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2 02:51:31

동정 평야

1. 개요2. 고대 도시
2.1. 영(郢)2.2. 이릉2.3. 형남 4군2.4. 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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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강 중류에 위치한 동정호 인근의 평야 지대를 의미한다.

예전에 빙하기에 형성됬던 빙하가 해빙기에 녹아서 '운몽택'이라는 거대 호수를 이루었던 적이 있다.

묘족신석기 시대부터 이 곳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분석되며, '형초 문화(荆楚文化)'의 발원지로 유명한 곳이다.

적벽대전, 형주 공방전 등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2. 고대 도시

2.1. 영(郢)

기남성이 이 곳에 위치하였으며, 약 400년동안 초나라가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파나라와 촉나라를 점령해서 파촉을 차지한 진나라를 상대로, 진나라가 있는 옛 파나라 지역으로 초나라가 처들어 왔으나 파촉한중 분지를 차지한 진나라는 백기로 하여금 초나라 군대를 격퇴한 것을 시작으로, 초나라는 진나라의 반격에 밀려,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진나라가 초나라 강역을 영에서 밀어내면서 언마저 차지한 직후, '영'과 '언'을 합한 구역인 '언영' 지역을 '남군'으로 개명하였으며, 영 지역은 이 '남군'의 '강릉(江陵)[1]'현으로 개명되었다.

수도 영과 부수도 언을 잃은 초나라는 거점을 진성과 거양[2] 등을 배도로써 삼다가 수춘으로 천도하였으며, 이후에 진나라에게 멸망할 때까지 수춘은 초나라의 수도로써, 영 다음으로 그나마 오래 유지되었다.

현대에는 행정 편성상 징저우시로 편성되었다.

2.2. 이릉

夷陵.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왕릉이 대거 위치한 곳이라 하여, '야만인의 무덤'이라는 뜻에서 '이릉(夷陵)'이라 하였다.

이릉대전이 발발했던 것으로 유명한 곳이며, 현대에는 이창시에 편성되었다.

2.3. 형남 4군

무릉, 영릉, 장사, 계양.

2.4. 무창

도시의 기원은 상나라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나라 대에 이 일대는 형주 장사군(長沙郡)과 강하군 소속이었다. 강하군의 경우엔 지금도 우한시 장샤(Jiangxia) 구 지명으로 남아있다.

형주 공방전으로 형주가 위와 오로 분리되자 오나라는 자국 영토의 강하군, 장사군 일부에 무창현(武昌縣)을 두었고 손권과 손호가 천도를 하기도 했다. 다만 해당 우창현은 현재 우한 도심이 아닌 동남쪽 외곽인 어저우(鄂州)[3] 일대이다. 서진시대 이후 무창현 부근 현 우한 일대는 무창군(武昌郡)으로 떨어져나간다. 지금의 우한 시는 이렇게 해서 형성된 무창현에 기원한다. 두 무창이 한자가 같은데다 연관성도 있기에 쉽게 헷갈린다.

남송 시대에는 양양(襄陽)[4]을 비롯한 남송의 요충지 중 하나였고, 악주(鄂州)[5]라고 불렸다.[6] 악비가 금나라로부터 중원 회복을 위해 군대를 주둔시켰던 곳이었고, 개경 원년(1259년) 몽송전쟁 시기 장승이 악전고투하였고, 이후 고달이 강릉에서 지원을 오자 공언휘[7]의 군대가 이를 요격하지만, 고달은 계략으로 공언휘를 주살하였다. 이후 가사도가 이곳에서 악주 전투를 지휘하였고, 충칭에 있던 여문덕의 군대도 이곳으로 향하여 악주를 방어하였다. 1273년 양양 함락 뒤 이듬해 악주도 함락된다.
파일:무창 중국.jpg
19세기의 지도. 무창현(Wu-chang)이 2개 있는 것이 보인다. 심지어 한자까지 같았다.[8]

한편 무창, 즉 우창은 신해혁명의 진원지로 청나라 만주족 왕조의 멸망에 결정타를 날린 곳이기도 하다. 1911년 이 도시의 전신인 우창에서 일어난 우창 봉기가 그 시작이었다. 봉기의 이유는 청 황실이 철도 국유화를 감행하려 하자 보로운동 즉 철로를 지키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만주족을 축출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멸만흥한으로 번진 것이었다. 이후 군벌 우페이푸가 장악하여 그의 중심지가 되었고 1921년부터 노동운동이 성행했으나 1923년 2.7 사건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됨으로 1926년 10월 중국국민당 정부의 손에 들어갔다. 상계군벌 탕성즈가 양호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장제스가 우한 천도론을 주장해 11월 우한 천도가 결정되었지만 공산당, 국민당 좌파, 탕성즈가 연합하여 반장운동을 벌이자 장제스가 기존 입장을 번복하여 난창 천도를 주장해 천도논쟁이 벌어졌다. 이후 3월에 정식으로 우한 국민정부가 출범하였으나 1927년,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 국민정부를 세운 후 난징 정부와 대립하다가 장제스 사퇴를 조건으로 영한합작이 이루어져 우한 정부가 난징 정부에 통합된다.

