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盧天命 | |
<colbgcolor=#000><colcolor=#fff> 원명 | 노기선(盧基善) |
출생 | 1912년 9월 2일 |
황해도 장연군 순택면 비석포리# | |
사망 | 1957년 6월 16일 (향년 44세) |
서울특별시 | |
가족 | 노계일(부) 2남 2녀 중 차녀[1] |
본관 | 풍천 노씨# |
학력 |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 졸업) |
종교 | 천주교(세례명: 베로니카) |
직업 | 소설가, 시인, 교수, 언론인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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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사슴의 시인, 평생을 독신으로 고독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하여 한국 문학에 이름을 남겼다. 뛰어난 시어 사용과 감상적인 작품으로 이름난 문인이자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다.2. 생애
개명 전 원명은 노기선(盧基善)이며 황해도 장연군(長淵)에서 아버지 노계일(盧啓一)과 어머니 의성 김씨 김홍기(金鴻基) 사이의 딸로 태어났다. 1930년 3월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하여 1934년 봄에 졸업하였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해 학예부 기자로 4년간 근무하면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 <사슴>을 발표하였다. 1938년에 조선중앙일보를 퇴사해 조선일보의 학예부 기자가 되었는데 4년 동안 조선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여성(女性) 지의 편집인이 되어 여성지 편집을 맡아 보았다.사 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그러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2년 친일 문화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가입하여 전쟁을 찬양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선동하는 시를 발표하였다.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문화부 기자가 되어 '승전의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노래하자 이날을', '흰 비둘기를 날리며' 등 다수의 친일 시를 발표했다. 대표적인 친일 시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가 있는데 아래가 그 내용이다.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2] 등에 강사로 나가 출강하였으며 후에 부녀 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기도 하였는데 1946년까지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있었다. 1949년에는 몇 편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피난하지 못한 그녀는 월북한 임화, 김사량 등이 주도하는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 궐기 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했다.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좌익 분자 혐의를 받아 징역 20년을 선고받으나 여러 문인들의 도움으로 몇 개월 만에 사면되어 풀려났다. 이후 공보실 중앙 방송국(현 한국방송공사) 방송 담당 촉탁에 임명되기도 하고 3차 시집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지만 무리한 집필 활동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1957년 재생 불능성 뇌빈혈로 사망했다.[3]
3. 기타
- 원명은 '기선'이었으나 어렸을 적 병으로 인해 사경을 넘긴 뒤 '천명(天命)'으로 개명하였다.
- 냉정한 성격으로 인해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고 연애도 거의 하지 않았으나 연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한때 보성전문학교 교수인 김광진과 연인 사이였으나 그는 유부남이었고 끝내 결별한 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 당대 같은 여성 문인인 최정희 및 모윤숙과는 매우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특히 최정희에게 보내는 편지인 '나를 대구로 데려가 주'를 보면 노천명이 최정희에게 떼를 쓰는 표현을 엿볼 수 있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알 수 있다. 노천명, 최정희, 모윤숙 3인방은 사이가 너무 좋은 나머지 친일 행위에서도 우정을 발휘하여 일제의 우리 문인 회유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1942년에 가입하는데 같은 시기에 반민족 악질 친일파로도 세 여성이 함께 변절한 것이다.네이버캐스트 이 중에서 최정희는 친일파 김동환과 동거하면서 2명의 자녀를 두기도 했다.
- 뛰어난 시적 감각을 지닌 여성 문인의 선구자로 필력만 따졌을 때 일제강점기 여성 문인 누구와 비교하든 가장 탁월한 자질을 가졌지만 그녀의 비정치적 채취는 자신의 형편에 따라 변해서 후에는 철저한 정치적 친일 선동에 앞장섰다. 그러므로 그녀의 문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일 행위까지 용납할 수는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친일 행위도 단순히 작품 1~2편을 발표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친일 시와 글을 지속적으로 한국 젊은이들을 징병과 징용에 적극적으로 밀어 넣은 매우 질이 나쁜 것임을 봤을 때 소극적 친일파로 볼 수도 없다. 그녀의 친일 행위가 얼마나 확실한지는 유종호 문학 평론가가 '시인 세계'에서 '마지못한 친일까지 중죄인 취급은 가혹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에서 거론하는 28명의 문인 중 시인으로는 김동환, 김소운, 김안서,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 모윤숙, 주요한 등 8명이다. 이 중 김동환과 노천명을 제외하면 교과서에 올릴 만한 작품이 별로 없다.'고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김동환과 노천명은 친일 시인 중 선별적으로 구제론을 펼치는 사람까지도 등을 돌릴 정도의 명백한 친일을 한 것이다.[4] 2006년 2월 13일 한겨레신문 결국 교과서와 수능에서 나오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 '여자 김동인'이었다. 근대 남성 작가 최악의 성격 파탄자가 김동인이라면 여성부 챔피언은 단연 노천명이다. 도도함을 넘어 오만불손하고 독선적이며 기회주의자[5]의 성격이었다. 본인의 시 자화상에서 스스로를 '대처럼 꺾어는 질 망정 구리 모양 휘어지기가 어려운 성격'이라고 했지만 자기보다 세면 얼마든지 휘어졌다.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성격으로 동료와 자주 충돌을 일으켰는데 같은 여성 문인들과는 친하게 지냈으나 남자들에게는 결벽스러울 정도로 냉정했다고 한다.[6] 그러나 노천명의 도도함이란 기실 세태에 따라 얼마든지 꺾어지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는데 절대 강자인 권력에는 발휘되지 못하고 철저히 굴복하여 민족을 팔아먹는 친일 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남자들에게 결벽스러울 정도로 냉정한 자세와는 다르게 일제에는 지조없는 비열한 모습을 보였다. 일제강점기에 행한 친일 행위 및 좌익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 활동으로 볼 때 기회주의 지식인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치하와 서울 수복 후 대한민국 국군 치하에서 보인 그녀의 처신을 보면 약자나 만만한 자에게는 오만하게 굴고 강자에게는 철저히 순종하는 전형적인 강약약강 기회주의자의 전형임을 알 수 있다. 본인 말과는 달리 '자신의 위기 앞에서는 대처럼 꺾어지지 않고 구리처럼 휘어진 것'이다.
