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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모스크의 미나렛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전경
하얀 모스크 전경
1. 개요
히브리어 רַמְלה아랍어 الرملة
영어 Ramla / Ramle
이스라엘 중서부의 도시. 텔아비브 (야파) 동쪽의 평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8만명으로, 이스라엘 중부 관구의 주도이다. 북쪽의 도시 룻드 (롯)와 시가지가 이어져 있다.
지명은 아랍어로 '모래'를 뜻한다. 8세기 우마이야 왕조의 행정 도시로 세워져 중세 시기 팔레스타인 지역의 최대 도시였고, 지금도 주민 중 1/4는 아랍계로 집계된다. 시내에는 하얀 모스크, 지하 저수조 등 중세 시기 유적들이 남아있다. 팔레스타인의 행정수도 라말라는 내륙의 서안 지구에 있는, 다른 도시다.
2. 역사
하얀 모스크 유적
우마이야 왕조의 왕자이자 팔레스타인 (필라스틴) 총독인 술라이만 이븐 압둘말리크가 기존의 치소이던 인근의 룻드 (롯)를 대체하는 행정 치소로 세운 신도시였다. 모래를 뜻하는 라믈라 지명은 도시가 입지한 토양에 모래가 섞인 것에서 기원했다. 굳이 릿다 대신 새 도시를 근처에 세운 것은, 기독교도가 다수인 룻드는 이슬람 정복 시에 맺은 협약 때문에 마음대로 이슬람식으로 개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 물론, 기독교도와 섞이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 초기 이슬람 제국의 위정자들이 암사르를 세운 것과 유사한 측면도 있었다.
술라이만은 우선 알 바라다라 불린 수도교를 세워 동남쪽 10km 지점의 텔 게제르에서 물을 끌어왔고, 거대한 사원을 세웠다. 그후 술라이만은 룻드의 교회 혹은 시가지를 파괴하며 기존 기독교도, 유대교도, 사마리아인 주민들을 이주시켰다.[2] 따라서 라믈라는 빠르게 팔레스타인 남부의 최대 도시로 거듭났다. 705년 ~ 715년간 팔레스타인 총독을 지낸 술라이만은 715년에는 칼리파에 등극했다가 717년 사망한다. 이후로도 라믈라는 이집트와 시리아, 지중해와 예루살렘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써 팔레스타인 지역의 중심 도시로 기능했다.
750년 압바시야 혁명 후 압바스 왕조는 주요 우마이야 도시였던 라믈라의 대사원 등을 압수했다. 압바스 당국은 알 바라다 수도교의 유지비가 큰 것에 고심했지만, 칼리파 알 무타심 대에 유지를 결정했다. 9세기 말엽, 라믈라의 무슬림은 주로 아랍계 및 페르시아계였고 딤미는 사마리아인이 대부분이었다. 10세기 예루살렘 출신 지리가 알 마크디시는 라믈라가 물과 과일이 풍부한 도시로, 잘 조성된 시장에서 과일과 올리브유[3] 등이 판매되는 등 교역이 활발하다고 기록하였다.
2.1. 바누 자라흐
압바스 왕조기에 세워진 지하 저수조
다만 10세기 중반 들어 라믈라는 계속되는 전란으로 쇠퇴했다. 969년 파티마 왕조가 점령했지만, 975년 동로마 제국의 남하로 시리아에 혼란이 도래하자 튀르크계 군벌 아프타킨과 카르마트 베두인이 연대하여 시리아 각지를 장악했다. 이에 파티마 조의 재상 자우하르가 출정했으나 다마스쿠스에서 대패했고, 라믈라까지 빼앗겼다. (977년) 이듬해 칼리파 알 아지즈가 친정하여 라믈라 인근에서 격전 끝에 아프타킨을 격파했고, 후자는 2만의 전사자를 남긴 채 패주하다가 기존의 동맹이던 베두인계 자라흐 부족에게 잡혀 10만 디나르에 파티마 조로 넘겨졌다. 그후 카르마트가 라믈라를 지속적으로 습격했고, 자라흐 부족 역시 파티마 조에 반기를 들어 라믈라를 장악해버렸다. 이에 알 아자즈는 또다시 토벌군을 보내어 983년 라믈라를 수복했으나, 여전히 팔레스타인 지역은 불안정했다.
