문사나 교육을 통해 합법적으로 독립운동 양성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문사 및 교육 운동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 자신의 이름이 도용 또는 이용되는 것을 묵인하는 방법이었다고 해석하면 된다.[10] 대한민국 정부 기관 친일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내용 中[11] 관련 자료(모바일버전, PC버전), 증언 동영상(모바일버전, PC버전), 관련 논문(#1, #2, #3, #4), 관련 서적(#1, #2, #3, #4, #5)[12] 여담으로 그의 집 가사도우미의 아들이 박광옥으로 조병옥의 추천으로 경찰이 되었는데 박광옥은 장덕수 암살범으로 배희범과 함께 직접 장덕수를 총으로 쏴버렸다.[13] 본래 김성수와 이승만 두 사람은 일제 당시까지는 서로 협력하던 사이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승만이 독재로 빠지자 반독재 투쟁을 벌이며 대립 관계가 되었다.[14] 이와 관련하여 한국 사민주의 운동 진영의 명망가 주대환은 "저는 인촌 김성수 같은 분도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최대의 지주이자 최초의 자본가가 아니겠습니까? 경성방직을 만든 분이죠. 그 지주의 대표자가 대세를 인정해 버린 겁니다. 농지 개혁은 피할 수 없는 대세다. 그래서 결사 반대를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 다만 주대환 같은 경우는 현재 정치적 입장이 다시 우클릭한 손학규와 비슷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뉴라이트와 비슷한 면모도 보이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15] 다만 그냥 찬성한 건 아니고 농지개혁법 대상에서 피하기 위해 멀쩡한 농지에 바닷물을 들이부어 염전으로 만드는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16] 아부[17] 시기와 의심[18] 2024년 기준 인촌기념관 주위. 1955년 해당 위치에 김성수의 묘가 안장되었으나 학생들이 묘지 주변에서 술에 잔뜩 취한 상태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술주정 행위를 벌였다고 한다. 결국 남양주시로 이장된 후 1991년 인촌기념관이 건립되었다. 2018년 김성수의 친일 행각이 밝혀졌는데 당시 학생들의 행위는 정당한 것으로 봐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