- 얼마나 비열하고 뻔뻔스러운 성격을 가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이윤옥 시인에 따르면 노천명은 1945년 2월 25일 시집 "창변"을 펴내고 성대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는데 시집에 친일시 9편이 수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광복이 되자 노천명은 시집 "창변"에서 친일시 9편을 제거하고 계속 출판했다고 한다.친일파 시인, 우리가 사랑하였던 노천명의 친일 진면목
- 방송인으로도 활동했다.
- 1983년에 전국민적인 관심을 모은 생방송이던 KBS1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서 상봉한 박 아무개 자매는 6.25 전쟁 이후 생활고로 인해 아버지가 자매를 각각 다른 집에 양녀로 보내 헤어진 케이스인데 이들 자매 중 1명을 입양한 가정이 바로 시인 노천명의 집이라고 한다. 그런데 당사자의 언급에 따르면 말이 입양이지, 노천명 집에서 식모로 굉장히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식모에게도 대우가 무척 나빴던 듯하다.
- 월간조선에서는 좌익 활동했다며 친일파를 곁들여 그녀를 비난한 기사를 썼으나 월간조선이 그동안 우익 친일파를 옹호해 왔던 터라 좌익 친일파만 욕하고 우익 친일파는 두둔하는 이념적으로 편향적 행보라는 비난만 받았다.
- 중요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논할 때 항상 언급되는 그녀는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선정되면서 결국 친일인명사전의 주요 친일파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친일인명사전 등재 때 일부 친일파는 이의 제기가 있었으나 그녀는 당연히 그런 논란이 없었다. 그녀는 총 14편의 친일 작품이 밝혀져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으며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한국어 위키백과 문서
- 그녀가 묻힌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가톨릭 묘역에 문학비가 있고 경창남도 거창군 거창읍 가지리 죽전근린공원과 경기도 과천시 서울대공원 다람쥐동산, 경북 김천시 직지문화공원 등지에는 <사슴>, 전남 진도군 동령개공원에 <져버릴 수 없어> 시비가 있다. 특히 서울대공원 시비는 1995년에 제막됐으며 2020년 광복회 측이 친일행적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웠다. 경기도 부천시 상동 사랑마을아파트 사잇길에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시비도 있었으나 시민들에 의한 수 차례의 민원 제기 끝에 2019년에 서정주, 주요한 등의 시비와 함께 철거됐다.
- 2020년 10월 스타북스에서 일제강점기 신문과 잡지, 국립도서관 보존 문서에서 새로 발굴된 작품과 친일 작품까지 망라한 노천명 전집 종결판이 발매되었다. 1권이 시, 2권이 수필, 3권이 소설집이다.
4. 관련 문서
[1] 언니와 오빠는 동복 형제, 남동생은 이복 형제.[2] 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3] 노천명의 시신을 수습한 법관 김홍섭(1915년~1965년)의 회고에 따르면 몇 권의 책과 앉은뱅이 책상 외에 변변한 가재 도구도 없는 손바닥만 한 낡은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어 교회 신자들이 수습해 줬다고 한다.[4] 사실 김동환과도 비교가 불가능한데 김동환은 그나마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자신의 친일 행위를 자수했고 김동환의 아들이 아버지의 친일 행위를 분명히 사과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 데 반해 노천명은 그런 것도 없는 데다 해방 이후에도 계속 기회주의적인 행보를 보인 터라 실드 받을 일이 앞으로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5] 일제 때는 친일을 했고 서울이 북한에 넘어가자 종북을 했다.[6] 다만 한 사내에게는 예외였는데 당대 최고의 미남이자 남녀 불문 조선 문인들의 아이돌이었던 백석. 노천명은 그를 바람직한 시인의 모델이자 자신의 이상형으로 봤으며 대표작 사슴이 백석에게 보내는 연시라는 해석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