도시에 대한 베두인 부족들의 잦은 공격은 기간 시설의 점진적인 파괴로 이어졌다. 저수조의 물도 시가지 교외의 빈민들은 접근이 어려웠다. 겨울에는 진탕으로 변하고, 여름에는 단단한 모래 토양이 되는 곳도 악조건에 해당했다. 997년 라믈라를 공격하다가 다마스쿠스 총독 자이쉬 이븐 삼사마에게 격퇴된 바 있던 자라흐 부족은 11세기 들어 더욱 세력을 넓혔다. 1011년경 팔레스타인 내륙 전역은 자라흐 부족의 수중에 있었고, 라믈라 역시 파티마 수비대가 축출된 후 자라흐 토후국의 수도가 되었다. 파티마 조에 반기를 든 그들은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 빈 자파르를 데려와 칼리파로 선포했고, 이로써 라믈라 일시적으로 칼리파국!의 수도가 되나 싶었지만 곧 파티마 조의 뇌물에 넘어간 자라흐 부족이 포기하며 해프닝으로 끝났다.
1013년에는 파티마 조의 베르베르 장군 알리 빈 자파르 빈 팔라흐가 2만 4천 대군을 이끌고 라믈라를 수복했지만, 인근 농촌은 여전히 자라흐 부족 수중에 있었다. 파티마 조에 복속해 있던 자라흐 부족은 하산 빈 무파리즈의 주도 하에 1024년 재차 봉기하였고, 다마스쿠스 총독 아누슈타긴 앗-디즈바리는 직접 라믈라에 주둔해 막으려 했지만 카이사레아로 패주했다. 그후 자라흐 부족은 라믈라를 점령, 여러 주민들 죽이거나 사로잡고 재산을 약탈했다. 하산은 나스랄라 빈 나잘을 총독에 봉했고, 파티마 조정으로부터 나블루스 지배권도 얻었다. 비록 이듬해 아누슈타긴이 라믈라를 수복했지만, 곧 재차 격퇴되어 아스칼론으로 피신한 후 이집트로 소환되었다. (1026년)
따라서 하산은 라믈라를 재점령하고, 팔레스타인 전역을 장악하려 시도했으나 1029년 증원된 병력과 귀환한 아누슈타긴은 갈릴리 호 동안에서 벌어진 알 우크와나 전투에서 그를 격파하며 파티마 조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회복했다. 1030년, 동로마 제국과 동맹하고 (명목상) 기독교로 개종까지 한 자라흐 부족은 동로마령인 시리아 북부로 이주해 종종 파티마 조의 영토를 습격했다. 1032년 동로마-파티마 휴전 협상 당시 로마노스 3세는 파티마 조의 속국 지위로 자라흐 토후국의 복구를 주장했지만,
2.2. 파티마 왕조기
자라흐 부족의 위협에서 벗어난 도시는 점차 회복했고, 1047년 라믈라를 방문한 페르시아인 지리가 나시르 호스로는 회반죽을 바른 석벽에 철문을 지닌 강력한 방어력을 지녔다고 묘사하였다. 그에 따르면 1033년 12월, 지진으로 여러 건물이 붕괴했지만 사상자는 없었다 한다. 주택들은 일대에 풍부한 대리석으로 겉면의 장식과 함께 지어졌고, 각각 빗물 저장고가 있으며 모스크의 큰 저수조에 물이 차면 누구나 가져가 식수로 썼다 한다. 또한 그는 대리석 색상의 다채로움[6]에 주목했고, '메카 모래'와 함께 쉽께 썰 수 있었다 한다. 과일 재배 역시 이어져 라믈라에만 있는 무화과가 특산물로써 시리아와 지중해권에 '필라스틴'이란 이름으로 수출되었다 한다.2.3. 십자군 치하
12세기 십자군이 세운 세례자 요한 성당. 후일 대사원으로 전환된다.
1099년 6월, 1차 십자군은 주민들이 모두 도망간 도시를 무혈 점령했다. 다만 얼마후 인근에 매복해 있던 파티마 군이 발각되어 격퇴되었다. 12세기 초엽, 라믈라에선 세 차례의 큰 전투가 있었다. 우선 1101년 5월, 아스칼론에 당도한 베이루트 태수 사드 앗 다울라 알 카와시가 라믈라로 진군했으나 보두앵 1세가 카이사레아에서 남하하자 물러났다. 그후 5천[7] 병력을 지원받은 사드 앗 다울라가 재차 아스칼론에서 진격해 벌어진 1차 라믈라 전투에서 파티마 군은 1천 남짓에 불과한 십자굼을 전멸에 가깝게 밀어붙였으나, 보두앵이 돌격해 사드 앗 다울라를 죽이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결국 파티마 군은 패퇴했다.
