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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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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50505><colcolor=#fff> 김영태
金永泰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2cx82008_2.jpg
1953년경, 사진의 우측이 김영태.[1]
출생 1920년 1월 16일
사망 2010년 11월 7일 (향년 90세)
미국 뉴욕 주
본관 광산 김씨
직업 조직폭력배, 정치깡패
종교 개신교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야인시대

[clearfix]

1. 개요

김두한의 친구이자, 우미관패와 대한민청의 간부. 오늘날에는 드라마《야인시대》의 등장인물로 유명하다.

참고로 드라마 상에서는 김영태가 김두한은 물론 그보다도 선배인 쌍칼에게 조차 형님 소리를 듣지만, 실제로는 김두한보다 2살 어렸다고 한다. 드라마 전개 상, 김두한이 주먹계에 입문할 때부터 정치 생활에 이르기까지 옆에서 조언해 주는 참모 역할로 낙점되어 연령대가 각색된 셈이다.

2. 생애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했고[2]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서 5년제 학교인 간타쿠 대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유학을 다녀온 후에는 본래 광복군 모집에 응하기 위해 만주로 가려 했으나 접선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한다. 과장된 요소가 있을법한 주장이지만 당시 구직이나, 독립운동, 창업 등을 이유로 만주 이주를 기획했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범죄자로 전락한 경우가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완전히 허황된 얘기라고 보긴 어렵다.

이후 22살이 된 해(대략 1943~44년 경)에 김두한을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 만난 자리에서 몇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서로 뜻이 통해서[3] 동지 서약을 맺었다고 한다. 아마 그때부터 김두한의 휘하에서 활동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자신이 원하던데로 광복군이 되지는 못했으나 김좌진의 아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 공명심에 불타 함께하며 대리만족을 느꼈다고 한다. 어찌보면 영웅이 되려다 타락한 악당인 셈.

경향신문1987년 4월 1일자에 나온 《청년운동반세기》라는 연재물에 따르면 대한민주청년동맹에서 김두한이 감찰부장일 때에도 별동대의 일원으로 있었다고 한다.

1973년,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으며 이후로 "인생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로 이름을 앞 뒤만 바꾼 김태영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1981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옮겨갔으며 뉴욕효신장로교회에서 장로를 지냈다.

야인시대 방영 당시인 2002년에도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때에 조선일보의 취재 하에 옛 동료 김두한의 딸 김을동과 30년만에 해후하고는 인터뷰를 가지기도 하였다. 당시 김을동의 미국 방문기는 SBS 좋은 아침에서 방송된 바 있다.

당시의 인터뷰 등을 참고해 볼 때에, 김영태는 무식하고 배운 것 없었던 조직폭력배들 중에서는 교육을 받은 엘리트에 속했기에[4] 김두한으로부터 단순한 부하로 취급되기보다는 책사 내지는 동료로 대우받는 등 우대를 받은 듯 하다. 물론 김두한이나 이정재, 이화룡 등등의 누구라도 아는 조폭두목 휘하에 있었다던 그 당시 조폭들 이야기 들어보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그 사람을 형님으로 모시기는 했으나 대등하거나 독립적인 관계였거나 친구였다'[5]고 운운하곤 하는데 이게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알아서 판단할 수밖에 없어서 좀 걸러들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실제로도 대한민청 안에서는 꽤 급수가 높은 사람이었던 건 사실이다. 보통 별동대를 이끌 때 대장 역할을 하던 사람이 신영균과 김영태였다는 증언이 있었는데, 그 예시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서술된 바에 따르면 시공관 사건[6]에서 김두한과 함께 가장 언급이 많이 되었고 실제로 그 사건에서 민청 부하들중 별동대를 이끌었던 이가 바로 그였다. 그리고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 있었던 중앙극장 습격 사건에서 연막탄을 터뜨린 조직원들 중 가장 지위가 높았던 이가 김영태라는 신영균의 증언이 있었다. 실제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조직폭력배를 포함한 범죄자 집단들 중에 고학력자가 끼어있으면 조직의 브레인으로 대접받아서 어지간한 조직원들과는 차원이 다른 대우를 받고, 심지어는 조직 밖에서도 뒷세계에선 적대조직에서 조차 기본 예의는 갖춰서 대하는 등 반쯤 거물로 대우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한민청 활동과 관련해서 신영균, 박용직, 조희창 등 김두한의 부하들도 공통적으로 김두한 바로 밑의 최측근이 신영균, 김영태였고 그 밑의 행동대장급 간부로 김관철, 홍만길, 고경주(휘발유), 조희창(상하이 조) 등등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2010년 11월 7일에 90세의 나이로 미국 뉴욕에서 사망했다.

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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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좌측의 안경 쓴 사람은 김두한[2] 김영태와 동갑이고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한 유명인사 중에는 제주도 교육감을 지낸 양치종이라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김영태가 몇 회 졸업생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니 둘이 동기였는지는 의문.[3] 김영태는 이에 대해서 "가슴속에 타오르는 반일의식"에서 동질감을 느꼈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시기상 김두한이 징용 빠지려고 청년단 하던 때와 너무나 맞아 떨어지다보니 진위를 가리기 쉽지 않은 편.[4] 당시에는 기초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문맹인 사람도 수두룩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본 유학생으로 중학 교육까지 마치고 온 김영태는 학력이 제법 좋은 편에 속한다. 고졸에 경찰까지 맡아봤던 이정재 정도면 당시 일반인 기준으로 최고학력이라 봐도 된다. 신마적의 경우는 이런 시대에 무려 대학교를 다닐정도로 엄청난 고학력자였으며 오늘날로 따지자면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사람이 깡패질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5] 이상욱이나 김동회가 자신이 김두한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고 주장하지만 김두한은 생전 이 둘을 언급한 적이 없고 신영균과 김영태, 조희창 등도 이 둘을 언급한 적이 없다. 거지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김춘삼은 자기가 김두한의 보스였다고 말하지만 신뢰성은 영.[6] 정진룡(야인시대에서는 정진영)과 김천호가 이끄는 조선민주청년동맹 무리가 명동에 위치한 극장인 시공관 앞에서 좌익 선전 경호를 하고 있을때 김두한의 대한민청 무리가 그들을 기습해서 선전을 방해하고, 조선민청 무리를 현장에서 때려 죽이거나 정진룡과 김천호와 함께 납치하여 민청 지하실에서 김두한의 부하이자 대한민청의 간부인 신영균과 그 일당이 정진룡과 조선민청 대원들을 쇠파이프로 때려 죽이고, 김천호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으로 흔히 정진룡 살해 사건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