이때 탕성즈가 양호 지역을 점령하려 안후이성으로 쳐들어가서 깽판을 치다가 리쭝런, 바이충시에게 토벌당한 후 잠시 계계군벌의 영향력 하에 들어갔다.

이후 국민정부에서는 광서파, 서산회의파, 개조파 등이 알력을 벌이다가 결국 장제스가 복귀했고 장제스는 우한을 다시 우창, 한커우, 한양의 우한 3진으로 환원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커우가 국민정부의 12개 직할시 중 하나로 승격하는 등 우한 3진은 중국의 중요한 대도시로 남았다.

국민당의 2차 북벌까지 마무리된 이후 장제스가 계계군벌 견제를 위해 루디핑을 후난성 정부주석에 임명해 루디핑과 광서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광서파가 호남 사건을 일으켜 허젠을 후난성 정부주석에 임명하고 루디핑을 파면하면서 1차 장계전쟁이 발발하고 이것이 반장전쟁으로 번진다. 여기서 장제스가 승리해 계계는 우한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만주사변제1차 상하이 사변, 열하사변을 통해 일본의 침략 야욕을 파악하게 된 장제스는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대규모의 공업기지 육성에 나섰다. 이때 장제스는 내륙 깊숙히 위치한 우한을 일본의 침략시 맞서 싸울 거점으로 계획하고 우한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였다. 그리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37년 12월에 수도 난징이 함락되자 국방최고위원회와 여러 주력 부대가 우한으로 퇴각했다.
1938년 우한 전투 당시 모습. 포격하는 일본 해군 강방함대, 일본 함선들을 노리고 폭격하는 중국 공군, 돌격하는 일본 육군 보병대의 모습이 담겼다.

1938년 10월에 우한은 일본군에게 함락되었고 일본 육군 11군 사령부가 설치되어 중지나방면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결국 국민정부는 쓰촨성 등 서남부 지역으로 가까스로 옮긴 극소수의 공업시설만을 가지고 일본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일본군이 항복한 후 우한은 국민정부의 손에 들어갔으나 국공내전 후반부인 1949년 5월 우한 3진을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우한 3진을 통합시켜 우한 3진은 최종적으로 우한이라는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9]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 조반파와 보수파 홍위병들의 내전으로 수백 명이 사망하는 일대 혼란의 장이 되었으며 7.20 사건이 일어나 중국이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한커우(漢口)는 명조(明朝) 중엽 이후에 자연발생한 도시이며 역사는 비교적 짧지만, 명조 말기에는 한양과 우창을 능가하는 큰 상업도시가 되어 장강 중류의 물류, 상업의 중추로서 성장하였다.

그 후 대에는 한커우진은 서산 상인이나 섬서 상인, 휘주 상인(신안 상인) 외 각지의 상인이 모이는 상업도시가 되어, 장시성경덕진(景徳鎭), 허난성의 주선진(朱仙鎭)(현재의 카이펑 시 부근), 광둥성포산시(佛山市)와 함께 《4대 명진》의 하나로 불렸다.

1891년에는 한양에 한양조병창이 설립되어 총기의 생산을 맡게 되었다. 주로 독일제 총기를 라이센스 생산하였는데 Gew88, MG08, 마우저 C96, Gew98등의 총기를 생산하였다.

현대에는 행정 편성상 우한시로 편성되었다.


[1] 징저우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있는 '장링(강릉)현'(이 곳에 있는 '강릉 망산 1호 무덤'에서 1980년대에 '호좌봉가고'가 발굴된 것으로 유명하다.)"과는 구분되고 있다.[2] 현재에는 푸양시(안후이성)으로 편성되었다.[3] 악주[4] 강남에 위치한 정권에 있어 요충지였다. 일찍이 손오 최후의 명장 육항이 형주를 중시했다.[5] 정확히는 우한시 우창구[6] 서쪽으로는 사천 지역을 지원할 수 있었고, 동쪽으로는 양회 지역을 지원할 수 있었다.[7] 장유 수하의 부장이었다.[8] 하지만 신해혁명 후 동쪽의 무창, 즉 우창은 옛 당송대 지명인 악주를 취하여 어저우가 되었고, 서쪽의 우창은 한구 및 한양과 합하며 우한(武漢)이 되어버려 현재 우창이란 지명은 우한시 우창구에만 남아 있다.[9] 중화민국국부천대 당시의 본토 행정구역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지금도 중화민국의 명목상 행정구역상으로는 한커우 직할시와 우창 시, 한양 현의 3개 도시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