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21:23:33

이화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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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이북의 3대 조직폭력배
이화룡 박두성 아오끼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화룡
李華龍
파일:external/news.chosun.com/199811120358_00.jpg
출생 1914년
평안남도 평양부 (現 평양시)
사망 1984년 2월 24일 (향년 69–70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고려대학교 부속 병원
신체 172cm[1]
별명 평양박치기, 검은 신사, 명동의 황제
가족 배우자 임봉옥, 누이 이성룡
슬하 2남 4녀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4. 여담

[clearfix]

1. 개요

평안남도 평양 출신 조직폭력배.

2. 생애

해방 전 이북에서 평양에는 이화룡이 있다고 할 정도로 이미 유명한 건달이었고, 젊은 시절에는 박두성, 아오끼와 함께 북쪽 3대 강자라고 불리고 있을 정도였고, 또는 이북이나 만주 등지에서 싸움과 노름을 하며 세월을 보냈고, 시라소니하고는 오랜 친구였다.

재빠르게 상대방의 무릎을 딛는 동시에 큰 기합을 지르며 위력적인 박치기를 구사했었다고 한다. 서북청년단 대동강동지회의 특공대장으로 좌익계열을 습격하는 등 백색테러리스트로 활동했으며 제주 4.3 사건(4.3 학살)에도 가담했다고 한다. 6.25 전쟁 이후 이기붕이 자유당 당원 제의를 했지만 이를 거절하였는데 이화룡이 스카웃을 거절하자 이기붕은 이정재를 스카웃했다.

누이 이성룡[2]이 서울에서 유명한 요정 명월관과 당시 명동에 있던 대규모 고급 중화식당인 청해루를 운영했으며, 요정과 중화식당 운영으로 벌어들이는 중 일부를 이화룡한테 원조해주었기 때문에 타 건달 조직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다고 한다. 시라소니가 굶주리고 갈 곳 없는 KLO 대원들을 위해 동대문패에 점포를 양도해 달라면서 몇 차례 돈을 대여했다가 50만환(5억원)을 또다시 빌려달라고 하며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군인들에게 점포 양도를 요구하자 동대문패가 분노하여 시라소니를 좁은 사무실로 유인하여 온갖 흉기로 린치를 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화룡은 복수를 위해 이정재의 동대문파와 대립했으나, 이정재의 사주를 받은 경찰의 협박으로 이를 그만둔다. 그러다가 황금마차 습격사건으로 다시 싸움이 일어났고, 이 때는 대승을 거두었다.[3] 이후 내부의 배신자들로 인해 명동패 몰락의 위기가 오자 이정재와 최후의 전쟁을 벌이지만, 1958년 충정로 도끼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면서 조직폭력계에서 강제 은퇴를 당하게 되는데, 이후 그의 조직은 신상사가 잇게 된다.

이후에는 1960년부터 1967년까지 화성영화사를 운영했었다. 이화룡이 제작한 거물급 작품으로는 소위 1대 장희빈으로 불리는 김진규, 김지미 주연에 정창화 감독의 1961년작 '장희빈', 한국 고전영화의 걸작을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강대진 감독, 김승호 주연의 '마부', '박서방', '노다지'[4]. 이만희 감독의 데뷔작인 '주마등' 등이 있다.

5.16 군사정변 직후 사회정화 구실로 잡혀가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다행히 당시 라이벌과 같은 비참한 말로는 맞이하지는 않았다.[5] 영화 사업에서도 은퇴한 후 이화룡은 신앙 생활을 하며 후에 목사로 지내 살아오다가 1984년 2월 24일, 고혈압으로 숨졌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옛날에 주먹세계에 몸담은 것을 굉장히 후회했다고 한다.[6]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에 있다.

3. 대중매체에서

대부분의 작품에서 김두한과 우호적 관계이며 불문율과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는 낭만파 주먹으로 설정됐다.

파일:3b008bcc3e1616905cdc2b6bf516aedd_W4Hrgj7QshMpfmD4Gp94l.jpg
  • 1999년 MBC 드라마 <왕초>에서는 배우 이계인이 연기했다. 빈 손으로 월남해 술집에서 꼬장이나 부리는 몰락한 오야붕으로 너프 당했는데, 유일하게 부정적 이미지로 나오는 작품.

파일:이화룡.jpg
  • 2004년 EBS 드라마 <명동백작>에서는 배우 최상훈[7]이 연기했다. 명동의 황제라는 별명을 바탕으로 명동의 문학가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문학가들을 정치에 끌어들이려는 이정재, 김두한 등 정치깡패들로부터 명동의 문학가들을 지켜주는 조력자 캐릭터로 나온다.

4. 여담



[1] 출처[2] 이 사람의 아들이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냈던 오원철이라는 세간의 설이 돌지만, 검색만 해봐도 모두 드라마 야인시대 관련 게시물이나 댓글에 불과하고, 이렇다 할 공신력 있는 근거조차도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원철의 실제 모친은 이춘봉으로, 황해도 해주 출신이며, 한국전쟁 후 서울로 내려오지 못하고 고향 황해도에서 사망하였다는 설도 있다.[3] 드라마 <무풍지대>에서 나레이터가 말하길 이정재의 동대문파는 전투력 면에서는 이화룡의 명동파를 단 한 번도 앞선 적이 없다고 했을 정도다.[4] 조감독이 임권택.[5] 사실 자유당과 결탁했던 이정재와 대립관계였다는 점과 오히려 충정로 도끼 사건으로 구속된 적이 있어 추가 처벌을 받기에는 애매한 면이 있었다.[6] 공교롭게도 최후가 김두한하고 똑같다. 박정희 정권에서 잡혀서 옥고를 치르고 나서 혈압 문제로 골골거리다가 고혈압으로 고려대학교병원에서 사망했다. 다만 당시 기준으로도 약간 명이 짧았던(이 쪽도 원래는 매우 튼튼한 체질이었는데,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고 알려져 있다.) 김두한에 비하면 환갑도 넘기고 천수도 누린 편이다.[7]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다이호 대좌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