1102년 5월에는 파티마 재상 알 아흐달의 아들 샤라프 알 마알리가 3천여 병력과 아스칼론에서 진격하자, 저번 승리로 자신감에 차 있던 보두앵은 불과 2백여 기사만을 이끌고 맞섰다가 대패하여 도주했다. 다음날 파티마 군대는 라믈라를 함락했고, 블루아 백작 에티엔과 부르고뉴 백작 에티엔이 각각 처형 및 전사로 생을 마감했다.[8] 이후 샤라프는 야파를 포위했으나, 마침 당도한 무장 순례단 및 예루살렘에서의 원군 덕에 구원되었다. 파티마 군은 증원되어 재차 진격하려 했으나, 장군들끼리 다퉈 무산되었고 오히려 십자군이 아스칼론을 포위했다가 철수했다. 그렇게 라믈라는 재차 십자군령이 되었다.
1105년 8월에는 알 아흐달의 다른 아들 세나 알 물크가 부리 왕조 튀르크 기병을 지원받아 아스칼론에서 나아갔고, 보두앵은 2천 보병 및 5백 기병과 출정했다. 그렇게 벌어진 3차 라믈라 전투에서 종일 격전이 이어진 끝에 참십자가를 대동한 십자군이 힘겹게 승리했다. 십자군은 1백여, 파티마-부리 군대는 1천여 전사자를 냈다. 십자군 지배 초기에는 릿다-라믈라 주교령이던 도시는 1134년 보두앵이란 기사가 영주로 봉해지면서 예루살렘 왕국 야파 & 아스칼론 백작령 산하 라믈라 영주령이 되었다. 1138년 영주 보두앵이 사망하고, 그 딸 헬비스가 바리장 디블랭과 결혼하며 이벨린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9] 1150년 바리장의 사후 장남 위그가 라믈라, 차남 발리앙 디블랭이 이벨린 영지를 계승했다.
1153년 아스칼론 함락으로 십자군 지배가 안정화되며 라믈라는 순례자와 상인들이 거쳐 가는 거점으로 발전했다. 십자군은 라믈라가 성경의 라마다임이라 여겼고, 아리마테아 (Arimathea)로 불렀다. 1163년경 도시를 방문한 유대 여행가 벤자민 투델라는 3백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외곽에 거대한 유대 묘지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1177년 11월,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이 십자군의 시리아 습격에 대응하여 2만 병력으로 라믈라와 릿다를 습격했다. 그후 팔레스타인 각지를 공격하던 살라흐 앗 딘은 보두앵 4세 휘하 4천의 십자군과 조우했고, 이어진 몽지스가르 전투에서 대패하여 이집트로 철수했다. 1187년 하틴 전투 후 라믈라는 아이유브 왕조령이 되었으나, 3차 십자군의 당도 후 재차 전장이 되었다.
1191년 9월, 아르수프 전투에서 패한 살라흐 앗 딘이 주둔했고 이어진 평화 협상 기간 중 11월에 리처드 1세가 주둔했다. 정찰 도중 리처드는 매복을 당했으나, 휘하의 윌리엄이 왕을 자칭해 희생하며 빠져나갔다. 이듬달, 그는 예루살렘으로 진군했으나 방어 태세를 확인한 후 1192년 1월 라믈라로 회군했다. 그후 병력 일부가 이탈하자, 결국 해안으로 물러났다. 다론 함락으로 자신감을 얻은 리처드는 그해 6월, 재차 라믈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향했으나 살라흐 앗 딘이 직접 수비에 임하자 철수했다. 8월에는 살라흐 앗 딘이 라믈라에 주둔하며 야파를 노렸고, 결국 리처드가 와병한 후에야 양측은 라믈라 (야파) 협정을 맺어 5년의 휴전에 돌입했다. 십자군은 야파까지의 해안 및 순례의 자유를 얻었고, 라믈라 등 내륙은 아이유브 왕조령이 되었다.
다만 1204년, 술탄 알 아딜이 십자군과 6년 휴전을 맺으며 라믈라와 야파 등지를 할양했다. 이후 발리앙의 아들 장 디블랭이 베이루트와 함께 통치하다가 1236년 사망한 후 다시 주교령이 되었다. 1229년 예루살렘 '대여' 후 라믈라는 재차 십자군에게 중요한 거점에 되었다. 하지만 1244년, 이집트 아이유브 및 호라즘 용병대가 십자군 및 시리아 아이유브 군을 격파한 라 포르비에 (히리브야) 전투 당시 라믈라 주교는 5천에 달한 십자군 전사자 중 하나였다. 이후 십자군 지배력은 약화되었고, 1246년 예루살렘에 이어 1266년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에 의해 라믈라 역시 점령되어 요새화되었다. 1272년에는 8차 십자군을 이끌고 있던 미래의 에드워드 1세에 대해 바이바르스가 라믈라 태수를 통해 암살을 주선시켰으나 실패하기도 하였다.
2.4. 근세
1480년경 유럽 서적에서 대도시로 묘사된 라믈라
15세기 말엽 라믈라를 방문한 도미니코회 수사 펠릭스 파브리는 맘루크 왕조가 세운 멋진 하맘 (목욕팅)에 대해 묘사했다. 오스만 제국기인 1548년의 통계에 의하면 라믈라는 무슬림 528가구, 기독교도 82가구가 사는 중소 도시였다. 1799년 3월, 팔레스타인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이 도시를 장악하고 프란시스코회 건물에 주둔했다. 1838년, 미국인 성서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은 라믈라의 인구가 3천이고 올리브 및 각종 채소밭에 둘러싸여 있다고 기록했다. 또한 집들은 석축으로 견고히 지어졌고, 여러 모스크가 있다고 덧붙였다.
1863년 프랑스 학자 빅토르 게렝은 현지 가톨릭 인구능 2명의 사제와 50인의 신도 뿐이라 기록하였다. 1869년 기준 라믈라에는 3천의 무슬림과 4백의 그리스 정교회 신자, 60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다. 1882년 영국의 팔레스타인 탐험 재단에 의하면 라믈라에는 바자르가 있었지만 쇠락한 상태였고, 세라이를 비롯한 건물들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한다. 1889년에는 초기 유대 이민 물결에 의해 중세 이래 최초로 31인의 유대인 노동자들이 정착하였다.
2.5. 근현대
1932년 라믈라의 항공 사진
1922년 영국령 팔레스타인 시기 라믈라는 무슬림 5837명, 기독교도 1440명 (1226명 정교회, 150명 가톨릭, 36명 개신교), 유대인 35명이 거주했다. 7천여 인구는 1920년대 전기 부설과 함께 1931년 1만을 넘겼고, '도보 10분 거리의' 릿다보다 훨씬 여건이 좋았다. 1920년 ~ 1947년간 라믈라의 시장은 셰이크 무스타파 카이리였다. 40여년간 라믈라에 살던 30여 유대인들은 1930년대 동안 떠났고, 1945년 도시의 인구는 1만 2천 무슬림과 3천여 기독교도 등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1947년 유엔 팔레스타인 분할안에서 라믈라는 아랍 국가에 배정되었지만, 아랍 측에서 거부하며 갈등이 고조되었다.
1948년 2월, 유대인 무장단체 이르군이 라믈라의 시장에서 폭탄 테러를 감행해 7인이 다칙ㅎ 45인이 부상당했다. 1차 중동전쟁 발발 후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관문인 라믈라를 수차례 공격한 끝에 릿다에 이어 7월 12일, 아랍 저항군의 항복과 함께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후 아랍 주민 대부분이 추방되었고, 1949년 기준 라믈라와 릿다에는 2천여 아랍인만이 남아있었다. 유대 주민은 6천이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기존 아랍인들이 살던 집을 홀로코스트 피해자 및 아랍계 유대인들에게 주었다. 유대-아랍 혼합 인구는 1972년 3만 4천에 이르렀고, 이스라엘은 라믈라를 예의주시 하며 국내의 유일한 여성 교도소를 포함한 5개의 감옥을 세웠다.
3. 라믈라 대사원
우마리 모스크로도 불린다. 12세기 성 요한 성당으로 세워져 1266년 모스크로 전환되었고, 미나렛이 더해졌다. 입구에는 쿠란 9장의 구절과 함께 술탄 바이바르스가 사원을 세웠다는 명문이 있다. 내부는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배치를 보인다. 동쪽 벽에는 성당 시절의 벽감이 있는데, 나사렛을 향하고 있다. 후면에는 여성 예배 공간이 있다. 오전에만 외부에 개방되고, 7셰켈의 입장료도 있다.
4. 하얀 모스크
미나렛인 백탑 (27m 높이) | 모스크와 첨탑 유적 전반부 |
미래의 칼리파 술라이만 이븐 압둘 말리크가 시작한 사원 건설은 그가 칼리파에 오른 후에도 계속되었고, 술라이만이 사망한 후 720년 우마르 2세 대에야 완성되었다. 대리석으로 세워진 사원은 우마이야 왕조의 주요 건축물 중 하나였다.
10세기 지리가 알 마크디시는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사원보다 아름답다 극찬했고 미흐랍은 제일 아름다우며 민바르는 일 아크사 다음이라 평했다. 그에 의하면 미나렛은 칼리파 히샴이 기독교도들이 새 교회를 위해 숨겨두었던 기둥들을 (릿다의 성당을 허물어 모스크의 자재로 쓰겠다고 위협하여) 징발해 세웠다 한다.
1467년에 기록된 현지 전승에 따르면 미나렛 자리에는 사하바 40인이 매장되었다 한다. 이 전승 때문에 기독교도들이 세바스테의 40인 순교자 성지로 착각하기도 했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사원 북서부에는 이슬람의 25 선지자 중 하나인 살리흐 (살레)의 영묘가 있었다 한다. 따라서 하얀 모스크는 일대의 무슬림들에게 성지나 다름 없었다.
1034년 1월의 지진으로 모스크는 완파되었다가, 1047년 나시르 호스로의 방문 전에 복원되었다. 1190년에는 살라흐 앗 딘이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 일야스 이븐 압둘리에게 중건하게 했고, 이때 서부 벽과 중앙부의 우두 분수대가 세워졌다. 1266년 바이바르스는 무너졌던 미나렛과 돔을 복원하고 새 민바르와 미흐랍을 세웠다. 동쪽 벽에도 현관과 2개의 공간이 더해졌다.
1318년 10월에는 지진으로 미나렛이 재차 붕괴했다가,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명으로 복원되었다. 1408년에도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고, 오스만 시기인 19세시 후반에 또다시 보수가 이루어젺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방치되었고, 결국 미나렛을 제외한 사원 건물이 파괴되었다. 1949년에 발굴이 이루어졌다.
[1] 14세기의 역사가 이븐 파달라 알 우마리에 의하면 본래 룻드 도심부에 신도시를 조성하려 했는데, 현지 기독교 사제가 결사 반대했다 한다. 이에 술라이만은 그를 처형하려 했으나, 현지 출신의 참모 라자 빈 하이와가 인근에 조성하면 된다고 말렸다고. 또한 술라이만은 부친과 형이 다마스쿠스 대사원과 바위의 돔 등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인 것을 부러워하고 이어나가려 한 것으로도 보인다. 일부는 성스러운 팔레스타인 땅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로 보기도 한다.[2] 9세기의 역사가 알 야쿠비는 술라이만이 주민들의 집을 허물었고, 저항하는 이들을 벌했다 한다[3] 그것도 키논이라 불리는 덜익은 올리브로 만든 것[4] 1036년 동로마 편에서 마르완 왕조 및 누미이르 조의 에데사 공격 방어, 1038년 아누슈타긴 도와 미르다스 왕조의 알레포 공격했다가 하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감금되었다가 자라흐 부족이 안티오크 공격할까 염려되어 석방됨.[여담으로] 자라흐 부족은 1065년 다마스쿠스에서 알리 가문원 아부 타히르 하이다라 아불 후세인이 봉기했을 때에 참가한 것을 마지막으로, 이라크로 무대를 옮겼다가 13~17세기 팔미라와 살라미야 등 시리아 사막을 지배하는 알 파들 부족으로 귀환한다.[6] 흑,백,적,녹색 등[7] 당대 사료에는 2만 보병, 1만 기병에 전사자만 5천이라 하나 과장으로 여겨진다[8] 독일 십자군 지휘관 콘라트 역시 격전 끝에 사로잡혔으나 그의 용맹에 감탄한 샤라프가 살려줬다[9] 이벨린 성은 아슈도드와 라믈라 사이에 있어 가깝다